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드리는 많은 기도 중에서 우리의 신망애 삼덕을 길러주는 기본 기도가 있다.가톨릭 기도서에 여러 가지 기도가 수록되어 있지만 여기에서 설명하는 기도는 자주 드림으로써 주님과의 일치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암송할 수 있어야 한다.
성호경
성호경은 매우 짧은 기도문이지만 가장 자주 하는 기도이다. 더구나 입과 손과 마음 즉 나의 온 존재로서 신앙의 근원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고백하고 구원의 도구인 십자가를 표시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서 은총을 비는 기도이다. 손으로 이마와 가슴과 양 어깨를 짚어가면서 몸에 구원의 십자가 표시를 한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내 몸에 표시함은 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임을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께 드러내는 것이다. 입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라고 함은 계시된 모든 교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교리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름으로'하는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하느님을 의지하여 한다는 뜻이다. 결코 나를 위하여, 나 혼자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멘'은 '굳은, 확실한,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이란 뜻이 있는데 기도문 끝에 붙여 그 기도문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강조한다. 손으로 머리를 짚는 것은 내 모든 지혜를 다하고, 가슴을 짚음은 내 모든 정성을 다하고, 양 어깨를 짚음은 내 모든 힘을 다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한다는 뜻이다. 로마 전례에 따라 성호경을 제대로 염하고 십자표시를 긋자면 먼저 왼손을 펴서 가슴에 얹고 '성부와' 하면서 오른손으로 이마[온 우주의 주이시며 지혜이신 성부를 가리킴]를 짚고,'성자와'하면서 가슴[사람이 되시어 사랑을 가르치신 성자를 가리킴]을 짚고 '성령의'하면서 양 어깨[은총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힘이신 성령을 가리킴]를 짚은 다음 양 손을 합장하며 '이름으로. 아멘' 한다. 이때 합장한 두 손의 끝은 약간 하늘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 엄지를 왼손 엄지 위에 얹어 십자형(+)이 되도록 한다.
영광송
하느님은 모든 것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 모든 능력의 근원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천사와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는 모든 존재와 모든 행위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범죄하고 있기에 하느님의 영광에 손상을 끼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상해야 하고 더구나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르쳐주셨으니 삼위께 각각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 후에나 일상생활을 포함한 온갖 활동 후에 영광송을 드리기를 권한다. 특히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다음 영광송을 바친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원히 영광 받으시기를 기원하고 실제로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렇게 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미사 때에는 대 영광송과 전문의 마지막 부분[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으로써 하느님께 우리 모두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 복음 전에는 "주님, 영광 받으소서" 하며 그분의 영광을 구하고, 성찬식에서는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하면서 하느님의 권능과 절대성을 찬양한다.
주님의 기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이기에 '주님의 기도'라 하며(마태 6,9-13;루가11,2-4), 그 안에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 즉 복음이 명백하게 포괄적으 로 집약되어 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공동 체[그리스도인들]의 근본 이념과 염원이 표현되어 있는 기도이다. 초대교회에 서는 신자들에게 성세 받은 자의 특권으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바치게 하였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으로 시작된다. 호칭에 따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이 친히 발음하신 아라메아어로 '아빠'라고 하셨는데 아라메아어의 '아빠'( Abba)는 젖먹이가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아무도 일찍이 하느님을 감히 아빠라 부르지 못했지만 예수님 은 즐겨 아빠라 부르셨고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신 이 특권을 우리도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기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아들로서 당신의 품위에 참여하라는 뜻으로, 또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께 신뢰하고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느끼며 친밀하게 대화하라 는 뜻으로 '아빠'라 부르게 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주님의 기도에서는 '일곱가지 청원'을 드리는데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후반부의 네 가지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이다. 전반부는 세가지로 나누어져 있으나 실은 '아버지의 영광'을 비는 것 하나로 요약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개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를 통해 세말에 완성된다. 그러므로 우선 나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내 안에 하느님이 거 처하시도록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악의 노예가 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왕 권이 하루 빨리 내림하기를 빈다. 즉 하느님의 구세사업이 빨리 완성되어 만천하에 밝히 드러나기를 비는 것이다. 후반부의 네 가지는 전반부에서 청한 것, 즉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한다.
첫째, 우리가 구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즉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다. 결코 부자되기를 욕심내지도 않고 곤궁을 원하지도 않는다. '아빠, 아버지'를 신뢰하고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서 그분의 섭리를 기다리는 위탁의 자세이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란 끼니에 필요한 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영혼의 빵[성체]까지를 가리킨다. 그래서 영성체 전에 반드시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일용할 양식을 부탁하는 청원에는 우리 삶 구석구석에까지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이 스며들어 하느님의 참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영적 물질적 은혜를 청하는 간구가 들어있다.
둘째, '죄의 용서'를 빈다. 우리 구원의 첫째 조건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새 생명을 주는 시작이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시대 즉 용서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우리가 받은 용서를 이웃에게도 베풀 줄 아 는 아량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용서할 용의가 없는 사람은 자기 잘못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빌 자격이 없고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아빠, 아버지'께 당연히 용서를 빌고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마련하신 관계로 되돌아가야 한다.
셋째, 아버지와의 관계를 파괴하는 죄의 전조인 '유혹에 빠지지' 않는 은총을 구한다. 즉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기를 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 유혹이 없을 수는 없지만 유혹에 떨어져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끝 맺는데 이는 모든 악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비는 불안한 어린 자녀의 간구이다. 진리와 행실을 그르치지 않으며 육체적 재난도 당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비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유혹과 악의 세력 앞에서 움츠러들 까닭이 없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시며 생명의 빵과 용서를 베푸시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소리 높여 "아버지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미사 때 주님의 기도의 응송]하며 마음껏 노래하자.
성모송
성모송은 주님의 기도와 같이 자주 염하는 기도로서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찬미와 존경을 드리고 우리를 위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비는 기도이다. 성모송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리아를 찾아온 대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 즉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루가 1,28)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이 마리아 가 예수를 잉태하신 것을 알고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루가 1,42) 라고 인사한 말로 구성되어 있다.
후반부는 성모 마리아의 전달을 구하기 위하여 교회가 만든 기도문이다. 주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 호칭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신 분, 하느님과 일치되어 계신 분,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은총이 가득하시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 분'이시기에 대천사의 지위에 있는 가브리엘이 '기뻐하소서'하며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성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도록 간택되셨으니 이런 인사와 축하는 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었기에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대천사 가브리엘보다 더 분명한 말로 인사하며 '여인 중에 복되시다'라고 마리아를 칭송하였다. 이 인사말에는 자기의 남편 즈가리야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으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고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셨으니 세상의 어떤 어머니보다 행복하시다는 축하의 뜻이 들어있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잉태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구세주가 인류에게 베풀고자 하는 모든 은공을 이미 받은 결과이다. 즉 죄악의 손상을 받지 않은 채 항상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으로 구원된 자의 으뜸이 되었다. 엘리사벳의 인사는 계속된다.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태중에 계신 예수님은 영원히 복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어머니의 복은 아들의 복이고 아들의 복은 어머니의 복일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누리시는 복을 인간인 성모 마리아도 누리시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만이 복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성모 마리아의 아들로서 어머니의 복에 참여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낳으신 예수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즐겨 부른다. 하늘에 올림을 받아 천상 모후의 영광을 누리시는 성모 마리아는 주님과 항상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가장 좋은 은총의 전구자가되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영생과 영벌이 결정되는 순간 즉 죽음에 임할 때 믿음과 겸손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 빌어주시기를 간구한다.
많은 성인 성녀들, 특히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은총 자체이신 구세주를 인류에게 주신 하느님께서 오늘날에도 성모 마리아의 청으로 많은 은총을 주신다고 확신하였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의 어머니로서 또한 은총의 중재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계심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우리가 약하면 약할 수록 우리 어머니신 성모 마리아의 모정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신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특별히 죄중에 있을 때 죄인들의 구원자 예수를 낳으신 성모 마리아께 간구할 것이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를 닮아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할 수 있는 굳은 믿음과 깊은 겸손으로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되게 살며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웃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신경
'신경'이란 말은 라틴어로 Symbolum(표시)이라 하는데 신앙적 교리를 교회가 권위있게 공식 문구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신경을 염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모두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신자의 표시로 신경을 염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님의 기도와 함께 성세성사를 받은 신자의 특권으로서 이 기도를 염하게 했고 이 기도의 내용을 믿는 것은 신자의 의무였다.
모든 신경은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믿음이란 지성을 가진 피조물 즉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믿음은 오관을 통해서 감지할 수 없고 지능으로 밝히 깨달을 수 없지만 말씀하시는 이의 진실성을 보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경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즉 성부, 성자, 성령과 그 업적을 차례로 고백한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배운 신앙의 근본 가르침이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성전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모든 교리가 요약되어 있으며 열 두개의 신앙조항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나는 무에서 유를 지어내시는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나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다.
2) 나는 생명의 근원이신 성신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그분이 바로 나의 주님이심을 믿는다.
3) 나는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모독하고 백성을 현혹했다는 유다인의 고발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의 돌무덤에 묻히셨음을 믿는다.
4)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조들[구약의 성인들]이 구원자 오시기를 수 천년 동안 고대하고 있던 고성소에 가시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음을 믿고, 하느님의 친 아들 이심을 믿는다.
5)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후 40일만에 하느님 나라에 오르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시어 아버지와 똑같은 영광을 누리시며 이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시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
6)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종말에 권능을 가지고 다시 오시어 산 이와 죽은 이 즉 모든 사람을 심판하여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7) 나는 천주 제3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같이 한 하느님이시오, 진리와 생명과 사랑 즉 모든 은총의 근원이신 성신을 믿는다.
8)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고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구원이 될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 되며 세상 종말에 완성될 순례하는 교회를 믿는다.
9) 나는 하늘 나라에 있는 성인들과 세상을 떠나 정화 중에 있는 연옥영혼들 그리고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가족을 이루고 같은 생명을 누리면서 서로 공을 통함으로써 도와주고 있음을 믿는다.
10)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첫째 이유가 우리에게 죄의 사함을 베풀기 위함이요,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하는 권한을 받은 교회가 우리의 죄를 사해줄 수 있음을 믿는다.
11) 나는 죽은 후 육신은 땅에 묻히지만 세상이 끝나는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부활하여 심판을 받게 됨을 믿는다.
12) 나는 육신과 영혼이 다시 결합하게 되면 선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끝없이 누리리라는 것을 믿는다.
사도신경 외에도 다음과 같은 신경이 있다.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 AD381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표현한 신경)
"나는 믿는다. 한 분이신 전능 천주 성부, 하늘과 땅에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께 나신 천주의 외아들이시며, 천주로부터 나신 천주시오,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천주로부터 나신 참 천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으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 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 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 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와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성세를 믿으며, 죽은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아타나시오 신경(Symbolum Athanasianum :4세기의 저명한 신학자 성 아타나시오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표현한 신경)
"누구든지 구원 받으려면 먼저 공번된 신앙을 가져야 하나니, 이 신앙을 굳이 온전하게 보존하지 아니 하는 자는 의심없이 영영 멸망하리라. 공번된 신앙은 세 위에 한 천주시오, 한 천주 세 위심을 믿어 흠숭함이니 위를 뒤섞지도 말 것이요, 체를 나누지도 말 것이로다. 성부의 위 다르시고 성자의 위 다르시며 성령의 위 다르시도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이 하나이요, 영광이 같으시고 위엄도 같이 영원하시도다. 성부 그러하시면 성자도 그러하시고 성령도 그러하시도다. 성부도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자도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령도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성부도 무한하시고 성자도 무한하시고 성령도 무한하시며, 성부도 영원하시고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도 영원하시도다. 그러나 영원한 분 셋이 아니요. 다만 영원한 분 하나이시며, 또 창조되지 않으신 분 셋이 아니며 무한하신 분도 셋이 아니요, 오직 창조되지 않으신 분도 하나이시며 무한하신 분도 하나이시로다. 또한 성부도 전능하시고 성자도 전능하시며 성령도 전능하시나 전능하신
분 셋이 아니요 전능하신 분, 다만 하나이시며, 성부도 천주시오, 성자도 천주시오 성령도 천주시로되 천주 셋이 아니라 다만 천주 하나이시며, 또한 성부도 주님이요 성자도 주님이요 성령도 주님이로되 주 셋이 아니라 오직 주 하나이시로다. 위마다 각각 천주시며 주님이심을 고백해야 하나 천주 셋이라거나 주 셋이라고 함은 공번된 신앙에 어긋남이로다.
성부는 결코 지음을 받지도 않으시고 창조되지도 않으시고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께 지음을 받지도 않으시고 창조되지도 않으시고 다만 성부로부터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지음을 받지도 않으시고 창조되지도 않으시고 태어나지도 않으시고 다만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시도다. 성부 셋이 아니요 성부 하나이시며, 성자 셋이 아니요 성자 하나이시며, 성령이 셋이 아니요 성령이 하나이시로다. 또한 이 세 위에 선후도 없고 대소도 없고 오직 세 위 함께 영원하시고 서로 같으시도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세 위에 한 체이시고 한 체에 세 위심을 반드시 믿어 흠숭할 것이며, 구원받으려는 자는 삼위 일체에 관하여 이와같이 믿을 것이로다.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심을 충실히 믿어야 할 것이로다. 바른 신앙은 천주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주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함이로다. 천주이심은 성부의 본체에서 영원으로부터 나 심에서요,사람이심은 모친의 본체에서 세상에 태어나심에서이다. 그는 참 천주 시오, 영혼과 육신을 갖추신 참 사람이시로다. 천주성으로는 성부와 같으시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시도다. 천주시며 사람이시나 둘이 아니요, 다만 그리 스도한 분이시로다. 천주시며 사람이시나 둘이 아니요, 다만 그리스도 한 분이시로다. 한 분이심은 천주성이 변하여 육신이 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인성을 취하여 천주성에 결합하심으로써이며, 참으로 한 분이심은 본체의 혼합으로써가 아니라 위가 하나이심으로써이다. 참으로 한 분이심은 본체의 혼합으로써가 아니라 위가 하나이를 이룸이로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고성소에 내리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육신과 함께 부활하여 자기 행위에 대하여 셈바치리라. 선을 행 한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고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로 가리라. 이것이 공번된 신앙 교리로다. 아무라도 이것을 충실히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리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밖에도 다른 신경이 많이 있다.
고백의 기도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으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나, 하루를 살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많이 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이웃에게 끼친 누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한다.
죄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게 하고 세상살이도 무질서하게 만들어 불행을 초래하며 나아가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혼자만의 숨은 행위라 할지라도 이웃과 관련이 없는 죄는 없다. 따라서 무슨 죄이든 하느님의 영광에 손상을 끼치고 하느님의 분노를 사고 하느님의 은총을 감소 혹은 단절하여 하느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한다. 더 나아가 내 안에는 하느님 대신 악이 자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촌각을 다투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고백과 통회가 필요하다. 이 통회와 고백을 도와주는 기도문이 '고백의 기도'와 '통회의 기도'이다.
고백의 기도는 미사 중의 참회예식[제 1 양식]때 사용하는 기도문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겠다. 이 기도에 담긴 뜻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시어 나의 마음속까지 알고 계신 하느님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며 나의 성장을 도와주고 있는 형제들에게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애덕을 거스렸고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며 생활하였기에 이를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범죄하게 된 원인을 어느 누구의 탓으로 돌려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죄 한 나 자신을 미워하고 스스로 내 가슴을 치면서 뉘우칩니다. 하지만 나는 죄인으로서 감히 하느님 대전에 용서조차 빌 면목이 없으니,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은총의 전달자들은 나를 대신하여 나를 위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 빌어 주십시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간구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의노를 거두시고 죄를 사하시어 은총 중에 살 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십시오."
미사 중에는 고백의 기도를 마땅히 해야 할 것이지만 죄를 범한 후에나 하루를 반성한 후, 혹은 고백성사 전에 이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로운 용서를 청할 것이다. 그리고 통회의 기도도 함께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통회가 요구된다. 진정한 통회에는 진실한 고백과 새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결심이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통회는 "나는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요한 8,11)는 용서의 말씀을 듣게 한다.
통회의 기도
이 기도에 담긴 뜻은 다음과 같다.
" 하느님, 당신의 피조물인 나는 당신의 뜻에서 벗어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께서는 나를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희생시키는 크나 큰 사랑을 베푸셨고, 온갖 성사와 말씀과 은총으로 나를 당신께로 이끄시려 하 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외면하고 게으름과 사욕과 세상의 유혹에 빠져 당신을 배반하였습니다만 이제 나의 잘못으로 당신께 누를 끼쳤음을 깨달아 뉘우치며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제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을 알고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깊이 깨달아 나에게는 죄 사함의 길이되고 당신께는 나로 인해 손상된 당신의 영광과 위엄을 되찾도록 보상하기 원하오며 진선미의 근원이신 당신만을 사랑할 것과 또 다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것을 굳게 결심합니다. 이 결심을 깨뜨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 당신과 함께 영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의 은총으로 도와주십시오."
통회의 기도는 죄를 범한 후, 하루를 반성한 후, 고백성사 때 드림으로써 완전한 통회를 발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 주님의 사랑과 은총지위를 되찾을 것이다.
삼덕송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하느님 편에서는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자비 즉 은총이고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이다. 그래서 이 신망애를 향주삼덕이라 하고 줄여서 삼덕이라 한다.
덕은 어떤 선을 되풀이하여 행함으로써 생기는 좋은 습성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이에 거스르는 행위를 했을 경우 두렵고 괴롭지만 덕을 실천하면 기쁘고 편 안함을 느낀다. 반대로 덕이 없는 사람이 덕을 실천하려면 어렵고 힘이 들지만 덕에 어긋나는 행위는 쉽게 행한다. 그러므로 덕을 쌓으려면 처음에는 어렵고 힘이 들지만 계속 노력하면 기쁨을 느끼게 되고 덕을 실천하기가 쉬워진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것 이기에 완덕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계속 노력해야 한다.
향주삼덕은 성세성사를 받을 때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으로서 한 번 받음으로 영구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 덕행을 닦아 나가기에 힘쓰며 더 큰 덕을 주 시도록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삼덕송을 바쳐 믿음, 희망, 사랑의 초자연적 덕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하겠다.
신덕송
신덕이란 인산의 지혜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공으로 주심으로써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진리의 근원이시고 그르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느님은 속이지도 속을 수도 없는 분 즉 진실하신 분이시기에 그 진실의 권위로써 계시하신 진리를 성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는 것이다. 진실의 권위로써라 함은 사랑과 품위와 기적으로써 진실함을 드러내어 믿게 하심을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가르치기를 원치 않으시므로 갖가지 방법으로 계시된 진리를 성교회에 맡기시고 성교회로 하여금 이를 가르치게 하셨다. 그리하여 성교회는 성서와 성전의 관리자가 되었고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그르침이 없이 가르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것처럼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진리로 받아 들이고 믿는다.
망덕송
망덕은 우리의 소원인 영원한 생명 즉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모시면서 사는 삶을 갈망하고, 이를 진정으로 원하고 청하며 신뢰로써 계 속 바라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이 태양을 향해 살 듯이 모든 존재는 하느님을 향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진실됨을 믿기에 한낱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둔다. 즉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라게 된다. 하느님은 진실되고 능하실 뿐만 아니라 성실과 자비의 근원이시므로 주께 진정으로 바라고 믿는 우리를 저 버리지 않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약속하신 바를 어김없이 지키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과 또 이 은총의 결과로 인간에게 허락된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자비하셔서 은총을 베푸시지만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 은총을 받아 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자주 하느님께 구원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이고 굳은 믿음과 신뢰로써 영생을 향해 살아야 할 것이다.
애덕송
애덕은 신덕과 망덕의 결과이며 모든 덕의 중심이고 완성이다. 우리가 하느님은 진실하시고 모든 희망을 채워주시는 좋은 분이라 믿고 바랄 때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
하느님은 진선미 자체이시고 만물의 근원이요 목적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마 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최상 최대로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몸 같이라는 말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베푼다는 뜻이다.
"믿음, 희망,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1 고린 13, 13 참고).
봉헌의 기도
세상에는 많은 피조물들이 있으나 사람만이 하느님께 의식적으로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존재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내셨으니' 나도 하느님께 사랑을 드림은 마땅한 일이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기쁨과 진선미를 함께 나누시기 위해 나를 내시고, 나에게 아름답고 신비스런 육신, 그리고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는 불멸의 영혼을 주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대로 나를 지어내셨으니(창제 1, 26-27 참고)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나의 품위를 지키고 하느님을 더욱 닮아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 주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주를 위하고'[섬기고], 또한 나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된 이웃이 완성을 향해 성장하도록 사랑으로써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겠다.
'주께서 주신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 사용하고자 고스란히 주님께 바친다. 자신의 뜻과 편의와 이익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산다는 것은 희생이며 고통이지만 이와 같은 삶은 분명히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봉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찬미의 제 물'이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봉사의 제물'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행위는 물론 온 존재가 찬미와 봉사의 제물이 되도록 아낌없이 바쳐 하느님께서 '어여 삐 여기시어 받아들이' 시도록 해야 하겠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 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라고 한 마리아의 대답은 가 장 완전한 봉헌의 자세요 기도이다.
이 완전한 봉헌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 안에 잉태되어 사람이 되게 하였다. 우리는 곧잘 내 생명, 내 재능, 내 소유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모 마리아
와 같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살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떤 환경에서 나를 어떻게 쓰실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봉헌의 기도는 그 내용이 매우 함축적이어서 '가톨릭 주요기도문' 전체 내용의 요약이며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봉헌의 기도에서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시기를 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전능하신 분이며 또 모든 것을 차지하실 분이라 인정하고 모든 것을 드린다. 받는 사랑에서 보답하는 사랑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드린다고 해서 하느님께 보탬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봉헌을 어여삐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이 봉헌의 기도를 바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고백성사로 다시 태어난 후에, 하느님을 더 가까이 느낄 때, 혹은 새로운 사 명을 받았을 때 이 봉헌의 기도를 드릴 것이다.
자신을 하느님의 것이 되도록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큰 영광이요 기쁨이다. 드림으로써 참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봉헌 기도문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것이다.
예수성심 봉헌문
가정, 단체, 사업체, 성당 등을 예수성심께 봉헌하고 우리가 하는 일에 강복하시고 함께 하시기를 비는 기도문이다[가톨릭 기도서 참고].
성모성심 봉헌문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우리의 생명과 소유물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의 법규를 충실히 지킬 것을 서약하는 기도문이다. [가톨릭 기도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