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요즘 같으면 총리는커녕 하급관리로도 임명되기 어려운 사람
1. 고려 충신에서 마음 바꿔 조선 조정 진출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정승을 가장 오래 지낸 재상은 황희였다. 그는 세종 시대에 무려 24년간 정승자리에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그를 아끼고 중용했다는 증거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개성에서 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본관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덕분으로 음서로 출사했으나 곧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1392년 7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황희는 고려의 유신이 되고자 벼슬을 던지고 성균관 학관 친구들과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부르고 동료의 권고도 있어 황희는 마음을 바꾸어 벼슬길로 다시 나갔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고려 유신으로 자처한 길재 학파의 후학인 김종직과 조광조 등의 사림파에서는 그를 훌륭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태종으로부터 요직에 발탁되어 많은 칭송을 받았고 태종의 아들 세종도 내내 그를 우대하고 아꼈다. 그러면 황희는 정말 정직하고 원칙만을 준수하는 완전한 청백리일까? 그는 청탁과 뇌물 수수로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세종은 결점이 많은 황희를 무려 24년간이나 정승자리에 있게 하였고 황희는 영의정을 18년간 하다가 87세에 은퇴하고 1452년 90세에 죽었다.
-
- 세종대왕(왼쪽)과 황희 /장대성
2. 황희, 사위 살인죄 무마 위해 청백리 맹사성에게 청탁해황희가 의정부 찬성(종 1품)에 있을 때인 1426년에 사위 서달이 충청도 아산의 신창현을 지나다가 양반인 자기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아 아전을 때리는데 말리는 다른 아전을 죽게 하는 살인을 저질렀다.
황희는 사위의 살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친분이 있는 아산 출신의 판부사 맹사성에게 피해자 가족과의 중재를 요청했고 맹사성은 피해자 가족들을 불러 합의를 주선했고 신창 현감에게도 선처를 부탁했다. 살인한 서달의 부친인 서선은 형조판서였고 장인이 찬성 황희이며 아산 출신의 유력인사인 판부사 맹사성이 해당관리들에게 압박성의 청탁을 하니 서달의 종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고 서달은 결국 석방되었다.
하지만 세종이 이 사건을 면밀히 조사하면서 사건을 감추기 위한 청탁과 뇌물이 있었던 것을 밝혀냈다. 사건이 밝혀질 당시 황희는 좌의정, 맹사성은 우의정이었고 둘 다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사건으로 망신살이 뻗친 것이었다. 세종은 이들을 파면시키고 의금부에 가두었다.
세종은 얼마 후 황희의 얼굴을 보아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 사형감인 사위 서달은 장 100대를 치고 유배를 보냈으나 가족과 함께 살도록 하였고 대사헌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황희와 맹사성은 좌의정과 우의정에 복직시켰다.
그런데 1년도 안 되어 첨절제사 박유가 황희에게 뇌물을 보내다가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역졸로부터 말과 술대접을 받고 잘 봐 주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또한 황희는 처남들과 아들의 이익 등을 위해 여러 번의 구질구질한 청탁과 뇌물 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라 탄핵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1431년 황희의 재주가 비범하다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임명했고 황희는 업무처리에 탁월한 재상이 되었다. 물론 맹사성도 우의정에 복귀한 후 좌의정으로 올라 음률에 뛰어난 청백리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②편에 계속>
-
- 세종 때 청백리 정승 맹사성 동상, 맹사성의 집. /장대성
3. 황희, 살인한 여자와 간통 혐의?
황희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살인한 여인과 간통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종의 친형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 때 주역을 한 박포가 역적으로 참수되고 박포의 아내는 죽산 현(지금의 안성)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녀가 남자 종과 살을 맞대고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것을 다른 종이 보았다.
그녀는 이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자신의 간통 현장을 목격한 종을 죽여 연못에 집어 던졌다. 몇 일후 시체가 연못에서 나왔는데 형상을 알아볼 수 없었고 관청에서는 조사가 시작되었다. 박포의 처는 서울로 도주하여 황희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서 여러 해 지내다 황희와 육체의 정을 통하였고 그 후 그녀는 자기 범죄가 무사히 해결된 것으로 알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황희는 범인을 은닉하고 은닉한 범인과 간통까지 했으니 중죄를 범한 것이었다. 황희의 후손들은 황희에 대한 위의 내용은 사관 이호문이 단종 즉위년 7월에 세종실록 10년(1428년) 6월 25일 자에 기록한 것인데 기록 내용에 대해 “당시 김종서, 황보인, 정인지, 허후, 정창손, 최항 등 9인이 회의에서 의논한 결과 허위라고 결정했다”고 주장했다(국민일보 2015년 4월 23일).
약 600년 전의 남녀 간의 간통사건이니 진위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자 종과 정을 통하고 사람을 죽이는 박포 처의 거침없는 과감한 행동을 보면 그녀가 먼저 황희라는 거물을 성적으로 유혹하여 자기 범죄를 숨기는 데 활용하려고 했을 것으로 유추는 된다. 어질고 온유한 품성으로 유명한 황희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것은 의심은 가지만 지금 간통 여부의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4. 황희 흠 있으나 업무 뛰어나고 세력 절대 구축하지 않은 것이 장수 비결
황희는 박포 아내 사건 말고도 황금대사헌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흠이 많은 사람이었다. 요즘 같으면 총리는커녕 하급관리로도 임명되기 어려운 사람인 셈이다. 더군다나 황희는 태종 때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반대 즉 세종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서인(庶人)으로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그를 정승으로 무려 24년간 일을 하게 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인 세종이 무슨 이유로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과실과 하자까지 있는 그를 그렇게 중용했을까? 세종은 관료의 인사에 있어서 국가 발전에 필요한 사람이라면 신분도 안 따지고 관직에 임명했다. 세종은 국사를 논하는데 황희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황희는 원칙에 입각한 조직의 관리 운영은 물론 장기적인 전략적 사고와 조정 업무에도 뛰어난 인재였고 자기 세력을 하나도 만들지 않아 세종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국가 만년 대계를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으로서는 장기적인 전략기획 수립에 뛰어나고 사심이 없는 황희를 결점이 있다 하여 놓칠 수 없었다. 황희는 뇌물과 개인적인 청탁 건으로 여러 번 탄핵 대상이 되었으나 태종과 세종 때 정승을 지낸 유명한 고관대작들에 비해 깨끗한 편이었다.
세종의 생각으로는 태종의 일등공신인 하륜은 권모술수에 뛰어나고 재물도 탐했다. 좌의정을 지낸 박은은 왕에게 아부를 잘하는 신하였다. 황희는 이들에 비해 정직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성품이 부드러워 하인들에게도 인정을 베푸는 인물이라 세종이 좋아했다.
원대한 국가 계획을 세우고 만백성에게 평안과 복지를 주는 것을 최고의 통치목적으로 하는 세종이었다. 그런 세종에게는 꼬일 대로 꼬여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힘든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을 꼭 내어 놓는 지혜와 깊은 학식을 가진 황희는 절대로 필요한 인재였다.
-
- 황희가 말년에 지내던 임진강가 반구정, 황희의 위패가 있는 상주 옥동서원. /장대성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첫댓글 거 참 !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탄핵감 !
不知而言不智(부지이언부지) 모르면서 말하는 것은 무지이고,
知而不言不忠(지이불언불충)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이다.
그런데 아는 것을 歪曲(왜곡)하여 말하는 것은 무어라 규정하면 적당할까?
‘韓非子(한비자)’에 보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