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독립형 호스피스 ‘모현의료센터’
정극규 진료원장, 박미영 수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실상 죽음은 인생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소설가 아시모프의 작품 <Bicentennial Man>에서 주인공인 로봇 앤드류는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마지막 절차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완성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절차를, 인간은 막무가내의 두려움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햇살이 가득한 실내
지난 5월말, 경기도 포천에서 모현의료센터(www.mhh.or.kr)가 문을 열었다. 국내에서 처음 호스피스활동을 시작한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관구장 박미영 수녀)에서 건립한 독립형 호스피스병동이다. 19병상과 임종실을 두고 있는 이 의료센터에는 정극규 선생이 진료원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5월 28일 오후 2시, 개원기념세미나를 앞두고 센터 직원들은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다. 새 건물이라 더 환해 보이는 센터는 웬만한 리조트 못지 않은 넉넉한 공간으로, 설계부터 호스피스 환자를 위해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설계를 맡은 상 건축사사무소 김준회 소장은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빛’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병실은 남쪽을 향하고 있고, 병실마다 넉넉한 발코니를 둬 환자들이 마지막까지 마음껏 햇살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동선은 길어졌지만, 센터 전체에 넘치는 햇살은 그런 수고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게 한다.
호스피스 병원의 모델을 제시한다
모현의료센터를 총지휘하고 있는 박미영 수녀(마리아 작은 자매회 관구장)는 2년 전부터 정극규 선생을 센터 진료원장으로 점찍어뒀다. 지난 90년대 중반 캐나다와 미국에서 호스피스 관련 연수를 마치고 미 호스피스완화의학학회(ABHPM) 인정의를 취득한 후 2001년부터 강남성모병원에서 호스피스센터 전담의로 일했던 정 원장은 독립형 호스피스 센터 진료원장으로는 적임자였다.
박미영 수녀의 제의에 “두고 봅시다”하고 말미를 주었던 그는 안양의 한 중소병원 완화의학과장을 거쳐 모현의료센터 진료원장 자리를 수락했다.
모현의료센터에는 월, 수, 금, 오전 10시부터 오후3시까지 진료하는 국내 최초의 ‘완화의학과’ 외래가 개설되어 있다.
주된 진료는 정극규 원장이 하지만, 1973년 포천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고 지난 2000년 영구 귀국했던 메리 트레이시 수녀(혹시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트레이시 수녀는 청년의사 창간호의 이 지면에서 만났던 사람이다)도 다시 돌아와 그와 같이 환자를 볼 예정이다. 외래가 없는 날은 후암동 모현호스피스센터에서 가정 호스피스 방문에 나선다.
“집에서 환자를 돌보는 시스템을 직접 경험하면 환자를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판자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마지막 생애를 보내야하는 사람의 입장을, 들어서만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극규 원장은 그동안 중소병원에서 우리나라 호스피스 실태를 조사해왔다. 중소병원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호스피스 의료진들은 비용 측면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호스피스 갈 정도는 아닙니다”
모현의료센터는 우선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나 있다. 후원활동과 재정적인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모현의료센터에서 호스피스 병원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의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 원장은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 의사 사회에 호스피스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걸을 힘이 있는 말기 환자에게는 “아직은 호스피스 갈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의사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암 환자를 앞에 두면 의사는 주로 검사결과를 봅니다. 암 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작 그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는 모를 때가 많죠. 호스피스 의사가 해야 할 역할은 이 환자의 전체적인 상황이 어떤지, 이런 신체적 문제가 왜 생기는지 파악해서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만한 전문가를 연결해주고, 평온한 마음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의사의 역할은 호스피스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가 받아들여지기까지
지난 2000년, 호스피스가 반짝 사회적 관심을 모은 이후, 5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 원장은 호스피스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정부와 언론이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모현의료센터에는 어디에도 ‘호스피스’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수녀원 부지라 포천에 자리를 잡았지만, 죽음에 관련된 것은 주변에 두지 않으려는 우리나라사람들의 습성상 자칫 지역사회에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될 수도 있다.
“호스피스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중소병원을 호스피스 센터로 만들어야 합니다. 말기암 환자들을 대학병원에서 본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죠. 몰핀 30mg을 처방 받기 위해 두 시간을 기다려서 겨우 1분 진료 받고 30일치 진통제를 처방 받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차라리 호스피스를 제대로 알려서 말기암 환자의 불필요한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호스피스 비용으로 돌리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래서 정 원장은 의료센터에서 환자 진료는 물론 의료계 관계자를 대상으로 호스피스에 대한 강의도 마련할 예정이다. 이제 호스피스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정도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려면 최소한 5년은 지나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품위를 끝까지 지키면서 임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종교를 떠나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이 곳에 와서 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특히 의료진들, 의사 선생님들이 힘들 때 힘을 얻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 됐으면 해요. 물론 도움도 받을 수 있으면 좋구요, 호호.”
박 수녀의 말이다.
마지막 성장기를 잘 보내려면
정극규 원장은 죽음까지 한두 달 남겨두고 호스피스를 찾는 사람들을 만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다가 절망한 채 호스피스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호스피스 대상을, 마지막 숨을 떨굴 일밖에 남아있지 않은 환자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호스피스는 임종소가 아니라 삶을 인간적으로 완성시키는 마지막 요양소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그의 제안이 어려운 일인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마지막까지 환자의 목숨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의사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그 중 일부는 저 세상에 한 발을 들여놓은 환자의 목덜미를 잡아내리는 데 성공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기회와 이 세상에 더 머무를 수 있는 기회. 어느 것이 더 의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이런 고민은 의사들의 몫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
출처 : aica 해외봉사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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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소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