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37), '시녀들(Las meninas)'. 1957년. 사진출처: 스페인 피카소미술관.
이탈리아 고전 미술의 영향
- 벨라스케스가 초상, 역사화 등 전통적인 구분을 깼지만 그 바탕에는 고전 미술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를 두 번 여행했는데, 30세에 떠난 첫 번째 여행에서 시스틴 채플, 바티칸 벽화, 고대 로마 조각 등을 그렸다. 그러한 고전 예술에서 벨라스케스가 많은 배움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그림은 이탈리아로 여행하기 직전에 그린 것이다. 훌륭하지만 공간의 관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인물이 모두 전경에 나열되어 있어서 공간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바쿠스의 승리(The Feast of Bacchus)',
1628-1629년, Oil on canvas. 사진출처: 프라도미술관
그리고 몇 달 뒤 고대 조각,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연구 한 뒤 공간 문제를 해결했음이 이 작품에서 드러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불카누스의 대장간(Vulcan's Forge)', 1630년. 사진출처: 프라도미술관.
여기서 공간은 매우 작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다. 또 인물을 보면 고대 조각을 연구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인물들이 일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벨라스케스만의 특징도 살아 있다.
- 벨라스케스 그림 속 사람들은 늘 움직이는 듯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간을 포착한 것 같다.
인물의 얼굴은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을 연상케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늘 다르게 보이는 것을 추구했다.
처음부터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는 것이 벨라스케스의 주요한 특징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도 고대 예술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늘 ‘다름’을 고민했다.
- 고대 예술을 해석해서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벨라스케스를 이해하려면 그가 유럽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회화 컬렉션과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스페인 펠리페 4세 왕은 그 시절 가장 중요한 컬렉터였다. 또 궁에는 티치아노, 루벤스의 최상급 작품들이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루벤스, 티치아노, 틴토레토, 반 다이크 그림에 둘러싸여 있었다.
'스페인 미술' 아닌 '유럽 미술 네트워크'를 조명하는 미술관의 전략
프라도미술관 페레스 큐레이터의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사진: 김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19세기까지 스페인 미술을 연구하던 역사가들은 우리 미술이 다른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스페인에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는 데 몰두 했다.
그런데 그 후 이어진 연구에서 스페인이 그렇게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좋은 작품들을 갖고 있음을 주목했다.
지난 50년 간 스페인 미술사는 벨라스케스, 무리요(Murillo), 주르바란을 고립된 화가가 아니라 유럽과 교류하고 이해하는 화가라는 관점에서 조명하려 노력했다.
벨라스케스의 경우 티치아노, 루벤스, 반 다이크의 작품 또 이탈리아 화가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을 아주 잘 알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갖고 싶어 했다.
- 프라도의 컬렉션 전시를 보면서 정확히 그런 맥락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었다.
예전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상설전을 순서대로 따라가보니 티치아노, 루벤스의 영향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현재 미술관 상설전의 배열이 정확히 그 점을 강조하려 했다.
예를 들어, 메인 갤러리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색채 화가인 베네치아 화가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루벤스가 있다. 루벤스는 비록 플랑드르 사람이었지만, 베네치아 화가들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당시에는 국가별 작가 개념이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18세기부터 미술사는 주로 국가의 관점에서 쓰여 졌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피카소가 해석한 '시녀들'
벨라스케스와 피카소의 '시녀들(Las meninas)' 사진출처: 프라도미술관, 피카소미술관.
‘시녀들’을 미술 내 장르, 국제적 미술의 관점뿐 아니라 다른 것과도 연결지어 볼 수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연결 고리는 연극이다.
당시 스페인에선 연극은 왕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즐겼다. 작가들은 한 작품 속에 다양한 의미를 넣어 누구나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시녀들’에도 비슷한 속성이 있었다. 연극처럼 여러 가지 의미를 복합적으로 넣은 것이 그렇다. 그리고 이를 정확히 이해한 예술가 중 한 명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이다.
- 피카소가 ‘시녀들’을 리메이크 한 연작 58점을 만들었다.
이 작품이 마지막이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관객에게 배우가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다. 피카소는 ‘시녀들’ 연작을 막이 내린 연극처럼 표현했다.
피카소의 '시녀들(Las Meninas)' 연작. 사진출처: 피카소미술관
-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와 경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재밌는 건 이 연작에서 피카소가 처음엔 벨라스케스를 거인 같은 존재로 그렸는데, 뒤로 갈수록 벨라스케스가 점점 사라진다는 점이다.
- 피카소의 작품에선 늘 야망이 느껴졌다. 가끔씩은 너무 강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피카소는 벨라스케스보다 고야와 더 닮았었다. 두 예술가는 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찾기는 쉽지 않다. 고야의 시대부터 예술들이 주관적인 생각, 정치에 대한 관점, 시대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을 사용하기 시작했었다. 개인적으로 벨라스케스보다 고야에 더 공감할 때가 많았다. 벨라스케스는 그림과 보는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대 예술가들에겐 일반적인 일이다
- 그렇지만 벨라스케스와 고야 모두 19세기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스페인의 어떤 속성이 이런 예술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궁금하다.
스페인적 요소가 전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것과 예술가가 하고 싶은 것 사이 교차점을 찾으려고 했던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스페인 예술가들은 ‘현실적인 것’을 좋아했고 이는 스페인 사회의 중요한 특성이다.
출처: 동아일보 2024년 07월 18일(목) [영감 한 스푼(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