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고전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4대 탈해왕(脫解王)은 집터를 잘 잡아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 초기부터 국가 경영과 국민의 생활 편리에 풍수지리가 실용화 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자료다. 또한 신라 말에 중국 당나라로부터 들어온 풍수설 이전에 이미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탈해왕(?-80)은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績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는 것을 계림 동쪽 아진포에서 한 노파가 발견하였다. 노파가 궤짝을 나무숲 아래에 가져가 열어보니 가지각색의 보물과 함께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노파가 그 아이를 데려가 이레동안 보살펴 주자 그제야 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이다. 나의 부왕인 함달파가 적녀국 왕녀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자식 낳기를 기도하였더니 7년 후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다. 이에 부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의고 사람으로서 알을 낳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인연이 닿는 땅에 나라를 세우고 가문을 만들라 하면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어 보내라고 하였다. 때마침 붉은 용이 배를 호위해주어 이곳까지 왔노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그 사내아이는 토암산에 올라가서 돌무덤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마침 초승달(반월)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지세가 오래 살 만한 자리인지라 곧 내려가 알아보았더니 이는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그는 곧 꾀를 써서 남몰래 숫돌과 숯을 집터에 묻고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을 찾아가 말하기를 "이 집은 우리 할아버지 때의 집이다."라고 하니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결판을 못 내고 결국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리가 말하기를 "무슨 증거가 있기에 이것을 너희 집이라고 하느냐?" 하니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지방으로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여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보면 알 것입니다."하였다.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阿尼)부인이었다. 남해왕의 아들 노례왕이 세상을 떠나니 중원(中元)2년(서기 57년) 6월에 탈해가 바로 왕위에 올랐다. 결국 탈해왕은 반월성 아래 좋은 집터의 발복으로 왕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