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가오니 물파래무침이 제철이 되었다.
쪽파와 무 채를 넣고 무친 파래무침은 향긋한 향으로 먹을 만하다.
맛있다고 남기지 않고 먹으니 자꾸 내놓는다.
하지만 아무리 향이 좋다고 해도 자꾸 내놓으면 질리게 마련이다.
요즈음은 파래도 귀해 옛날처럼 값이 싼 것도 아닌데...
대학시절에 하숙집이 지금 남천동 메가마트가 있는곳에 있었다.
대연동과 남천동의 경계를 이루는 남천천이 흘러내리는 하구였다.
남천천 상류에는 빼갈공장도 있고 평소에도 오물이 많이 흘러내렸다.
냇물 하구에는 송광목재를 위시하여 소규모 목재, 합판공장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바다로 흘러내리는 또랑물은 아주 불결했다.
게다가 비만 오면 냇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똥퍼!' 값을 아끼려고
밤중에 무단으로 똥통을 비웠다. 그래서 하숙집 근처 바닷물에는 비만 오면
인분 덩어리가 둥둥 떠다녔다. 그때는 대연동 부경대학 부근이 온통 시금치밭이었는데
시금치밭에는 군데군데 인분 구덩이가 있었다. 해초도 인분을 먹고 잘 자라는 모양이엇다.
인분을 먹은 파래도 시금치처럼 시퍼렇게 살이 올랏다.
하숙집 밥상에 처음 파래무침이 올랏을 때는 아줌마가 시장에서 사온 줄 알았다.
그런데 비 온다고 학교에 안 가고 강의를 빼먹은 하숙생이 바람 쐬려 밖에 나왔다가
하숙집 아줌마가 바닷가에서 똥파래 채취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 뒤로는 아무도 파래무침을 먹지 않았다.
비위 약한 녀석은 옛날에 먹은 똥파래무침 생각에 토악질까지 했다.
세월이 흘러 외항선을 탈 때, 1970년대 중동 아프리카 건설붐이 일었다.
그때 돌가리(시멘트)나 건축자재를 싣고 간 배들은 3개월은 보통이고 6개월 이상
대기를 해야 했다. 바다 가운데서 주부식이 달랑달랑햇지만 구입하려고 해도 너무 멀어서
운반비가 비싸 구입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지원을 해 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누룽지를 끓여먹고 보트를 내려 흘수선에 붙은 파래와 손톱만한 담치를 긇어먹었다.
그때 페르시안 걸프에는 하루종일 낚시질을 해도 고기 한 마리 잡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일본군이 완패를 당하고 수군대장 와끼사카 야스히로 외 최 측근
몇 명만 빠른 배로 겨우 탈출해 김해로 도망갓다. 그의 부장 와키사카 곤베에는 근처의 무인도에 상륙해 자살하고
나머지 부하 400여 명은 파래와, 고동, 찔피, 등 해산물로 연명을 하며 뗏목을 만들어 탈출햇다.
이순신은 '왜군 모가지 좋아하는 원균'에게 잔적을 소탕하라고 맡겼는데 원균이 놓쳐버렷던 것이다,
그때 해초로 연명하며 살아 돌아간 왜군 후손들이 (와키사카 야스히로의 조선 전쟁 기록을 보고)
십여 년 전에 그 섬에 찾아와서 400여 년 전에 죽은 조상의 영혼들을 위로하고,
또 조상들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 돌아가게 해준 그 섬에 감사드렸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첫댓글 간장 없어면 바닷물로 간 맞추고. 치약 없어면 동키호스물로 요즘 스마트폰 전부 사용하던 사람 폴드폰 쓰면 없는넘 바보라 생각 한다
느리게 없는 세상에서도 목숨 부지 하고 사는게, 복잡한 스트레스 없어 단순한 세상 편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