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영웅 원균, 그 뜨거운 진실 - 임진왜란 일등 공신에 빛나더너 원균은 왜 후대에 이르러 무능과 모함의 대명사가 됐는가!
시대에 따라, 필요에 따라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몰두한 집권 세력들이 원균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후 후대 역사는 그를 인격 살인하기 시작했다!
원균과 같은 元門의 후손인 원종섭이 조상의 명예를 되찾고자 수년 동안 방대한 역사적 사료를 모으고 분석하여 내놓은 진짜 원균 이야기
유성룡은 임진왜란 전에도 그렇고 임진왜란 중에도 병조판서, 좌의정, 도체찰사, 영의정 등 모든 요직을 다 거치며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에서 한 걸음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누가 뭐라 해도 전쟁 대비에 아주 소홀했다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이율곡의 십만 양병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과 자신이 천거한 김성일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이후 임금에게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을 인지하고도 그를 묵인하고 아무런 대비를 안 한 것이다.
이는 가벼이 넘길 수가 없는 중대한 일로서 유성룡은 서둘러 글을 남겨 모면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역사를 왜곡하고서라도 거짓 기록으로 남겨서라도 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아닐까?
칠천량 패전은 원균만의 책임인가? 권율의 곤장이 원균을 죽인 것이다. 아니 그의 무모한 독전이 조선 수군을 바닷속에 쓸어 넣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보다 더한 것은 이중간첩 요시라의 간계에 놀아난 조선의 무능한 조정과 임금이 원균도 죽이고 이순신도 죽인 것이라 보아야 한다.
이중간첩 요시라의 반계에 의한 일이지만, 칠천량 패전은 절대로 원균의 패전이 아니다.
첫째로, 적의 왜성 포진을 무시하고 무리한 독전을 강요한 무능한 조정과 도원수 권율이 원균과 조선 수군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둘째로,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유성룡은 일본이 조선의 남쪽 4개 도를 할애할 것을 요청해 온 강화 회담에 표면적으로는 반대를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평화회담을 지지하는 명의 편이었다
셋째로, 왜성이 들어선 지역은 임진왜란 중 해상전투의 대부분이 치러진 경남 남해 해안으로 조선 수군의 승전지역이다. 결국 칠천량의 패전도, 노량에서의 순천 왜성과 연계된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것도, 일본은 강화회담 기간 중 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개념의 선박을 건조하고 경상도 남해안에 장기전을 준비하여 왜성을 쌓고 둔전을 하는 등 정유 재침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하는 동안 아무런 준비 없이 자만에 빠져 허송세월한 조선 수군과 조선 조정에 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원균에 대한 잘못된 세평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근거로
첫째,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 일등공신에 봉해졌다.
둘째, 임진왜란의 대부분 해전은 원균의 경상우수영 지역에서 벌어졌다. 임진왜란 동안 18번의 주요 해전이 있었다. 그중 정유재란 이전에는 대부분 원균과 이순신이 늘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세 번째, 한양이 함락을 당하고 임금이 평양으로 피할 동안 경상도 바다는 원균이 혼자서 지켰다.
네 번째, 원균은 이순신이 죽을 자리에 대신 죽었다. 무능한 정부 때문에 벌어진 왜의 이중간첩 요시라의 농단에 말려 이순신이 죽을 자리를 원균이 죽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