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vs 묻는 만큼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대입, 입사, 사업을 앞두고 불안해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결과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앞날을 나름대로 예측할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맞추기가 어렵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신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신이라면 무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도 없고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도 없다. 신은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이 있을 리가 없고 호기심이 생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문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유홍준 교수가 사용해서 널리 퍼뜨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격언을 떠올릴 수 있다. 원래 이 구절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에서 처음 쓰였지만 표현의 정확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유 교수는 이 구절의 출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에서 조선 후기 문인 유한준(兪漢雋)이 당대의 수장가 석농 김광국의 화첩에 쓴 발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오해를 풀려고 한 적이 있다.
“그림에는 아는 이가 있고 아끼는 이가 있고 보는 이가 있고 모으는 이가 있다. …… 알면 제대로 아끼게(사랑하게) 되고 아끼면 제대로 보게 되고 보면 모으게 되니 그냥 쌓아두는 게 아니다.” (畵有知之者, 有愛之者, 有看之者, 有畜之者. ……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은 “알면 제대로 아끼게 된다”는 말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그림에 대한 뛰어난 식견을 갖춘 훌륭한 소장자를 예찬하는 말이다. 맥락을 넓혀 문화 예술 일반이나 인생 태도로도 확장 가능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문화 예술의 감상과 인생 문제를 풀어가는 데에서 ‘지식’의 가치를 존중하고 있다. 이는 분명 맞는 말이다. 같은 스포츠의 보도를 봐도 사실을 나열하는 기사도 있지만 심층 분석을 통해 보이지 않는 측면을 밝혀주는 기사도 있다. 기자의 식견이 기사의 질을 다르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알면 제대로 아끼게 된다”처럼 가정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인다”처럼 단정이 되면 이 구절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절대적 가치를 강조하는 반면 앞으로 알게 될 지식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무시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한다면 결국 알고 있는 사람만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르게 될 것이다.
문제 상황을 잘 풀어가려면 물음을 잘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제대로 알고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물음이 유효하면 문제 상황을 풀어가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기보다 “묻는 만큼 보인다”라고 할 수 있다.
공자(孔子)는 BC 551년부터 BC 479년까지 살면서 장례 등 의례 전문가들의 지식을 인간 일반의 가치로 발전시킨 역사적 인물이다. 장례나 혼례 등은 의례 절차를 실수와 잡음 없이 매끄럽게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의례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의례와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을 쭉 지켜보면서 의례의 의미와 사람의 됨됨이까지 읽어낼 수가 있다.
예컨대 상례를 치르면서 상주가 온갖 일을 간섭한다면 고인에 대한 애도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학부모가 학예회에서 자기 자식이 나오는 순서가 되자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종횡무진 돌아다니면 행사의 진행을 막는 것이다. 이 경우에 상례의 절차를 말끔하게 처리하거나 자식을 끔찍하게 아낀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
공자의 초상화 <출처: (cc) Cold Season at Wikimedia.org>
공자는 어떻게 하면 예식을 치르면서 사람 사이를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얼토당토않은 개인의 버릇보다는 전통을 통해 공인된 규칙을 존중하고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수 있는 책임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공자의 사상은 이미 완성된 것으로 나름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일구기 위해 “사람다움과 관련해서 스승에게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라는 독립적 사고의 굳은 의지를 가졌던 것이다. 위 구절에서 사(師)를 스승이 아니라 군사로 풀이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공자는 어떠한 물리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지켜내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공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의례 전문가의 실용 지식을 인문학적 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공자는 사후에 현실 정치인의 필요성에 따라 인류의 스승이나 제왕으로 제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는 개국 이후 제국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공자의 권위를 활용했다(중국사에서 명 주원장과 한 유방은 유이하게도 유서 깊은 귀족이나 권문세족 출신이 아님에도 황제가 된 인물이다.) 유방은 오늘날 취푸(曲阜) 지역에 위치한 공자 사당을 방문하기도 했고 황실은 공자의 후손을 제후 왕으로 분봉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자는 생전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쓸쓸히 죽었지만 사후에 자신이 그렇게 반대했던 성인(聖人)으로 추앙되었다.
이로써 공자는 단순히 춘추시대의 역사적 인물을 넘어 중국 역사와 문화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정치인들은 공자가 실제로 하고자 했던 것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공자에게 권위를 덧씌우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위를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자는 죽자마자 학파와 지역을 넘어서서 공통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공자를 이어서 등장한 묵자(墨子)는 공자의 사상이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차별적인 사랑으로 귀결되므로 결국 개인과 개인,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묵자는 유학을 비판하는 비유(非儒)와 유학을 헐뜯는 훼유(毁儒)라고 할 정도로 공자의 사상을 아무런 제약 없이 가혹하게 비판했다. 그는 공자를 ‘공모(孔某)’로 부르기조차 했다. 장자(莊子)는 자신의 책에 필요할 때마다 공자와 안연을 등장시켜 그들을 부당한 논리를 펼치는 시대착오적 인물이거나 장자의 사상을 대변하는 개종자로 표현했다.
한 제국이 등장한 후 학자-관료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에서 유독 ‘공자 배우기’ 또는 ‘공자 따라 하기’ 열풍을 주도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공자는 이제 특정한 학파의 인물에 한정되지 않고 공직자가 되려면 그의 책을 읽어야 하고 그의 관점을 따라 해야 하는 정치 문화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는 실로 공자가 생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권위이기도 하고, 공자의 진의와 달리 왜곡될 수 있는 운동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를 공공연하게 비판하기가 쉽지 않았다. 묵자나 장자 같은 인물이 나오려면 강고한 현실 권력과 맞설 수 있는 용기와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 지식을 가져야만 했다. 하지만 한 제국 내내 그러한 도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공자 따라하기’의 열풍이 지속되면서 기괴한 상황이 일어났다. 공자의 사상을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은 공자 열풍의 수혜자가 된 반면 공자의 사상을 가슴으로 아는 사람은 오히려 세계의 변방으로 몰리게 되었다.
후한의 지배력이 약화될 즈음에 왕충(王充)은 실로 대담한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세상의 학문이 얼마나 타당한지 그 값어치를 저울로 달아서 허망(虛妄)하고 황당(荒唐)한 주장을 날려버리겠다는 뜻의 [논형(論衡)]을 썼다. 이 책은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도전 정신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하다. 그는 [문공 問孔], [자맹 刺孟], [비한 非韓]이라는 글을 써서 공자뿐 아니라 한비자와 맹자에게도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다.
커다란 권위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왕충은 [문공]의 첫 구절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그대로 던진다. 이 부분은 [논형] 전체에서만이 아니라 중국 철학사를 통틀어서도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유학자들은 스승을 믿고 옛것을 옳게 여기길 좋아한다. 성현이 한 말은 모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 오로지 배우고 익히려고 할 뿐 따지고 물을 줄 모른다. 성현이 붓을 움직여서 글을 지을 때 마음 씀씀이가 아무리 세세해도 아직 모두 사실과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급하게 쏟아낸 말이 어찌 모두 옳다고 하겠는가? 모두 옳지 않은데도 당시 사람들은 따질 줄 몰랐다. 옳다고 하더라도 뜻이 분명하지 않는데도 당시 사람들은 물을 줄 몰랐다. 생각해보면 성현의 말에는 위아래가 서로 어긋난 곳이 많고, 문장도 앞뒤가 서로 모순되는 곳이 많은데도 세상의 학자들은 그걸 모른다.”
왕충은 성현의 말과 글이라고 해서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하나같이 따지고 물어보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왕충은 실제로 [논어] 등 고전 텍스트의 모순점을 하나씩 밝혔으며 회의를 잊고 맹목적인 추종과 앵무새와 같은 암기를 일삼은 ‘침묵’의 학습을 끝장내라고 주문하고 있다.
“배우고 묻는 길은 재능에 있지 않다. 어려움은 스승과 거리를 두고서 도의를 사실대로 밝히고 시비를 논증하는 데에 있다. 묻고 따지는 길은 반드시 성인과 마주하거나 살았을 적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성현의 이야기를 풀이해서 사람을 가르칠 때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대로 일러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밝게 이해되지 않는 물음이 있으면 공자에게 따져 묻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도의를 다치게 하겠는가? 진실로 성현의 학업을 전할 지혜가 있다면 공자의 말을 비판하더라도 어찌 이치에 거슬리겠는가?”
왕충은 일찍이 공자가 발휘했던 바로 그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을 가지고 공자의 진실한 세계에 이르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파악되지 않으면 마땅히 물어서 밝히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마땅히 따져서 끝까지 파헤쳐라!”(不能輒形, 宜問以發之. 不能盡解, 宜難以極之.)
사실 정확하게 잘 묻는 것만큼 무지를 유지로 빠르게 바꿀 수 있는 길이 없다. 사람은 살다보면 늘 ‘문제’(problem) 상황을 만날 수밖에 없다. ‘problem’의 ‘pro’는 앞이라는 뜻이고 ‘blem’은 무엇이 놓여 있다는 뜻으로, 우리 앞에서 뭔가 놓여 있어서 진행을 막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왕충은 문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 아는 체만 하는 헛똑똑이를 비판하고 있다. 헛똑똑이는 스스로 잘못된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서푼의 지식을 앞세워서 제대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왕충이 혼자서 출구를 찾지 못해서 빠져들었던 숙명론은 벗어나야겠지만, 자신의 시대에 헛똑똑이들의 변함없는 합창 소리를 멈추게 하고자 유쾌한 지적 반란을 꾀한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유학대학 학장을 맡으며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011),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맹자와 장자, 희망을 세우고 변신을 꿈꾸다](2014),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2014)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다수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첫댓글 ‘아는 만큼 보인다.’
‘묻는 만큼 보인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 한 구절 누구나 한 번씩 써 먹은 글이지요.
여행을 떠나기전에 공부하고 가면 훨씬 많은 것을
살피고 쉽게 지나치지는 않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