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교반의 봄은 황황히 왔다가 속절없이 떠나간다. 영강 기슭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벚꽃은 고작 며칠을 온전히 머물지 못하고 꽃 진 가지에 파릇한 애잎만 남긴 채 꽃비 되어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붉은 빛 감도는 가지에 갓난 강아지 눈뜨듯 새파란 싹들이 살포시 돋아나고 있다. 저리 쉽사리 지는 꽃을 보노라니 그 무슨 기운이 내 속을 빠져나가는 것 같아 몸도 땅으로 내리는 꽃잎과 함께 가라앉는 듯하다. 허전도 아니요, 허망도 아니요, 허무도 아닌 아릿하고 아련한 느낌이 꽃잎이 가지에 머물렀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두고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봄은 아직도 우리의 것이다. 우거진 솔숲 사이에, 절벽 바위 틈 에 한창 눈부시게 핀 진달래는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진홍, 담홍, 진분홍, 연분홍, 갖가지 명도와 채도의 빛깔을 저 가녀린 가지 어디에 간직해 두었다가 철 맞아 저리 찬란하게 뿜어낸단 말인가. 산에는 진달래뿐만 아니다. 산벚꽃, 산복숭아꽃, 산살구꽃, 산매실이며 온갖 산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온 산이 바야흐로 찬란한 화원이다. 붉은빛, 하얀빛, 분홍빛, 푸른빛이 서로 섞이고 어울리어 현란한 빛깔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오히려 두렵다. 저리 흥성스러운 잔치의 끝자락에서 또 얼마나 서운해 해야할 것인가. 저 산에 봄이 떠나는 날이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고 한 김영랑의 그 '찬란한 슬픔의 봄'이 될 것도 같아 가슴이 미리 아려진다.
또한 그러나 나에겐 아직 기다릴 봄이 있다. 집은 작지만 마당 넓은 사택
에는 수령이 십수 년씩은 다 넘었을 듯한 여러 그루의 큰 나무들이 있다. 물푸레나무, 앵두나무, 느티나무, 호두나무, 모과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산수유, 엄나무, 감나무……. 먼저 사택을 거쳐간 사람이 별스레 좋아했음인지 은행나무는 여러 그루가 있다. 물푸레나무와 호두나무의 가지 끝에는 이제 막 새잎의 싹이 돋으려하고, 느티나무는 잎이 제법 많이 자랐다. 단 한 그루 작은 앵두나무는 잎이 피기 전에 벚꽃을 닮은 하얀 꽃잎을 먼저 피웠다. 밤나무는 아직도 봄이 온 걸 모르는지 채 지지 않은 마른 잎새와 꼬투리를 그대로 달고 있고, 은행나무에는 청춘남녀의 얼굴에 돋은 여드름 같은 새잎의 싹이 도돌도돌 달려 있다. 줄기 곳곳에 가시를 달고 있는 엄나무는 가지 끝에 애순을 제법 많이 내밀어 놓았고, 감나무는 이제사 봄이 온 걸 눈치챈 듯 뾰족뾰족 새싹을 내밀고 있다.
옛날 서당의 회초리로 많이 쓰이어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큰절을 했다는 물푸레나무, 붉은 열매가 숫처녀의 어여쁜 입술 같아 귀염을 받는 앵두나무, 시원한 그늘로 뭇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느티나무, 열매의 고소한 맛이 구미(口味)를 즐겁게 하는 호두나무, 날카로운 가시가 귀신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엄나무, 잎도 열매도 껍질도 줄기도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은행나무, 오색오행(五色五行), 오덕오방(五德五方)을 모두 갖춘 예절지수(禮絶之樹)로 나무 중에 으뜸으로 꼽히는 감나무…….
이 나무들이 꽃 피고 잎 피는 절서(節序)는 다 달라도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꽃 피울 것은 꽃을 피우고 잎 피울 것은 잎을 피울 것이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봄날을 따라 싹이 튼 잎들은 점점 자라 무성한 자태를 이룰 것이다. 그리하여 봄이 빚어내는 신록의 계절은 우리들에게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 잎 크게 자라 푸르러 짙은 그늘을 짓는 어느 날, 그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을 차리고 한가로이 앉을 것이다. 검은 흙 그대로인 마당에 피어있는 민들레며 꽃다지며 제비꽃을 보기도 하고, 푸른 나무의 기운을 흠뻑 마시기도 하고, 나뭇잎 사이의 파란하늘로 눈길을 뻗쳐 올리기도 하면서 무르익은 봄 하루를 즐기리라. 그 때 내 옆엔 피천득의 수필집이나 노천명의 시집이 있어도 좋고 막걸리 몇 잔쯤 있으면 더욱 좋다. 오월, 그 신록의 노래를 음미하다가 두어 잔의 술을 마시고 잠들어도 좋다.
"당 나라 때 순우분(淳于芬)란 사람이 어느 날 술이 취해 집 앞 느티나무 밑에서 쉬게 되었다. 괴안국(槐安國)에서 왔다는 사신을 따라 그 나라로 갔다가 국왕의 사위가 되었고 남가군수(南柯郡守)로 임명받아 임지에서 이십 년을 보냈다. 전지(戰地)에서 적과 싸워 패하였고 공주마저 죽자 쓸쓸히 돌아오는데 깨어나니 꿈이었다. 느티나무 밑에 텅 빈 개미굴이 있었는데 왕개미 한 마리만 남아 있었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되어도 좋다. 인생이란 어차피 변전 무상한 것. 지금 내가 마성의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도 무상한 인생 행로 중의 하나이리라. 희로애락이 얽히고 설키는 가운데 우리네 삶이 엮어져 나가는 것이거늘, 삶에 허무가 있기로 더욱 단련될 수가 있고, 사랑에 이별이 있기로 더욱 정열적일 수가 있을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사이에 마당의 물푸레나무며 느티나무 잎새가 신록으로 푸르러 그 그늘 아래 내가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잎은 아직 무성해져 있지 않고 파랗게 돋은 싹들이 지난밤 내린 비로 더욱 파래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찬란한 신록의 계절이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 올 것이다. 저 아래 남쪽 나라보다 조금 늦을지라도 맑고 싱그러운 얼굴로 내 삶의 터 마성을 찾아 올 것이다.
기다림의 봄, 그것은 아직도 마성의 봄이자 나의 봄이다.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릴 것이 있어 행복한 봄이다.(200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