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을 경강상인(京江商人)이라고 한다.
이 경강상인들이 한때 조선의 상권을 흔들었다.
그 상인을 강상(江商) 경강선인(京江船人) 경강인(京江人)이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용산 마포 뚝섬 두모포 등지를 근거지로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운종가(雲從街 현재의 종로)을 중심으로 전국의 상권을
독점적으로 누렸던 시전(市廛)상인을 완전히 밀어냈다.
이들 경강상인들이 시전상인을 제칠 수 있었던 것은 시전상인들의 정경유착,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조선왕조는 개국 이래 도성에 서울 거주민과 관부의 수요품을 대기 위해 도성에 오늘날의 조달청과 같은 시전을 조성했다.
시전상인은 이때 중앙정부와 관계를 맺으며 특권 상인화 되었다.
일정한 시역(市役)을 부담하고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허가받았다.
17세기 후반 시전상인들의 매점과 폭리에 도시민, 민간수공업자 등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들의 횡포로 민심은 들끓었다.
조정도 결국 1724년 시전상인들의 독점적인 상권에 쐐기를 막고나섰다.
1791년 정조때 신해통공을 전격시행하였다.이 통공은 가히 혁명적인 조처였다.
1791년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주창에 의해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했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독점권을 폐지한 것이다. 이 정책을 바로 '신해통공'이라 한다.
이로 인해 일반 상인들이 금난전권에 저촉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결과 정부의 재정 운영상 필요한 육의전의 일부 금난전권만을 존속시키고 나머지 특권적 시전 상업은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이 특별조치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권을 배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조선 후기 한강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이 상권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정부의 세곡(稅穀)과 양반지주층 소작료의 임운(賃運)활동에 종사하던 경강상인들이었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지금의 의정부 근처 다락원장과 송파장의 상인들과 결탁하여
독점적인 상권의 특혜를 누렸던시전상인을 압박하였다.
이들 두 지역의 상인들은 금란전권에 규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 두 시장이 시전에 비해 거리가 멀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소상인들에게는 거리가 장애가 되었다.
이들 소상인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해 비교적 먼 거리에 찾는 소상인들을 유인하였다.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가 바로 양대 볼거리로 두 시장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이들은 도성안에 있던 칠패시장(지금의 중앙일보 근처)와 배오개시장(지금의 광장시장)의 소상인들을 주로 불려들였다.
이들은 금란전권 밖에서 물건을 사다가 시전에서 산 물건과 섞어팔면서 단속의 눈길을 교묘하게 피했다.
원래 모든 물품의 생산자나 지방에서부터 물품을 운반해 온 자가 한양에서 그것을 판매하고자 할 때는
관아에서 인가된 시전에 가서만 팔 수 있고, 다른 데서는 팔 수 없었다.
다른 데 가서 처분하면 이를 난전(亂廛)이라 하여 처벌하였다.
이른바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런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긴급 조처가 나왔다.
정조15년(1791) 신해통공(辛亥通共) 이 나온 것이다.
그후 도성안의 육의전 상인들의 특권이 없어지자 그들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에 비해 오강(五江) 상인을 비롯한 강상들의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경강은 한강 가운데에서도 한성부가 주관하는 광진(廣津)에서 양화진(楊花津)까지의 한양 남부를 끼고 흐르는 부분을 말한다.
용산·마포·뚝섬·두모포 등지가 바로 경강상인의 근거지로서 상업기지가 되었다.
경강에는 조선 전기부터 경강의 나루터에서 사람과 화물을 건네주고
고기잡이·행상 등을 하는 선인(船人)들이 있었다. 이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가 바로 조선 후기였다.
항해술과 선박제조 기술의 발전, 자본 축적 등이 이들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자본 축적을 하게 되는 계기는 국가의 조세곡과 양반들의 소작료를 운반해주는 곡물운반업을 벌이면서부터였다.
조선정부는 일찍이 조운제도를 정비하여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물을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그러나 점차 조운제도가 허구화되고 세곡의 운반에서 사선(私船)의 이용이 늘어났다.
경강상인들은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동원되었으나 나중에는 세곡운반이 생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경강상인들의 항해술은 매우 뛰어났다.
위험한 항로로 손꼽히는 황해도 서해안의 장산곶 일대, 충청도 서해안의 안흥량 등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경강상인들은 배를 직접 만들기도 하였다. 제조기술이 우수하여 운항능력과 적재능력이 높았다.
선박을 만들 때는 정부의 사용기간이 지난 선박을 사서 개조하기도 하고 직접 선재를 구입하여 제조하기도 하였다.
정조 때 한강 위에 주교(舟橋)를 설치하는데 강상들의 배가 동원된다.
정조는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었다.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京江),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倉)별로 분속시켰다.
14년에 주교사(舟橋司)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강상들은 주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권력에 보다 밀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조가 선친인 장헌세자의 묘역인 현륭원 참배하러 가는데 이용하는 주교였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주교를 만드는데 자신들이 소유한 배를 아낌없이 제공하였다.
정조가 봄가을로 화성을 내왕하는데 주교를 이용하고 그 행차가 끝나면 철수하게 하였다.
그 일을 전담하는 주교사(舟橋司)라는 관청까지 두었다.
이 주교사 당상관에 당대의 최고의 실세들이 들어앉았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주교사를 통해 권력층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들 상인들은 권력층과 결탁하여 쉽게 번 돈으로 새로운 상거래 수단을 개발하거나 투자대상을 확대하는데는 소홀하였다.
그 경강상인들도 결국 시전상인들처럼 정경유착의 유혹을 떨처내지 못하였다.
돈으로 양반을 사서 기존의 기득권에 진입해 안주하려는데 집중해 경상상인들도 몰락한다.
경강상인들도 부패권력과 결탁하여 몰락하고만 시전상인으로부터 안타갑게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소중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