758번째 편지 - 악마의 속삭임, 비교
요즘 검찰 수사가 한창입니다. 수사 관련 신문기사를 보면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스페인에서 검찰 연수를 하던 1993년 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직후라 전 정권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절정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에는 월요일마다 한국신문 일주일 치가 한꺼번에 우편배달되었습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이것이 한국 소식을 듣는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저는 신문을 펴들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동기 검사들이 검찰 수사에서 활약을 보이는 모습이 매번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동기들은 이렇게 활약을 하고 있는데 나는 이곳 스페인에 처박혀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또래의 압박>은 검찰에 근무하는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동기생 다수가 먼저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하였을 때, 검사장 승진에서 동기생들이 저보다 좋은 보직에 임명되었을 때, 동기생이 총장이나 장관이 되었을 때, 저는 늘 속상했고 부러웠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논리는 항상 옳았습니다. 변호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큰 사건을 맡았지만 누가 대형 사건 변호를 맡았다고 하면 그 자체가 저에게 스트레스였습니다.
이런 유치한 심리 상태는 나이가 들어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검찰에서 승진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인한 압박만 존재했지만 세상에 나오니 각종 잣대에 따른 압박이 존재했습니다.
저를 남들이 보면 잘 지내고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텐데 저 스스로는 여전히 히딩크의 표현대로 “I'm still hungry”였습니다. 이 비교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니 우울증세가 가중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현상은 저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 공중보건 대학교 실험에서도 이런 현상은 증명되었습니다.
‘당신 연 소득은 5만 달러이고 나머지 국민들은 2만 5천 달러인 A 국가와 당신 연 소득은 10만 달러이고 나머지 국민들은 20만 달러인 B 국가 중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냐’는 설문에 대부분 A 국가를 택하였습니다.
이를 긍정심리학에서는 <사회 비교>라고 합니다. 사회 비교는 유사성의 원칙에서 작동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또래의 압박>이 여기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한참 선배 검사나 후배 검사와 저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 또래의 미국 검사나 일본 검사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 동기 검사들과 비교하였습니다.
사회 비교가 인류를 진화로 이끌었고 개개인의 인간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그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한 것 같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부러움(envy)은 사물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비교로 볼 때 나타난다. 당신이 영광을 원하면 나폴레옹이 부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시저를 부러워했고, 시저는 알렉산더를 부러워했다. 아마도 알렉산더는 실존하지 않았던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타인과의 비교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남은 생애 동안 이 악마의 속삭임을 들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행복의 해답>의 저자 ‘마넬 바우셀’과 ‘라케시 사인’은 몇 가지 조언을 해줍니다.
첫째, 올바른 연못에서 놀라고 조언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잘 알고 자신에게 적합한 사회 집단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명예를 목표로 삼는 교수로 한 평생 존경받으며 살다가 퇴직하고 부나 권력을 목표로 삼는 세상에서 활동하면 그의 행복은 줄어들 것입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사회 정의를 목표로 평생 검사로 살다가 사회에 나와 부를 목표로 사업을 하니 허덕이게 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제 회사 규모는 아기 중에 아기입니다.
둘째, 선택적 비교를 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웃의 집 크기나 자동차 브랜드에 부러움이 생기면 자신의 좋은 건강이나 행복한 가족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라는 말입니다.
재벌 드라마를 보면 가족관계가 불화투성이입니다. 일반인들은 드라마를 통해 선택적 비교를 하여 재벌은 ‘우리만큼 가족관계가 화목하지 않다’는 프레임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셋째, 친절한 행동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운이 덜 따르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만족감을 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육원이나 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 그를 통해 비교우위 만족감이나 안도감을 얻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좋은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조언합니다. 존경은 부러움을 해소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농담으로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타인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 되고 맙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타인의 행복을 더불어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저를 돌이켜 보면 타인의 행복에 대해 진심으로 더불어 기뻐해 주었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저와 무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행복에 대해 더불어 기뻐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제 또래의 성공과 행복에 대해 진심으로 더불어 기뻐했냐는 것입니다. 오늘 편지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제 동기생의 성공에 질투하고 시샘하였습니다. 어쩌면 동기생들도 저의 성공에 시샘했고 지금도 시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월요편지를 통해 이런저런 제 삶을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그중 저의 성공과 행복을 기록한 어느 월요편지가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불편하고 속상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섬뜩해집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행복해지는 길은 “타인, 특히 또래의 성공과 행복에 대해 더불어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능력을 기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능력이 저절로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니만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음력으로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능력을 기르겠다는 다짐을 해보면 어떨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3.1.30. 조근호 드림
첫댓글 “부러움은 사물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비교로 볼 때 나타난다.
당신이 영광을 원하면 나폴레옹이 부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시저를 부러워했고, 시저는 알렉산더를 부러워했다.
아마도 알렉산더는 실존하지 않았던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