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과 분리 불안 [김이듬]
네가 사랑을 말할 때 나는 불안했다 네가 연인을 소개할
때 나는 울음이 터질 듯 초조했다
떨지 마
우리가 헤어지는 게 아냐
우체국 앞에서 노인이 신문을 펼쳐 놓고 있다 비 내리는
일요일이다 우체국 앞 차양 아래 다 낡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일그러진 바니타스 같다 노인이 신문을 보다 말고 나
를 쳐다본다 이봐요 여기 단어 퍼즐 좀 맞춰 볼래요
소년 시절 귓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시인, 부모의 이혼으
로 침통한 소년 시절을 보내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객사한
시인의 생가 맞은 편 우체국 앞에서
노인은 술에 취한 채 쓰러진 술병 옆에 신문을 펼쳐 두고
있다 크로스워드가 막혔다
철광 캐러 온 산간 마을 함께 온 친구들이 다 떠난 뒤에고
혼자 늙어가는 노인 광산엔 이제 철이 없는 거 알아요 노인
은 내일도 신문 귀퉁이를 보고 있다
머잖은 나의 미래가 극으로 상연되고 있다
편지 써도 부칠 데 없겠지
시를 써도 발표할 데가 없겠지
여기 와인은 다 가벼워요 따뜻한 지방에서 성장한 포도는
맛이 깊지 않아
나는 노인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아 마신다 테이블 아래
와 찢어진 소파 속까지 세찬 빗줄기 들이친다
-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이피스트, 2024
첫댓글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