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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금) 한글날 5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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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이상한 학자들이 훈민정음 즉 우리의 한글을 창조가 아닌 모방이라고 생각하며 아시아의 고대 문자들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애써 유사점을 찾으려고도 했고 갖다 붙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일본인들 처럼.. 우리나라의 훈민정음은 고대 우리민족의 문자 가림토정음 (가림토 문자)를 과학적으로 가다듬은 것입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도 비슷한게 발견 되었는데 일본의 대다수 영토도 그렇지만 오키나와는 우리의 섬이고 일본사람들도 오키나와인은 자신들과는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학대를 해 왔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28년(1446년), 국보 70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는데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며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이라 부른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분은 무척 간략해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도 실려 있어 전해져 왔지만, 한글 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는 해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정본이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 그것이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드디어 해례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중에게, 그리고 한글학회 간부들에게 공개된 것은 해방 후에 이르러서였다. 첫머리에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한글학자들도 해례본이 없었기 때문에 창제의 원리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대 글자 모방설, 고전 (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화장실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의견이 분분 했다. 이런 것들은 일제강점기의 일본 어용학자들의 주장이었다. 특히 1937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고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한 후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전장을 태평양 너머까지 확장시켰다.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식량배급제가 강화되고 일제의 수탈은 혹독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우리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라고 배웠다.
내선일체, 황국신민, 창씨개명, 일선동조론, 신사참배 등 방법도 다양했지만 문제는 그 질이 불량했다는 점이다. 그 중 가장 악랄했던 정책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탄압 정책이었다. 1942년 12월 일본어 사용에 반하여 한글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의 임원 33인을 투옥시킨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발한다. 이때 이윤재, 한징과 같은 사람은 옥사하기까지 했다.
하나의 나라, 하나의 민족정신을 담는 그릇은 바로 그들의 언어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 즉 세계관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일제는 진정으로 우리 말과 글이 사라지길 바랬다. 18세기 조선의 실학 연구자들은 중국의 중화사관으로부터 탈피하여 우리 고유의 문물과 사상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이때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과가 바로 훈민정음 언해본의 발견이었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을 한글로 풀어쓴 것이다. 일제는 18세기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는 등 언해본 자체의 진위를 허구로 몰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해례본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다. 해례본을 없앤다면 조선초까지 소급되는 세종조의 한글 창제의 신화는 물거품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정신을 담는 그릇의 뿌리와 기원을 허구화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1940년대 초기에 이미 우리나라를 넘어 동북아시아에 이름이 알려진 대수장가였다. 간송은 김태준이라는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국문학자로부터 해례본의 실존 소식을 접한다. 당시 일제는 조선에서 발생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의 발견은 일제로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간송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대명사였고 김태준 역시 일제로서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회주의자였다. 이 둘이 만난다는 것은 너무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송은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는 데 사활을 걸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가 발음기관을 상형(象形)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눈물겨운 노력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체가 간송의 품으로 왔으며 비밀리에 지켜오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불러 한글 연구를 위해 영인본을 만들며 세상에 공개된다. 이 실체는 우리의 언어가 인체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백성을 위해서 기획적으로 언어를 창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특히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최초의 언어로 기록된다. 언어가 그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그리고 창제의 세계관을 동시에 밝히면서 제작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진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962년 12월 해례본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된다. 그리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다.
훈민정음 해례본 1000억원 보상 요구 훈민정음 해례본 의 소유자가 1,000억원을 보상해주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가에 기증 하겠다고 밝혔다. 훈민정음 해례본 현 소유자 가 요청한 금액은 전문가들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평가한 감정가 1조원의 10%에 해당 하는 금액이다. 현재 훈민정음 혜례본은 경북의 모씨가 소유하고 있다. 경북 상주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조 모씨는 지난 2008년 현 훈민정음 혜례본 소유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했는데 조 모씨의 주장에 따르면 현 훈민정음 혜례본 소유자가 골동품 가게에서 고서적을 사면서 훈민정음 혜례본을 훔쳐갔다고 주장 했고 긴 법정 공방 끝에 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는데요 하지만 현 훈민정음 소유자는 법원에 판결에 불복하면서 훈민정음 혜례본을 내주지 않았다. 이후 법정공방 끝에 현 훈민정음 혜례본 소유자가 승소 하면서 훈민정음 혜례본을 소유하게 되었다. 훈민정음 혜례본은 한글 창제 원리를 풀이한 한문으로 된 해설서 인데요, 훈민정음 창제 3년 뒤인 1446년 (세종 28년) 편찬되었다. 1,000억원의 보상을 요구한 훈민정음 혜례본은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훈민정음 혜례본 국 보 70호 와 동일한 판본으로 전문가들은 간송미술관에 소장 된 훈민정음 혜례본 보다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보고 있다. |
훈민정음(訓民正音) 2
『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
◎ 예의(例義) ·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
· 새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 등
◎ 해례(解例) ·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 용자례(用字例)
· 정인지 서문
예의(例義)는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과,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라는 말은 정인지의 해례 서문에 나온다.
“계해년(세종 25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와 뜻(例義)을 들어 보이시고서 이름 하시기를, ‘훈민정음’이라고 하셨다.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하는 데에 들어 있다.
세종의 서문에서는 새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취지를 밝혔다.
이 서문은 54자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초성자와 중성자의 음가를 밝혔다.
초성자는 아(牙)·설(舌)·순(脣)·치(齒)·후(喉) 음의 순서로,
그 각각은 원칙적으로 전청(全淸)· 차청(次淸)· 불청불탁(不淸不濁) 자의 순서로17자를 배열하되,
병서(竝書)를 할 수 있는 글자 뒤에 전탁자 6자(ㄲ ㄸ ㅃ ㅉ ㅆ )의 내용을 추가하여 배열해 놓았다.
해례는 제자해,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의 5해(解)와
용자례(用字例)의 1례(例) 및 정인지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에 대해 해설하고 설명하는 부분이 제자해(制字解)이다.
그 다음으로 초성해와 중성해, 종성해의 순서로 해설하고, 초성·중성·종성의 세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을 해설한 합자해의 순서로5해를 구성하고서, 마지막으로 합자법에 의해
올바르게 구성된 단어에 대한 실례를 용자례에서 실제 단어 123개의 용례를 들어 보인 것이다.
자못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해가 끝난 뒤에는 ‘訣曰’(“비결에 이르기를”)이라 하고서 운문으로 그 해의 내용을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성음(聲音)을 바탕으로 하여 그 이치를 다하였다(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고 하면서 정음(正音) 28자는 상형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즉,초성의 기본자 ㄱ(아음), ㄴ(설음), ㅁ(순음), ㅅ(치음), ㅇ(후음) 등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하고,그 외의 글자들은 소리의 세기[稍?]에 따라 획을 가하여 만들었다.
다만, ㄹ와 ㅿ는 각각 혀와 이의 꼴을 본떴으되 몸이 달라 가획의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중성의 세 기본자 ㆍㅡㅣ는 천·지·인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합자해에서는 초성·중성·종성의 세 소리가 합쳐 글자를 이루는[成字]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정인지의 해례 서문은 전통적인 언어관인 풍토설(風土說)에 입각하여 풍토에 따라 말과 소리가 다름을 지적하고,
우리나라에서 한자를 빌려 썼으나 우리 문자가 아니므로 우리말에 맞지 않으며 신라 설총이 만들었다는 이두도
한자를 빌려 쓴 것이라서 한자 못지않게 불편하여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게 되었다는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훈민정음 28자가 아주 교묘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는 깨우칠 수 있는 문자라고 하면서,
이 새로운 문자를 가지고
첫째, 한문을 풀이하여 뜻을 쉽게 알 수 있고,
둘째, 송사(訟事)를 들어 그 사정을 알 수 있으며,
셋째, 자운(字韻)의 경우 청탁을 잘 구분할 수 있고,
넷째, 악가(樂歌)의 경우 율려(律呂)를 극히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등의 우수성이 있다고 하면서,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다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세종 때에 와서는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안정되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것을 존중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기운이 충만하였다.
이러한 기운이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기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문자를 만든 창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경우는 없다.
더구나 새로 만든 문자의 창제 원리와 그 음가와 운용법을 밝히고
그것을 해설한 책을 간행한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훈민정음(즉, 한글)은 매우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이다.
바로 이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다루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도
그에 못지않게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저작물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출처: 문화재대관-국보-전적2]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닿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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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물네 가지를 바탕으로 하는데, 모두 홑소리(단음)이고, 홑소리로 나타낼 수 없는 겹소리(복음)는 두세 홑소리를 어울러서 적되, 그 이름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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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않는 닿소리
ㅿ | ㆁ | ㆆ |
반시옷 | 옛이응 | 여린히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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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훈민정음 -- 유래배워가요 큰오빠님
한글은 참으로 위대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