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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부산☆황선홍
항상 초심의 마음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다 - 부산아이파크 강승조
현재 완료 진행형 :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어떤 일을 계속 해 오고 있는 것.
갑자기 벼락처럼 나타난 선수? 아니다. 갑자기 기량이 확 늘어난 선수? 역시 아니다. 2군에서부터 꾸준히 자신의 진가를 다듬어 오던 그가 이제는 한 단계 도약하여 팬들 앞에 섰을 뿐이다. 모든 것에 차례가 있듯이 그는 그 차례를 다 거쳤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남달랐죠. 가족오락관 보면 남성 팀이 지면 그 날 밥을 안 먹었어요. 졌다는 그 분함을 이기지 못했죠. 옆에서 여성 팀이 이겼다고 좋아하는 사촌누나랑 싸우기 까지 했으니깐 승부욕이 보통은 넘었죠.”
남에게 지는 게 너무너무 싫었다. 승리의 기쁨을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았을까. 그 아이는 내면 가득 승부욕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 승부욕은 변함이 없어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는 오직 승리만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 아이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바로 그 승부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축구가 좋았어요. 이유 없이 그냥. 학교에서 축구부를 만들어주지 않아서 5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을 정도였죠. 그동안은 방과 후 축구 교실 다니면서 축구를 하는 정도였죠.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교실로 전주시장 배를 나갔어요. 그 때 강원길 감독님을 만났어요. 감독님께서 당시에 완주중학교를 맡고 계셨거든요. 경기 끝나고 저에게 오시더니 ‘축구 해볼래?’ 하시더라고요. 집에 물어봐야 한다고 하고 집에 와서 반대하시던 엄마를 무조건 조르기 시작했죠. 허락 받고 나서야 완주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 6학년 때 완주봉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죠.”
길을 알려주는 좋은 안내판이 나타났다. 그가 축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준 강원길 감독. 그와 강원길 감독의 인연은 남다르다. 시작을 도와준 스승이기도 하고 사춘기인 중, 고등학교 6년의 시절을 든든하게 도와준 스승이기도 하다. 때론 스승으로, 때론 아버지처럼 그렇게 축구를 시작한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저는 이리고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강원길 감독님이 계속 전주공고를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감독님 말씀이니깐 따라야겠다 싶어서 전주공고로 진학을 했죠. 그런데 제가 1학년 들어가자마자 전주공고 감독님이 바뀌셨어요. 진짜 놀란 건 바뀐 감독님이 제 중학교 감독님이셨던 강원길 감독님이셨어요. 감독님께서 전주공고 오실 걸 미리 아시고 일부로 저에게 전주공고로 하라고 하신 거였죠.”
매 순간, 배우고 다짐하고 나 자신을 바로 잡다.
“제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키가 150cm 조금 넘을 정도 이었어요. 진짜 작았죠. 축구를 그만둬야하나 할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엄마는 큰데 왜 나는 안 클까?’하면서요. 그러는 와중에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었어요. 팔을 다쳐서 한 3~4개월 집에서 쉬었거든요. 운동도 안하고 빈둥거리면서 집에서 쉬었는데, 신기하게 그 쉬는 기간 동안 제 키가 180cm가까이 큰 거예요. 4개월 만에 거의 30cm가 큰 거죠. 저는 제 키가 그렇게 크고 있는 줄 몰랐어요. 다 나아서 학교를 갔는데 제가 제일 컸어요.”
지독한 콤플렉스가 마법처럼 사라지면서 그는 물 만난 물고기 마냥 그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중학교 3학년 때 오룡기 3등을 제외하곤 별다른 경력이 없었던 그는 2002년 진주MBC 전국고교축구대회와 문화 관광부장관배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전국금석배 축구대회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어서 U-17 대표팀에 발탁돼 그의 빛을 볼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 최종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종탈락 이후로 더욱 열심히 자신을 다금질 했다고 하니 오히려 본인에게 약이 되었단다.
“최종탈락하고 이틀 내내 울었어요. 엄마도 같이 우시고. 너무 아쉬운 거예요. 당시에는 잘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속으로 ‘잘할 수 있었는데, 내가 더 잘하는 거 같은데(웃음)’ 하면서 아쉬워했어요. 그때는 진짜 그렇게 생각 들었어요. 후에 학교로 돌아왔는데, 감독님께서 저를 보시고 첫 마디가 ‘미안하다’였어요. 제가 부족해서였는데,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깐 괜히 속상하더라고요. 감독님의 그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 U-17세 세계청소년대회 때 새벽에 TV로 경기를 다 봤거든요. 그런데 막상 또 우리 팀이 지니깐 속상하더라고요.”
최종탈락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는 이번에도 강원길 감독의 추천으로 단국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단국대로 진학한 후, 그는 대학시절 대회에서 예선이나 16강, 8강에서 탈락하며 유난히 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징크스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고. 바로 자신이 팀 내 고참이 되면 이상하게 팀이 우승의 기쁨을 맛본다는 것이다. 2007년, 그가 대학교 4학년 최고참이 되던 해 대통령배에서 승승장구하며 3위를 기록했다.
“저희가 고려대랑 울산미포조선랑 한 조였거든요. 조별예선 때는 제가 대학선발로 덴소컵에 합류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조 편성 받고 또 탈락되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저희가16강전, 8강전, 4강전까지 올라가게 되었어요. 수원시청이랑 4강에서 맞붙었거든요. 정말 중요한 경기였는데 제가 실수하고 말았어요. 전반 35분쯤에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한 거죠. 전반에 퇴장당해서 후반 내내 고생할 후배들, 동료들 생각하니깐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그리고 저희는 져서 결승전에 오르지 못했어요. 그 때 깨달았어요. 나의 순간 잘못된 판단이 팀 전체에 정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그는 이내 이것저것 대학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주변에 웃긴 친구들이 많았다며 재미있는 이야기들 한껏 풀어내는 그는 벌써 그 시절로 돌아간 학생 같았다.
“하상섭감독님 권유로 기도원에 들어갔어요. 그것도 휴가기간에(웃음). 진짜 가기 싫었어요. 그래도 감독님이 가라고 하시니깐 친구들 몇 명이랑 기도원에 갔죠. 가자마자 핸드폰이랑 시계를 다 뺏고 조를 나누는데 친구들이랑 다 떨어트렸어요. 그리고 새벽 6시에 종소리를 듣고 매일 아침을 깼어요. 거기다가 찬송가 부를 때 박수 열심히 안치면 혼나거든요. 정말 열심히 박수쳤어요. 발표 하는 것도 있었는데, 조에서 제가 제일 어려서 매번 나가서 발표도 했죠. 진짜 기도원 있는 내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요. ‘이건 아니다.’하면서(웃음)
마지막 날에 다 모아놓고 기도를 했거든요. 갑자기 눈을 뜨라고 해서 눈을 떴는데, 엄마랑 감독님이 눈앞에 있는 거예요. 주변에 둘러보니깐 가족 분들이 다 오셔서 서로 부둥켜안고 우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뭐 딱히 놀라지도 않았어요.(웃음) 엄마 표정도 억지로 오신게 눈에 보였고요. 엄마가 불교이신지라……. 감독님은 기도원 다녀온 뒤로 우리가 달라지길 원하셨는데,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거 같아요(웃음).”
나의 어머니.
인터뷰 내내 그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사소한 에피소드에도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그는 한없이 어린 아들이 되었다가도 이내 가장 듬직한 아들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라는 존재만으로도 그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분이기에 그에게 어머니는 어떤 부연 설명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 뒷바라지 하시느라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운동하는 아들 위해서 눈 코 뜰세 없이 바쁘게 사셨으니. 이제는 제가 효도할 차례죠. 뭐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자식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계속되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그는 말끝을 흐리며 한동안 숙연해졌다. 축구를 시작한 이후로 함께 지난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은 어머니와 아들. 그래서 그에게는 유난히 어머니의 그리움이 깊게 묻어 있는 듯 했다. 모든 자식들이 그렇듯 체격이 점점 커지고 나이가 점점 들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된다. 그 역시도 어릴 때는 한 없이 강해보이던 어머니가 마음 아프게 이제는 점점 약해지신다.
“축구교실 다닐 때는 합숙이 없어서, 저는 축구를 하면 합숙 안하고 경기 있을 때만 나가면 되는 줄 알았어요. 합숙을 하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이랑 떨어져 지내니깐 힘들었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전화해서 축구 안하겠다고 집에 가겠다고 하면 엄마가 ‘네가 하고 싶다고 한 일이니깐 그런 말 하지마라.’고 하시면서 뚝 끊으셨어요.”
“그런 엄마가 지금 몸이 조금 아프시거든요. 제가 전북과의 경기를 발목이 다친 상태로 뛰었어요. 그걸 엄마가 아셨어요. 그러고는 저보고 아프면서까지 뛰지 말았으면 한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뛰어다니는 아들 모습 보는 게 너무 마음 아프시다고. 그 이야기 들으니깐 마음이 참 찹찹하더라고요.”
프로, 그 곳에서의 시작
대학 선배 따라 다른 나라에서 축구를 시작해볼까 생각도 했던 그였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트래프트를 신청했다. 한국에서 먼저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계속 확인을 했었어요. 그런데 발표 결과가 바로바로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다가 친구한테서 전화를 받았죠. 부산 간다고. 부산으로 오게 될 줄은 진짜 상상도 못했거든요. 부산이랑은 연습경기 해 본 적도 없고 학교 선배들, 친구들도 없었어요. (이)강진이 한 명 알았어요. 그래서 강진이한테 전화해서 부산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죠. 부산 클럽하우스에 처음 딱 들어서는데 좋더라고요. 환경도 좋고 형들도 잘해주시고.”
그토록 원하던 프로에 오게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 프로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당장 주전으로 뛰는 욕심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이 또 다음이 되고, 또 다음으로 미루면서 그렇게 기다릴 뿐이었다. 누군들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회를 기다리며 2군에서 꾸준히 경기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제가 번외로 부산에 오게 되었기 때문에 시즌 초반부터 주전으로 뛸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기회는 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일단 2군에서 열심히 하면 나한테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늦더라도 언젠가는. 솔직히 제 또래 선수들은 경기 출전해서 잘 뛰는데, 저는 그저 지켜봐야하는 입장이다 보니깐 답답하기도 했죠. 그 때마다 (김)창수랑 (이)승현이가 ‘너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기회는 언제든지 찾아온다.’ 라고 말해줬죠. 고마웠어요.”
올해 초, 핫피플 신인 인터뷰에서 그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가장 큰 차이를 경쟁으로 꼽았었다. 선배들의 벽은 높았고 그 속의 자신은 점차 주눅 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프로의 경쟁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을 때쯤, 그는 그 해답을 찾아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 지난 7개월 간 그가 몸소 느낀 해답은 실력 그 이상의 것인 ‘자신감’이었다.
“제가 낯가림이 좀 있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낯설기도 하고……. 시즌 초반에는 뭐가 그리 자신이 없었는지 숫기 없이 조용히 지냈어요. 진짜 부산에 와서 처음 한 2~3일 동안 훈련을 제외하고는 방 밖을 나선 적이 없었어요. 그게 경기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나 봐요.”
“제가 대학 시절에는 선배들로부터 프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질 못했어요. 지금 후배들하고 자주 통화하는데 후배들이 프로생활에 대해 항상 물어요. 대답은 똑같죠. ‘네 하기 나름이다. 네가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플레이 하나를 하더라고 자신감이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더라고요.”
“발목을 다친 상태로 경기에 나선 적이 있는데, 계속 혼잣말로 암시했어요. ‘내가 발목이 아파도 상대방보다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게 경기 전에 몸 풀려고 잔디를 밟는데 거짓말같이 하나도 안 아픈 거예요. 그리고 경기 끝나고 나서는 발목이 다시 아팠어요. 그 때 생각했어요. 자신감이 정말 중요하구나. 물론 그 자신감이 도를 지나쳐서 자만심이 되면 안 되지만 자신감은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내 목표로 향하는 첫 계단에 서다.
그는 지금까지 뛰었던 경기들이 어땠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기를 뛰었던 자신의 모습도. 그는 지난 4월 2일 제주와의 컵 대회에서 첫 데뷔전을 치렀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경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 후 2달이 지난 6월 28일 서울과의 첫 리그 데뷔전에 선발 출장하게 된다.
“서울전 대비해서 훈련하는데, 황선홍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몸 괜찮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 때 진짜 컨디션이 좋았거든요. 슈팅 정확도도 스스로 느끼기에 좋았구요. 그래서 좋다고 말씀드렸죠. 솔직히 안 좋아도 좋다고 했겠죠. 그 때, 서울전에 혹시 경기 뛸 수도 있을까 생각도 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미팅할 때 제가 선발 명단에 있는거에요. 저는 대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진짜 경기 전날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서 잠을 못 잤어요. 들어가서 어떻게 해야 하나 잘 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새벽 2시까지 잠 설쳤죠.”
“제주전 때 진짜 못했거든요. 너무 굳어 있었어요. 정말 그 경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못했어요. 그래서 제주전처럼은 하지말자고 이미지트레이닝을 계속했죠. 솔직히 신인이 들어가서 잘한다고 해도 경험 많은 선수들에 비해서 얼마나 잘하겠어요. 혼자 다짐했죠. 그냥 죽기 살기로 뛰자. 경기 직전에 황선홍 감독님이 저한테 경기 어떻게 할 지 생각해봤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하겠다고 했더니 감독님도 그게 정답이라면서 감독님께서 국가대표 처음 발탁되셨을 때,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 이야기가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계단을 하나씩 디디며 오를수록 보이는 것이 많아지고 느껴지는 바람은 서늘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계단 더, 한 계단 더 하며 오르기를 원한다. “한번, 이 자리에 올라오니깐, 다시 내려가기는 싫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해서 꼭 살아남고 싶었어요.”라는 말에서처럼 그는 후퇴 없이 이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전북월드컵경기장으로 원정경기를 갔을 때, 그는 기분이 묘했단다. 어린 시절 그 곳에서 볼보이하던 아이가 이제는 프로 선수로 그 곳을 들어서게 되었으니 그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축구를 시작하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어린이처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는 두근거림으로, 첫 출근을 할 때 가슴을 들뜨게 하는 마음처럼.
사람들은 새싹보다 꽃봉오리를 먼저 기대한다. 우리는 그렇게 시작부터 꽃봉오리이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새싹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지금 그에게는 현재완료진행형보다는 미래완료진행형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의 목표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나 그는 과거에서부터 미래의 그 곳까지 그렇게 한 발작씩 나아갈 테니 말이다. 그리고 깊이 박힌 뿌리가 뽑히지 않듯 그 초심만은 끄떡없길 바란다.
K-리그 명예기자 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