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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이드의 수도, 그 한가운데에 웅장하게 서 있는 거대한 성. 나라의 최정점에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만 허용된 매우 호화스러운 어느 방 안 이지만, 그곳은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한 남자가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었다. 깨끗한 금발에 귀티가 좔좔 흐르는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에비시안 왕자는 자신의 테이블 위에 차려진 진기한 스테이크 요리를 글자 그대로 '맹수처럼' 먹어치우고 있었다.
왕자라는 고귀한 기품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맨손으로 고깃덩이를 쥐어 들어서는 입으로 물고 뜯어 우적우적 먹어갔다. 그의 고급스러운 옷 위로는 육즙과 양념이 번져 더럽게 물들어갔고, 그의 손과 입가에는 기름이 덕지덕지 묻어갔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냥을 끝내고 사냥감을 빼앗기기 전에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는 늑대처럼, 야만적인 식성 속에서도 날카로운 눈빛만은 쉽사리 감춰지지 않았다.
"저어... 왕자님."
말을 거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그럼에도 매우 중요하고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기에 그 심복은 무릎을 꿇고 복종의 자세를 취한채로, 식사에 열중하는 왕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래, 뭐냐?"
식사 중에 방해를 받은 왕자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소식을 가져왔으리라는 것을 눈치챘기에 여전히 손에 고깃덩이를 쥔 채로 우물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왕자님께서 찾으시던 네 번째 왕자를 '가져'왔습니다."
네 번째 왕자란, 에비시안 왕자의 철천지원수인 이베이드 왕국의 선왕의 자식들 중 한 명이다. 어머니가 겪은 고통과 굴욕을 갚고자, 선왕의 핏줄은 모조리 학살하고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으로 눈이 뒤집혀 있는 에비시안이기에 당연히 그의 자식들인 왕자, 공주들이라고 살려둘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숨어 살던 자들이라고 해도 예외로 여기지 않은 왕자는 사방에 사람을 풀어 지금까지도 찾아왔다. 왕자는 심복이 사람을 대상으로 '가져왔다' 라는 이상한 표현을 붙인 보고를 올렸음에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반가운 소식을 알려온 심복에게 큰 상을 약속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지시했다.
"잘했다. 당장, 이리 가져와라."
"그... 식사가 끝나시면..."
"지금 당장!"
식사 중에 결례가 아닐까 걱정한 심복이지만, 계속해서 재촉하는 지엄한 왕자의 명령에 그는 고개를 조아리고는 조심스레 물러났다. 심복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왕자는 속에서 밀려오는 복수의 환희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목에 매고 있던 브로치를 집어들어, 하늘에서 이런 행운을 내리며 자신을 돌봐주시는 어머니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 유품에 입맞춤을 하고자 했으나, 곧 이 신성하고 고귀한 유품에 손을 대기에는 자신의 손이 적갈색의 양념과 기름진 육즙으로 지저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손이 피로 물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것 따위 자신의 어머니가 받은 고통에 대한 피 값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두 손목을 잘라 내놓으라 해도 두 손, 두 발까지 내놓을 용의가 있을 만큼 왕자는 복수심으로 머리끝부터 손끝, 발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가져왔습니다."
잠깐이지만 초조하게 느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그 심복은 사람의 머리통 정도밖에 들어가지 못할 법한 크기의 상자를 두 손으로 안고서 들어왔다. 왕자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심복이 공손히 내미는 상자를 빼앗듯이 직접 받아들어서는 자신이 식사 중이던 테이블로 가져갔다. 테이블 위에 상자를 둘 적당한 자리가 없자, 왕자는 식기나 쟁반들을 가치없는 돌멩이처럼 팔로 쓸어 자리를 만들었다. 쟁반이나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며 '와장창' 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지만 왕자는 그딴 것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뜯다시피 급하게 열어젖혔다.
"...크, 크... 크하하하하!"
왕자는 상자 속 내용물을 보고는 마치 광인이라도 된 것처럼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기쁨에 휩싸여 죽어버릴 것 같기에 그는 미치도록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 순수하고 잔인한 기쁨. 악마라 해도 절대 따라 하지 못할 것은 웃음소리로 그 넓은 방안은 오랫동안 채워졌고, 듣는 주위의 인물들은 현실 속에서 절대 들을 수 없을법한 그 웃음소리에 귀가 잘려나가는 것 같은 섬뜩한 공포에 휩싸였다.
"하하, 하... 후우... 후우..."
왕자는 얼마나 웃었는지 숨이 막혔고, 목에서는 갈증이 밀려왔다. 그렇기에 그는 누군가가 눈치껏 내오는 물잔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질질 흘리며 마셔가는 그의 옷은 축축하게 젖어갔지만, 그러한 것에 신경쓰지도 않는 왕자이기에 다 마신 잔을 대충 던져버리고는 심복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머지 부위는?"
"썩어서 버렸습니다."
왕자의 현 기분을 잘 알기에 비위를 맞추고자 심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말투로 골라서 대답했다. 왕자는 그런 심복의 태도로 더욱더 기분이 좋아졌다.
"누가 가져온 거냐?"
"그자의 하인으로 수년을 일했다고 하는데, 음식을 가지고 불평을 하기에 술잔에 독을 탔다고 합니다."
"그래? 그건 좀 아쉬워. 살아있는 채로 잡아 데려왔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왕자는 보고를 들고는 반 독백, 반 대답으로 중얼거렸다. 살아서 바쳐졌을 그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는 상상을 하던 왕자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심복에게 지시했다.
"이것을 바친 자에게 준기사의 작위를 내리고, 거기에 상금도 두둑이 주어 부유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줘라."
"예."
왕자가 내리는 포상, 결코 가볍지 않는 그것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기쁜지를 증명해주었다. 심복은 지시를 듣고 물러나려 했으나 그런 그를 왕자는 다시 붙잡았다.
"아, 그리고... 이것을 그 계집에게도 보여줘라.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후후."
"예. 알겠습니다."
위치린 공주에게 상자를 전하라는 지시에 심복은 상자를 안고서 물러났고, 왕자는 테이블로 돌아가 앉아서는 잔을 들어 붉은 포도주를 따랐다. 자축하는 잔, 그리고 어머니에게 바치는 잔. 왕자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향해 경배하듯, 잔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살아남은 혈족은 위치린... 그 계집 하나뿐.'
지금껏 자신은 복수, 이것 하나만을 뼛속까지 깊은 곳까지 새기어 살아왔다. 그렇기에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도망간 왕자, 공주들이라 해도, 그는 끝까지 찾아내어 복수해왔다. 그리고...
'조금은... 이상해...'
왕자는 지금껏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작은 의문에 머리를 기울였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신이 무서워서 도망쳐 숨은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 수준이었고, 다른 왕자 중 확고히 결정된 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족속들이 갑작스레 계승권을 포기하고 도망친 것일까?
'하늘 위의 어머니께서 도와주셔서이다. 의심하지 말자.'
왕자는 고개를 들려하는 의문을 억지로 누르고는 들고 있던 잔을 새로이 붉은 액체로 채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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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한껏 입을 벌렸다. 그러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스프가 구수한 향과 함께 갈색 빛의 나무숟가락에 담기어 가까워졌지만, 카린은 그것이 한입에 넣기에는 뜨거워 보이는지라 슬쩍 고개를 젖혀 미루며 말했다.
"뜨거워 보이는데..."
"예."
수프를 떠주던 재상은 그 말을 듣고는 빙긋 미소 지으며 답하고는 자신이 입김을 '호호' 불어 식혀서는 다시 카린에게 내밀었다. 이에 카린은 두 손은 침대의 이불 속에 찔러넣은 채로 상반신만을 내밀고서 먹이를 받아먹는 작은 새처럼 주둥이를 벌려 넙죽 받아먹었다.
"맛있... 우물우물... 맛있어."
"다행이십니다."
재상은 그녀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기뻐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침울해진 채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그였지만, 그녀가 정신적인 면이라도 이렇게 빨리 회복해준 것이 재상에게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기분은 이렇게, 평소 이상의 지나친 간호행각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재상은 지금 사랑스러운 딸이나 혹은 연인을 대하는 양 카린을 간호하고 있지만, 그 행동이 너무나도... 연인이 없는 솔로들이 보기에는 닭살이 돋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카린에게는 재상에게 이런 지극정성어린 간호를 받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녀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수프를 떠먹고도 남을 만큼 기력은 충분히 회복했지만, '이런 잘생긴 미남 재상이 수프를 호호 불어가며 먹여주는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재상이 떠주는 대로 목을 빼고서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꿀꺽... 라미엘씨는?"
"아, 필요한 생필품을 구하러 오래전에 나가셨습니다."
"그럼 공작은 누가 간병해?"
"라미엘씨 말로는 다른 간병인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재상은 카린이 다른 남자의 얘기를 꺼내자, 마음속이 실타래처럼 꼬이는 것처럼 복잡해져 왔다. 그렇지만, 이를 재상 스스로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는 그녀의 미소를 행복하게 구경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묻혀질 뿐이었다.
"..."
"재상? ...? 재상?"
"아, 예."
수프를 뜨고서는 먹여줄 생각은 않고 석상처럼 굳은 채로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재상의 모습에 카린은 반 부끄럼, 반 아리송함을 느끼고는 무안함에 연신 그를 불렀다.
"건더기... 감자 말고 다른 건 없어?"
"고기라면 있는 것 같습니다."
재상은 방금 전의 멍한 모습은 어느새 감추고, 그녀에게 한 번 빙긋 웃어 보이고는 수프 안을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답했다. 그녀에게 재상과 단둘이서 찰싹 가까이 앉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의 왕궁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주위의 여성진들로부터의 부러움, 시기, 질투, 분노, 원한...(?) 등의 시선 같은 것도 한몫 하기는 했지만, 재상 본인 역시 카린과는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군신관계로서 어느정도 거리를 벌리려한 탓에, 그녀에게는 이렇게 가까이서 재상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상당히 두근거리고... 행복했다.
그렇기에 카린은 입안의 고깃덩이를 씹지도 않고 이리저리 굴리며, 수프를 속을 의미 없이 휘휘 젓고 있는 그의 옆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이 여관에서 처음 눈에 떳을 때에 보인 그의 몸 이곳저곳에 있던 상처들은 대부분 적갈색의 딱지가 더덕더덕 붙으며 아물어갔지만, 그의 손에는 마차에 깔렸던 자신을 구하느라 입었던 화상은 물론, 파편에 이리저리 베이고 찔린 상처들만이 여전히 남아 쉬이 아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재상 조금은 멋있었지...'
카린은 마차에 깔렸을 당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중에 작은 빛의 틈 속에서 보이던 재상의 듬직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전하?"
"응...?"
재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입에서는 무의미한 부름과 대답이 오고 갔지만, 말 그대로 무의미할 뿐, 두 사람의 마주친 눈은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카린은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재상의 주홍빛 눈동자 속에서 점점 가까워져 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아...
"...다녀왔다."
갑작스레 라미엘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두 사람은 황급히 떨어져서는 딴청을 부렸다. 라미엘은 그런 그 두 사람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양 어깨에 메던 짐이 한가득한 광주리를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 아하하 뭐, 뭐였지?"
"아... 그렇군요. 무, 무엇을 이야기하다 말았습니까?"
두 사람은 말을 더듬거리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변명을 늘어놓으려 애썼지만, 라미엘은 이미 두 사람의 분위기를 아는 둥 모르는 둥, 그들에게 애매모호한 의미의 말을 던졌다.
"원한다면 방 하나는 해약하겠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두 사람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소리질러가며 거절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나올 법한 광경이지만, 막상 라미엘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광주리를 짊어지느라 구겨진 흰 옷의 주름을 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광주리에서 평범한 평상복을 하나 집어들어 카린의 빨개진 얼굴 위로 던졌다.
"나갈 때는 이걸로 갈아입어라."
"아우우..."
카린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얼굴 위로 떨어진 옷을 집어들었다. 거친 직물로 엉성하게 짜여진 평범한 옷. 깨끗한 새 옷이라는 점만 빼면, 길거리의 사람들의 반 이상이 입고 다니는 흔하디흔한 옷이었다.
"돈도 많은데, 좀 예쁜 옷을 사면 안돼요?"
"관심 없다."
그녀의 작은 불평에도 라미엘은 짤막한 말로 무시했다. 그런 무관심한 말투로 뾰로통해진 그녀에게 재상이 대신 해명했다.
"너무 눈에 띄시면 좋을 게 없습니다."
"...알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예쁜 옷이 좋다는 미련을 벗어던지지 못하며, 카린은 자신의 현 옷차림을 확인했다. 붉은 실크로 짜인 고급 잠옷. 왕궁에서 입던 최고급은 아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그런데...?
"나, 여기에 처음으로 오기 전부터 정신을 잃었었지?"
"예."
재상의 대답에 한결 더 불안해진 카린은 불안불안한 속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기절한 나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사람은 누구야?"
"..."
"..."
적막만이 감돌 뿐.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자, 카린은 더욱더 불안해졌다. 그런 그녀에게 라미엘은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입을 열었다.
"내가 했다."
"...!"
카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을 느끼며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창피해 죽을 지경인지라, 얼굴은 물론, 온몸에서 뜨거운 열과 함께 땀이 흘렀고, 그녀는 불판 위의 오징어 마냥 몸을 둥글게 말아가며 이불 속 깊이 숨어갔다.
"농담이다."
"..."
카린은 농담이었다는 말에 뒤집힌 거북이처럼 이불 밖으로 머리만을 빼꼼이 내밀었다. 그렇지만 '농담' 이라고 하였던 그의 말과는 다르게,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오히려 진담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여전히 안심이 안 되는 카린인지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재상에게 눈빛으로 사실 여부를 물었다.
"농담하신 겁니다. 여기, 여관의 여주인분께서 손을 빌려주셨었습니다."
재상의 증언을 듣고서야 그제야 안심이 된 카린은 라미엘을 쏘아보며 말했다.
"제발... 그런 얼굴로 농담은 하지 말라고요!"
"어떤 얼굴을 말하는 거냐?"
여전히 차가운 눈빛, 무표정한 얼굴인 채로 전혀 모르겠다는 말조차 딱딱하게 묻는 그의 태도에 카린은 할 말을 잠시 잃었다.
"..."
"..."
"그냥 하지 마세요."
"알았다."
라미엘은 농담을 했음에도 생각 외의 결과가 의아한지, 품 속에 손을 넣어 '타인과 친해지는 거짓말 101가지'라는 표지의 작은 책을 한 권 꺼내서는 펼쳐 잠깐 읽어갔다. 라미엘은 내용과 조금 전의 상황을 비교하는가 싶더니, 도움이 안 되는 책이라고 판단하였는지 그대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재상, 나 수프."
"아, 예."
카린의 요구에 재상은 다시 수프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잠깐의 회화였지만, 짧지는 않았는지 수프는 먹기 좋게 적당히 식어 있었다. 재상은 수프를 한 숟가락 가득히 떠서는 입을 쩌억 벌리고 기다리는 카린의 입에 넣어주었다. 카린은 재상이 넣어준 숟가락을 이로 꽉 물 정도로 과장스럽게 받아먹고는 우물우물 씹다가 금세 삼켰다. 그런 닭살 돋는 커플이나 할 법한 광경을 라미엘은 무뚝뚝하게 서서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옆에서 누군가가 눈도 떼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다면,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다 해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카린과 재상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감정을 삭히고자 카린은 적당히 신경을 돌릴만한 것으로 화제를 꺼냈다.
"뭐뭐, 사온 거에요?"
그녀의 말에 라미엘은 물건을 파는 장사꾼처럼(얼굴은 무표정하지만) 광주리에서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식량.., 옷가지.., 담요.., 베게.., 약초..."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는 그의 성실함에 카린은 속으로 괜히 말을 꺼냈다 싶어하면서도 일단 말을 꺼낸 것은 그녀 자신인지라, 예의상 그가 보여주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머리끈.., 물주머니.., 술.., 그리고..."
카린은 마법의 항아리 마냥 두 개의 광주리에서 끝없이 나오는 물건들에 기가 막혔고, 그가 의외로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겨왔음에 다시금 놀랐다. 그의 겉 이미지로는 대충 '귀찮다', 라던가 '관심 없다' 라던가 하면서 굶던지 말던지 일체 무관심할 줄 알았는데, 말과는 다르게 그가 챙겨온 물건들을 보자면 이사라도 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온 것이다.
카린은 그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지만, 옆의 재상은 그녀가 한 숟가락 더 떠달라는 의미로 오해하고는 수프를 떠서 카린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이에, 카린은 입안에 들어오는 감자 덩어리를 무의식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속옷."
라미엘이 카린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준 물건은 담이 큰 여성들조차 차마 손대기 어려운 야한 망사팬티였다. 라미엘은 그저 평범한 물건인 양, 손으로 쥐어 들어 보였지만 (한 줄기 꽃 같은 사춘기!) 카린에게는 마치 커다란 망치가 얼굴을 강타한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너무 놀란 그녀는 입 안의 감자 덩어리를 씹는 것조차 잊고서 그대로 삼켜버렸고... 당연히...
"우우우우, 욱욱!"
커다란 감자 덩어리가 목에 걸린 카린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목을 부여잡고 침대 위에서 바둥바둥 난리를 피웠다. 이에 재상은 그녀의 급작스러운 위기에 깜짝 놀라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급히 물컵에 물을 급히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카린은 재상이 준 물을 낚아채듯이 받아서는, 정신없이 꿀꺽꿀꺽 들이켰고 '파핫' 하고 큰 숨소리를 내보이며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하아하아... 고마워, 재상."
죽다 살아났으면서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 예의 바른 카린은 붉어져 가는 얼굴을 억지로 들어서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망사팬티를 손에 쥐고 있는 라미엘에게 물었다.
"그, 설마, 사온 거에요? 혼자서? 직접? 여성속옷가게에서?"
그녀의 질문에 라미엘은 고개만을 천천히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보일 뿐이었다.
"안 창피해요?"
"...무엇을 말하는 거냐?"
여전히 무뚝뚝한 그의 태도에 카린은 머릿속으로 그 광경을 상상했다. 분홍빛 인테리어의 가게에 여성 점원이 서 있다. 당연히, 사방에는 여성 속옷이 굴비 꿰어지는 줄줄이 벽에 걸려 있거나 마네킹에 입혀 세워져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남성들조차 차마 그 가게 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지나갈 뿐인데,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양 어깨에 광주리를 메고는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점원을 똑바로 노려본다. 그리고는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어쩔 줄 모르는 점원에게 손가락을 들어 가까이에 보이는 망사팬티를 가리키고는 주문한다.
"속옷을 내놔라. 그러면 순순히 돌아가주마."
카린은 상상 속의 그 이후의 벌어질 광경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지만, 어느 쪽이든 카린의 머릿속에서는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책의 다음 페이지 마냥, 도저히 펼쳐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보고 싶기도 하였기에 카린은 상상 속의 책의 붙어버린 페이지에 손가락 끝을 끼워넣고는 억지로 벌리려 애썼다. 디자엘 재상과 라미엘은 멀쩡한 나무 벽에 손가락을 끼워넣고 무의미하게 용을 쓰고 있는 카린의 희한한 행각에 머리 위로 물음표 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한참을 혼자서 그러고 있던 카린은 힘이 달리는지, 벽을 손톱으로 '그르륵' 하고 긁으며 포기하는 듯 하였으나,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서는 여전히 손에 그것을 쥔 채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라미엘에게 물었다.
"그 가게 점원이 뭐라고 안 해요?"
"...내가 입을 거냐고 하더군."
그 말에 카린은 머릿속으로 여자 속옷을 입은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의외로 어울릴 것 같은 모습에 여러가지로 민망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항복을 외쳤다. 라미엘은 남성적인 면이 강한 디자엘 재상과는 대조적인 여성스런 미형남이다. 재상의 굵은 목선과 지적이면서 준수한 이목구비에 비해, 라미엘은 눈매나 턱선이 다소 여성적이었고 일반적인 남자들에 비해 어깨가 약간 좁고 허리도 가늘었으며 재상과 비슷한 큰 키에 비해 여자처럼 호리호리했다. 더군다나 무릎 뒤까지 닿는 그의 머리카락도 푸른 호수에 비치는 달빛처럼 윤기가 흐르고, 여성인 자신조차 부러울 정도로 머릿결이 고왔기에 그에게 치마를 입히고 적당히 꾸며주면 여자라고 해도 다들 속을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카린은 머리를 벽에 쿵쿵 찍으며 머릿속 환상을 지우려 애썼고, 라미엘은 그런 카린의 계속되는 기이한 행동을 무시하며 재상에게 말을 걸었다.
"마차를 구했다. 정확히는 짐마차지만... "
"...예? 아, 예."
재상은 그 말을 듣고는 그 마차를 확인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는 애꿎은 벽을 손톱으로 그륵그륵 하고 연신 긁어대는 여왕이 있었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크게 문제는 없으리라 라고 생각하며 그는 앞서 방을 나가는 라미엘의 뒤를 따라나갔다.
"솔직히 입혀보고 싶어..."
모두가 나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린은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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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린 공주는 사람 머리통 만한 크기의 상자 속에 있는 둥근 내용물에 화들짝 놀라며 기겁해 뚜껑을 닫았다. 에비시안 왕자가 보내준 상자이지만, 그녀의 등에 칼을 박아넣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그가 호의적인 선물 같은 것을 보냈을 리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공주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죽음의 예감에 한기가 밀려왔다. 어깨는 부들부들 떨려왔고, 뭐라도 다른 것에 열중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겠는지라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담뱃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뱃잎을 담으려 했지만,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손 때문에 오히려 엎질러버리기만 할 뿐이었다.
"으으...."
왕자가 보내준 상자, 그것이 담고 있는 숨겨진 메시지는 어리석은 그녀라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 역시 이 꼴이 될 것이다.'
그녀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쪽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그녀의 비싸디비싼 자홍빛 나이트가운이 의자 턱에 걸려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져 그 무엇조차 들리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유일한 구원줄, 맞은 편에 앉아있는 시커먼 후드 차림의 남자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가 보내는 도움을 구걸하는 시선이 전혀 의식되지 않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와인을 잔에 따라갈 뿐이었다. 초조한 공주에 비해 그 검은 후드를 쓴 자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것인지 와인잔 속 와인만을 찰랑찰랑 흔들며 향을 맡본 후,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모습만을 보였다.
공주는 시선을 돌려 그자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성검을 보았다. 그녀가 알기에는 그 검은 그저 장식, 썩어가는 나뭇잎 하나 베지 못한다고 하지만, 막상 이런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가 소지하고 있으니 무언가 신비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 신비스런 성검처럼 저자가 겉으로는 저런 모습을 보일지언정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최후의 희망만을 억지로 쥐어짜내며 그녀는 빈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귀빈실, 아니 독방에 갇힌 지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자신의 늙다리 영주들은 참고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왕자파에게 밀린 정치판은 도저히 뒤집힐 여부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긴밀히 보낸 군대는 돌아올 때가 되었건만 이미 해가 저물고 밤하늘에는 달과 별이 멍청이의 낯짝처럼 무언으로 떠 있을 뿐... 사소한 소식 하나 들려오는 것조차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성 밖에서 땅이나 파먹는 무지렁이들에게는 꿈조차 못 꿀만큼 사치스러운 가구와 장식으로 가득하지만, 위태위태한 자신에게 있어 호화로운 삶과 함께 이것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것들... 불안감이 맞다면 얼마 못 가 피비린내나는 교수대에나 서게 될 것리라.
"그, 저를 정말로 지켜주시는 겁니까?"
"..."
그녀의 말에도 눈앞의 그자는 그저 새로이 와인을 잔에 따를 뿐, 여전히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자가 가지고 있는 마술 같은 힘을 희망을 걸고 그자에게 계속 매달렸다.
"여지껏 당신에게 충성했는데... 다른 후계자들을 내쫓은 것처럼... 이번에도 당신이 그 왕자를..."
"에비시안 왕자를 남겨둔 건..."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검은 후드의 그자는 잔을 내려놓고는 공주를 향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얼굴을 정면으로 들었음에도 후드 안쪽 만은 괴상하게도 검은 그림자로 뒤덮여 턱선이나마 간신히 보일락말락 한 게 여전히 수수께끼로 뒤덮여 있는 자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자의 능력이었다. 이베이드의 수십 여명의 왕자와 공주들을 겨우 삼 일 안에 대부분을 수도 밖으로 내쫓아낸 그자의 능력... 어떤 방법을 썻는 지는 모른다. 침실 안에 찾아가 자는 이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협박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을 조종하는 마술 같은 것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닌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우리를 배신하지 못하게 하고자 마지막 동앗줄로 남겨둔 것이고, 거기에 더해서..."
"더해서...?"
공주는 그자의 말끝을 따라 하며, 그녀의 목숨을 쥐고 있는 그자가 계속 하려는 말에 집중했다.
"..."
"...?"
갑자기 말을 멈추는 그자의 행동에, 그녀는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자는 애타는 공주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말을 멈춘 채로 베란다 쪽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고, 그녀도 그의 시선을 따라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패했다."
베란다에는 그 검은 후드를 쓴 이를 베껴놓은 듯한 인물이 베란다에서 서 있었다. 역시나 전의 그자와 같이, 검은 후드에 얼굴 안쪽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어져 있기에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언제 나타났는지, 어떻게 베란다를 통해 들어왔는지조차도 모를 새로 온 자는 이렇게 눈에 보임에도 마치, 액자 속 초상화나 사람의 모습을 한 조각상처럼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새로 온 자는 선 채로 그 한 마디를 유령처럼 낮은 저음으로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원래부터 방 안에 있던 후드 쓴 이는 몸을 일으켜 그 새로 온 이에게 다가가 묻기 시작했다.
"원인은?"
"라미엘이 개입했다."
검은 후드를 쓰고 있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선 채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마치, 한쪽에 거울을 세워둔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귀찮게도... 가장 중요할 때에 절묘하게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건가... 뭐, 두 마리의 사냥감을 모두 쫓을 수는 없었으니..."
"하나를 포기하더라도 떼어놓을 수 밖에 없었었지... 그래도 성과는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말대로... [속죄]를 무너지게 한 건 큰 성과다."
"그렇지만, 주인님들께서는 너에게 실망하고 계신다. 위치린 공주라는 '사냥개'를 몰고도..."
위치린 공주는 자신이 거론되자 호명된 것 만치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인기척에 대화를 방해받은 두 사람은 고개를 획 돌려보였다. 마치 유령이 겁을 주는 듯한 그들의 행동에 그녀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억누르고는 고개만을 끄덕끄덕해 보였다. 아무말 않겠다는 그녀의 모양새에 새로 온 자는 원래 있던 자에게 추궁을 가하는 것을 계속했다.
"...여왕을 놓친것을 말이다. 쓸모가 없다 싶으면 너같은 신내기는 쉬이 버려진다."
"...아직이다. 저 무능한 '개'가 아닌 내가 직접 나서서라도 여왕을 손에 넣겠다."
"그들과 맞붙지 말라는 주인님의 당부를 잊었나?"
"...당부였었지... 명령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 보이겠다."
"...할 수 있다면 말이지..."
괴이한 분위기 속에, 필요한 말은 다 전했다고 생각했는지 새로 온 자는 베란다 쪽으로 나가더니 귀신에 사라지듯이, 먼지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위치린 공주는 회화를 끝낸 그자가 천천히 자신을 돌아봄에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었고, 이는 그자의 말로 곧 증명되었다.
"역시나 부전자전, 아니 부전여전이라고 해야하나..."
"..."
자신의 목에 동앗줄이 걸리느마 나느냐 하는 위태한 상황인지라 공주는 그자의 말 속에 담긴 비아냥을 참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내가 직접 나서서 돕기까지 했건만... 드레마의 여왕은 놓치고 말았군."
"그, 그건..."
그자의 말에 공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을 구해줄 유일한 눈앞의 인물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으니, 이제 자신에게 남은 기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아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방금 성과가 없는 건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그의 반응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애처롭게 매달렸다.
"그, 그건 즉... 그러니깐... 적어도 제안을 철회하시기에는 이르시다고 생...각..."
"확실히 성과는 있었지."
그자는 그녀의 말을 시원스레 인정하며 다시 자리에 앉고는 다시 와인잔을 집어들어 붉은 와인을 채우고는 그대로 쭉 들이켰다. 공주는 그자의 말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며 그자가 다시 기회를 주겠다는 말만을 하기를 조마조마 하며 기다렸다.
"라미엘은 우리가 상대하기에도 버거운 상대야... 무능한 너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지..."
"...그, 라미엘이라는 자는 누구입니까?"
공주의 말에 그자는 대답을 해줘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지 침묵한 채로 와인을 새로이 따르기 시작했다. 다만, 전과는 다르게 아주 천천히, 무언가를 생각하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따르며 그자는 혼잣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만 하였다.
"적어도 [속죄]는 무너졌지만...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주인님을 뵐 낯이 안돼..."
무언가를 혼자서 중얼거리며 와인을 따르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느릿느릿해 보일지 모르지만, 공주에게는 와인 잔 속, 붉은 액체가 채워져 가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의 심정이 어떻든, 그자는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도구'로 만들기 전까지는 아직 안심할 수 없어... 거기에 라미엘은 아직 건재해... 그렇다면..."
와인은 이미 잔에 담을 수 있는 양을 넘어서, 잔 밖으로 흘러넘쳐 테이블보를 붉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자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로 철철 넘치는 잔 위로 와인을 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남은 천사들은 별볼일없어... 우선은 골치아픈 [속죄]를 계속 무너뜨려야..."
'천사?'
공주는 그자가 하는 말을 엿듣는 도중에 들려온 '천사' 라는 말이 신경쓰였다. 원체 귀신 같은 자이니, 천사를 언급한다는 게 그다지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원래, 함부로 질문같을은 것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안 되었지만, 그자의 정체에 의문을 품어온 그녀는 이렇게 돌려서라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속죄] 라고 하는 자는 '천사'라는 것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고집 센 늙은이, 가장 까다로운 적..."
그자는 생각에 몰두하느라 그런 것인지, 여과 없이 그대로 대답할 뻔하였다. 실수할 뻔 하였던 그자는 말을 멈추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록, 그녀에게 그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그자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으로 충분이 인식할 수 있었다.
"왜? 궁금한 게 아직도 있냐?"
"...없습니다."
공주의 부정에도 그자는 검은 후드 속에서 새하얀 눈동자만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말없이 그녀를 주시하였다. 아마도, 어디까지 말해 주어도 되는가 고심하는 것이리라.
"천사란 건 말이지..."
그자는 이 말을 꺼내며, 자신의 옆구리에 차고 있던 성검을 뽑아서는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거다."
그자는 성검의 옆면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하였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그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한 공주의 표정에 그자는 설명을 덧붙였다.
"쉽게 말해 무기라는 거다. '신의 무기', 혹은 '도구'"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무기? 무기라니? 천사가 무기란 말인가? 어떠한 목적으로 쓰이는 무기란 말인가?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오던 여러 가지 생각은 누군가 문을 '쾅' 하고 거칠게 부수다시피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공주의 방을 이렇게 무례하게 침입할 자는 에비시안 왕자나 그의 수하들뿐이리라. 그렇다면, 저렇게 창칼을 꼬나 쥐고서는 흙발로 비싼 카펫을 짓밟으며 들어오는 자들이 그녀에게 할 말은 뻔했다.
"총회의가 있습니다. 공주님께서도 참석하셔야 합니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서는 예도 차리지 않고서 명령조로, 그리고 위압적으로 말하였다. 특히나, 말꼬리에 힘을 주어 말하는 게 참석을 거부하면 힘으로라도 데려가겠다는 의사가 역력히 드러났다. 그들의 험악하고 흉흉한 분위기에 공주는 위축되면서도, 일단은 시간을 끌어보고자 핑계를 대 보았다.
"그, 우선 옷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기다려...라."
"금방 끝날 테니, 그대로 가셔도 무방합니다."
그녀의 말에도 대장은 대놓고 비웃는 듯 한 얼굴로 단칼에 거절하고는 부하들 쪽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끌고 가라, 아니 모시고 가라."
한 앞부분의 말실수. 실수 같지만, 일부러 한 말. 공주가 그 회의장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충분히 짐작케 해주는 말이었다. 기사들은 테이블에서 구경하듯 앉아있는 후드 쓴 이는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하는 건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공주의 양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서 범죄자를 연행하는 것처럼 그녀를 끌고서 방을 나갈 뿐 이었다. 공주는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연약한 여성이 좌우에서 구속하는 힘센 남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쉬울 리 없었다. 그저, 문 너머 방 한쪽에서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는 검은 후드의 인물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녀의 귀로 들려오는 그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절망으로 떨어졌다.
"이제... 너는 쓸모없다."
ps. - 위의 내용은 픽션이며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 것은 현실의 정치, 종교, 지역, 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뜻 같은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