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서울생.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뉴욕 소재 사회과학대 학원에서 제 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1년 6월 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을 통해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극이었다고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널리 밝혀졌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서른이던 1985년부터 1998년 마흔네 살이 될 때까지, 13년 2개월 동안의 황금같은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후였다.
'내 인생을 내 의지로 내가 바꿔 나갈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젊은 시절, 무기징역 선고는 날벼락 같은 것이었고 그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살아온 길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연히 교도소 벽에 도배된 <가톨릭신문>의 천주교 순교사를 읽고 자신 또한 분단된 국가ㅢ 희상자 또는 순교자라는 생각에, 열세살 어린 나이에 고문을 견디다 순교한 유대철 성인의 세례명인 베드로을 우리말로 바꾸어 바우(Bau)라는 이름으로 종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60일동안의 모진 고문과 추가징역도 두려워하지 않고 난동을 부린 죄로 온몸과 팔마저 묶어 가두는 두 달간의 징벌방 생활로 체험한 두 번의 죽음. 당시 하염없이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노래를 부르며 기도했지만, 그는 신으로부터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 좌절되자 그는 고정된 인격신을 넘어 모든 것에 편재한 하느님을 추구하게 되었다. 도가사상은 그런 생각의 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사소한 물건이나 벌레, 풀 같은 존재들이 신령스런 존재, 생명을 가진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감옥 산에 야생초 화단을 만들어 100여종에 가까운 풀들을 심어 가꾸며 징역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옥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었다. 감옥은 더 이상 그에게 투쟁의 장소가 아니라 존재를 실현하는 곳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 이후 많은 문제들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지원이 들어오고 외국으로의 서신 왕래가 허락되어 영국 펜클럽 명예회원 자격으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마침내 1998년 오랜 영어 생활에서 풀려나 전남 영광에서 농사를 지을 때, 노르웨이 국영방송(NIR)이 찾아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타리를 제작, 방영하여 노르웨이 전역에 알려지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1999년부터 2년 동안은 유럽에 머물며 영국의 임페리얼 대학에서 생태농업을 공부하면서, 변화하는 세계의 모습과 유럽의 대안공동체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이즈막 그는 활발한 저술과 강연 와중에 청년시절부터의 오랜 숙원이었던 생태공동체의 실혐에 온 열정을 쏟으며, 2001년부터 현재까지 생태공동체 연구모임(http://www.commune.or.kr)을 이끌고 있다. 저서 <백척간두에 서서:공동체 시대를 위한 명상>(사회평론, 1993)과 세계 공동체 탐방기인 공저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한겨레, 2002), 역서 <가비오따스>(말, 2002)와 논문 <대체 농업의 상호비교에 대한 연구: 자연농업을 중심으로>가 있다.
현재 지난 2년 동안의 유럽 체럼을 바탕으로 인권과 생태문제의 연관 속에서 정치, 사회구조, 인간관계를 재조명하는 '유럽기행'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