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우 (시인, 미술가, 성신여대 명예교수)
엄청나게 큰 대륙이라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나라, 아메리카-
77년 11월 30일 밤 9시 40분-
좌석 324석이나 되는 거대한 DC-100편에 올라 드디어 김포공항을 벗어 났다.
고도(高度) 1만미터의 캄캄한 고공(高空)위를 날면서 계속되는 소음으로 눈을 바로 붙힐 수 없었다. 상냥한 슈튜어디스가 주는 양주를 거푸 몇잔을 들고서야 잠이 들었다.
지금부터 꼭 30년이나 지나간 옛 이야기이다.
5시간 이상의 시차(時差)가 나는 나라, 끝없이 투명한 얼음덩이 북극에서 무더위가 찌는 갈색 사막에 까지 엄청난 대륙에 White, Yellow, Black의 전세계인종이 두루 망라된 그렇기에 끝없는 문제가 터지고 언제 터질지 모른 대국에 첫발을 들여 놨다.
시차(時差)탓으로 밤하늘은 잠시였고 같은 날, 오전 10시- 제2차세계대전이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벌어지고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를 입은 진주만-
다이아몬드 헷드와 와이키키 해변이 기일게 내려다보이는 하와이-
호노루루 국제공항에 기체는 착륙하고 예측이상으로 무척이나 더웠다.
안내원에서부터 버스기사에 이르기까지 건강미가 풀풀 넘쳐나는 2세 여자들이 눈부시다.
까다로운 세관원은 그예 나의 작품박스들을 통관시키지 않고 실랑이 끝에 결국 본토 세관으로 이첩해버렸다. 빨간 딱지를 붙혀서.....
본토로 떠나기 위해 다시 이륙한 것은 12시 50분.
5시간이나 더 걸린 뒤에야 드디어 본토 캘리포니아의 로스엔젤레스 밤하늘 위를 날았다.
“야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입을 담을 줄을 몰랐다. 빛나는 시가지는 마치 바둑판같이 정확하고 태평양 대해를 끼고 휘황찬란한 <천사의 도시>가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1972년 여름 생전 처음으로 이웃 일본 본토에 발을 디딘 후로 연거푸 도도쿄오(東京)과 전 열도(列島)를 누비기는 했어도 이건 비유가 되지를 않는다.
물론 72,73년에 일본초청전시회를 가졌고 이나라 서부 LA에서도 개인전을 갖기위해 무거운 금속덩치를 간직한 체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이미 공항에는 동창인 김봉태와 김종학등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김봉태- 그는 이미 유명인사로서 LA시에 확고한 기반을 다졌으며 나를 초청해준 은인이나 다름이 없다.
개인작품전시이고 작가로서 판매에는 의사가 없다고 설득해서 겨우 공항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南가주 주재 한국일보지사, 중앙일보, 미주동아일보 라디오코리아 한인 방송사등을 찾아 알렸다. 한인회의 유력인사들과 대학동창, 고교동창들도 만났으며 매우 반갑게 마지해주어서 오히려 고향에라도 온것처럼 동포애를 만끽하였다.
이민을 온지도 수십년이 지나고 미국영주자이거나 시민권을 가졌어도 억양이 한곳 틀리지 않고 옛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는가하면 불과 몇 년전에 왔으면서도 우리말은 혀가 잘 돌지 않는다고 능청을 떠는 꼴불견도 있다. 아무리 급하거나 바빠도 혼자로서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나라- 광활한 지역에서 누구라도 차로 픽업하여주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못한다. 콜택시를 부른다는 일도 한두번이지 쉽지 않다.
더구나 밤 12시- 자정에서 새벽까지의 이동은 상상하기도 싫다. 총성(銃聲)이 울리고 굉음(轟音)과 폭주, 헬리콥터와 비상싸이렌이 울리는 다운타운은 아예 히스페닉계들의 범죄온상이다.
자유와 번영을 구가(謳歌)하는 민주주의 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큰 곯치거리가 바로 범죄이다. 금발미녀 연속살인사건 의 범인은 무려 11명이나 살해하였다고 뉴스가 나간다.
니그로들이 설치며 쏘다니는 밤거리는 히스페닉제왕국이다. 이른바 ”맥작“들이 주범들이며 마약과 무기를 휘둘르며 횡행하는 로스엔젤레스에서의 체류와 일정도 어찌보면 긴장과 스릴의 연속이었다.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르는 일도 적지 않았다. 저들에게는 오리엔탈, 특히 코리안은 항시 무언가 지니고 있기에 표적이 된다. 전시는 성황이었다 찾아드는 관객 또한 작품감상보다도 모처럼 해후(邂逅)하여 고국의 사정을 듣고 인정을 나누는 정겨운 만남이었다.
남가주미술협회장인 황하진(작고)내외, 강정훈, 박경섭,김종학, 권증안, 한화랑의 한우식선배주인,전준,고태규,신보남,황규태,민병남, 성신여대 제자인 원난희, 모두 반갑고 고마웁다.
밤이 오면 예외없이 음식점및 주점행각이다. 고급카페 <大虎>에서는 인기가수 조영남의 노래도 즐겼고 시바스리갈,죠니워커레드를 안주도 없이 들이켰다. 무장괴한의 침입을 방지하려고 고용한 자체 경비원들이 무장한 체 문앞에 떡 버티고 섰다.
우리 교포들은 거의 매일 순례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재미시인협회의 전달문, 윤금숙, 박효근,문인귀, 곽상희, 김송희,김문희,이재학,황갑주 시인, 뒤를 잇는 재미작가들은 모국어로 서정적 글을 쓰고 발표하며 재미시인협회 기관지도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었다. 모두 애국자이고 때가 묻지를 않았다.
윤호섭,손광식,호재경,정호섭,원강희, 김광유, 김헌겸,재미 서울고 동기생들의 호의는 일상에 쫓기는 국가. 선진국의 빈틈없는 사회구조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어 내주니 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
의외로 성신대학출신들이 낯선 이 나라에 많이 건너와 영주하고 있음에 저으기 놀랬다. 특히 훗날 방문한 뉴욕에는 동창회가 결성되어 활발히 움직이면서 못난 은사를 초청하고 딸에게도 접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역시 제자는 여자들이 훨씬 더 났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라스베가스 환락과 도박의 도시는 네바다주 모하브사막의 한가운데 서 있다. 13일밤 정확히 새벽 1시 술집을 나서면서 의기가 투합된 것이다. 후리웨이는 10차선으로 기일게 뚫려 있고 젊은 우리들은 기세를 올렸다.
쏘련의 후루시쵸프가 이 도로 규모에 완전히 감탄하였다는 대로를 따라 다섯시간을 내달렸다.
캄캄한 하늘만 보이는 사막을 일확천금(一攫千金)의 환상을 쫓아서 한국의 사나이들이 교대로 운전하며 겨우 새벽 동이 터가는 무렵에 도달하였다.
파라마운트. 힐톤, 그랜드 호텔에서 마지막 씨이자스호텔에까지 누비고 다니었다. 유명배우겸 가수 딘 마틴과 후랭크 시나트라가 노익장으로 노래로 출연한다는 환상의 도시에서 허나 결과는 묻지 않아도 뻐언한 일이다-
네바다와 캘리포니아주의 경계선 초소에서 검문을 받았다. 혹시 식물을 반입하지 않는가해서라지만 차속에 기일게 뻗어 있는 일행을 마음씨 좋은 영감은 싱겁게 웃으며 통과시킨다.
“흥~ 꼴 좋구나, 다 털린체 자는군~”
롱 비취에도 가보지 않을 수 있나요, 부두에 매달린 거대한 퀸 메리호는 그대로 호텔이다. 크루스는 않한지가 오래된 퇴역선이나 유흥장으로 성업중이다. 젊은 연인들이 결혼식을 올리거나 갑판위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우정의 표시로 기증한 거대한 동종(銅鐘)이 있다. 종로 보신각 종과 매우 흡사하다. “월부인생의 나라”
여기서 현찰은 만져보기 힘들다, 크레디트 카드와 체크로 일체를 결제하는 탓이다.
“절대 10불이상 현찰을 넣고 다니지 말것“
평생 살아도 WASP*인 백인들과의 차별은 어쩔 수가 없다는데도 악을 쓰며 이민을 와 팍스아메리카나의 <꿈>을 이룩하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김포공항을 떠날 무렵 쳐주던 박수소리 때문에 다시 되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래서 신사복이나 넥타이는 출국할 때와 모국을 방문하게 될 경우에나 겨우 착용한다는 교민들의 애환(哀歡)이 어린다.
대학동기 서양화가 김종학과 성인극장(Adults)을 찾아갔다.
흑,백인이나 스페인계 미녀들이 몸에 실오라기 한겹도 걸치지 않은체 차거운 불빛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서 몸짓을 해보인다. 던져주는 지폐를 음부에 꽂아넣고서 추잡한 꼴을 보여주며 웃는다.
미국사회의 단층을 들추어보려고 시카고나 뉴욕에 갔을 때에도 일부러 찾었다.
그러나 보라! 록키산맥에서부터 콜로라도주를 거쳐 모하브사막에 물을 길어 옥토를 가꾸는 캘리포니아 도시와 변방정신은 바로 아메리카의 정신이며 “서부개척사”가 아닌가. 시가지 한가운데서 석유가 풍풍 솟아도 시추하지 않고 중동에서 비싼 원유를 사다 쓰는 나라-
겨울이 와야 겨우 비가 내린다는 옛 멕시코인의 눈부신 하늘을 우럴으며 두고온 한국, 서울의 가족을 그린다.
미당시인께서 도착하셨다고 황갑주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서 뵈야지- 출국하기전 서울 댁에 인사를 드렸더니
“나하고 함께 떠나세” 하시던 말씀이 생각 난다.
우리야 세계 어느 구석에 가져다 놓아도 마구 부려도 끗덕 없겠으나 년로하신 서정주시인은 고생이 많으실 텐데, 언어와 식성(食性),기온, 이동할 때 차로 픽업해드리는데도 여의치가 못할텐데... 걱정된다. 황갑주시인은 이민온 지가 퍽 오래 되었다. 집에 초대받아 방문하고는 놀랐다.
2층집에 수영장이 딸리고 정원도 아주 넓고 잘 가꾸어져 있었다.
시에 대한 이야기며 고국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넘쳐나고 있었다. 새벽 동이 틀 무렵까지 미국시의 경향이며 시의 대중화, 한국시인들의 근황을 애기하였다.
T.S.엘리엇, 로버트 푸르스트, 딜런 토마스, 에즈라 파운드, 칼.센드벅 등 저명시인의 시낭송으반을 주면서 서울에 가면 <시낭송의 밤>을 반드시 가진 후에 문덕수시인들에게 나누어 드리라고 신신 당부한다.
시인은 시인끼리 의기가 투합되는 법이다.
나는 그에게 기러기 모양의 금속기물 한 점을 기증하였다.
한잔 또 한잔 술에 취기가 농익어가는 밤이었다.
이런 교민의 역사와 현실가운데서도 간혹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어글리 코리안들이 있다니-
12월 16일 저녁 5시 50분. United Airline에 올라 암흑의 밤하늘을 날았다.
간간히 별을 뿌려놓은 듯한 소도시위를 지나며 3시간여만에 아이오와주 디모인 시공항에 착륙하였다. 미전역에 時差)가 4시간이다.
고요한 시가와 거리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한결같이 시가지 풍경이 포근하다.
미국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손위 동서네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함양호씨는 우리나라 전부통령 함태영씨의 손자가 된다. 그리고 서울고교출신으로 내 선배도 된다. 마냥 착하게 생긴 두내외와 두아들들도 반갑게 만나고 여장을 풀었다.
아이오와주는 땅이 기름지고 검다 평원에 옥수수가 많이 재배되여선지 콘스테이트(Corn State)라고도 불리운다. 그래서인지 아릿다운 아가씨들이나 영감님 마나님들이 한결같이 뚱뚱하고 부드러웁다. 엘리베이터 문을 옆으로 겨우 몸을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란다.
다음날에는 곧장 데반폿시로 달려갔다. 차로 5시간을 함께 달려 몰린과 록아일랜드, 베텐돌프, 4도시가 미시싶피강을 끼고 나란히 있고 강을 사이에 둔 일리노이주와 아이오와는 매우 재미있는 고장이란다. 주의 법이 서로 달라서 여러 가지 아이로니칼핮ㄴ 일도 빚어지는 곳이라고 들었다.
결혼한지 얼마 않되는 아래 처남 홍성수 가족을 만났다. 이화여대 생활미술과를 나온 부인은 고교후배인 처남이 맞선을 보려고 휴가를 얻어 일시 귀국한 무렵에 만나본 적이 있다. 조교로 근무중이었는데 비슷한 처지의 내가 서둘러서 결합에 도움을 준 기억이 난다. 참고로 우리 처가(妻家)는 이북 평안북도 의주에서 내려온 장인내외로 인하여 거의 미국으로 떠나가 살고 있다.
오래전에 귀천(歸天)하신 홍은표 장인내외께서는 로스앤젤레스 공동묘지에 안장(安葬)하셨다. 당신의 집이랑 재산을 모두 교회에 헌납하신 후에 빈 몸으로 훌훌히 돌아가시였다.
자식들이 모두 흔쾌히 두분의 의사를 받아드렸다.
자아~ 이젠 또 떠나야지,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날아가야 하지- 막내 처남부부가 살아가며 우리의 대시인 박남수님 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 최대도시로 가야 된다. 알 카포네의 깽단 출몰로 음침하고 바람 드센 Windy City도시 오헤어국제공항을 먼저 찾아서 간다.
미당과 박남수 두분 원로께서 나를 시인의 반열에 올려주셨다. 20대 뒤늦은 나이에 신문사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서 뽑아 데뷔시켜 주셨고 바이요린 전공하는 따님의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어 뉴욕으로 이민을 가시면서도 마음은 늘 서울에 두고 있으신 터였는데도 경영하시는 청과 가계앞에서의 잠시 해후(邂逅)를 끝으로 당신은 결국 고향에 묻히시지를 못하고 소천하셨다.
이후-
각설(却說)하고 나는 미국에 연관이 적지 않았다.
이런 저런 회의와 세미나,출장,전시행사가 뒤따라 있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연수와 92~93년에 교환교수로도 1년을 체류하였다. 장인내외께서는 이북의 두고 온 고향을 꿈속으로나 그리워 하시다가 이역만리에 한 줌 흙이 되어 묻히셨다. 원혼(冤魂)인들 압록강변으로 떠도실런지~
한민족 동족이면서도 유일한 이산가족의 만남은 아직도 힘들고 가야할 길이 멀다.
30년전에 미대륙, 첫 방문과 오랜 인연이 70대에 이르른 노인으로서 스치는 만감(萬感)이 교체되기도 한다. 어찌 미국과의 유대가 나 혼자뿐이랴만 초기의 체험과 기억을 떨칠 수 없어 기억에서 지워지기전에 다시 한두번으로 요약해보려는 것이다.
사진 <美8軍영내/성신여대 제자들과-스승 장윤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