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
손잡고 중국 올 때가 다섯살이던 네가 벌써 이렇게 어엿한 중학 2년생이 되었구나.
너는 기억이 안 나겠지만, 중국 오는 페리호안에서 이것저것 신기한 듯이 폴짝폴짝 뛰면서 새로운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층 부풀어 있던 너를 보던 아빠.엄마는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할 겨를이없이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깨뜨린 유리잔 값을 치루느라 진땀을 뺏단다.
몇개월 동안의 호텔생활에서 너는 모든 중국사람들의 히로인이었단다. 유모차에 네 동생을 태우고 온 호텔로비를 휘젓고 다닐땐, 모든 호텔직원들이 너의 추종자이고 보디가드였던 걸 기억하니? 그당시 너는 깨끗한 용모에 잘 다듬은 머리.브렌따노상표로 기억난다 마는 어디서도 눈에 띄이는 참 멋있는, 쩐빵(眞棒)이었지. 그당시 주위에 한국인이 없어서 너의 제일친한친구는 모든 호텔의 형아.누나친구뿐이었지. 너는 의도하지 않았고 또 동의 안 할지도 모르지만,너는 한국을 모르는 모든사람들에게 한국 아이들에 대한 첫인상의 모델이 되어버렸단다.아빠는 얼마나 뿌듯하고 기분이 째졌는지 넌 꿈에도 상상치 못할거야.
기억나니? 너는 남들이 조금만 받들어 주면 금새 으시대는거. 그래서 무례히 굴어서 아빠가 한국식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깎듯이 인사해야 한다고 호통치니까, 까만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며 "응-"한마디만 하고 후다닥 뛰어가서 아까하던 놀이를 끼득끼득거리면서 계속할때, 아빠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렇겠구나 하고 걱정을 했단다. 아빠가 잘못 생각한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랜시간이 필요없었지. 다음날 너는 사람을 만났을때 깎듯이 하는 인사뿐 아니라,더해서 공손한 자세로 말을 듣고, 두손으로 물건건네고, 조용히떠들지않고,뭘시키면 투정을 안부리고<예>하고 얼른 시킨일을 하는것을 보고, 아빠가 얘기안해준 예의까지 차릴줄 아는 너의 총명함에 아빠는 그만 흠뻑 반해버리고 말았단다.
기억하니? 네가 초등학교 2년일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외국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월요일 국기계양식때 학생대표로 구령을 했던일 말이야. 그얘기를 듣고 아빠는 울 뻔했단다. 외국인으로서 장하다고 선생님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칭찬을 받았었니. 덕분에 중국학우들이 많은 괴로움을 당했겠지만……..아빠는 너의 그 멋있는 일들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단다. 중국학우들 속에서 꿋꿋이 경쟁해내는 너의 멋을 말이야…. 아빠도 너를 본받고 싶었단다.
그런데,요사이는 많이 변했더구나.목이 너무 뻣뻣해 졌더구나. 옷도 그게 뭐니 아줌마에게 자주 빨아달라고 하질않고……세수는 그렇게 하기가 싫니? 이빨은 하루세번은 많더라도 두번이라도 꾸준히 닦으면 안되니? 왜 새옷은 그리 안 입을려고 하니? 초등학교시절때까진 아빠가 어느정도 이해 할려고 했단다. 아빠가 다 적어 놨는데,네가 잃어버린 시계가 여섯개가 넘지 아마…..꼼꼼한네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것을 아빠는 다 알고있었단다.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들어올땐 네가 넘어지지 않았다는것도 아빠는 다 알고 있었단다. 그렇게 힘들었니?
너한테 컴퓨터를 사줄때,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타크래프트를 까는 일이었지. 그당시 네 중국학우들 중에 스타크래프트를 아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지 아마..그래서 친구들을 집에 엄청데리고 와서 네가 신이나서 열심히 설명하며 게임하는것을 보고는 그렇게도 좋을까 생각했단다. 엄마는 네 친구들이 돌아간뒤 방에서 발냄새를 제거하느라 혼줄이 났지마는…………..한국에서 그 비싼 게임책을 수십권 싸갖고 와서는 밤을세워 책대로 하는라 끙끙대는 너를 보며, 공부도 저리 재미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단다.
네가 말했지."아빠.이제 나 스타크래프트 도사가 되었어. 모르는게 없어.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해.."라고.. 여름방학때 한국갖다와서는 또 네가 말했지."아빠.한국에가서 사촌형아랑 PC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했는데. 형아가. 할 줄 알아?하길레 우리학교에서 제일 잘한다 했거던. 그래서 같이 게임을 했는데. 난 하나도 못해보고 멍청하게 구경만하다왔어. 한국에는 무기와 전술이 엄청 많아. 하나도 뭔 말인지 못알아 듣겠더라" 라고…...........
그래.용아!
중국에서 생활하느라 잃어버린것이 있다 하더라도,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는것 또한 많다고 생각한다. 힘이들겠지만, 이제는 한국사람표시를 내고 생활해보렴. 학교갈때 다른애들은 횡단보도를 막 건너지? 너는 신호등을 보고 건너보렴. 친구가 곤경에 처했을때, 모든애들이 무관심해도 너는 정을 갖고 해결해주도록 해보렴. 친구가 잘못을 해도 나하고 상관없다 하지말고, 네가 책임을 한번 덮어쓰보렴. 목에 힘을주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걸어보렴. 세수도 자주하고,머리도 깔끔히 다듬어 보렴. 엄마처럼 보는사람마다 웃으며 인사를 해보렴. 한국에 한번씩 갈때마다 유심히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고난뒤 꼼꼼히 적어와 보렴. 아빠가 다른건 몰라도 한국친구들 뒤지지 않게 하는일에는 하나도 안 아낄게. 얼마전에는 네가 보고싶다고 해서 사온 책을 너는 보지도 않고 처박아 놓지 않았니? 너는 모를거야, 호그와트의 퀴디치경기에서 해리포트가 순식간에 스니치를 낚아채는 그 통쾌하고 신나는 경기를 말이야..... 네가 아빠에게까지 일푼이라도 따져 계산하는것은 버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언젠가 네가 좀더 크면 이런얘기도 들려주고 싶구나.
남자로 태어나서 어디를 가던지, 아무도 없는 사하라 사막에 던져져 있더라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나를 지키고 있으면,한갖 생명이 없는 미물까지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네것으로 만들수가 있단다. 아빠는 너와는 많이 다른 생활을 해 왔단다. 아빠는 초등만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을 8년이나 하면서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공부를 혼자서만 했단다. 그리고도 아빠친구들이 가고싶어도 실력없어 못갈때 아빠는 대학에 들어갔단다. 그것을 아빠는 인생의 첫번째의 전환이라고 하고싶구나. 아빠는 아무리 어려울때도 스스로를 잃어버린적이 없단다. 직장을 십년다니고 중국으로 건너올때를 아빠는 인생의 두번째의 전환이라고 믿고싶구나. 남자는 인생을 살아갈때 몇번의 전환점을 겪게되는가 보구나.그때 평소의 나를 간직하고 있으면 어떤 전환점이라도 두려움이 생기지 않고 용기있게 추진할수 있는것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싯점에서 주저하고 있다는것을 아빠는 잘알고있단다. 네가 얘기 했듯이 중국은 "외국"이란다. 외국이란 내국이 있다는 말일것이야. 내국은 한국이란다. 네가 크서 중국에서든.아프리카 오지든, 사하라 사막이든, 아마존의 정글에 있던 변할수 없는 일이란다.
자신을 키우거라. 네만이 간직할수있는 "나의 잠재력"이 충만할때.네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던 아빠는 안심이 된단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확고히 인식할때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고귀한 너만의 향내를 잃지않게 된단다. 그리고.멋을 키우거라. 네 할아버지,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네게 준 멋을 말이다.
2002-03-12. 화요일.안개자욱.
너를 걱정하는 아빠가..늦은밤에…
첫댓글 감동이네용..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다시한번 가슴에 와 닿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