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늘 이야기 속에서 살아왔다. 자식을 낳아 기르고, 먹이를 얻기위해 일해야 하는 삶은 분명히 고달프다. 그런 삶에 의미와 보람을 주기 위해서 이야기가 필요했고 먹고 일하고 자는 시간 외에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기에 즐거움이 필요했다. 또한 남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었다. 남들의 고난을 보며 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극 속의 인물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용기와 희망을 얻기도 한다. 이야기란 육체가 먹을 것을 요구하듯이 정신이 요구하는 먹을 것이었다. 먹이가 부족하면 빈혈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에서 먹을 것 만큼 이야기는 형태를 달리하여 우리들의 주변에 늘 있었다. 이야기의 발달과정은 문명의 발달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주체와 대상은 인간이고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고통받고 안락을 추구하기에 이야기의 기본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민담이나 토속적인 마을의 이야기,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 한 부족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신화등이 있었다. 그런 것들 속에는 이야기의 즐거움 외에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기 위한 도덕이 스며있었다. 민중과 지배층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위해서 그런 신화의 주인공들은 영적인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주인공은 왕, 귀족, 그리고 점점 민중으로 내려온다. 민주화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또한 문명의 발달은 이야기의 형태를 변화시킨다. 신화나 민담은 극으로, 서사시로 ,소설로, 그리고 영화로 변모된다. 산업화는 인간의 소외 현상 뿐 아니라, 소설과 영화라는 서사장르를 만들어 낸다. 소설은 인쇄술의 발달과 시장경제, 도시화, 독서대중이라는 요건이 갖추어지면서 동시에 나오고 영화는 사진술의 발달, 음향효과, 복제문화의 파급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경제성의 조건을 보자. 무대 위의 연극은 고유가치이지만 수많은 대중의 요구에 일일이 답할 수가 없다. 소설은 그보다 훨씬 간편한 서사이지만 언어만으로 되어있어 '보여주기' 라는 예술의 본질에서 영화를 당해내기 어렵다. 사실 영화가 발전된 20 세기에, 소설은 대중성보다 예술성에서 스스로를 지키려 애써왔다. 가장 재미있었고 대중예술의 왕이었던 리얼리즘 소설이 지난 뒤에 오는 모더니즘은 난해함으로 스스로를 지키려했고 대중과 거리를 좁혀보려던 포스트모더니즘도 예날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한다.
이렇게 시간에 따라 서사의 형식과 내용은 달라져오지만 변함없이 요구되는 기본구조는 무엇일까? 세익스피어의 극은 여전히 감동적인 진실을 내뿜고 그때 잘 쓰인 소설은 지금 읽어도 좋으며 지나간 명화는 다시 보아도 여전히 다른 영화보다 낫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관객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감흥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재미도 있고 감동도 주는 것, 적어도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난후 나도 이렇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든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며칠동안 가슴이 뭉클하게 남는 것등, 그러나 이 말만큼 하기는 쉬우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해내기 어려운 것도 없다. 게다가 실천의 문제로 가면 그야말로 막막한 요구가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위 앞선 사람들의 설명에 기댄다. 물론 그 설명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설득력있는 것으로 인정 받았을 때이다. 다양성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그래도 우리를 여전히 지켜주는 것은 확률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1. 서사의 기본 구조
서사의 기본 구조로 두 개의 고전을 고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이론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의 것은 감동과 재미를 주는 구성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위장과 속임수라는 서사의 본질에서다. 앞의 것이 주로 골격의 문제라면 뒤의 것은 그 골격에 빛을 내는 칠감이랄까. 그러면서도 두 개는 서로 비슷하게 맞물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설득력있는 해설로 플롯이 핵심이다. 어떻게 관객을 사로잡고 절정에 이를 때까지 긴장을 고조시켜 가장 극에 달했을 때 방출시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냐. 이런 의미에서 카타르시스는 모든 서사의 오르가즘이다. 그는 이것을 아이러니, 혹은 반전과 발견이라고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반전이란 그때까지의 서사가 방향을 정반대로 바
꾸는 것이며 발견이란 지금껒 알아온 것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반전은 서사의 플롯에 관한 용어이고 발견이란 내용에 관한 용어이기에 결국 '속임수' 였다는 데서 형식과 내용이 일치한다. 여러 가지 인물들이 등장하여 서로 얽히고 문제가 생기며 점점 복잡해지다가 어떤 순간에 숨었던 진실이 드러나면서 결말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플롯은 저자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느냐, 독자가 참여하여 구성하느냐의 차이에 따라 사실주의, 모더니즘등 구별되지만 기본적인 감흥의 틀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아무리 난해하고 흩어진 실험영화도 독자에게 그런 양식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를 암시하고 그런 속에서도 관객이 무엇인가를 합성하여 긴장과 방출을 느끼게 하지 않으면 그는 만족하지 않는다. 감동을 배제하는 극단적인 실험이 당시에는 정치성을 띄지만 생명이 길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관객을 끌지 못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극이 관객의 감정을 자꾸 자극하여 이성을 흐려놓는다고 시인을 추방하라 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달리, 감정이란 그렇게 억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기에 조금씩 방출케 하는 게 오히려 더 낫다고 보았다. 게다가 이상적인 국가를 만는데 극은 민중을 선량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수도 있다. 그가 잘 짜인 극으로 격찬했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은 한치의 군더더기도 없이 한 단계씩 고조되다가 극적인 반전을 통해 발견에 이른다. 테베 시에 재앙이 내린다. 신탁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죄인을 찾아 벌할 것을 명한다. 왕은 범인을 찾는다. 그런데 모아지는 증거들은 수색자가 곧 범인이라는 아이러니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범인 찾기를 단념하기는커녕 그럴수록 더 초조히 재촉하는 왕, 스스로를 처벌하는 결말은 신탁이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운명론과 왕의 자만심이 지나친 게 아니었느냐는 깨달음을 준다. 반전이 주는 놀라움과 함께.
인생이 아이러닉하기에 반전은 공감을 준다. 그리고 속았다는 것이 그렇게 즐겁다. 우리는 늘 속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군두더기 없이 꽉 짜인 구성, 긴장의 고조, 놀라움, 역전, 깨달음, 발견. 이런 것들은 제한된 시간에 최고의 기쁨을 주는 극의 필수적 요소들이다. 선과 악의 갈등에서 선이 이기는 결말은 그것이 비극이냐 희극이냐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서사는 미학과 도덕이 합쳐진 예술이다.
프로이트에게 즐거움과 도덕은 마치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 공존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어릴 적에 맛본 아늑한 느낌, 어머니와 나눈 그 쾌감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 타인과 부대끼며 불안 속에 살아간다. 근원적 상흔으로 자리잡은 상실의 어머니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현실 속에서 갈등과 양가적 감흥을 일으킨다. 창조적인 작가도 그렇다. 그가 어릴 적에 맛본 유희에의 욕망은 사회속으로 들어서며 억압되지만 성인이 되어서 백일몽이라는 환상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 백일몽을 사회가 용납하는 형태로 위장하여 내보낸다. 그가 그려놓은 작품 속의 한 모퉁이를 들여다 보면 아름다운 공주가 그려져 있다. 그 공주를 얻기위해서 겪어야되는 긴 고통과 시련, 사회가 부여한 임무를 다 수행한 뒤에 얻는 보답. 욕망의 대상은 축소되고 긴 시련이 정당화된다. 많은 괴물을 물리치고 힘들게 도달하는 목적지. 쾌락은 현실을 통과하지만 단념되
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위장할 뿐이다. 서사는 인간의 근원적 상실을 다른 형태로 충족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회하고 위장하고 속으면서도 마지막 충족을 위해 가고 또 간다. 죽음이라는
최종 목표다. 소설과 영화는 멋진 속임수를 환영한다. 거의 종말에 이를 때까지 이 속임수는 진
실과 갈등을 일으키며 지속되다가 반전과 발견에 의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프로이트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위장, 속임수, 반전과 발견,
그리고 미학성과 도덕성이다. 영화에서 속임수와 반전을 가장 잘 그린 사람이 알프래드 히치콕
이다.
2. 서사로서의 영화
소설과 영화는 현대 서사의 대표적인 장르이다. 둘 다, 교환가치로서의 이야기, 복제문화시대
의 이야기로서 즐거움과 도덕을 충족시키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소설은 언어로 인간의 상상력
을 자극하여 세상과 삶의 실체를 보여주려 애쓴다. 때로 실재란 도저히 객관적으로 그릴 수 없다
고 야단스럽게 구는 픽션이 있는데 사실은 그것도 실체를 그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무대, 시간,
그리고 인물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서 해방과 자유를 맛보았던 소설도 기술의 발달에 의해 영화
가 나오면서 슬그머니 난해하거나 복합적인 실험으로 도피하고 영화도 갈수록 복합적이 되어간
다. 영화는 '보여주기'라는 서사의 본질을 극대화시킨 것으로, 보고 느끼는 시각과 듣는 청각이 어
우러진 장르이다. 소설에서의 '말하기' 라는 설명과 지시의 기능을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눈이 대
신한다. 어떻게 찍느냐는 그만큼 중요하다. 소설에서 장면과 대화는 영화에서 대사로 나타난다.
소설의 삼인칭 서술은 카메라가 어떤 장면을 위에서 멀리서 조감하듯 찍는 것이고 일인칭 서술은
인물이 화면에서 사라지면서 그가 보는 것만을 그리기에 역동적이 된다. 관객은 그 순간 인물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함께 대상을 보기 때문이다.
소설이 하는 것을 영화가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을 소설이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는 듣고 동시에 보기에 이것을 반대로 사용하여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헤밍웨
이의 소설, {무기여 잘있거라} 는 두 번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원작이 가진 절
제된 감흥 속의 아픔을 제대로 표출해내지 못하고 두 남녀 사이의 멜로 드라마로 전락시켰기 때
문이다. 관객을 속이는 데 실패한 것이다. 감흥이란 절제 속에서 힐끗 드러날 때 극대화 되는 것
이지 알알히 드러나서는 안된다. 원작에서는 맨 마지막 장면, 모든 상황이 주인공의 가슴을 아프
게 만드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울지 않으므로서 독자가 대신 울게된다. 독자에게는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상상력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우회의 기법이다. 원작이 철학성이 깊거나
미학적으로 뛰어날 때 영화로 만들 면 실패하는 수가 많다. 원작자와 같은 수준의 제작자를 요
구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보다 덜한 작품을 뛰어난 제작가가 성공시키는 경우는 많다.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가 두 번 다 헤밍웨이의 실존적 용기를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반면,
1933 년 아카데미 녹음 상과 촬영 상을 수상했던 영화에서는 소설이 하지 못하는 기법을 선보여
인상적이었다. 주인공들인 게리쿠퍼와 헬렌 헤이즈는 여전히 원작과 다른 물컹한 순정파인데 이
때 헬렌 헤이즈가 케리쿠퍼를 그리며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있다. 연인에게 자신이 처한 불우한 환
경을 알리지 않으려고 그녀는 편지에 모든 게 화려하고 잘되어간다고 쓴다. 그러나 이런 음성과
달리 카메라는 낡은 카펫트와 허름한 가구들을 비추인다. 음성을 배반하는 카메라, 듣는 것과 보
는 것이 반대라는 묘한 불일치에서 관객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위장 속에서 힐끗 드러나는 진
실,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런 식의 반어법은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다.
어떤 사물을 직접 보이지 않고 인물의 표정을 통해 관객이 그것을 유추케하는 기법이 있다.
직접 보여주는 것 보다 이렇게 우회할 때 관객은 기쁨을 느낀다. 상상력의 공간이 주어지기 때문
이다.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인물의 시점을 교차해서 쓸 수 있기에 소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한다. 크로즈 엎은 어떤 부분을 강조하거나 자세히 설명하는 효과를 지닌다. 관객은 전지적 시점
에서 전체를 조망하기도 하고 인물의 시점에서 동일시를 일으키면서 이야기를 엮어낸다. 배경음
악의 효과 역시 소설이 못하는 부분이다.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조정하는데 음악은 대단한 역할을
한다.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필버그는 총력을 모아 관객을 울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바이올린 선율을 적절히 이용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쓰인 기묘한 항가리 음악 역시
사막과 이국적인 취향을 풍기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소설이 쉽게 하는 것을 영화가 잘 못
하는 경우도 있다.
<배역의 중요성>
찰스 디킨즈의 유명한 소설, {위대한 유산}은 두 번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흑백 필름의 경우는
성공했고 천연색인 경우 실패했다. 어둡고 안개가 자욱한 비밀스런 분위기가 흑백 화면에 더 어
울렸던 이유도 있으나 그보다 배역 선정에 문제가 많았다. 원작에서 여 주인공 에스텔라는 신비
스럽고 오만하고 아름답다. 한 남자의 생애를 좌우할 만큼 매혹적이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한 두
문장으로 충분하다. 독자는 그런 인물을 주관적으로 떠올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서는 그런 인물을 보여줘야하는데 매력에 대한 취향이 각기 다르기에 인물을 선정하기가 쉽지 않
다. 흑백 영화에서 카메라가 비추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신비롭고 표정은 오만하면서도 아름
다워서 남주인공의 긴 여정에 타당성을 준다. 그러나 그뒤에 만들어진 천연색 필름에서 그녀는
천박하기만 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없었다. 매혹은 단순히 선량한데서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
로 악은 단순히 괴물이거나 추악한 모습을 띄지 않는다. 악이 더 우리를 매혹한다는 것을 상상하
면서 배역을 선정해야한다. 세익스피어의 {맥베드}를 영화로 만든 것을 보면 맥베드 부인이 상당
히 매혹적이다. 남편을 부추겨서 살인을 하게한 여자이니 괴물처럼 사악하리라 상상하기 쉽지만
그렇치 않다. 그녀의 가냘프고 긴 머리칼을 보면 왜 맥베드가 그녀의 말을 들어야만 했던지 이해
가 되는 것이다. 성적 매혹은 선함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자칫 {리어 왕}의 세 딸 가운데 막내
딸 역할을 가장 예쁜 배우에게 맡길 우려가 있다. 그러나 정직하다는 것과 매혹적인 것은 다르다.
햄릿이 잘 생긴 배우보다 어수룩한 배우에게 더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앤토니와 클레오파
트라}에서도 세기의 미녀가 그역을 맞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여주인공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미와 절제를 잃고 사랑의 남용 속에서 흩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극의 감동은
극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 인물에 적절한 배역을 고를 때 일어난다. 무조건 주인공은
예쁘고 악인은 괴물같아야 한다는 단순한 이분법은 재고되어야 한다.
오손 웰즈가 주연하고 감독했던 {이방인} (1946)은 그 해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르는데 탄탄
한 구성 못지 않게 주연 배우들의 연기대결이 인상적이다. 나치 전범으로 신분을 감춘 챨스 (오
손 웰즈)는 미국의 어느 조용한 마을에 와서 그 마을 판사의 딸, 메리 (로렛타 영) 와 결혼한다.
그를 뒤쫒는 FBI 전범 수색원, 에드워드 G 로빈슨. 챨스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그는 갖 결혼
한 청순한 아내, 메리에게 사실을 알린다. 남편을 의심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아내를 이
용해 남편의 본심을 드러내려는 계획이다. 아내의 갈등을 눈치 챈 챨스는 그녀를 살해하려 한다.
스릴러와 러브 스토리가 한데 얽힌 이야기인데 이 삼각구도에서 만약 오손 웰즈가 천박한 악인이
었으면 극의 긴장은 고조되지 않는다. 그의 냉혹한 매력과 우아함이 대단해서 아내의 고통이 진
실로 다가온다. 악(챨스)의 매력이 클수록 선(메리)의 입지가 약해지기에 극의 긴장이 고조된다.
또한 관객은 악인에게 매료될 때 그가 선해지기를 간절히 빌게된다. 오손 웰즈가 로렛타 영을
정말 사랑하는지 아닌지 하는 궁금증은 극의 긴장을 지속시키는 동인이다.
<알프래드 히치콕--정보를 배치하는 법>
영화의 매혹은 인물 선정 못지 않게 극의 구성에서 오는데 알프래드 히치콕은 이 방면의 권위
자다. 위장, 반전과 발견, 속임수, 감동을 그의 대표작, {레벡카} 와 {현기증}에서 알아보자.
영국의 소설가, 다프네 뒤 모리에(Daphne de Maurier, 1907-1989) 의 원작 소설 {레베카}는
이 차 대전 당시 첩보원들이 정보전달에 이용해서 안 읽은 군인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그녀의 대
표작이지만 히치콕이 영화로 만들어서 더욱 잘 알려진다. 원작을 충실히 반영한 이 영화는 히치
콕 특유의 분위기로 1940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콘웰의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나는 맨
델리(로렌스 올리비에) 와 이름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젊은 개인 비서( 존 폰테인). 순진한 그녀
는 부유한 맨델리 저택의 부인이 되지만 그 저택은 아름다운 전 처, 레베카의 흔적으로 곳곳이
물들어있고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도, 충실한 하녀 댄디스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없어 겉돌며 괴로운 날을 보낸다.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음산하게 떠도는 전처의 망령, 그녀
는 전처와 같은 차림새로 남편의 마음을 돌려보려하지만 그의 상처는 너무 깊어 도저히 그녀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외돌아진 저택과 하녀의 증오어린 냉냉한 조소, 로렌스 올리비에의 음
울한 고뇌가 히치콕 특유의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보트, 오두막, 파티복... 화면은 과거의 흔적
을 더듬고, 미세스 M은 남편의 음울함을 레베카에 대한 열정으로 해석한다. 물론 관객도 그렇
다.
그러던 어느 날 레베카의 시체와 보트가 발견되고 맥심은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 둘은 서로
증오했으나 남들의 시선 때문에 위장된 결혼을 계속했다.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진 그녀는 남편
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는 그녀를 죽이기에 이른다. 증오가 극에 달하여 죽어서까지도 그를 살인
자로 만든 전처, "그녀가 이겼어" 맥심은 말한다. 지금까지 미세스 M을 질투에 떨게한 그의 상
처는 전처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라 증오와 죄의식 때문이었던 것이다. 증오를 사랑의 상처로
잘 못 읽는 M, 그리고 관객들, 히치콕의 속임수는 완벽했다. 반전과 발견, 그러나 극은 아직 끝
날 수가 없다. 악인이 승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맥심은 위기에 몰리고 마지막 증언을 위해
레베카가 죽던 날 찾아간 의사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녀가 "말기 암 환자" 였다는 사실을 알아낸
다. 그녀는 자실을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이다. 끝내 전처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는 댄디스는 저
택을 불지르고 두 연인은 행복한 결합을 한다.
댄디스는 레베카에게, 미세스 M은 맥심에게 충성을 바치는 충절극이 두 번의 반전과 발견을
통해 스릴러와 결합된다. 그리고 증오를 사랑의 상처로 잘 못 읽는 과정이 너무도 완벽하여 관
객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물론 올리비에의 음울한 표정과 폰테인의 순진한 질투, 외돌아진 대
저택의 음산함도 위장에 한 몫을 하지만.
흔히 히치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현기증}(Vertigo) 은 특이한 구성의 연애 스릴러다. 사
랑과 스릴러를 결합시키는데 천재인 그는 여기서도 단순히 거친 스릴러로 추락하지 않는 여러 장
치를 사용한다. {레베카}에서 놀라운 반전은 순진한 미세스 M과 관객이 똑같이 맥심을 잘못
읽는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현기증}에서는 제임스 스튜어드와 관객이 똑같이 킴 노박을 잘 못
읽지만 극의 어느 지점부터 관객은 제대로 읽는데 스튜어드만 잘 못 읽으므로서 극의 서스펜스
가 유지된다. 극의 긴장, 혹은 서스펜스란 이처럼 정보를 어떻게 누가 나누어 갖느냐에 의해 지속
된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현기증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하는 전직 형사에게 어느 날 친구
가 미행을 의뢰한다. 아내가 정신이 이상해서 방황하니 뒷조사를 해달라는 의뢰였다. 그는 아름
다운 마들레인의 뒤를 밟으며 차츰 그녀의 처지에 동정을 하게되고 구해주고픈 욕망을 느끼게되
는데 그녀는 첩탑에 올라가 실수로 떨어져 죽는다. 죄의식과 사랑의 상실감으로 정처없이 방황
하던 스코티는 어느 날 우연히 죽은 마들레인과 너무도 닮은 쥬디를 만난다. 그의 간곡한 권유
로 데이트를 약속한 쥬디. 스코티를 따라가던 시점은 이제 쥬디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과
거를 떠올린다. 상속금을 노리고 아내를 살해한 남자가 자신의 살인을 감추기 위해 가짜 아내
를 내세우고 친구에게 미행케 한다. 높은 첩탑에서 가짜가 떨어지는 척할 때 바로 그 아래층에
서 진짜를 밀어트려 죽인다. 아내가 자살했다는 법적인 증인으로서 현기증으로 아래를 못보는
친구를 이용한 것이다. 쥬디는 돈을 받고 마들레인 역할을 했던 여자였다. 관개에게만 보여주는
놀라운 반전과 발견. 이제 정보는 스코티에게만 차단된다.
여기까지 회상한 쥬디는 긴 편지를 쓰고 멀리 떠날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다. 그
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들레인이 아닌 쥬디로서 그의 사랑을 받자. 이제 쥬디와 스콧티의 눈먼
사랑에는 깊은 오해의 심연이 가로 놓인다. 그리고 쥬디를 마를레인의 모습으로 꾸미려던 스코티
는 어느날 마들레인의 목걸이를 쥬디의 목에서 보게되고 그 순간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 분노
로 그녀를 끌고 첩탑으로 올라간다. 친구의 살인음모에 가담한 쥬디를 미칠 듯이 질투하는 스코
티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설명할 틈도 없이 당황한 그녀는 정말로 발을 헛디디며 추락한다. 극
의 후반부는 사실을 모르는 스코티가 어떻게 발견에 이르며 어떤 대응을 하게되는지에 관객의 호
기심이 모아진다. 살인음모에 가담한 두 남녀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랑에 빠지고 목걸이라는
단서에 의해 사실이 밝혀지며 질투에 의해 비극적 결말에 이른다.
극의 서스펜스를 주는 또 한가지 방법으로 카메라가 관객에게만 정보를 주고 극 속의 인물들
을 헤메게 하는 방식이 있다. 스콧트랜드 출신의 극작가요 소설가인 조세핀 테이 (1897-1952)의
소설, {한 푼짜리 촛불}은 1937 년 히치콕에 의해 흑백필름으로 제작된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오
기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젊고 순진한}(Young and Innocent) 이란 제목이었다. 순진한 청년 로
버트가 젊은 처녀 에리카의 도움으로 범인을 찾고 누명을 벗는다는 스릴러다. 두 젊은이들 사이
의 신뢰가 범죄의 단서를 찾는 과정에 의해 조금씩 쌓여간다. 앞에 눈 깜빡거리는 장면 하나가
얼핏 스쳐가는데 맨 마지막에 그가 범인으로 드러난다. 두 남녀가 그랜드 호텔로 범인을 찾아간
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찾나. 히치콕은 우선 카메라를 볼룸의 위에서 전체를 내리비추
며 (track shot) 드럼을 치는 사람에게로 좁혀간다. 초조함으로 눈을 심하게 깜박이는 사내가 범
인임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두 남녀는 찾지 못하고 헤메다가 그냥 호텔을 나가려한다. 바
로 그때 범인이 겁에 질려 발작증세를 보이고 걸스카웃이었던 에리카는 달려와 그를 구출한다.
그녀는 극의 앞 부분에서도 쓰러진 로버트를 치료했었다. 그순간 로버트를 알게되듯이 그 순간
범인이 눈을 깜빡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히치콕은 처음에 무심코 단서를 주고 어느 시점에서 다
시 그것을 조명한다. 그리고 트랙 셧으로 관객에게만 정보를 주고 주인공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
켜보게 하여 긴장감을 유발한다.
정보를 관객에게만 줄 때는 흔히 트랙 숏을 이용한다. 히치콕의 {오명}(Notorious) 에서 카
메라는 커다란 리셉션 홀을 내리 비춘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잉그릿드 버그
만의 손으로 좁혀간다. 그녀의 손에 든 열쇠가 클로즈 엎된다. 카메라가 관객에게만 주는 진술이
다. 이때 관객은 인물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기쁨과 인식론적 우위에서 인물들을 지켜보게
된다. 그런데 정보를 관객 뿐 아니라 극 속의 특정 인물들에게도 나누면 극의 밀도가 한층 높아
지면서 긴장을 지속시킨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화려한 의상과 서사시적 배경으로 유명할
뿐아니라 주인공의 심리를 묘하게 표출한데서도 흥미를 유발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장면 하나가 프로이트의 원초적 장면처럼 되어 극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동인이 된다.
극의 앞 부분에서 스카렛이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그것을 버틀러에게 들키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관객과 두 인물만 알기에 그이후 스카렛의 내면과 버틀러의 내면을 다른 인물들은 못
읽지만 관객은 읽는다. 왜 두 사람이 서로 빈중대는지 왜 스카렛과 버틀러가 속마음을 털어놓치
못하는지등등. 관객은 다른 인물들이 모르는 두 사람의 빈중거림과 마음 속의 상흔을 알기에 더
잘 이해하고 긴장된다. 이처럼 정보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극의 긴장을 유지 시키고 반전을 낳
는데 아주 중요하다.
도무지 히치콕이 만든 것 같지 않은 실패작이 하나 있다. 1939 년, 영국 시절을 마감하는 작품
으로 {자마이카의 여인숙} 이다. 챨스 로튼과 모린 오하라가 나오는데 두 개의 반전이 있고 구성
이 엉성하다. 18 세기 말 콘웰의 황야에 여인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극. 남파선 약탈자를 잡으
러 온 치안판사가 사실은 약탈의 배후자라는 사실이 극의 숨겨진 동인이다. 그런데 영화에 돈을
댄 챨스 로튼이 치안판사 역을 맡았는데 자신의 대사를 자꾸만 더 넣고 역할을 부각시키는 바람
에 극이 엉망이 된다. 히치콕이 훗날 이렇게 불평한 것을 보면 정보의 차단, 혹은 정보의 절제란
좋은 영화 만들기에서 기본임을 알 수 있다.
3. 정보 절제의 기법--{초록 물고기}와 {센스 & 센서빌리티}
기차가 달린다. 군에서 막 제대한 사내가 달리는 열차의 승강구에서 밖을 내다본다 어디선가
획 날라와서 얼굴을 덮는 빨간 마후라. 영화는 한 석규와 심혜진이 이렇게 만나는 것으로 시작
된다. 돌아온 아들보다 텔레비죤 화면에 더 팔려있는 어머니, 정신박약의 형, 술로 새월을 보내
며 형, 주변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화되어도 그의 집은 여전히 초라하게 허무러지는 옛집이
다. 일자리를 구하던 그는 조직 폭력배 두목의 정부인 그녀를 다시 만난다. 두목 문성근은 그를
끌어들이고 그는 그들이 시키는 짓을 하며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처럼 어머니의 생일에 모
인 가족들은 엉망이 되도록 맞붙어 싸우고, 감옥에서 나온 전 두목에게 시달리는 문성근은 정부
를 받치면서 비위를 맞춘다. 어느 쪽도 희망이 없다. 비정한 세계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돈을 모
아 작은 음식점을 차려 가족끼리 오손도손 사는 것. 그러나 그의 꿈은 목숨을 대가로 하여 이루
어 진다. 대략 이런 줄거리의 영화 {초록 물고기}는 줄거리 중심의 영화라기 보다 이미지 중심의
영화다. 그만큼 화면 전개가 빠르고 상징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사보다 크로즈 엎을 통한 지시
와 오버랲을 통한 병치가 병든 세태를 풍자적으로, 암울하게 비추인다. 사랑이 없는 세계, 아니
사랑이 병든 세계다. 초록 물고기를 잡으려던 어린 시절의 꿈을 이야기 한 후, 두목의 차 유리에
부딫치는 한석규의 옆 얼굴은 오염된 죽은 물고기를 연상시킨다. 반대파의 두목을 죽인 대가는
제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는 비정한 폭력의 세계,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가족들이 음식점을 차리
고 일하는 모습은 그런 냉기를 어느 정도 지운다. 그리고 앞의 거친 욕설들이 더 이상 혐오스럽
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작은 놀라움들의 연속과 함께, 커다란 반전은 한석규의 죽음과 그 대가로
얻어지는 가족의 행복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반전이기는 하지만 극의 내용을 완전히 뒤 바꾸는
것이 아니어서 주제가 무엇인지 잘 잡히지 않는다. 폭력배의 의리? 젊음의 좌절? 병든 사회? 그
런 것 만으로는 어딘지 아쉽다. 그래도 잔인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의리 때문에 보고난 후가 그
리 허전하지 만은 않다. {초록 물고기}는 절제된 기법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
했으나 반전이 오기 까지의 긴 속임수가 없어 구성과 주제가 약해졌다. 반전이란 앞의 기대치를
완전히 뒤바꾸어 새로운 발견에 이르게 하는 충격이다.
가장 전형적인 반전과 발견으로 1996 년도 아카데미 각본 상을 수상한 {센스 & 센서빌리티}
가 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상 7 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 골든 글로
브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19 세기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주연을 맡은 엠마 톰
슨이 긴 시간을 들여 시나리오로 만들었는데 원작을 잘 살리면서도 현대 감각에 맞게 처리했다.
반전과 발견이 충격적으로, 윗트있게, 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앞에 긴 시간의 위장과 절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극 속에서 엠마 톰슨이 연기로 보여주듯이.
딸에게는 유산을 상속하지 않는 법으로 인해 벌어지는 어느 가정의 해프닝을 서사의 핵으로
잡으면서 그런 불합리한 관습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정의 문제점을 함께 짚어 성 차별로 인한 사
회적인 왜곡을 암시한다. 열정보다 상식과 이성이 앞 서는 언니와, 열정적이고 감성이 넘치는 동
생의 사랑을 대비시키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암시한다. 이런 다분히 교훈 적인 내용이 어떤
식으로 짜였기에 관객이 눈을 돌리 수 없게하고 긴장과 유머와 눈물을 자아내는가. 영화는 죽음
의 침상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유언으로 시작한다. 재산을 모두 너에게 상속하지만 새
어머니와 배다른 세 누이동생들에게 돈을 주어 돌봐주라. 그러나 탐욕스런 며느리는 그들을 내좆
는다. 큰 딸 엘리너는 잠깐 올캐의 남동생, 에드워드와 친분을 나누지만 그들의 관계는 올캐의
방해로 이어지지 못한다. 시골에 집을 빌어 이사 온 세 자매, 그 가운데 둘째, 마리앤은 그녀의
소원대로 낭만적인 사랑의 열정에 빠진다. 그러나 윌러비는 돈 때문에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고
비련에 빠진 마리앤은 언제나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던 브랜든의 도움으로 열병에서 회생한다.
빠르게 전개되는 화면, 우회적으로 암시되는 대화 (예를 들어 올캐의 인색함을 여러 장면으로
바꾸어가며 표현한다든지), 수다스럽고 익살맞고 인색한 기성세대들 속에서 젊은이들의 순진한
열정과 인내의 미덕이 대조된다. 돈 때문에 사랑을 잃었기에, 가난한 마리앤에게 변함없이 애정을
바치는 고독한 브랜든, 유산을 받지 못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약간 우둔하지만 성실한 에드워
드. 그들이 돋보이는 것은 그만큼 천박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뮈니뭐니해
도 극의 압권은 마지막 반전과 엘리너의 연기이다. 에드워드에게 숨겨둔 약혼녀가 나타나고 둘
이 결혼한 것으로 알았는데 에드워드가 엘리너를 찾아온다. 동생과 그녀의 결혼을 성으로만 얘
기해서 잘 못 알아들은 것이다. 약혼녀는 형이 유산을 잃자 재빨리 동생을 유혹했던 것이다. 뜻
밖의 구애에 어리둥절한 가족, 지금까지 감정을 전혀 보이지 않던 엘리너가 격하게 흐느끼면서
관객은 감동에 휩싸인다. 지금까지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에, 늘 이성적이었기에 그녀의
울음은 그만큼 충격적이다. 엘리너와 에드워드로 시작해서 실컷 딴청을 부리다가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는 기법에 의해 관객은 필연적인 구성이라는 고전 서사의 전형을 맛본다. 극의 앞 부분에
서 나온 장면은 잊혀지지 않고 뒷 부분에서 다시 연결된다.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이 시치미
뚝 떼기가 미학적 속임수이다.
4. 소설과 영화
< 원작과 조금 다르지만 성공한 경우--{서편제} >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는 오빠가 어릴적에 헤어진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주막의 여자들에게
서 조금씩 듣는 이야기로 오빠의 회상과 여자들의 이야기가 섞인 형식을 취한다. 어릴 적에 그가
밭뙈기 사이에서 놀때면 어떤 사내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고 그럴 때면 어머니는 일감을 놓곤
했다. 소리에 미친 그 사내는 아이의 새 아비가 되어 어미없는 두 오누이를 길렀는데 둘 다 소릿
꾼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집을 뛰쳐나오고 동생만이 남아 아비를 섬기며 소릿꾼이 되었
다. 눈 먼 소릿꾼이었다. 소리를 더 잘하게 하려면 가슴에 한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비가
잠 든 딸의 눈가에 독한 약을 묻혀 눈을 못 보게 했다는 것이다. 소리는 가슴에서 한을 풀어내는
것이요, 말이 가장 의도를 담지 않은 것,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언어라는 것이다. 작가가 말에 대
한 탐구를 하던 시절, 잃어버린 말의 원류를 찾던 시절의 글이었다. 영화 {서편제}도 대략 이와
같은 줄거리에 맞추어 만들어 진다. 다만 글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생동감있게 소리를 들려주고
소릿말을 넣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소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한 사내가 사라져가는 문화 유산
을 어떻게 지켜가려 애쓰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악극단과 소리를 비교하기도 하면서 점점 설 땅
을 잃고 몰이해 속에서 고립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성의 뼈대는 물론 동생을 찾는 오빠의 방랑
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이 멀게 된 이유가 작품과 영화에서 조금 다르다. 물론 소설은 작품보다 더
암시적이어서 해석 상의 차이가 날 수도 있다. 허지만 작가는 사내가 딸을 눈 멀게 한데는 소리
를 더 잘 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라고 하지만 실은 모두들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
움에서가 아니겠느냐고 암시한다. 자기 곁에 붙잡아 두려는 것, 결국 딸의 가슴에 한을 심어주기
는 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외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는 암시다. 자신의 한을 옮겨준 것?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는 언어다. 그리고 영화는 사라지는 우리 문화에 대한 향수와 그것
을 지키려는 안깜힘을 보여준다. 강조점은 조금 다르지만 제각기 성공했다. 만약 인간의 내면 성
찰 쪽을 곁들여 영화가 다시 만들어 진다면 어떨까. 소리의 매력을 한껒 부각시킨 것은 영화가
좋았고 복합적인 내면 성찰을 암시한 것에서는 소설이 좋다.
원작을 한층 더 세련되게 다듬어서 복합적인 내면묘사를 더 선명히 하고 역사성도 놓치지 않
은 걸작으로 1997 년도 아카데미 9 개 부문을 수상한 {잉글리쉬 페이션트} 가 있다.
< 원작을 더 잘 살린 경우--{잉글리쉬 페이션트} >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열 아홉 살에 캐나다로 이주한 시인이요,
소설가인 마이클 온다치 ( Michel Ondaatie, 1943-)는 1991 년 소설, {영국인 환자}(English
Patient) 를 발표했다. 다국적 배경을 가진 작가의 분위기를 바탕에 깔고 탈 식민주의적 암시를
지닌 이 소설은 이듬 해 부커 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아마데우스}를 만들었던 안소니 밍겔라가
각본을 쓰고 감독했다. 원작은 열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서술의 시점이 다양하고 응집력이 약해
얼핏 읽으면 무엇을 말하려는지 쉽게 오지 않는다. 이 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의 어느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죽음을 앞 둔 환자와 그를 정성껒 보살피는 젊은 여자 간호병, 한나의 이
야기다. 여기에 어느 날 한나의 아버지 친구였던 카라바조가 나타나 그녀를 도와주고 인도 출신
공병, 킵이 합세한다. 서술은 전쟁의 상처를 각기 가슴에 지닌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신원이 불확실한 환자가 자신의 과거를 서술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영화는 이렇게 조
금 추상적이고 난해한 서술을 응집력있게 모으면서 원작의 주제를 더 선명히 부각시켜 놓았다.
그러나 각본과 감독을 맡은 밍겔라가 원래 섬세하고 수준 높은 재 창조자여서 영화는 그리 단순
하지 않다. 그는 영화 속에서 독특한 서술 양식을 선호한다.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서술자를 등장시켜 그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모짜르트의 생애를 조명한 {아마데우
스}에서도 서사의 초점은 기이한 생애를 살다간 천재 음악가에게 보다 그의 천재를 알아보지만
그와같은 천재가 될 수 없는 궁정 음악 대신의 욕망과 질투를 함께 보여준다. 신이시여, 왜 나에
게는 천재를 알아보는 혜안은 주셨는데 천재가 될 수 있는 재능은 안 주셨습니까 라는 그의 애소
는 천재가 되지 못하는 많은 평범한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소설
로서 그를 매혹한 것도 서술양식이 바로 환자의 회상을 통해 전쟁과 사랑의 문제가 전달되기 때
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지뢰로 순식간에 친구를 잃은 한나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온몸
에 화상을 입고 정체불명으로 그저 영국인 환자로만 알려진 환자에게 자신의 외로움과 아픔을 쏟
는다. 전쟁 이전에 카나다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경험을 지금 환자에게 다 쏟는 것이다. 폐허
가 된 수도원에 남은 단 두 사람만의 삶, 몰핀으로 삶을 연장하는 환자의 과거와 현재의 일이
오버랲되어 펼쳐진다. 항가리의 백작으로 사하라 사막의 지형을 탐험하며 지도를 그리는 영국 지
리학회의 임원 올마시가 그의 이름이다. 사막은 이 영화에서 상징이다. 아무리 인간이 선을 그어
놓아도 하루 아침에 모래바람으로 지워지는 곳, 그곳은 국경을 만들 수 없는 곳, 그레서 임원들도
다국적이다. 그곳에 어느 날 영국 항공 사진사 클리프튼 부부가 도착한다. 신혼인 그들은 원래 친
구 처럼 자랐기에 남자는 여자의 감흥에 세심하지 못하다. 독신의 노총각, 올마시와 아름답고 매
혹적인 유부녀, 캐더린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원작에서 온다치는 이 부분에 많은 서술을 할애한
다. 영화에서도 캐더린이 모닥불을 피운 한 가운데서 가이우스왕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묘사된
다. 왕은 아내의 아름다운 육체를 자랑하고 싶어 충신 가이우스에게 몸을 보게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왕비는 가이우스에게 내 몸을 보았으니 내게 죽던가 왕을 죽이고 남편이 되던가 선택
하라고 명한다. 물론 왕은 죽고 가이우스는 왕비의 남편이 되어 왕이 된다. 이 이야기가 캐더린을
사랑하게 되는 올마시 비극의 근원이었다. "말의 힘은 그토록 큰 것이었어."
우연히 불어 넣어진 욕망은 올마시의 전 생애를 바꾸어 놓는다. 그와 캐더린의 사랑은 마치
{폭풍의 언덕} 속의 사랑을 상기시키듯 열정적이고 절대적이었다. 우연이 낳은 절대성. 절대성
은 우연의 산물. 캐더린은 남편을 두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헤어질 것을 원한다. 헤어진 이
후 올마시가 보여주는 질투와 증오. 그런데 여기서 밍겔라는 극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이 둘의
운명적인 사랑을 또 다른 커플, 한나와 킵의 사랑과 대조시킨다. 사랑하되 거리를 두는 것, 상대
방을 풀어주는 것, 킵은 촛불로 한나를 인도하여 큰 성당의 벽화를 보여준다. 인도인과 영국인의
사랑의 차이인가, 전쟁을 일으킨 국가와 그들이 심어놓은 지뢰를 제거하는 공병의 차이랄까, 결국
캐더린의 사랑은 영국 정보국에 의해 모조리 추적되었고 같은 정보원인 클리프튼은 셋의 죽음을
시도하지만 자신만이 죽는다. 동굴에 캐더린을 남겨놓고 비행기 연료를 구하러 떠난 올마시는
영국 군인 들에게 간첩으로 오인된다. 전쟁이 시작된 초기여서 경계가 삼엄했고 올마시는 캐더린
의 이름을 잘 못 불러 주어 그녀를 구해내지 못한다.
"내가 그녀를 죽였어, 이름을 잘 못 부른 거지." 원작에서도 극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캐더린 클리프튼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영국군은 즉시 그녀를 구출하러 비행기를
보냈을 것이다. 정보원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거의 무의식중에 "나의 아내" 라고 부
르짖는다. 내 여자. 그러나 캐더린 올마시는 지상에는 없었다. 사랑이란 얼마나 소유에서 자유로
울 수 있는가. 올마시의 절대적인 사랑은 한나의 사랑과 대비되어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 암시하
지만 관객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올마시와 캐더린의 절대적인 사랑이었다. "우리는 죽는다." 캐
더린이 동굴에 남긴 마지막 말처럼 카라바조는 그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캐더린과 함
께 죽은 것이다.
사랑의 우연성과 절대성, 질투와 증오, 강렬한 소유욕, 올마시는 영국군이 자신을 믿지 않자
탈출하여 독일군에게 지도를 팔고 동굴로 가는 연료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이 연합군에게 피해
를 입힌다. 올마시를 통해 작가는 묻는다. 누가 국가를 만들었는가. 국가를 초월하여 내 사랑을
구할 수는 없는가. 사막은 국가의 경계를 지우는 곳인데 이곳마저 국가사이의 소유대상으로 변한
다. 식민주의는 소유욕에서 나온다. 영국은 얼마나 많은 나라에 자기 이름을 잘 못 붙였던가. 영
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통하여 식민주의의 문제, 다국적 상황
의 문제를 암시한다. 이야기를 마친 올마시가 몰핀 캡슐을 쓰러트리고 그것을 한데 모으며 한나
가 눈물을 터트릴 때 관객도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킵과 헤어진 한나는 올마시의 아픔을 누구
보다 이해하고 이둘의 사랑을 지켜본 관객은 또 자신의 설음을 보태서 운다. 이 지상에서 왜 사
랑은 지되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지금까지 소설과 영화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원작을 바탕으로한 영화는 창조자의 철학적
깊이와 감수성에 의해 무한히 재 창조될 가능성을 지닌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소설이냐 영화냐
가 아니라 잘 만들어진 작품이냐는 물음이다. 이제 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소설 못지 않은
암시적 기법으로 사상과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곳에 까지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