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의 만리장성 위치로 보다, 진이 당시의 대륙전체를 다스렸다!
문의를 드립니다.
중국의 진나라때 하북,산동,하남 일대를 다 잡아먹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의 위치가 현재처럼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방향으로 잡혀져 있다는 것.(진나라때 수도가 서안)
그러면, 그때에 지나족이 중국대륙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지금의 성씨들(우리 한민족의)의 족보나 무덤이 한반도에 있다는 것.
그 드넓은 대륙을 다 내준 사건들과 연대를 증거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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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이 방금 사무실에서 우리 사장님과 설전을 벌인 내용입니다.
제가 아는게 일천해서 제대로 설명(반박)을 못하고 버벅거려 속이 아픕니다.
어느 분이든 속시원히 증명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참고로 제 메일은 goonton@yahoo.co.kr입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이러시는군요.."틀림없이 진시황도 동이족이라고 할거야 아마",,,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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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不遠人 (2005-12-17 12:51:36)
배달민족인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사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대부분 배달민족과 그 후손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한민족을 동이(東夷)족 이라 한다.
중국인들은 고대 중국의 임금이라 하여 [삼황 오제]를 받들고 있다.
[삼황 오제]는 [삼황] 즉 [태호 복희씨(太호伏羲氏)]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와
[오제] 즉 [소호금천씨(少호金天氏)]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 을 말한다.
그런데 [태호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가 동이(東夷)인이라하는 증거가 자꾸 발견되자 (여기서 동이(東夷)는 배달민족) 이
제는 중국인들이 이야기 하기를 중국 역사는 [황제 헌원씨]부터 시작한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중국의 옛날 책인 <초사>를 보면 '[황제헌원씨]는 백민 (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백민(白民)'이란 말은 옛 중국에서 배달민족(한민족)을 부르던 말이다.
그리고 [황제 헌원씨]는 성이 유웅씨(有熊氏)이다. 즉 '곰'씨이다.
이는 [황제 헌원씨]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곰 토템 부족(곰을 상징동물로 하던 부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호금천씨]등 [5제]는 모두 [황제헌원씨]의 후손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순임금(舜)은 동이인(東夷人)이다.'
'창의(昌意)는 [황제헌원씨]의 아들이다.' '창의(昌意)로부터 7세가 순(舜)이다.'
즉 [황제 헌원씨] - 창의(昌意) - (7대 후손) 순임금 즉 [황제 헌원씨]의 8대 후손이 순임금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황제헌원씨] 와 [순임금]이 동이(東夷)인이고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등도 모두 [황제헌원씨]의 자손이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고대 임금이라 받드는 [삼황오제]는 모두 동이인(배달민족)이라하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사기(史記) 의 리동이국(黎東夷國) 에 보면 "황제헌원씨(軒轅)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구리(九黎)에 천자 치우(天子 蚩尤)가 있었다." 라 한다. 소전(少典)이라하는 것은
사람이름이 아니라 벼슬을 말한다. 마치 지금의 도지사나 군수 같은 것이다.
그럼 당시의 대국(큰나라)는 어디인가. 중국이 생기기 전의 큰나라...
[구리(九黎) = 구이(九夷) = 구한(九韓) = 배달한국]
즉 당시 천자국인 구리(九黎) 에 '천자(황제)'인 [치우천황]이 있었는데
그 나라의 한 '소전(少典)' 벼슬 하는 사람의 아들이 [황제 헌원씨]라는 말이 된다.
"구리(九黎)" 는 "구한(九韓)"의 다른 말인데
구한(九韓)이라 하는 것은 고조선 이전의 한민족 국가인 "배달한국(한웅시대)"이
[아홉 한국(구한九韓)]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고조선은 단군께서 전 국토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가 된다.
말하자면 고구려 백제 신라도 "삼한"을 다시 통합하려 한 것이고
태조왕건의 '(후)고려'도 "삼한"을 부활하고자 한다.)
고조선 전의 우리나라였던 [배달한국]의 14대 한웅 [치우천황]시대에 천자 아래 제후인
[소전(少典)]의 아들인 [황제헌원씨]는 [치우천황]의 반대에 무릅쓰고 독립의 길을 간다.
그리하여 독립에 성공하고 [황제헌원씨]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으로 왕통이 이어진다.
대략 요임금 시대에 이르러 동방에는 [배달국]을 이어 [(고)조선]이 건국되고 중국은
순임금을 거쳐 우임금(역시 황제헌원씨의 후손)시대에 이르러 나라이름을 '하'라고 붙인다.
중국인들은 이 '하나라'를 중국 최초의 나라로 본다. [하나라 -> 은나라 -> 주나라 -> 진시황]
'고사변(古史辯)'은 현대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책이다.
바로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은나라 사람과 동이(東夷)는 같은 민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복희씨], [제준(帝俊)], [제곡고신], [순임금], [소호금천씨], 그리고 [설] 등이
같은민족(동이족)이다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如太호之卽帝俊帝곡帝舜少호之卽설 近人旣得明證]
[설(契)]은 은나라를 세운 <성탕>의 선조. 은나라 왕족은 [설(契)]의 후손이다.
즉 은나라 왕족도 동이족이다. [하나라 -> 은나라 -> 주나라 -> 진시황]
[삼황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禹)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다음에 들어선 나라가 은(殷)나라이다.
일명 상(商)나라라고도 하는데 은나라는 저 유명한 갑골문(甲骨文 - 고대 한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사변'은 고대 중국의 문헌과 근래에 발굴된 유물등에 근거하여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은나라는 그 시조가 알에서 깨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를 갖고 있는데,
고구려,신라,가야의 예에서 보듯이 난생설화는 동이족의 공통된 특징이다.
중국의 정사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제헌원씨]로부터 순임금,우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일한 성姓이며,
그들이 세운 나라의 호칭만 달랐을 뿐이다.』
[自黃帝至舜禹 皆同姓而其國號]
이와같은 기록들을 종합하면 결국 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주로 왕조)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말이 된다.
중국인들이 [삼황] 이라 칭하는 동이인(東夷人)인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등은 실로 성웅(聖雄)이다.
동이족인 그분들은 [고조선] 이전의 [배달한국]의 빛을 우리나라와 세계로 펼치는데 혁혁한 일을 한다.
[삼황오제]는 중국인들의 핏줄의 시조인 면은 적고 (동이인들과 지나인들은 유전자가 많이 다름.)
[삼황오제]는 중국인들에게는 말하자면 '왕가의 시조' '문명의 시조' 라 할 것임
이용하 (2005-12-17 15:02:31)
제가 겉핣기식으로 알고 있는 바로는
시황제가 제국 40년동안 한꺼번에 쌓은 것들이 아니라
후대의 각 제국들이 명멸해가며 개,보,신축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특히나 산동이북의 성은 군사적으로 수성의 의미가 없어요.
단기간의 제국들이 급조해서 쌓은 것들이므로
우리의 치성이나 옹성, 또는 황,내자,내.외성등이 없지요.
현재의 인구와 기술력으로도 15년이상이 걸리는 일입니다.
더구나 지나의 인구가 지금처럼 억대이상으로 급증한 것은
기원후 17세기 이후 구황작물인 고구마가 들어 오면서 부터이니까
기원전의 인구가 3~40년동안 그것을 쌓을려면
군사제국을 유지할 수가 없읍니다.
sumer (2005-12-20 13:38:24)
우선 님의 사장님께서 역사에 어느정도 지식이 있고, 또 한문 해독 능력이 어느정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설복하려고 하지만 말고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게 질문을 해 보세요.
첫째.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수행하고 난 뒤 존속한 기간이 얼마라고 생각하느냐?
그 짧은 기간에 화북에서 섬서성에 이르는 장성을 쌓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한국의 자료를 인용하면 믿지 않을 테니, 중국사람이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자료를 제시하세요.
진장성은 섬서성에서 산서성 중부까지 이고, 그 뒤 조장성,
연장성을 연결하고, 명대에 이르기까지 쌓은 것이 현재의 장성이다.
이것은 북경대교재로 쓰이는 지도에 나와 있지요. 이 사이트 고지도 모음 12번,
태원,북평, 상곡, 어양 중 중간쯤 북경대교재가 나옵니다. ‘전국형세도’지도를 제시하세요.
지도를 보면, 장성은 북에도 있고, 내륙 나라간에도 있지요. 위장성, 초장성, 제장성 등..
이들을 연결한 것이 진시황이니까 모두 진시황의 공으로 만든것이지요.
진시황이 동이라고 이 사이트에서 주장한 것은 못 보았지만,
중국인들이 진시황이 동이족출신이라고 쓴 글은 제가 보았지요.
제가 올린 글 중 '조나라 이적문화'로 검색해 보면 진은 조와 같이 선조가 동이이다.
라고 쓴 기록이 있더군요. 이것은 아마 여불위를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하고..
여불위는 조나라 사람이고, 조나라는 동이족이지요.
둘째, 백제의 멸망시 인구와 조선초의 인구가 얼마인지 알고 있느냐?
그 중 백제라고 알고 있는 충청, 전라도 호구가 조선초 얼마인지 알고 있느냐고?
백제 멸망년대가 언제인지 아는가? 700백년 뒤의 조선인구가 백제보다 적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76만호 중 호당 인구가 평균 4명이라고 보아도 300만 인구가 넘지요. 옛날에는 호당 인구가 더 많았겠지요.
★ 백제 인구
사서에서 백제(百濟)의 인구가 76만호(萬戶)라고 하였는데
근세조선 초기 百濟땅으로 주장하고 있는
충청, 경기, 전라도는 총합 56,003호(戶)에 불과한데 반하여
백제지명이 있는 중화국 산동성(山東省)에서
근세조선 초기와 비슷한 시기인 1491년 인구가 77만호(萬戶)로
백제와 비슷하니 어느 곳에 백제의 수도가 있었겠는가 ?
★ 그리고 아래 구당서의 기록을 제시하여 한번 해독해 보라고 하세요.
구당서 本紀第四 高宗上
四年春二月乙亥,上親策試舉人,
十一月,以中書侍郎許圉師為散騎常侍、檢校侍中。戊午,兼侍中辛茂將卒。
癸亥,以邢國公蘇定方為神丘道總管,劉伯英為昆夷道總管
夏四月戊寅,車駕還東都,造八關宮於東都苑內。癸亥,至自并州。五月壬戌,幸八關宮,改為合璧宮。
六月庚午朔,日有蝕之。辛卯,詔文武五品己上四科舉人。甲午,駕還東都。
秋七月乙巳,廢梁王忠為庶人,徙於黔州。戊辰,度支尚書、同中書門下三品盧承慶以罪免。
八月庚辰,蘇定方等討平百濟,面縛其王扶余義慈。國分為五部,
郡三十七,城二百,戶七十六萬,以其地分置熊津等五都督府。
셋째, 북위와 백제간의 전쟁기록을 알고 있느냐고 질문하세요.
북위가 우선 어디에 있던 나라인지 알고 있느냐고. 북위는 산서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국가지요.
북위와 백제는 한번도 아니고 다섯차례나 큰 전쟁을 치르지요.
백제를 수십만 기병으로 침공하였다가 패한 남제서의 기록을 제시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해 보세요.
중국을 통일하려면 많은 인접국가부터 침공하는 것이 기본이다. 바다건너 백제를 수십만 기병으로
침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비록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래도 이해 못하겠다고 한다면 더 이상 논쟁은 무의미 하겠지요.
-이하는 남제서 기록-
(남제서 권 58 백제전의 기록)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주2)
★ 더 자세한 내용은 2005. 11.4. 운영자님이 올려 놓으신 ‘(1일재게시) 북위를 멸망으로 몰고간
대륙백제의 진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 글은 운영자님의 글에서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