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소재는 시를 쓰고자 하는 이에게 감동을 준 것 -사물, 현상 등-이라면 어느 것이나 좋다.
그러나 일반적인(평범한) 감동은 시를 쓰고자 하는 이에게 시상(詩想)이나 시정(詩情), 시흥(詩興)을 일으키지 못한 채,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이 감동을 준 사물이나 작용, 현상 등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무한히 잠재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시정과 시적 흥미를 느끼게 된다.
즉, 시의 소재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어느 하나 시의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다만 그 많은 소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표현하여 자신의 시 속에 용해시키느냐가 문제다. 시는 바로 소재를 어떤 관점과 의식에서, 어떤 가치관을 드러내기 위해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바꾸어 말하면 소재를 '발견'하는 노력과 의식에 따라 시는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2) 소재의 발견은 의식이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밀린 흙은 밀린 쪽의 흙이 되었다
<불도저> 장원상
위의 시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장난처럼 보이는 이 행위적인 시는 소재의 발견과 동시에 한 편의 시가 완성되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첫행부터 마지막행까지 모두 다 읽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시이다.
이 시를 시로서 자리매김 하려한 시인의 의지는 마지막 행에 있다. 그러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이 끝 행으로 해서 시를 시로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시인은 어쩌면 시는 소재의 발견만으로 시가 될 수 없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밀린 흙은 밀린 쪽의 흙이 되었다>는 진술을 통해 힘과 권력, 인간의 세상살기가 다 그렇다는 삶의 진리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어쩌면 많은 독자가 마지막 행으로 인해 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장원상이란 시인이 불도저의 작업을 보고 밀린 흙이 밀린 쪽의 흙이 된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그것은 바로 '의식(意識)이며, 부동산 업자가 불도저의 작업을 보았을 때 땅 값의 상승과 차익을 떠올리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80년대를 살고 있던 시인은 불도저가 흙을 밀어내고 있는 작업광경을 보고 밀리고 밀리는 힘의 이동을 보았으며, 데모대와 전경들의 투석전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2. 시의 소재와 주제의 관계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상아탑』 5호 (1946년 4월호)에 실린 박목월 시 <나그네>
거적장사 하나 산 뒤 옆비탈을 오른다
아-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길이다
산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 간다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주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
시집 『사슴』(1936년)에 실린 백석 시 <쓸쓸한 길>
두 시의 소재는 다같이 '길'이다. 그러나 시 속에 흐르는 정서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일제치하의 시대적 배경이 같으면서도 시의 소재를 다루는 시각은 정반대의 흐름에 있다. 또한 같은 길을 소재로 하면서도 주제 의식은 시대의식을 도외시한 낭만적 주제가 되었거나(나그네), 시대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고통스럽게 그려내면서도 향토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시(쓸쓸한 길)가 대조적이다.
우리의 삶이란 모든 사물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길에 생쥐 한 마리가 등장해도 그것을 무심코 바라보면 그만이지만, 그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한없이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구상 <현대시 창작 입문>).
<생략>
쥐는 점점 납작해졌고
평평해지면서
쥐는 쥐도 아니고, 한 마리도 아니어서
그 죽음의 그림자마저 스러져버렸다.
그저 납작한 것이 한 장
햇빛을 받으며 젖혀져 있었다.
오노 도사브로 <쥐>
위의 시는 누구나 경험했을 길바닥에 깔려 죽은 쥐의 모습을 통해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현대문명의 냉혹함과 비정을 늘 염두에 두던 시인의 눈에 차 바퀴에 깔려 납작해진 종이장 같은 쥐의 시체는 더러움 이전에 현대문명의 희생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인식 세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소재를 달리 해석해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평범한 사람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쥐의 흔적을 보면서 무심할 수 없던 건 시인의 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3. 상상력을 부르는 체험과 관찰
천 년 몇 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 순간을
말,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내리쪼이는 아침
<몽수리>공원에서의 일이었네.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자크 프레베르 <공원>
시의식의 확대를 통해 범우주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시이다. '벤취 위에서 입맞춤을 하는 연인―몽수리 공원―파리―지구―우주' 로 확대되는 상상력이 독자를 자연스럽게 우주적 사고로 이끌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 이토록 크고 넓은 우주적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는 소재가 훌륭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재를 어떤 의식에서 비라보고 관찰하며 또한 상상력으로 표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1968.5.29)
4. 시- 체험의 결과물이다
시는 결국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지지만, 그 이전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시인의 체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를 머리로 쓰느냐, 아니면 가슴으로 쓰느냐, 아니면 몸으로 쓰느냐 하는 구분을 확연히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온몸으로 쓴 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가슴(情)으로 쓴 시'에서 막연한 감동을 공감하게 된다. 이는 천박한 감상주의로 인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명시'라고 들어 온 많은 시들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고운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깃발>
관념적 체험만 있으며, 그 관념도 '왜?'란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없는 막연함이 느껴진다.
읽는 이에게 ' 깃발을 꽤나 어렵게 표현했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뿐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교과서에도 실린 <깃발>에서 비유·상징의 묘미는 얻을 수 있을 망정 시가 지녀야할 내용성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별로 할 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시키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사물을 추상적 의미로 바꾸어 낯설게 하고 있음에 의의를 찾아야 할까? 날아가지 못해 찢기우고 헤지는 색바랜 깃발이 더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가?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 같은 시들이 중·고등학교의 국어교과서를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 시에서 우리는 머리로 쓴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실된 체험이기보다는 '그럴 것이다'란 당위성에서 쓰여지는 시, 어른의 흉내를 낸 시들이 백일장을 휩쓸고 있다.
봄의 소리
새롭다.
꽃잎이
열리는 소리.
나비의
날개 젓는 소리.
봄의 소리
들으면
가슴이 열리고
마음은 훠얼훨
하늘을 난다.
초등학교 6학년 의 시<봄의 소리>
초등학교의 어린이가 쓴 시에도 이처럼 억지 감동의 글이 있다. 어른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심한 이 같은 꾸며진 상상은 상상이 아니라 거짓이다. 상상력과 거짓은 다르다. 상상력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건강함과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하지만(딱지 따먹기), 거짓은 뿌리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듯이,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짐작으로 위장된다(봄의 소리).
딱지 따먹기를 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강원 사북초등학교 4학년 강원식 <딱지 따먹기>,『나도 쓸모 있을걸』1990.창작과 비평사
시는 마음이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시삼백이면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라고 했다. 진실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거짓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쯤에서 뛰어난 독일의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충고 몇 마디를 떠올려 보아야겠다.
①모든 사건은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난다.
②자기 자신 속에 침잠(沈潛)하라
③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캐어라
④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써라
⑤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 속에서 써라
⑥자연에 근접하라. 그리고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고 표현하라
⑦보편적 주제를 피하라
⑧창조하는 자에게는 빈곤도 없다
⑨어린 시절의 풍성한 추억의 보고(寶庫)를 간직하라
⑩자기 자신 즉, 고독 속에 파고 들라
릴케의 이와 같은 충고는 우리를 주눅들게 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시도 하나의 글에 지나지 않으며,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에서 시작된다. 글에 대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충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I. 시창작의 실제
1. 시상(詩想)의 발견
시상(詩想)이란 좁은 의미로써 시를 직접 마음속에 그려내는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상의 시작은 시심(詩心)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심 속에서 싹이 튼 시상은 마음속에 그림처럼 그려짐으로써 시를 일으키는 그 첫 단계가 된다.
여기에서 시심(詩心)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이나 자연의 현상, 인간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서 느껴지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로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슬픔, 고통, 기쁨, 황홀감 등의 일상적 심리상태와는 달리 자기가 일상적 감정으로 느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시심은 시상을 일으키는 텃밭이 되며, 시심의 순수함은 시쓰기의 가장 기본이 된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애틋함을 느끼는 이같은 시심이 풍부해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쉽게도 청소년들이 자신이 지닌 순수함을 계발하고 드러내어 한 편의 글로 표현하는 습관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글을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글이란 어려운 단어나 추상적 어휘가 들어가야만 하는 것처럼 오해를 가지는 경우도 있어 자신이 무얼 쓰는지 조차 분명하지 않은 글들이 쓰여지게 되고, 결국은 글과 자신이 멀어지는 결과가 되고 있다.
시상의 발견은 우연(偶然)이라기 보다는 필연적이며, 수동적이라기 보다는 의지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냥 앉아 있으면 다가오는 것이 아니란 거다. 늘 마음속에 준비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시상도 찾아온다고 할 수 있다.
시상을 맞을 준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자세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가.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자.
관찰이란 이미 자신의 능동적 태도와 마음의 준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평소에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갖추어질 수 있어야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사물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은 '잘 안다'는 것이며, 따라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느냐이다. 시인의 사상과 이념, 그리고 관심 영역에 따라 발견의 깊이와 모습은 달라진다. 자연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에서 바라보면 <나비>처럼 아름다운 시가 된다. 나비가 예쁘기 때문에 예쁜 나비가 앉은 꽃은 당연히 예쁠 수밖에 없다. 꽃이 예쁜 이유는 꽃 자신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예쁜 나비가 앉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나비는 아주 예쁘다.
나비는 날 때도 예쁘다.
나비가 앉은 곳에는
꽃도 예쁘게 피어 있다.
(성주 대서초등학교 4년 한상재 <나비>)
다음의 <감자꽃 1>은 시인의 체험 속에서 발견한 시다. 농삿일에 허리가 휘어보아야 감자꽃이 허리 아픈 꽃임을 안다. 그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찍어누르며 모녀가 오뉴월 따가운 여름 햇살에 감자밭을 매는 모습이 결코 꽃처럼 예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자꽃이 있기에, 농사를 짓는다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 거기 있기에 그 처절한 삶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앞의 <나비>와 그 발상과 관찰이 똑같다. 10살짜리가 바라본 사물과 50세의 시인이 바라본 사물이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앉아 피어도 허리 아픈 꽃
자줏빛 흰빛
서로 물들이며
어머니도 누이도
오뉴월 빛 속에 엎드리면
그렇게 꽃으로 보였다
(이상국, <감자꽃 1>, 시집 『내일로 가는 소』)
나. 상상력을 동원한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감정이나 감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전율할 듯 강한 감동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남이 알 수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감동일 뿐 남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이러한 감동의 표현을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감동을 구체화시키고 이를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글이 되는 것이다.
엄마의 일요일
장마철이 좋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
비가 많이 오면 늘 밭에서 호미질에 모종에 일만 하는 어머니가
쉴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난 늘 비 오는 날은 우리 어머니의 일요일로 정했다.
생전 비라도 안 오면 밭에서 사실 것만 같다.
비가 가끔 많이 왔으면 좋겠다.
(대천 여중 3년, 최선화, 창비아동문고 『나도 쓸모 있을 걸』)
<엄마의 일요일>에서 시적화자는 비가 오는 날 이외에는 늘 밭에 나가 밭일로 하루 해를 다 보내고 쉬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을 쓰고 있다. 가끔 비가 와서 쉬는 날(일요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상상이 있다.
그러나 다음의 <곰팡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저 시커멓게 썩어버린 곰팡이 자국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바라보려는 시인의 상상력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곰팡이
곰팡이를 마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현미경 속
아름다운 흑백의 나선, 벌거벗음을 먹었다
축축한 회색빛 그늘 속에서
주검의 흔적처럼 은근한 냄새, 검은 화약자국
버짐처럼 번지는
저 말릴 수 없는 거부의 몸짓
메마른 세상에 너의 터전을 넓혀라
긴 장마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검게 스미는 불꽃
하나 됨을 위해 소리 없이 일어서야 하리
( 박종헌 <곰팡이>)
다. 늘 보았던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보자.
세상의 모든 글감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모두 다 썼다고 슬퍼하지 말자,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만약에 한정되어 있다하더라도 모양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냄새가 다르며 촉감이 다르다면 그것은 내가 쓸 수 있는 소재다.
즉, 글이란 소재가 아니라, 그 소재에 대한 해석과 의미가 글이다. 따라서 아무리 낡은 소재라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바라볼 때 새로운 의미가 탄생되는 것이다.
다음은 같은 제목으로 쓰여진 시들이다. 즉 소재가 같지만 모두 다른 시이다.
구상(具象)의 강(江) 연작시는 강을 다양한 의미에서 조망하고, 깊은 사유와 관조로 의미를 파악한다. 평등과 겸손, 용기, 자유를 가르쳐 주는 강은 벌써 강이 아니다.
(江) 16.
구상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生成)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구상연작시집, 시문학사, 1985>
신경림 시인은 강을 '울음'이 밴 강으로 보고 있다. 역사 속에서 한없이 울기만 했던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강(江)
신경림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김용택은 섬진강변 시골 분교의 교사다. 그가 바라보는 강물은 어둠의 강물이면서 핏줄이다. 어둠을 씻어주면서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스민 강이다.
강
김용택
겨울 짧은 해 침침하게 진다
저뭄에 홀리고 홀려서
저문 데로 가서 그림자만 부리고
저물어 돌아오면 누가 그대 온 줄 알겠는가
하루를 저물게 하여
강물은 끊임없이 어둠을 실어가
세상을 다 저물게 한다
보아라 어두운 강물에 언뜻언뜻 보이는
강물의 희디흰 뼈
피도 보이지 않는다
저물 때 저물어 가서
저물어 돌아오면 누가 그대 돌아온 줄 알겠는가
소리없이 흐르는 물 가까이 걷는
그대의 기쁨을 누가 알겠는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에
그대 핏줄을 잇고
핏줄 끝을 잡고 나는 풀잎처럼 쓰러져 강이 된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창작과비평사, 1988>
강 1
이성복
남들은 저를 보고 쓸쓸하다 합니다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미류나무 숲을 따라갔기 때문이지요
남들은 저를 보고 병들었다 합니다
매연에 찌들려 저의 얼굴이
검게 탔기 때문이지요
저는 쓸쓸한 적도 병든 적도 없습니다
서둘러 그들의 도시를
지나왔을 뿐입니다
제게로 오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제게서 가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그들의 눈 속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이성복 시인의 <강 1>은 의인화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을 생명 있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모든 것을 씻어주고 거두어가는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동일한 소재라도 바라보는 이의 시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으면 어떤 의식에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재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일이다. 나의 시각에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소재를 발견하는 일은 자신의 몫이다. 소재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시를 쓰는 이의 의식에 달려 있다. 건강한 의식과 건전한 비판 정신, 그리고 사물에 대한 애정은 좋은 시를 쓰는 기본 자세다.
라. 시상의 형상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명령하는 대로 살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말로 표현되고 이를 글로 나타내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발견이나 미적 감동, 깨우침 등을 창작이란 기능으로 다듬어 낼 때, 비로소 시상이 머리 속에 자리 잡는다. 우리가 흔히 '참 표현이 시적이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상의 표현이 언어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상의 머무는 단계에서 체험과 의지, 사고력, 역사성, 사회적 배경 등이 작용하면서 재구성되어야만 한 편의 시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시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는 이러한 재구성의 단계가 분명하며 미적 감동으로 형상화(image) 되었느냐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재구성의 모습은 성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음에서 보듯이 어린이는 자신의 경험을 사실대로 말하고, 소년기가 되면 수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인들은 이를 자신의 경험 세계에 비추어 비유와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청소년들은 단순 수식의 과정에서 상상과 비유의 과정까지 폭넓게 펼쳐지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단계에 도달한 시를 쓰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아동기의 발상으로 시를 쓰는 단계까지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청소년의 정신발달과 괘를 같이하는 것이므로 적절히 아이들의 생활시(어린이시)에서 성인들이 쓰는 일반시로 유도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무너지는 것이 '백일장' 대회란 필요악이다.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의 경우에는 감동보다는 반짝이는 말재주를 뽑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백일장에서 당선작들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성인시 수준의 작품을 뽑게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들의 문학적 성장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으므로 신중해야만 한다.
아래의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는 삶이 없고 관념만 남은 아동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자/ 너와 나/ 해바라기처럼 항상 웃고/ 친구와의 우정, 슬픔을/ 함 께 나누자/ 추억을 만들기 위해/ 김밥을 싸가 뒷산에서 먹고/ 소풍도 간 날/ "친구야, 오늘 재미있었니?"/ 하고 말하면/ 친구는 "어∼"/ 하고 대답한다./ 마음속에 남는/ 나 의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
(2000.6.12일자 강원도민일보 어린이 판에 실린 춘천 ㄴ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쓴 동시)
글쎄? 무엇이 추억 만들기며 마음속에 무엇이 남은 것인지 감이 안 잡힌다. 추억을 만들기 위해 김밥 싸 뒷산에 가서 먹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러니 "재미있었니?" 하고 물어도 "어∼"라는 대답 밖에 더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글에서 솔직한 것이라곤 "어∼"하는 대답뿐이다.
이런 시들이 잘 된 시로 신문에 실리고, 그것을 본 아이들은 시는 '저렇게 써야 되는구나' 하며 선생님의 말 시 지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다. 교실에서 올바르게 시 지도를 하려 해도 주위의 시들이 이런 모습일 때, 아이들은 오히려 혼란을 느끼게 된다. 정말 아이들의 삶이 베어 나오는 살아있는 아이들 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아이들 작품을 선별하는 어른들은 신중해야만 한다.
내 몸집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아주 공갈 사회책
외우기만 하는 자연책
부를 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잘 부러지는 연필 토막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일기장, 숙제장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혼식 점심밥통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얼마나 더 많이 책가방이 무거워져야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집어넣어야
나는 어른이 되나, 나는 어른이 되나?
5학년 학생작품 <내 무거운 책가방>
"나는 이 작품이 아이들에게 감동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아이들의 가장 절실한 생활문제를 그들의 친근한 일상어로 표현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이답지 못한 좀 지나친 표현이 있어 순수한 아동의 작품임을 의심하게 하기도 하나,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 그토록 감동으로 읽는다는 데 있다. 아이들이 감동하는 것은 반드시 반항적인 마음이 나타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솔직한 그들의 일상―아무도 어른들이 시로 써 보여주지 않던 그들의 절실한 생활이 과감하게 씌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아동문학에서 동시에서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고 버림받았던 것이 아동의 생활세계였던 것이다."
이오덕 <模作 동시론>중에서,『詩精神과 遊戱精神』 318-319쪽
아이들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 즉 체험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요 마음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더더기를 덧붙이고 깎고 다듬다 보면 감동은 사라지고 재미만 남게 된다.
생선 비늘이 뛰어
번뜩거리는 바다
노오란 지느러미를 펴다가
그물에 걸려든
해.
바다를 휘감고
퍼덕거린다.
개펄이 묻은
장대로
뛰는 바다를 치면
그 빠알간
해의 아가미 속에서
비린내 나는
햇살이 쏟아진다.
이상현 <풍경>, 이오덕 지음『詩精神과 遊戱精神』255쪽에서 재인용.
이오덕 선생은 이에 대해 "말이 매우 신선하고 매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독자들의 머리 속에 바다의 풍경을 펼쳐 보이는 데 있어서 사물 자체로서 던져지는 살아 있는 말이 못 되고, 적어도 머리 속에서 한 차례 번역을 해야 하는 성가신 과정을 거쳐야 짐작이 되는 이질적인 말의 덩어리, 곧 죽은 말의 조립으로 되어 있다." (위의 책 255쪽)고 지적하면서 감동이 아니라 말재주의 재미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질이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감동은 체험이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는 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세계는 체험(삶)의 세계이면서 솔직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살아있는 세계다. 그래서 시적인 미숙함이 드러나면서도 오히려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이 쓰는 동시는 시적인 완성도는 있을 지 몰라도 감동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이들의 체험 세계에 들어가려는 잘못 된 동시 쓰기의 자세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상현의 동시에서 '생선 비늘이 번뜩거리는 바다' , '그물에 걸려든 해' , '비린내 나는 햇살이 쏟아진다' 등이 바로 그러리란 개연성(蓋然性) 속에서 빚어진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감동이 없는 말장난의 시어가 되고 말았다.
2. 정서의 흐름 따르기
시도 일반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를 시에서는 정서의 흐름이라고 한다. 일어난 감정의 첫 단계(도입)가 주위의 배경과 함께 확장되고(발전), 감정의 극대화(정점-전환)를 이루고 드디어 정리단계(맺음)로 이르는 4단 구성의 흐름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정서의 흐름이 곧 시의 흐름이며, 이러한 단계는 시낭송을 할 때 감정의 상승과 하강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한 편의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감정 상태를 독자는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시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그 감정의 오르내림에 따라 어조의 높낮이를 달리해 읽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의 기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을 들어보면 감정의 높낮이나 어조의 변화가 없어 뜻 전달이 전혀 안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경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시가 가지는 낭송의 부적절함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시인들의 상당수는 시가 여전히 나약하고 애처로움 속에서 읽히고 음미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수되어 시를 낭송해보라 하면 백이면 백 모든 학생들이 예쁘게 애처롭게 읽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과서에 실린 시들의 대부분을 목청을 돋워 침튀기며 낭송할 작품이 별로 없음은 물론, 시는 이런 것이다라는 듯이 한결같이 감정을 내리 깔아야하는 시들이기 때문에 시낭송의 즐거움과 향유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독자들은 이런 시의 감정의 흐름을 1차적으로 파악해가며 시에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정서의 변화나 흐름이 느껴지도록 시를 읽고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시에 담겨 있는 이러한 정서의 흐름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또는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반대로 긍정에서 부정으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정서의 흐름은 시인의 의식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마련이다. 정서의 흐름은 바로 주제 의식과 직결되어 독자의 마음속으로 전달된다. 시적 형상화(이미지)의 모습도 바로 이와 같은 정서의 흐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미당 서정주의 대표시로 꼽히는 <국화 옆에서>다.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4단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1연에서는 시상의 진술이다. 2연에서는 촉발된 시상이 확장되고, 3연에서는 누님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며 감정의 극대화에 이른다. 4연은 정리 단계다.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남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읽은 시인은 불교적 연기설을 떠올리며 형상화에 이른다.
시는 소설과 달리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된다. 비유나 상징의 표현을 사용하는 목적도 바로 이 내면의 정서를 보다 구체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1인칭의 수필이 가지는 고백적 성격과 같으나 수필보다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정서의 변화와 주제 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정지용의 <유리창1>에서 정서의 변화와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1930.1 <조선지광>89호에 발표)
<유리창(琉璃窓) 1>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유리창에 어린 영상은 새의 이미지다. 안과 밖을 단절시키는 유리창 속에서 내다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여전히 유리창 속에 머문다. 시적화자는 열없이 유리창에 어리는 물먹은 별의 반짝임을 보고 싶어 입김 자국을 지우고 지우면서 더 잘 보려한다. 이런 행동은 슬프고 애절한 마음의 행동이다. 여기서 유리창은 이승(밝음,화자의 세계)과 저승(어둠, 죽은 자식의 세계)의 경계이며,투명한 유리의 속성에서 보이듯 서로를 연결시키는 영매적 세계이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 죽어버린 자식은 산새처럼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별의 이미지는 죽은 아들의 이미지와 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의 이미지로 복합되어 있다. 죽은 영혼과의 교감은 격리된 유리창을 통해 가능하지만 유리창을 열 수 없고 다만 '지우고 보거나, 유리를 닦는'행위로 밖에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유리창2>에서는 정서의 변화가 더 구체적이다. 모더니즘 계열의 정지용 시인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밖의 세상은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잣나무는 자란다. 그것은 희망이다. 일제하의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아직 요원하다. 목이 마르다. 나는 유리항아리 속에 갇힌 금붕어다. 목마름을 달랠 물도, 희망의 등대가 될 별도 보이지 않는다. 갇힌 나를 꺼내달라고 외치지만 현실을 꿈쩍도 않는다. 현실과 타협할 수 있다면 이 고통도 사라지리라. 그러나 시인에게 허용될 수 없는 차가운 입맞춤에 지나지 않는다. 쓰라리고 아련한 향기는 멀리 도회의 하늘을 피어오르는 화재의 불꽃처럼 멀리만 있는 것이다.
내어다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 앞 잣나무가 자꾸 커 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쪼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유리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뺨은 차라리 연정스레이
유리에 부빈다, 차디 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서 고운 화재가 오른다.
<유리창(琉璃窓) 2> 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정서의 흐름을 볼 수 있다.
3. 시 쓰기와 고치기
시 쓰기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퇴고의 과정 속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어쩌면 이 과정이 몹시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이 창작의 과정이고 자신을 확인하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다. 고쳐 쓰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간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촉발된 시상을 부여잡고 하얗게 밤을 새우는 날, 비로소 언어의 조탁(彫琢)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다음은 필자 자신의 시 쓰기 과정을 보인 것이다.
지난 해 여름, 방학을 했지만 보충수업은 여전히 실시되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뭐든지 붙들어야만 하는 교사와 고3 입시생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땀을 흘렸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고도 흐르는 땀은 멈출 줄 몰랐다. 앞 뒷문을 열어 젖히고 언어영역 참고서 문제에 나온 김수영에 거품을 물다보니, 아이들은 어느 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렸다. 반 이상의 잠들고 나머지 반은 비몽사몽이다. 칠판 한 쪽에는 'D-99'가 선명했다. 이른 바 수능고사 99일전이란 무언의 압력이었다. 정말 고3교실은 전쟁터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공격 99일전에 이미 패잔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전자식 둥근 시계가 눈에 들어 왔다. 유리는 벌써 오래 전에 없어진 듯 자판이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빨간 초침은 전지가 다 닳았는지 9자를 건너뛰지 못하고 움찔거리고만 있었다. 시침도 ㄹ자로 구부러졌고, 시침도 반쯤 꺾어져 나간 채였다.
고3이란 정말 불가사의의 특수 그룹이다. 그들에게는 초능력이 요구되고 그들에게는 판단이나 청소년의 푸른 삶이 존재하지 않았다. 잠든 아이들과 벽에 걸린 초현실적 시계가 그대로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거의 단숨에 다음의 시를 썼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부러졌을 거다.
또 누군가의 입에서
분침은 부러졌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이리저리 구부러졌을 거다.
지금은 폭염.
아이들은 모두 D-99를 보고 있었다.
훅훅거리는 교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시를 두 번째 고쳐 썼을 때는 1연의 마지막 초침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지 못해 '이리저리'를 고3학생들이 꿈꾸는 S대학의 이니셜로 바꾸어 대학과 아이들의 반항적인 행위를 상징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2연에서는 'D-99'의 상징적 숫자가 타의에 의해 빚어진 일종의 엄포요 압력수단임을 드러내기 위해 ' 눈 앞에 내걸린 D-99'로 바꾸어 썼다.
3연에서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의 뜻이 되어 이미지의 연결이 되지 않을뿐더러 초현실주의 미술가 달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면이 있어 '남은 전지가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시가 되었다. 조금 정리된 듯하지만 아직도 선명치 못한 구석이 있었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거다.
아이들은 모두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었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다. 사실적이지만 구체성은 오히려 살리지 못하고 있다. 시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 만족할 수가 없다. 분침을 익명성에, 아이들은 특수성을 강조했다. 2연에서는 교실분위기를 좀더 구체화시키고, 시계의 고통스러움과 교실의 풍경을 삽입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지 못하는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3연에서 현실을 떠난 교실의 모습으로 이미지화시켰다. 차라리 희극적이던 선풍기를 교실을 들어올리는 프로펠러로 비유하면서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그림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성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구부러졌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특수반 아이들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것이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반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눈알이 새빨갛다
책들만 어지러이 쌓이고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교사의 다그침이 메아리지는
여기는 삶의 변방.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직 시상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3연 구성이 단조로움을 주고 있다. 강조할 부분과 시적 배경이 조화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연과 2연을 바꾸어 '상황 제시- 상징적 묘사- 시상의 전환- 부정적 인식의 끝맺음'으로 4연 구성으로 정리했다. 먼저 1연에 교실 상황과 분위기를 속도감 있고 건조하게 묘사했다. 2연은 시상의 구체적 전개부다. 여기서는 상징의 방법을 썼다. 따라서 굳이 추정적 어미를 버리고 단정적인 어미로 바꾸었다. 3연에서는 지친 시계와 아이들을 초현실주의자들의 식탁으로 시적 전환을 꾀했다. 이어 4연을 1행으로 처리하면서 삶의 변방으로 끝맺음을 했다. 어느 정도 만족한 모습이다. 제목은 아무런 수식 없이 <고3 교실>로 했다. 비로소 주제가 살아난다. 군더더기도 많이 사라졌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 교실.
펼쳐진 책장 위에서
아이들은 고개를 꺾었다.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ㄱ자로 구부러졌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여기는 삶의 변방.
(박종헌 <고3 교실> 1999년 여름)
1) 시를 압축하고 생략하기
시를 쓸 때 감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노력과 끈기, 그리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된다. 상식적인 생각과 관습적인 사고로서는 결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수 없다.
길가에는 벚꽃이 뿌려지고
언제 저버릴지 모르는 벚꽃은
계속 피고, 피고 있었다.
위의 글에서 '길가에는 벚꽃이 계속해서 피어난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다른 요소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분명 벚꽃이 피고지고 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에 쓴 것일텐데 단순한 자연의 현상만이 나타나 있어 왜 이런 시를 썼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을 쓰게 한 것일까? 시는 바로 이러한 이유와 근거마저도 시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시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런 표현을 썼느냐는 되물음에는 묵묵부답이거나 그것이 정서다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를 본다. 마치 시는 적당히 써놓으면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안일한 답변을 듣는 경우도 생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이름 있다는 반짝거리는 시인들의 시에서도 발견한다. 시는 그렇게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길다란 산문보다도 더욱 엄격히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이 시이다.
최초에 느꼈을 그 '무엇'을 찾아내어 시를 빚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잘 빚은 항아리는 보기도 아름답고 그 기능면에서도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 위의 시를 아래와 같이 고쳐보면 어떨까?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을 보면서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매달리고
꽃봉오리가 벙글고.
위의 3행을 여섯 행으로 늘리면서 비유을 통한 이미지화를 꾀하고 있다. 앞의 시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그런데, 시는 압축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길어졌으니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자신이 쓴 글이나 시에서 빼거나 줄여도 내용을 전달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빼야 한다. 물론 리듬의 조화를 위해 남기거나 오히려 늘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한 두 음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압축을 위해 우리는 상징이나 비유 등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벙글고.
이러한 시 고쳐쓰기는 활자화되기 전까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또 고쳐서 보다 완전한 시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활자화가 된 이후에 고치는 경우도 있게 되는데 이를 개작(改作)이라고 한다. 다음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어떻게 개작되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가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가실 에는 말업시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내
아름 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 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고히나 즈러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처음 『개벽』25에 실렸을 때는 오른 쪽의 모습이었으나, 후에 자신의 시집 『진달래꽃』에는 왼쪽의 모습으로 개작되어 실렸다. 이렇듯 시는 끊임없는 퇴고 속에서 다듬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다.
흰 달빛 흰 달빛이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경주 불국사 자하문을 열고 들어서면
달안개 달빛 젖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물 소리 물소리는 청량하게 들려 온다.
대웅전(大雄殿) 절의 대웅전 뜨락에 서니
큰 보살 큰 보살님이 미소짓고 있네
바람 소리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솔 소리 소나무사이 소근거리는 소리로 불어오네
범영루(泛影樓) 절 앞의 누각인 범영루는
뜬 그림자 추녀깃을 들어 올리는 그림자로
흐는히 달빛에 흐릿하게
젖는데 젖고 있는데
흰 달빛 흰 달빛이 내리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불국사 자하문 근처의 밤은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한데 어울려
물 소리. 달빛 안개 속에서 깊어만 가네
박목월, <불국사(佛國寺)> 필자가 늘여 쓴 박목월의 <불국사>
시와 산문의 가장 큰 차이는 같은 내용이라면 길이가 짧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없어도 상상이 되는 불필요한 수식이나 어휘, 조사, 어미 등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생성과 전달, 그리고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언어라고 보아도 된다.
위의 박목월 시인의 <불국사>를 본래대로의 의미와 묘사로 확장시켜보면 오른쪽에 늘여 쓴 시와 같은 모습이 된다. 왼쪽의 <불국사> 원문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오른쪽의 시는 오히려 풀어지면서 상상의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시에서 언어의 과감한 생략은 많은 어휘를 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표현 방법이 된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은 자꾸 덧보태려 하는데, 시는 더하기의 미학이 아니라 빼기의 미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기야. 너는 어디서 온 나그네냐? 보는 것, 듯는 것, 만 가지가 신기롭고 이상하기만 하여 그같이 연거푸 울음을 쏟뜨리는 너는, ―몇 살이지? ―네 살? 어쩌면 네가 떠나 온 그 나라에선 네가 집 나간 지 나흘째밖에 아닌지 모르겠구나!
유치환, <아기>『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동서문화사, 1960
2) 시를 논리적으로 구체화하기
가) 잘된 시
흔히 시평의 자리에서 논리성이란 말을 쓰면 대다수의 시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시가 논문이냐는 반발들을 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는 시어와 시어, 행과 행의, 연과 연의 전체와 부분의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어도 시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이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성이란 시어의 유기적 관련과 짜임(구성)의 체계화, 상징이나 비유의 타당성, 내용과 정서의 필연성을 아우르는 포괄적 언어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시 쓰기는 시인들의 목표이며 시평의 대상이 되는 시의 구조면이기도 하다.
에즈라 파운드는 시를 형성하는 언어에는 운율적 요소, 영상적 요소, 논리적 요소의 세가지가 있다고 했다. 이 세 가지 중 운율과 영상적 요소는 일반적으로 잘 지켜지고 있으나 논리적 요소에서는 우리의 시들이 등한한 것이 사실이다. 운율적(음악적)요소 만을 중요시한다면 음악을 따를 수 없고, 영상적 요소는 미술을 따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논리적 요소가 시의 맛을 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한다. 음악과 회화의 요소에 논리적 요소가 덧보태질 수 있다면 읽을 맛 나는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구상 시인은 우리 한국시가 이 논리적 요소에 등한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의 한국시의 이미지란 거의가 저 시각적(감각적) 심상에 머물러 있다 하겠고, 이지적 정신의 소산이 논리적 심상에 자각적으로 나아가는 시인이 드물다 하겠으 며, 그래서 아마 논리적 심상이란 용어부터 낯설게 들릴 것이다.
이런 논리적 완벽함에 도달한 시들은 우리들에게 시를 읽는 즐거움을 주며, 이러한 시들은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자연스레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는 것이다.. "시는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고 말한 T.S. 엘리어트는 시의 이와 같은 논리적 심상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에 보이는 <제망매가>는 삶과 죽음의 괴리감을 한 가지에 난 나뭇잎과 낙엽으로 파악하고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감각적 이미지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을 피어나는 잎새로, 죽음을 낙엽으로 배치한 비유의 완벽함과 논리적 계산이 개입되어 있다.
생사로 삶과 죽음의 길은
예 이샤매 저히고 여기 있으므로 두려워하고
나 가 다 말ㅅ도 나는 간다는 말도
몯다 닏고 가 닛고. 못 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이른 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딜 닙다이 여기에 저기에 떨어지는 잎처럼
? 가재 나고 한 가지에 나고
가논 곧 모 온뎌.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으 미타찰에 맛보올 내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도 닷가 기드리고다.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제망매가, 월명사, 삼국유사, 양주동 향가 역)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론 님: 사랑하는 사람)
(황진이, 진본 청구영언, 현대어 역)
어디 한 군데 허투루 쓴 게 없다. 그러면서도 결코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다. 솔직한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자연스러움이 있다. 수식도 없다. 다만 <제망매가>에서는 단순하면서도 뛰어난 직유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에서는 추상적 시간을 구체적 이미지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읽는 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도록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고도 격조 높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구상 시인은 "밤이란 시간을 의인화하여 여성 자신의 육체로 공간화한 그 절묘하고 고도한 수법은 얼마나 지적이며 기술적인가?" 고 감탄하면서 고도의 계산된 시의 구조와 시어의 표상을 강조한다. 구상 시인은 장 곡토(1889-1963)의 <직업의 비밀>이란 글에서 '시인은 꿈꾸지 않는다. 그는 계산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흔히들 시를 부정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큰 오해인 것이다." 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시가 가지는 다양한 이미지와 개인의 경험 세계가 쉬이 공감되지 않기 때문이지 엉터리 시는 아니다. 이러한 시를 이해할 때 시의 논리성에 준하여 감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1981년 중앙일보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날, 역 대합실에는 막차를 기다리는 몇 사람이 톱밥난로를 쬐고 있다. 대합실을 감싸고 있는 벽의 유리창에는 돌아가며 난로의 불꽃이 조그맣게 비친다. 기다림의 지루함 속에 자꾸 내다보이는 철로 변 마른 수숫대에도 눈이 내린다. 난로 주위에 모여 동질감을 느끼며 기다리는 사람들. 그 중의 어떤 이는 쿨룩거린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한 줌의 톱밥을 집어 난로에 던진다. 불은 조금 반짝이고 따스한 열기는 주위의 사람들을 저마다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간다. 불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불의 자극이었을까? 시린 손들을 난로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어밀면서 저마다 고향에 가지고 갈 사과 광주리며 굴비 한 두릅을 매만지면서 조용히 머잖아 올 기차를 기다린다. 담배를 피우고, 기침을 쿨룩거리는 사람들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싸륵싸륵 내린다. 소리가 들린다. 눈꽃들의 화음. 그 정겨움. 자정이 넘으면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낯설음을 허물고 서로의 뼛속에 밴 아픔을 공감한다. 간이역에는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열차의 차창이 붉은 단풍잎처럼 창 밖을 스친다. 지나가는 열차 속의 얼굴들도 각자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또 다른 나를 보듯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면서 한 줌의 애틋한 정을 난로 속에 보탠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이런 이야기다. 한 편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 시에서 버릴 것은 없다. 버릴 것이 없다는 얘기는 논리적으로도 합당하다는 얘기다. 바꾸어 말하면 시상과 시어, 그리고 표현이 함께 어우러져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 어느 것을 빼거나 보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시의 배경이 되는 '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공간이다.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는 기차역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이 사평역을 만든 것이다. 인근 나주군에 남평역이 있을 뿐이다. 상상력의 위력과 문학적 진실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그러나 아직 논리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했다. 그래서 위의 시를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분석해 보는 것도 이해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1) 막차는 왜 오지 않느냐?---막차를 타려는 사람은 찻시간 보다 훨씬 더 여유 있게 온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2)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은 어떤 것이냐?---꺽지 않은 수수꽃이 유리창에 비친 것(?) 만약 수수꽃다리를 말한다면 없어도 좋을 시행이기도 하다.
3) 그믐처럼 왜 졸까?---그믐은 심리적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정리되는 시간이기에 지쳐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4) 한줌의 톱밥을 왜 난로 속에 던질까?---그리움을 더 오래 간직하고 떠올리기 위해.
5) 청색의 손바닥을 적셔두고는 어떤 것일까?---겨울날의 차갑게 언 손을 미미한 온기에 쪼이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묘사
6) 왜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각자의 삶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상상과 상념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느라. 바슐라르는 불은 상상력을 일깨우는 원소로 보고 있다.
7) 왜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하는 걸까?---그리움과 서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
8) 낯설음도 뼈아픔도 자정이 지나면 설원인 이유는? ---삶의 고단함도 시간이 지나면 눈이 덮여 하얘지듯 표백되고 정화되므로.
9) 왜 이름을 부르며 한줌의 눈물을 던질까?---그리운 삶의 애틋한 시간들을 하나씩 불러내며 떠올리기 위하여.
등등의 질문과 답변이 타당성 있게 성립된다면 시어의 적확한 사용, 상황의 필연성, 솔직한 정서 표현 등이 갖추어 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위 시에서 '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의 구절에서 희고 보랏빛으로도 보이는 수수꽃이란 뜻일텐데 수수꽃이 눈오는 겨울날에 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잘못일까? 확인할 수 없다.
곽재구 시인의 시들 속에는 패랭이꽃, 감자꽃, 진달래 등등의 꽃들이 상당히 많이 언급되지만 시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의미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수수꽃'은 플랫홈 철로가에 아직 남은 수숫대 위의 수숫대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며, 수수꽃이 유리창에 난로의 불빛과 함께 오버랩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를 유리창에 낀 성애의 모양이 마치 수수꽃 같았기 때문이라면 흰 보라의 색채가 어울리지 않게 된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는 비교적 잘 짜여진 시로 읽힌다. 물론 시에서 완벽이란 없다. 그저 모든 시는 완전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을 뿐이며, 독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황동규 시인은 이 <사평역에서>를 뽑고 난 소감으로 "허황됨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를 다루는 기량과 삶에 대한 끈끈한 진실도 보여주고 있다." 고 했다. 즉, 눈에 보이는 사실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현이며, 그 속에 삶의 진실이 배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시가 된 것이다.
시의 논리적 구체성은 시를 쓰는 순간에는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감정(정서)의 표현이기에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솔직함과 진정한 마음의 표출이기에 체계적일 수 없다. 그러나 이 체계적이지 못한 솔직함이 언어화의 과정을 거칠 때는 언어적 질서와 감정의 적확한 표현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다양한 모습과 이미지로 촉발된 정서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곧 언어화의 과정이며 창작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물론 시인이 시를 쓸 때 모든 걸 다 계산하고, 논리적이면서 필연적인 인과성 위에서 시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함과 진정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는 자연스럽게 질서와 논리성을 담아내게 된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황진이의 시조와 월명의 <제망매가>에서 맛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함과 진지함이 없을 때, 시는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게 된다. 정약용은 "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 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하다면 제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 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따라 내려는 것과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천인 성명의 법칙을 연구하고 인심 도심의 분별을 살펴 그 때묻은 잔재를 씻어 내고 그 깨끗한 진수를 발전시키면 된다" 고 하였다. (이어령, <문장대백과사전>) 먼저 사람이 되라는 얘긴데 사람되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니 그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한 시쓰기일 것 같다. 춘원 이광수도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고 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조국산천 기행을 쓴 그의 시는 소설이나 역사보다 한참 아래다.
나) 잘못된 시
지난 겨울
남 몰래 이장한 묘구덩 속
아직 남은 뼈마디 하나.
엉겅퀴에 걸려
푸른 보라빛으로
멍이 든
컴플렉스.
'잘라 버릴거야'
낙서처럼
스쳐지나는
개울 건너 무덤까지.
이 시는 필자의 노트에 쓰여진 아직 시로서 발표되지 못한 시다. 제목은 <개울 건너>라고 되어 있다.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조차 지금은 잊어버린 상태다. 여기에는 세 개의 이미지가 나열되어 있다. 이장한 묘 자리에 남은 뼈 하나와 엉겅퀴의 보랏빛 꽃, 그리고 벽에 가위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쓰여진 낙서다. 그러나 이 세 개의 이미지는 하나로 녹아들지 못하고 삐걱인다. 억지로 하나로 묶으려 한 흔적이 마지막 행에 드러나 있다. '개울 건너 무덤까지'가 그것이다. 시상만 나열되었을 뿐 시가 아닌 것이다. 이 글이 시가 되려면 세 편의 시로 태어나야지 하나로는 도저히 시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억지로 하나로 묶어 보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위의 글이 시가 되지 못한 이유는 시상만 가지고 시를 억지로 쓰려했기 때문이다. 느낌과 감동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건질 것은 구덩이에 버려진 뼈와 엉겅퀴의 푸른 빛깔이다. 지난 겨울이란 시간적 배경과 낙서는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최초의 상황―시상을 얻었을 때의 놀라움이 표출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미 솔직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시상은 그대로 묵혀두거나 버려야 할 것이다. 그냥 하나의 경험으로 깊숙이 넣어두어야 한다. 언제 때를 만나면 그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만약 내 자신이 이것을 시라고 강변한다면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양심의 문제다.
그렇다면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철저한 논리적 구성 속에 시를 쓰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시인의 의식 속에 시의 씨앗으로 잉태된 정서의 출렁임은 필연적인 인과성 위에 펼쳐지지만 느낌은 순서를 가지지 않고 한꺼번에 찾아온다. 직감적으로 찾아오는 이 정서의 이미지들은 어찌 보면 무척 무질서한 듯하지만 구조적으로 완벽한 상태이다. 다만 시인이 이 무질서해 보이는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시가 쓰여지거나 의식 속에 잠재되어 버리거나 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보거나 생각할 때, 그 대상과 접하는 순간 의식 속에는 엉켜있는 생각의 덩어리가 자리를 잡게 되고, 이 생각의 덩어리를 차분하게 있는 그대로 최초의 느낌 그대로 표현해내는 작업이 바로 시쓰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최초의 느낌이 끝까지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시인들이 시작업을 하는 동안에 처음의 의도와 다른 시들을 쓴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촉발된 정서가 또 다른 정서를 일으키면서 확장되고 변형되어 최초의 생각과 다른 시들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 예를 든 필자의 <개울 건너>는 바로 이 확장과 변형의 과정에서 방향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교수는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내장이 나온 창으로
상아연안이 침몰하고 있는 것을
화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조난(遭難)하는 백합 한 송이…….
라고 쓰고 그 제목을 <작품9>라고 붙여 내놓는다면, 마치 아무렇게나 괴물의 형상을 그려놓고 도깨비라고 우기면 누가 시비할 수가 없듯이 누가 뭐라고 하지야 않겠지만 저 무의미한 표상의 나열이 결코 시가 될 수는 없다." 며 앞 뒤의 논리적 상관성과 의미적 상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상 <현대시창작법> 105쪽)
어제 꿈을 꾸었다
예전에 소중했던 추억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아
손을 뻗어 보았지만
추억은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무엇도……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간다.
그리곤 다시 지나간 추억을 쫓아
잠을 청한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위의 글은 어느 고등학교 문학동아리반 학생이 쓴 글이다. 제목의 추상성이 주제의 모호함으로 이어지면서 내용이 없는,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가 되었다. 언뜻 보면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글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언어형식이란 점에 비추어 볼 때, 글이 되지 못하고 있어 시라고 할 수도 없다.
3) 생각을 시어로 쓰기
시어(詩語)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시가 무엇이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많은 시인들이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는 자신의 문학관의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시는 율어(律語)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운율적 구문이며....이성의 도움에 알맞는 상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쾌락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기술이다.....그리고 그 본질은 발견하는 것이다. ( 사무엘 존슨)
☆시는 일반적 의미에서 상상의 표현이다. (셀리)
☆시는 시적 진리와 시적 미의 법칙에 의한 비평에 알맞는 상태에 있는 인생의 비평이다.(메슈 아놀드)
☆나의 시는 나의 참회다. (괴테)
☆시는 체험이다.(R.M. 릴케)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다.(T.S.엘리어트)-------감정의 일반화와 언어화를 지적
☆詩三百 一言而蔽之曰 思無邪(공자)
☆詩言志(書經)
☆시는 우주의 생명적 본질이 인간의 감성적 작용을 통하여 표현되는 언어의 통일된 具象이다.(조지훈)
☆시는 언어의 건축이다.(김기림)
이들 정의들이 시의 모든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정의들 중에서 공통된 사항을 정리한다면 '시는 정서와 상상의 문학이며 운율적 언어로 생명의 해석과 체험의 표현' 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해석되는 시(詩)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요소는 시어, 리듬, 이미지, 표현기교, 소재,주제,행과 연의 형태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은 시어(詩語)이다. 시의 본질이 언어예술이란 점으로 보아 시어의 중요성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물론 특수한 예로 그림이나 기호로 쓰여진 시들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시도일 뿐, 시의 일반적 모습은 아니다.
발레리는 "시는 언어의 연금술(鍊金術)"이라고 했다. 이 말은 시를 쓰는 작업은 시정신을 가다듬고 내적 체험을 응결시키는 일이며, 언어와의 대결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언어를 깎고 다듬고 손질하고 매만져서 그 정수(精髓)를 캐내는 일이 곧 시인의 시작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문학의 한 갈래이다. '문학'이란 말이 어렵다면 그냥 '글쓰기'라고 생각해도 된다.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법이다. 시도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글의 한 갈래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것을 의외로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어떻게 글로 나타내야할 지를 모르겠다며 하소연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그런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지금 내게 말하듯이 그냥 글로 옮기면 된다고 일러주면 그게 그렇지 않다면서 공연히 글쓰기를 무슨 대단한 일로 신비화시킨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아름다운 글을 써야하고, 의미가 그럴듯한 철학적 주제를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글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담아내야 한다. 특히 시쓰기를 어려워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시 속에서 말하려 했는지 조차 뚜렷하지 않아 자신이 시를 써놓고도 이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탁 트이고 수평선만 내다보이는 바다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이 맨 먼저 들었을까?
① 넓다/푸르다/ 물결이 진다/ 잔잔하다/ 반짝인다
② 시원하다/ 춥다/ 음산하다/짭조름하다/ 비릿하다
③ 유리 같다/ 거울 같다/ 들판 같다/ 목장 같다/ 호수 같다
④ 소근거린다/ 비밀이 담겨 있다/ 또 하나의 세상이다
등등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①은 최초의 감각이며 시각적이다. '넓고 푸른 물결이 반짝인다'고 쓰면 바다의 모습을 쓴 글이 된다. ②는 느낌을 쓴 것으로 촉각과 미각의 감각이다. '시원한 바람이 비릿하게 코끝을 스쳤다' 고 쓸 수 있다. ③은 눈에 보이는 시각적 현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유리처럼 반짝이는 바다'라고 쓰면 바다가 햇살을 받아 유리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모습과 유리의 날카로움이 겹치게 된다.④는 주관적 느낌이다. '바다는 늘 소근거렸다'고 쓸 수 있다.
앞의 예로 든 글쓰기는 모두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쓴 것이다. 여기서 ①과 같이 단순한 시각적 느낌만을 썼다고 해서 질이 낮은 글이 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처지와 느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느낀 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된다. 다정한 친구와 여행을 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귓가에 속삭이는 바다'의 다정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고 서러운 마음에 찾아 온 바다는 결코 '거울 같이 반짝이는 바다' 일 수 없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과 다른 글을 쓰면 글 전체로 보았을 때 어울리지 못하는 구절이 되어 쓰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옷에 단추를 달아야 하는데 단추 대신 값이 나가는 동전을 가져다가 꿰맸다고 어울리는 옷이 될 것인가?
그러나 예외는 있다. 엄마한테 야단을 맞아 슬픈 마음으로 바다를 찾아 왔는데, 바다가 거울같이 반짝이고 있었다고 생각이 되었다면, 분명 다음 구절에는 '나의 슬픈 마음을 바다에 비추어 보며 위로를 받는다'는 상황의 구절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즉, 일반적 사고와 다른 대비적 상황이 놓여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계기(이유)가 전제될 수 있어야 시작품의 구조적 필연성이 성립된다. 이유나 상황제시가 없이 돌발적인 대립적 의미는 타당성이 없는 표현이 된다.
우선 글을(시를) 쓸 때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낼 수 있어야 비유도 성립되고 상징도 이루어질 수 있다.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알지 못하고 글을 쓰게되면 글쓰는 흥미도 사라지고 마음에 부담만 되어 오히려 쓰지 않음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는 글쓰는 재주가 없는가 보다', '글은 전문적인 시인이나 소설가나 쓰는 건가 보다.' '글은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등등의 글쓰기 최대의 부정적 상황까지 자신을 내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비하시킬 필요는 없다.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문자언어로 바꾸는 작업은 문맹자가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을 드러내기도 전에 멋을 내거나, 꾸미려 애쓰기 때문이다.
생각이 나타나지 않는 글은 글이라 할 수 없으며, 읽는 이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무늬만 글인 것'이 되고 만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될 것을 '아름다운 배가 고프다'라든가, '조각달 같은 배가 쪼르르 고프다'고 한다면 본래의 뜻을 나타낼 수 없다. 우선 글이 된 다음에 비유도 상징도 성립된다는 얘기다.
4) 글 속에 생각을 담으려면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생각을 담으려면 우선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까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세계나 국가, 그리고 사회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면 잘 알 수 있는 이웃이나 가족, 자신의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느낌이나 생각한 바가 없는 국가나 사회를 글쓰기의 대상으로 정한다면 결코 잘된 글이 나올 수 없다.
감을 깎고 또 깎고
깎아도 깎아도 줄지 않는 땡감
땡감을 깎아서 곶감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 싫어서 그냥 먹는다.
에잇 떫어. 모두 나를 보며 웃고
나도 어이없어 덩달아 웃는다.
정진욱 <곶감> 『함께여는 국어교육』98년 봄호196-197쪽
충북 안내중 이경희 선생님 글 중에서
이 글은 농촌에 사는 아이가 글을 쓰기 전에 선생님과 대화하는 중에 글감을 찾아 쓰게 된 시이다. "집에서는 요즘 뭐하니?" "감 따요. 나락 베요. 고추 따요" "그럼 그걸 써 봐." 이렇게 해서 쓴 자신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생활의 솔직함이 나타나 있다. 수식이나 비유도 없지만 삶이 배어나는 시이다. 압축과 생략, 리듬감이 느껴진다. 시의 요소를 고루 갖췄다. 시가 함축적이라든가, 상징적이라든가 하는 것은 뒤의 이야기다.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지도 못한 글에 상징이 성립될 수 없고, 비유라고 해서 제대로 효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내 생활을 쓰자'는 것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지내는 생활에는 어떤 게 있을까?
등교하는 버스 안 풍경, 아직 잠이 덜 깬 친구의 모습, 교문을 들어서면서 더욱 무거워지는 책가방, 딱딱한 의자, 선생님들의 다그침, 잃고 싶지 않은 나의 꿈, 길에서 본 여학생, 손 때 묻은 문제집, 교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 부모님의 실직 등등. 글감은 무한히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글감이 그대로 쓰여지지는 않는다. 이런 글감들에 대해 평소에 얼마나 생각해 봤느냐가 '생활을 잘 안다'와 직결된다. 아무런 생각 없이 등교하는 버스 안 풍경은 그냥 버스 안일 뿐이며, 손 때 묻은 문제집을 매일 매일 접하면서도 그냥 문제집으로만 바라보면 쓸거리가 안 된다. 버스 안이 삶의 현장이며, 문제집은 내 삶의 흔적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글이 된다. 글은 소재의 발견(대상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내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에야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의 굵은 손마디가 자식을 길러낸 억센 의지라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된다.
오늘 아침부터 비가 왔다. 옷도 눅눅해지고 기분도 별로였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다. 2교시는 수학이었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열도 나고 잠도 왔다. '쉬는 시간에 선생님께 조퇴 맞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쉬는 시간이 되자 머리에 열도 나지 않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중략)
아침부터 내린 비
내 맘을 흔든다.
머리가 지끈지끈
잠이 스르르
조퇴나 할까.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치자
씻은 듯이 나았다.(중략)
위의 산문과 시는 박현우 학생의 글이다. 먼저 산문으로 구체적인 생활글을 쓰고, 그걸 다시 시로 옮겼다.( <생활이 곧 국어수업> 충북 안내중 이경희 글 속에서)
여기에서 먼저 산문으로 자신의 생활글을 쓴 것은 자신이 무엇을 쓸 것인가를 확인해보는 기초 단계로서의 한 방법이다. 쓸 내용에 대한 생각은 곧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모아진다. 여기서 주제의 선택은 쓰는 이의 주제 의식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이 주제 의식은 주제 선택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의 좋지 않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 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서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정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에 불리한 시대>
우리는 브레히트의 시에서 가치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시의 주제와 내용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브레히트는 민중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히틀러의 연설에 경악하고, 아름다운 소녀보다 삶에 지친 소작인 여자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는 시의 형식보다는 내용성에 의미를 둔다. 이러한 외면 받는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곧 사회를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삶, 정의로운 세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 생각의 시작과 확장
정원석(정원사)
↑
침묵과 인고의 상징(시인:유치환) 수성암 형성시기(지리학자)
↖ ↗
바위
↙ ↘
안식처(피곤한 사람) 신의 조화(종교인)
↓
조각품(조각가)
앞의 그림에서 보듯 하나의 '바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도나도 다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개인적 관점의 차이는 개인의 삶의 태도와 환경, 그리고 자신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바라보는 '바위'는 그냥 '바윗덩어리'라고 느끼는 게 일반적 모습이며 평범한 생각이다. 그러나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한다면 무의미하게 사물을 바라보기보다는 의미를 담아 느낄 수 있다면 삶의 가치는 달라진다.
내가 자연환경 보호자라면 자연의 신비로, 조각가라면 돌을 깨어 빚어낼 조각품의 원석으로 떠올리게 된다. 유치환 시인처럼 생명의식을 지닌 소유자라면 바위에서 인고의 삶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유치환의 <바위>는 바위를 통해 허무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즉 바위라는 소재를 통해 시인이 바라본 것은 그의 가치관 속에 내재한 '허무 의지이며 생명 의식'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생각을 구체적인 바위로 형상화시키고 있어, 허무를 극복하고 무한한 생명의식으로 나아가려는 시인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시는 우선 글이 되어야 한다. 글은 또한 생각이 나타나야 한다.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훈련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시도 쓸 수 있다. 시의 가장 초보적 단계는 짧은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단계다. 그것이 음악성을 지니든, 구체적 이미지를 가지든 하는 문제는 다음 단계다. 성급하게 음악성, 시어의 상징성을 이미지를 떠올리고 시를 쓰게 되면 자신의 생각마저도 드러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흔히 시를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이라는 의미는 말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시법이다. 이미지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미지 속에 의미를 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갓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음의 시들은 이오덕 선생님이 글쓰기 회원들과 엮은 책 창비아동문고 『나도 쓸모 있을걸』 중에서 뽑은 아동시다. 아이들의 체험과 삶의 냄새가 그대로 배어 있으며, 꾸밈이 없어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어 좋은 보기글이 되고 있다.
하나의 시상을 확대 심화시킨다는 것은 쓰는 이의 인생관과 경험 정도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아래의 초등학교 학생들은 하나의 시상이 하나의 체험에서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쓸모가 있을 걸>에서는 자신의 태어남에 대한 의미 부여에서 앞으로의 희망과 의지로 확장되고 있으며, <내복 장사 굶어 죽겠네>에서는 아버지의 내복에서 내복 장수로 확대되어 있다. 단일한 시상에 국한되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시는 짧고 내용이 분명하다. 한편 고학년의 경우에는 시상의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길어지게 된다. 이러한 시상의 확장은 삶의 경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일반 성인시로 쓰여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청소년의 시는 어떠한 단계에서 쓰여져야 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나. 연상(聯想)을 이용한 상상력의 확대
무심코 길을 가다가 돌멩이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고 하자.
A: 아무 생각 없이 툭툭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간다.
B: "으- 재수 없어." 하고 가던 길을 간다.
C: "어? 이게 뭐야? 왜, 여기 있지? 아, 그래 엊그제 도로공사를 했지?" 하면서 간다.
D: "어? 이게 뭐야? 어디서 굴러왔지? 이 놈도 머잖아 모래가 될텐데. 인생은 다 그래."하며 오늘 저녁 이 돌멩이를 가지고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하면서 간다.
여기서 촉발된 계기는 네 사람이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A는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못했고, B는 재수 없다는 생각은 가졌으나 더 이상의 확장된 생각이 없었다. C는 사물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생각을 가졌으나 사실에만 머물렀다. 그리고 D는 촉발된 계기를 가지고 상상을 통해 인생의 문제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람직한 시쓰기 태도는 마지막 경우이다. 연상의 과정이 의미 있는 ―쓸 만한 가치가 있는 방향으로 생각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연상과 상상의 확장 속에서 드디어 유치환 시인은 <바위>를 바라보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라고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의지를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상의 확장은 소재의 발견임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즉 뛰어난 시인은 소재(자연물이든 자연 현상이든, 아니면 사람이 만든 인공물이든)에 내재(內在;안에 이미 담겨 있는)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끌어다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창조적 의미라고 한다. 애초에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극단적 견해도 있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시는 자연(사물과 현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로 쓴 것이 시(문학)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길에서 야바위꾼이 동전으로 돈 놓고 돈 먹기를 벌이고 있는 장면을 모여 선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보고서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구나' 라는 깨달음(발견)을 가지고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동전은 다섯 개뿐
던지면
결과는 뻔하다
앞
아니면
뒤
그래도 속임수로
섞고
바꾸고
던지고
받고
순열과 조합 다 해봐도
달라질 수사 없어
돈을 대면
눈깜짝할 사이에
물주가 먹어버린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동전을 다섯 개뿐
앞
아니면
뒤
달라진 것은 없다
누가 돈을 먹는가
그것밖에는
김광규 <야바위> 1983년 『세계의 문학』 봄호
김현 평선 『거대한 낙원』에서
야바위꾼의 동전치기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동전의 양면이 인생의 삶과 죽음이며, 승리와 패배라는 이분법으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먹든, 아니면 먹히든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이미 정해진 사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광규 시인 이전에 살아온 지금까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의 깨달음은 알고 있었다. 다만 야바위꾼의 동전치기에서 인생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김광규 한 사람 뿐이란 사실이며, 이러한 개인적 발견이 이 시를 쓰게 한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상의 확장을 생각해볼 단계다. 다음의 김수영 시 <푸른 하늘을>에서 시상이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가 보자.
1연에서는 노고지리가 하늘 높이 나는 것을 보고 자유롭다고 느끼는 잘못된 생각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2연에서는 수정 요구의 이유가 시상의 확장과 함께 제시된다. '비상→자유→피의 냄새→혁명→고독'의 시적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알기 쉽게 살펴보면 자유를 위해 비상하려면 피를 흘려야 하고, 그 피는 혁명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혁명은 끝내 자신을 고독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즉,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피를 흘리며 혁명을 꿈꾸며 고독한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다는 것이요, 혁명의 피를 흘리지 않은 자유는 무의미함을 말하고 있다.
3연에서는 혁명은 고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르헨티나인으로 쿠바의 무장혁명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성공으로 이끌었던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말했던 그 불가능한 꿈은 바로 이 고독이란 것이었으리라.
이러한 시상의 전개는 그 밑바탕을 이루는 이념과 사상이 확고하기에 가능한 시상의 확장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들은 이러한 하나의 시상이 또 다른 시상을 물고 나와 시적 의미가 심화되고 확장되면서 주제를 형상화하게 된다. 다음의 시는 우리가 친숙한 김소월의 시다.
초혼(招魂)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진달래꽃, 매문사, 1924>
1연에서 '부서진 이름-헤어진 이름-주인 없는 이름-내가 죽을 이름'으로 그 사람의 이름은 확장되어 간다. 이러한 1연에서의 확장된 심상은 시 전체 구조에 관련되어 있다. 즉, 1연에서 5연까지 '임의 부재(죽음의 슬픔)-고백하지 못한 안타까움-시간적인 배경(허무함) -공간적인 배경(거리감)-설움의 극한 상황(슬픔의 응집)'이라는 확장된 의미로 전개되어 가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선 채로 돌이 된다'는 것은 살아 있는 형상이지만 죽음의 상징인 망부석(돌)의 이미지로서 현실 부정과 초월 의지로 볼 수 있다. 여기서의 현실 부정은 조국을 일제에 빼앗긴 시대적 상황에 대한 부정과 그에 대한 내면적 극복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의도적인 여성적 화자를 내세운 것은 개인적 심상이 시대적 상황과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상의 확장 단계에서는 반드시 '필연성(必然性;반드시 그러함) 또는 개연성(蓋然性;그럴 수 있음)'이 따라 주어야 한다. 아무런 인과성이 없이 나열된 시어나 심상(이미지)의 제시는 시를 난삽하게 함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시로 만들어 버린다.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시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초현실주의적인 의식의 흐름을 도입한 시들에서 느끼는 난해성(難解性)과는 다르다. 난해성은 이해의 어려움이 있을 뿐,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은 논란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초현실주의적 시인 이상의 시를 살펴보면 난해성의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오감도(烏瞰圖)
- 詩제1호
이 상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
兒孩와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조선중앙일보」(1934년7월24일)
이상을 천재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는 평자(評者)가 있는가 하면, 당시 일본 문단에 유행했던 시경향의 단순한 모방일 뿐이라며 낮게 평가하는 평자도 있는 우리 시단의 이단아(異端兒) 이상은 시인이자 소설가요, 수필가이기도 하다.
정신이상자의 장난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시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등 기존 문법 질서의 파괴와 숫자, 기호, 도표의 사용으로 인해 더욱 그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당시 쓰여지던 순수지상주의적 시작 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취하는 일종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또는 다다이즘(dadaism) 경향의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독자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먼저 시의 표제가 되는 '오감도(烏瞰圖)'는 없는 말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상태의 도면(그는 건축기사였다.)을 일러 '조감도(鳥瞰圖)'라 하는데 이상은 의도적으로 글자를 바꾸어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여기서 '13'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당시 우리 나라의 도(道)가 13도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한다고도 하며,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13의 금요일이 주는 기독교적 불길함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13이란 숫자에 얽매어 시의 참맛을 잃을 필요는 없다. 그저 막연한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질주하는 행위는 자신들의 정체 모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13인의 아해는 서로 무섭고, 무서워하는 사이가 되어 13인의 아해는 더욱 불안해지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이 불안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끼는 시인의 의식 표출이다.
이상(李箱)의 [오감도]를 이해하려면 '박제가 된 천재'라는 그의 [날개] 첫머리의 암시처럼 박제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 천재였고 그 피나는 몸부림이 [오감도]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경성 공업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조선총독부의 건축 기사, 기생 금홍과의 연애, 폐병 등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씌어진 소설이 [날개]고 시가 [오감도]이다. 따라서 [오감도]는 한 천재의 처절한 몸부림이고 절망적인 절규라 할 수도 있다.
시의 우유적(寓喩的) 특성과 은유성(隱喩)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도리어 시의 이해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오류는 이상(李箱)과 같이 이른바 난해한 시를 읽으려고 하는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상의 시 전체가 건축 설계도처럼 직선이나 사각형으로 짜여져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근대성(모더니티)이나 도시성 같은 인상을 주게된다. 이러한 도시성을 도로를 질주한다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라는 진술에서 색다른 길의 은유적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질주하는 서로를 무서워하면 무한 질주를 하는 오늘날의 세계와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은 30편으로 된 연작시의 제목을《오감도(烏瞰圖)》라고 한 것도 이러한 부조리에서 연유된 언어적 유희로서 다양한 해석상에 놓이는 복합적 시어이다. 이러한 시어의 동어반복과 변주(變奏)속에서 시어의 의미는 유기적으로 확장되고 해석된다.
1.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미음의꽃이피었습니다
우우의꽃이피었습니다
기역의꽃이피었습니다
우우의꽃이피었습니다
이응의꽃이피었습니다
히읗의꽃이피었습니다
오오의꽃이피었습니다
아아의꽃이피었습니다
묵음화꽃이피었습니다
2.
진달래꽃이피었습니다
지읒의꽃이피었습니다
이이의꽃이피었습니다
니은의꽃이피었습니다
디귿의꽃이피었습니다
아아의꽃이피었습니다
리을의꽃이피었습니다
리을의꽃이피었습니다
애애의꽃이피었습니다
진단내꽃이피었습니다
3.
한그루꽃이피었습니다
히읗의꽃이피었습니다
아아의꽃이피었습니다
니은의꽃이피었습니다
기역의꽃이피었습니다
으으의꽃이피었습니다
리을의꽃이피었습니다
우우의꽃이피었습니다
한그루꽃이피었습니다
한글의꽃이피었습니다
고 원 <숨바꼭질>
고 원의 시는 이상의 시보다 단순하다. 동어반복과 각 연의 첫 행에 쓰인 단어를 철자 순서대로 풀어 제시하면서 '무궁화→묵음화, 진달래→진단내, 한그루→한글의'로 변이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유희적 시적 태도는 현실에 대한 부정과 해체에서 출발하여 시인의 바램이 남과 북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이상으로 전개된다. <숨바꼭질>에서 보이는 시각적 형태는 구체시(具體詩)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 시각적 특성이 시의 내용을 규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고원의 시에서 무궁화가 묵음화가 되면서 남쪽의 상징이 해체되고, 진달래가 진단내가 되며 북쪽의 상징이 해체된다. 그리고 한 그루의 꽃이 피면서 '한글'로 통합됨을 보인다. 여기서 한글이란 '한민족의 얼'로 상징됨과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의 체제와 사상을 억압했던 분단민족의 언어가 진정한 통일민족의 언어로 피어나기를 기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규칙적인 10개의 글자 수와 10줄의 시행은 규격화된 모습을 보여줄 뿐, 통일의 자유의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은 황지우 시인의 <무등>이란 시이다.
山
절망의산
대가리를밀어버
린,민둥산,벌거숭이산
분노의산,사랑의산,침묵의
산,함성의산,증인의산,죽음의산
부활의산,영생하는산,생의산,회생의
산,숨가쁜산,치밀어오르는산,갈망하는
산,꿈꾸는산,꿈의산,그러나현실의산,피의산
피투성이산,종교적인산,아아너무나너무나폭발적인
산,힘든산,힘센산,일어나는산,눈뜬산,눈뜨는산,새벽
의산,희망의산,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평등한산,대
지의산,우리를감싸주는,격하게,넉넉하게,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황지우의 <무등>에서는 시의 형태가 내용을 제어하고 의미의 확대를 이루고 있다.
다음은 고등학교 학생의 시를 참고로 연상에 의한 상상력의 확장 모습을 살펴보자.
달님마저 숨어 버린
좁은 골목길
골목길에 있는 건
오직
가로등 하나
가로등이 만들어 낸
노란 불빛
누굴 위한 불빛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빛나기 위한 불빛이 아닌
비추기 위한 불빛이라는 것.
<1998년 ㅅ고 시화전 작품. 1학년 >
위의 시에서 가로등의 확장구조를 살펴보면, '가로등-노란 불빛-알 수 없는 불빛- 비추기 위한 불빛'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가로등 불빛에 대해 '알 수 없음'이란 진술이 시의 의미적 확대를 방해하고 있으며, 다음의 '비추기 위한 불빛'이란 인식과도 모순되고 있다. 따라서 시 전편의 흐름으로 보아 '가로등이 자신을 밝혀 남을 비추어준다'는 희생적 의미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상상력의 빈곤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적 묘사에 그치고 있어 시로서의 맛이 없다. 시의 맛은 사실성에 있다기 보다는 상상을 통한 유추(類推;미루어 짐작함)로 내재된 의미를 떠올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된 의미가 없어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이는 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주제 의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의 <바다>는 고등학생으로서는 좀 긴 시를 쓰고 있다. 인터넷상에 내보인 고등학생 문학동아리 홈페이지에서 인용을 했다. 이 학생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뛰어나 장차 시를 잘 쓸 수 있는 자질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개 한 개의 시어들이 각각의 의미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연결이 안 된다. 즉, 시어의 유기적 관련성이 없어 무엇을 말하려는지 통일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바람기 가득한 산 속
이슬이 튕기어 번진 안개 사이로
촉촉이 젖은 이끼 곁에서
알 수 없는 푸른 바다 내음.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를
빼앗아 날고 싶다던 바다가
새가 잠수하기만을 기다리다 지쳐
수평선에서부터
땅 속 깊이 박힌 바람을 일구어
새를 향해 손을 뻗는다.
계속 뻗은 손의 키는
점점 줄어들고
이제는 산을 타기 시작한다.
거북이의 기는 속도보다 느리지만
바다는 창공을 나는 꿈을 상상하면서
흙을 삼키며 산을 오른다.
산의 흙을 갉아먹고
도착한 정상에는
새의 날개는커녕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건 철썩거리며 진동하는 풀빛 메아리뿐
새의 날개를 갖지 못한 서글픔을
산바람에 실어 바람꽃을 피우고
바다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뻐금거리는 물고기와 쓴 맛의 물초를 위하여
그리고 가끔씩 바다는
산이 그리울 때, 하늘을 날고 싶을 때
그리움을 바람에 날려
산 속 습한 곳에 바람꽃을 피운다.
추억을 되새기며...
고2, 원주 ㄱ문학회 회원. <바다>
'바람기 가득한 산 속/ 이슬이 튕기어 번진 안개 사이로/ 촉촉히 젖은 이끼 곁에서/ 알 수 없는 푸른 바다 내음' 이라니. 알 수 없는 미사여구의 나열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산 속에 안개가 내리고 있는데, 이슬 맺힌 이끼 옆에 서 있으니 바다냄새가 난다.' 는 뜻이라면 당연히 푸른 바다 냄새가 왜 나는지 알 수 없었으리라. 자신도 불확실한 느낌을 적어 놓으면 독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냥 알아서 읽어? 그건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한 신뢰성을 해치는 일이다. 첫째 연은 시적화자가 산 속에 있다. 그러나 화자는 갑자기 바다로 가 있다. 첫 연이 둘째 연을 이끄는 서사였을까?
둘째 연에서는 바다가 하늘을 날고 싶어 새가 바다에 뛰어들기를 기다리다 지쳐 드디어는 손을 뻗어 수평선에서부터 땅속 깊이 박힌 바람을 일구어 새의 날개를 빼앗으려 한다. 마음껏 발휘된 상상력이지만 개연성이 적다. 땅속 깊이 박힌 바람을 어찌 바다가 일구어 낼까? 넓디넓은 바다가 겨우 작은 새의 날개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도 그렇다. 셋째 연에서는 바다가 손을 내뻗었다가 그 키가 줄어들고 산을 오르며 창공을 느리게 나는 상상을 한다. 키가 준다는 표현이나 바다가 산을 탄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넷째 연에서는 정상에 도달하지만 새의 날개는 없고 철썩거리는 풀빛 메아리뿐이다. 철썩거리는 풀빛 메아리는 자신이 떠나온 파도소리인가? 비유가 억지스럽다. 그리고 다시 떠나온 바다로 간다. 물고기와 물초를 위해. 여기서 물초는 해초가 맞다. 없는 단어를 마음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언어의 창조는 우리의 조어법에 맞아야 하며, 언중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넷째 연에서 바다는 왜 산으로 갔느냐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바다로 돌아간 이유가 물고기와 해초를 위한 것이라면, 산으로 간 이유는 더욱 약화된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바다는 산이 가끔 그리워진다고 했고, 그럴 때는 산 속 습한 곳에 바람꽃을 피운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바람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바람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큰바람이 일어나려고 할 때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을 가리키는 뜻과 '여름철에 높은 산에 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 풀로서 국화바람꽃, 그늘바람꽃, 꿩의바람꽃 등을 통틀어 일컬으며, 일명 '아네모네'라고도 하는 식물성의 바람꽃'일수도 있다. 그러나 뒤의 미나리아재비과의 바람꽃은 아닐 듯 싶다. 왜냐하면 산이 그리울 때, '하늘을 날고 싶을 때/ 그리움을 바람에 날려/ 산 속 습한 곳에 바람꽃을 피운다.' 고 했으니 그리움을 담은 바람꽃을 바다가 피운다고 이해함이 타당할 듯싶다.
그러나 이렇게 두루 살펴도 바다가 왜 산을 그리워하는지 알 수 없다. 바다가 산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피워내는 바람꽃의 비밀스런 사랑인가? 그렇다면 제목이라도 '비밀스런 사랑' 이라고 붙였어야 한다. 결국 주제의 모호함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알 수 없는 퀴즈 문제를 풀다가 그냥 지치면 '그런 것 같다'로 끝나야 할까?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논리적 심상을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최소한 바다가 산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제시될 수 있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시를 관통하면서 각각의 소재들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어야 시의 틀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바람기'도 '바람끼'의 잘못인지, '바람의 기운'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못하다.
아직 습작기에 있는 작품을 이렇듯 꼬집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분명한 시(글)를 써야함이 시쓰기의 처음이기에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를 쓸 때는 말을 만들려 하지 말고, 먼저 생각을 나타내려 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시를 쓰려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시적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부터 해야만 한다.
나에게 너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이제야 알았어.
널 떠나 보내고야
너가 나의 반쪽인걸
이제야 알았어.
너와 나를 반쪽되게 만들어준
이별이란 두 글자에 진정한
사랑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어.
그러기에 난 이별에
행복할 수 있어 언제나
널 생각하며……
널 기다리며……
<이제야 알았어> 정선군 H고 ○○기
'밥' 매거진 7월호 중에서
위의 <이제야 알았어>는 청소년들의 연애감정을 쓴 시이다. 청소년시 중에 상당히 많은 시들이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시의 대부분은 주제가 분명한 대신에 남는 게 없다. 사춘기에 도달한 청소년들이 이성에 대한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랑' 이나 '이별'을 주제로 한 시들에서 느끼는 바는 한결같이 감상적이면서 구체적 감정 표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 체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추상적 관념 속에서 개연성만을 가지고 시를 쓰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청소년들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나 제목이 친구·봄· 버림· 이별· 안녕·행복 등등의 추상적 어휘다. 이는 사춘기적 감수성이 그대로 시속에 드러나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소재가 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형상화가 따라 주어야만 한다. 그저 막연한 감정 표현에 머물러서는 시로서의 맛을 내지 못하게 된다. 이는 소재의 잘못이 아니라 구체적 형상화에 이르지 못하는 창조적 사고가 없는 시쓰기가 문제가 된다.
청소년들이 시를 쓸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름다움이나 슬픔이라는 정서의 가장 초보적 단계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정서를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진술에 머문다. 이는 우리 교육이 삶과 동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음에 무관하지 않다. 이육사의 <광야에서>를 읽고 나도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황진이의 <어져 내일이야>를 읽고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기 전에 소재가 무엇이고 주제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이 시속의 시적자아가 되어 또 하나의 인생을 체험해본다는 생각은 시험문제와 무관한 쓸 데 없는 짓으로 취급되고 있는게 오늘의 문학교육이다. 고등학생들에게 시를 읽어보라면 어떤 시든 간에 한결같이 예쁘게 읽으려 하거나, 힘이 하나도 없는 어조로 무기력하게 읽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시 읽기의 어조는 시의 내용 이해마저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은 시를 읽는 재미마저 빼앗기게 되고 만다. 이러한 시 읽기는 내로라 하는 단체가 주최하는 시낭송 대회도 예외가 아니다. 시는 그 시의 주제에 맞게 때로는 울먹일 수 있어야 하며, 또 때로는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는 예쁘고 잘 다듬어지고, 시어가 그럴 듯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지 않으면 시 쓰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III.시쓰기를 위한 몇 가지 유희
1.패러디를 통한 시쓰기
장정일의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작품이란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패러디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창조의 한 범주로 자리잡고 있다. 영화와 영화, 문학과 문학 등의 동일 장르의 패러디는 물론 문학과 영화, 미술과 문학의 패러디가 성립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비판이 없지도 않으나, 탈장르의 확산적 의미를 담기도 한다. 이러한 패러디는 전통의 현대화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창조의 양심과 독자성을 인정하는 패러디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디 방법이 원작이 가지는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여 원작을 해친다고 볼 수는 없다. 패러디한 작품은 그 원작이 이미 잘 알려져 있어 누구나 쉽게 원작을 떠올리면서 언어 유희의 즐거움에 빠지게 되고, 기발한 착상에 경탄하게 된다. 이러한 패러디의 방법을 청소년들의 시창작 교육에 적극적으로 권할 수는 없겠으나 한 번쯤 해볼 만한 방법이다. 원작을 패러디 하는 동안에 원작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고, 원작에 대한 비평적 이해까지도 겸할 수 있는 이중의 효과와 시창작 방법을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디의 방법은 자주 이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새로운 형식적 개념을 가진다 하더라도 원작에 대한 모방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의 형식이나 운율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이다. 한 번 쯤 해볼 만하다.
이같은 패러디가 때로는 아주 새로운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이점을 가지게도 한다. 다음은 오규원 시인이 역시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명사나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오규원 <'꽃'의 패로디>,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오규원 시인의 <'꽃'의 패로디>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김춘수의 <꽃>을 풀어놓고 있다. 마치 김춘수의 <꽃>에 대한 해석편과 같은 느낌을 준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했다' 정도이다.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망은 의미 부여라는 행위 속에 담긴 시인의 창조적 의지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김춘수의 <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패러디의 한계다.
2. 그림 그리기를 통한 시쓰기
시의 회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편의 시를 읽고 그 시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은 역으로 시 창작을 할 때,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시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이 쓴 시의 시어와 분위기가 그림 곧 영상으로 바꾸어지는가를 확인해 본다. 예를 들어
1) 꽃이 피었다
2) 빨간 꽃이 피었다
3) 빨간 장미꽃이 피었다
4) 이슬 맺힌 빨간 장미꽃이 피었다
5) 벌들이 잉잉거리는 빨간 장미꽃
과 같은 구절에서 영상으로 가장 선명한 것은 4와 5번이 된다. 이 중에서 4번은 시각적이미지만이 드러나고 있는데 비하여 5번은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보다는 2가, 2보다는 3이 구체적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가장 나타나지 않는 것은 1번 '꽃이 피었다' 임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구절은 표현했다기 보다는 추상적 진술에 머물고 말아 시의 이미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만다.
학생들의 시 쓰기는 바로 여기서 판가름 나고 만다. 자신의 생각을 쓰긴 쓰되 표현되지 않고 그냥 솔직하게 드러내는 시 쓰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추상적 어휘를 제목으로 쓰는 경우 거의 모든 학생들이 추상적 진술에 머물고 만다.
과연,
내가 쌓은 탑의 모양은 온전한 것인가
처음 내딛는 발자국 주위엔
사랑의 미소가 뿌려져 있었다
따뜻한 사랑과 밀어(密語)를 먹고 자란
내 마음의 탑 위엔
어느새 웃음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참을 수 없는 침묵을
강요하는 시간
과연 내가 쌓아야 할 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고2 임대현, <과연 내가>
위의 시는 어느 고등학교의 시화전 작품이다. 일관된 내용으로 쓴 글이면서도 도저히 그림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추상적 어휘들이다. 구체적 어휘로 유일한 '탑'이란 시어도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탑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시가 반드시 이미지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같이 추상적 어휘로 쓰여진 시의 내용은 읽는 독자들도 '뜬구름 잡기'로 마음에 실제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화전에 전시된 이 작품의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은 검은 3층탑이 하나 구체적이었을 뿐, 시의 내용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의 희망찬 설계와 축복을 지나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황하는 고등학교 2학년생의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는 마음을 쓴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으나 " '탑'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음의 시는 앞의 시를 쓴 학생과 유사한 인식 속에서 쓰여진 시이다. 이른 새벽부터 보충수업이니 야간 자율학습이니 정신없이 돌아가는 학교생활 속에서 자신의 존재조차 잃어버리는 일상 생활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학생의 하루를 떠올리며 미소를 띄게 한다. 특히 자신의 무의식적인 생활을 '개미들의 대열'에 비유해 선명성을 더하고 있다.
아침인지 새벽인지
시계가 요동을 한다.
희미하게 보이는 시계의 보턴을 눌러
우선 요동을 막고, 나는 또 눕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언제인지 세수를 하고 와 시계를 보며
옷을 입었는지 걸쳤는지
신발을 신었는지 들었는지 모르게 뛴다.
헐떡이며 운동장 한 가운데를
개미들의 행렬같은 대열에 끼어 가고 있다.
종이 울린다. 개미들의 대열 속에서 나도
순간, 힘든 것도 모르고 뛰어 올라
교실에 앉아 있다.
이젠 여유를 가지고 앉아서는
오늘 아침을 안먹었구나
또 젓가락을 빼놓고 왔구나
가만, 오늘이 며칠이더라……
토요일 되려면 며칠이나 남았지 한다.
김병섭(고1,1985), <하루의 시작>.『희망이라는 종이비행기』에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정지용시인의 <향수>는 가만히 시를 읽다 보면 절로 리듬이 살아나고 그 선명한 이미지가 눈 앞에 펼쳐지면서 우리를 마음의 고향으로 데리고 가버린다. 설명하지 않고 그저 드러낼 뿐이지만 우리의 머리 속에 펼쳐지는 그림은 바로 고향의 모습인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향수(鄕愁)>,『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신경림 시인은 『시인을 찾아서(1999. 우리교육)』에서 정지용의 <향수>는 시인의 체험에 의한 직접적인 투영이기보다는 조선 일반의 풍물이라는 성격이 짙다며, "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의 은유에는 풍요가 있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에서는 평화의 이미지가 있다."고 했다. 이렇듯 시 속에 드러나 있지 않은 행간 속의 의미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이라기보다는 시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의미이기에 독자는 그 숨겨진 의미까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3. 운율을 따라가보는 시쓰기
시에 있어서 운율은 시의 참맛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이 차츰 약화되면서 시를 읽는 맛이 사라지고 재미를 느끼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재미 없음은 현대시가 가지는 가장 취약한 약점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지는 유희적 속성은 노래를 즐기는데서 유감 없이 발휘된다. 학생들은 시를 멀리하고 대중가요에 또는 힙합이나 랩을 더 좋아한다. 학생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다. 시를 선택하지 않고 노래를 좋아하는 걸 나무랠 수도 없다. 좋은 걸 어떡하란 말이냐? 다만 오늘의 시가 재미없다는 것이 오히려 비난 받아야할 지 모른다.
시의 재미는 읽는데 있다. 소리내어 시를 읽으면서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다면, 시가 오늘날 처럼 외면 받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현대시는 음악성보다는 이미지로서의 내용성에 보다 크게 의지하고 있다. 어찌보면 시의 운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쇄문화가 덜 발달했던 시대에는 기억에 편리하기 위해서는 소리로 전달할 때의 어감이나 리듬이 크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쇄문화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소리로 전달되기 보다는 눈으로 보고 읽는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더우기 답답한 문자기호로 단순하게 쓰여지던 시대에서 컴퓨터 화면에 비치는 다양한 모양의 글자체로 다양하게 가시화 되는 전자시대가 성큼 다가서면서 시집을 찾는 이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어쩌면 음성파일을 통한 낭송된 시를 선호하게 될지도 모른다. 음악과 사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자의 동영상 속에 음성으로 들려주는 전자시집이 보편화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의 이미지는 배경 사진으로, 시는 전문가의 음성으로, 시의 운율적 리듬은 음악이 대신하게 되고 문자는 보조수단으로 컴퓨터 화면 속에 흘러갈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결국 시가 오늘과 같은 모습을 고집한다면 시의 화석화가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컴퓨터와 시디롬이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하더라도, 그것은 독자가 시를 읽고 이해하는 수단의 변화이거나, 시를 쓰는 이들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문장화 시키는 정도의 변화이지 시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시가 시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히 시다워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시의 운율 문제다.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마음을 흔드는 음악적 감성이 사라진다면 시는 그저 분량이 적은 산문에 지나지 않게 된다.
①생사로
②예 이샤매 저히고
③나 가 다 말ㅅ도
④몯다 닏고 가 닛고.
⑤어느 이른 매
⑥이에 저에 떠딜 닙다이
⑦? 가재 나고
⑧가논 곧 모 온뎌.
⑨아으 미타 애 맛보올 내
⑩도 닷가 기드리고다.
우리가 잘 아는 10구체 신라 향가이다. 신라 향가 중 시에서 풍기는 음악적 부드러움과 시상의 완벽함, 인생론적인 삶의 깊이가 고루 갖춰져 있어 읽는 이나 듣는 이나 다함께 즐거울 수 있는 작품이다.
②행에서 '예'를 '여기에'로, '이샤매'를 '있으므로', '저히고'를 '두려워하고' 나 '저어하고'로 바꾸어 읽어보자. ①행에서 3음절로 간결했던 시작이 갑자기 길어지면서 호흡이 가빠짐을 느끼게 된다. 음절수가 적은 행에서 갑자기 긴 음절수의 행으로 이어질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시의 음악성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보여준다. '저히고'를 빼고 읽어보면 더욱 음악성이 부드러워지면서 자연스럽게 ③행으로 이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저히고'는 의미상 중요한 구절이기에 삭제할 수 없는 일이다. 아쉽지만 만족할 수밖에 없다.
①,②행에 이어 ③,④행은 단숨에 읽힌다. 유사음으로서의 자음과 모음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특히 분철표기가 아닌 연철표기로 번역한 양주동 박사의 향가 번역은 그야말로 국보적이다. 연철표기가 가지는 음악적 부드러움이 현대국어에서도 적극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한번 쯤 가질만한 대목이다.
④행까지 읽고 나면 자연스레 잠시 휴지가 온다. 의미단락임과 동시에 낭독상으로도 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잠시 후에 ⑤행으로 이행되면서 단숨에 ⑧행까지 나아간다. ⑤,⑥행과 ⑦,⑧행의 비유적 댓구가 여기까지 읽고 음미하도록 한다. 그리고 잠시 ⑨행의 첫구 '아으'에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진실을 알고난 뒤의 안도라고나 할까? ⑩행에 오면 의미의 완결이 이루어진다.
4. 마인드 맵을 활용하여 쓰기
마인드 맵이란 촉발된 이미지에서 연상되는 순서에 따라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그림지도를 그리고, 이의 상관관계를 통해 심리를 측정하는 기법이다. 즉 마음 속에 일어나는 구체적 이미지와 추상적 이미지를 상하, 밀착,발전,확대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인접 이미지로부터 점차 먼 관계의 이미지로 구상해보는 마음의 지도 작성법이다.
시창작에서 마인드 맵의 활용은 연상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며 심층적으로 확대된 심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해볼 만하다.
다음은 문예백일장에서 동일 제목이 주어졌을 때의 반응을 백일장 작품을 통해 추정해 본 것이다.
A학생:
선착장
명절만 되면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뵈러
전라남도 작은 섬에 가곤 했다.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긴 여정 끝에 닿는 선착장
선착장은 나에게는
꿈같은 세상.
길가에 펼쳐진 장난감 집들.
나의 고집에는
부모님도 당해내실 수 없으셨나보다.
배 안에 오르는 내 어린 손에는
로봇이 멋쩍게 웃음짓고
그걸 보는 나도 그저 허허허.
오늘도 바다냄새를 맡으니
먼 기억 속 동심이
잔잔히 물결친다.
B학생:
선착장
슬픈 뱃고동 소리를 기억하며
오늘도 시작되는 선착장.
마치 누군가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
가지 못하는 날개 다친 연인같은
이 선착장에.
푸른 물결만이 갖은 붉은 햇살 가르며
저멀리 님 실은 배가
수평선 위로 떠올를 때,
기다림이 기쁨되어
활기를 되찾아 분주한 선착장.
서로 만나 좋아하는 모습이
내 마음 텅빈 곳을
아련히 감싸주네…….
두 학생의 마인드 맵을 보면 선착장이란 최초의 이미지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A학생은 전라남도의 작은 섬에 살고 계신 할머니를 떠올리고, B학생은 연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A학생의 시를 통해 본 마인드 맵
선착장----가족---할머니
---전라남도 작은 섬---버스 (긴 여정)
꿈같은 세상---장난감같은 집
나의 고집---부모님이 당해내지 못함
배---어린 손---로봇
오늘 ---바다냄새---동심
B학생의 시를 통해 본 마인드 맵
선착장 ----슬픈 뱃고동소리---오늘의 시작
누군가를 기다림---가지 못함---날개 다친 연인
푸른 물결---붉은 햇살
님실은 배---수평선
기다림--기쁨---활기---분주함
----서로 만남--좋아함
--- 내마음--텅빈 곳---감싸 줌
A학생이 모두 6연의 시를 쓰면서 '할머니-여정-로봇-동심으로 회귀'의 구도로 도입과 여정, 그리고 감상이란 수필적 심상에 한정된 반면, B학생은 '뱃고동-날개 다친(홀로 서있는)연인-기다림-만남의 기쁨-자신의 감정'의 구도로 자신의 눈에 보이는 연인의 만남을 쓰고 있다. 두 학생 모두가 시의 끝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과거의 기억을 유추해 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현상은 '시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빚어진 현상이다. 그리고 두 편 모두 '선착장'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스펙트럼이 없다. 따라서 시어가 빈곤해지고, 시상의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선착장은 배가 들어오고 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인생이며 삶이란 추상적 이미지로 확대될 수도 있다. 또한 만남과 헤어짐도 같은 흐름 속에 위치한다. 선착장이 가지고 있는 외부적 상황은 거칠음이다. 다듬어지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아갈 거친 인생들, 녹슬은 쇠붙이와 비린내, 소란함 등도 선착장의 이미지이다. 선착장은 나루터와 다른 이미지 즉 남성적이면서 황량하고 거친 이미지를 가진다. 이러한 거친 삶의 모습은 이용악 시인의 <항구>에서, 선착장의 인생론적 의미는 김용호 시인의 <항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용악의 거친 인상과는 달리 김용호 시인의 <항구>는 추상적 인상과 행복과 불행의 교차점으로 항구(선착장)을 바라보고 있다.
태양이 돌아온 기념으로
집집마다
카렌다아를 한 장씩 뜯는 시간이면
검누른 소리 항구의 하늘을 빈틈없이 흘렀다
머언 해로(海路)를 이겨낸 기선이
항구와의 인연을 사수하려는 검은 기선이
뒤를 이어 입항했었고
상륙하는 얼굴들은
바늘 끝으로 쏙 찔렀자
솟아나올 한 방울 붉은 피도 없을 것 같은
얼굴 얼굴 희머얼건 얼굴뿐
부두의 인부꾼들은
흙을 씹고 자라난 듯 꺼머틱틱했고
시금트레한 눈초리는
푸른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서 나는 너무나 어린
어린 노동자였고―
물 위로 도롬도롬 헤어 다니던 마음
흩어졌다도 다시 작대기처럼 꼿꼿해지던 마음
나는 날마다 바다의 꿈을 꾸었다
나를 믿고자 했었다
여러 해 지난 오늘 마음은 항구로 돌아간다
부두로 돌아간다 그날의 나진(羅津)이여
이용악 <항구> (분수령, 삼문사, 1937)
부우―ㅇ―
항적(航笛)이 하늘 우에서 울면
헐어진 구름도 모여 운다
……항구(港口)의 표정은 슬프다
환등(幻燈)처럼 비쳐 움직이지 않는 얼굴
갈대밭에 심은 물새의 불행(不幸)이
내게도 있다
끄―ㅁ 벅―
별이 하나씩 선창 우에 늘어서면
등대도 그리운 듯 외짝눈을 끔벅인다
……항구(港口)의 마음은 고웁다
물결처럼 밀려와 내 마음을 미는 얼굴
짝지여 물을 쫓는 물새의 행복(幸福)이
내게도 있다
김용호 <항구> (향연(饗宴) 1941)
이들 두 시인의 시를 구조화 시켜보면 하나의 이미지에서 연속적으로 확산되는 이미지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편화 된 이미지가 아니라 서로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확대되거나 아니면 대조되면서 그물처럼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연결성은 김용호의 <항구>보다 이용악의 <항구>가 보다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용악의 시를 통해 본 마인드 맵
항구---태양이 돌아옴--카렌다아 뜯기
검누른 소리---항구의 하늘
머언 해로를 이겨낸 기선--인연 사수--검은 기선--입항--상륙하는 얼굴--희머얼건한 얼굴
시쓰기에 있어서 촉발된 시상(詩想)을 부여잡고 그 순간의 감정과 발견을 드러낼 수 있는 시어의 사용과 확산된 이미지의 조직은 시의 성공을 가름한다. A학생의 경우처럼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로봇을 가지고 배를 탔다는 사실은 이 시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동심'을 끌어내기 위한 의도라고 본다해도 선착장의 의미와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4,5연은 빼버리는 것이 오히려 시를 살리게 된다.
5. 추리하여 시쓰기 <쉬운 시와 어려운 시로 나눔>
시쓰기의 순서는 대체로 오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대상이나 현상에 대하여 즉각적인 의미부여가 이루어지는 감정의 촉발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시상(詩想)이라고 한다. 물론 이같은 시상(詩想)은 늘 마음 속에 시에 대한 애정, 곧 시심(詩心)을 담고 있을 때에야 제 모습을 갖추고 일어나게 된다. 시상(詩想)은 구체화를 통해 비로소 형상을 드러낸다. 이 구체화의 작업은 시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일반적일 때에는 평범한 시가, 특수하고 개인적인 경우에는 참신함을 가진 시로 태어나게 된다. 따라서 시인은 똑같은 사물이라고 해도 남이 해석하거나 드러내지 않은 방법으로 구체화시키려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모든 예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지극히 일반적인 행위다. 피카소는 자전거의 안장과 손잡이를 접한 순간 그 사물이 가진 다른 면―예술적 미의식과 공통적 현상―을 발견하고 개인적 해석을 가해 '황소'의 모양으로 만들어 내 이를 처음 대하는 이에게 충격을 준다.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손잡이)은 기계 기술자가 만든 기계로서 예술적 가치는 미세한 사물이다. 그러나 피카소의 개인적 해석에 따라 자전거 부속이 '황소'란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시도 피카소의 '황소'와 같은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일상적 언어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의사 표현 도구이다. 플로베르의 '一物一語設'은 하나의 사물에 가장 적합한 언어 표현은 하나 뿐이라는 견해이다. 시인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단어)를 두 개 이상 가지지 못한다. 마치 중국의 가도가 집의 문을 들어서는 행동을 '민다'의 뜻인 '퇴(推)'로 할 것인가, 아니면 '두드린다'의 뜻인 '고(敲)'로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처럼 유사한 의미를 지닌 두 개의 단어가 있을 경우에 어떻게 해서든 그 중의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운명에 자주 부딪치게 된다. 시 한 편을 쓰는데 십 분, 이십 분이 아니라 몇 날, 몇 달이 걸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시 중에 한 두 행을 빈 칸으로 두거나, 한 두 단어를 비워서 빈 칸을 시의 흐름 속에서 유추하여 채워보려고 하는 노력도 좋은 시를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에 쓰인 시어들은 한 편의 시속에서 필연적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인과관계가 희박한 시행이나 시어들이 쓰였을 경우, 그 한 행이나 단어를 빼도 시에 보태고 더함이 없다면 그 시어나 행은 불필요한 구절이므로 애초에 빼버려야 할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시인들이 밤을 새워 시를 쓰며 머리를 뜯고 고통스러워함은 점 하나, 음절 하나, 단어 하나 아무렇게나 쓰지 않으려는 노력의 모습이다.
싹수 있는 놈은 아닐지라도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아닐지라도
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 ① )는 녀석
( ② )는 녀석
( ③ )는 녀석
모두 모두가 ( ④ )
공부 잘해 대학 가고 졸업하면 펜대 굴려
이 나라 이 강산 좀먹어가는
관료 후보생보다
농사꾼이 될지 운전수가 될지
공사판 벽돌 나르는 노동자가 될지
모르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이 시대를 지탱해가는 모든 힘들이
버려진 사람들 그 굵은 팔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공무원 관리는 되지 못해도
어버이의 기대엔 미치지 못해도
동강난 강산 하나로 이을 힘이 바로 너희들
두 다리 가슴마다 들어 있기에
나는 믿는다 통일의 알갱이로 우뚝우뚝 커가는
건강하고 옹골찬 너희 어깨를.
조재도 <너희들에게>
위의 시에서 빈 칸을 채워넣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 시의 흐름이 일관되고, 주제가 분명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유추해낼 수 있다. 유추를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필자가 의도적으로 연을 나누었다.
먼저 ①의 빈 칸에 대해 생각해 보자.
1연에서 싹수 있는 놈, 모범생이 아닌 놈에게 희망을 건다는 역설이 성립되고 있어 2연세서의 ( )녀석은 분명 싹수 없는 놈이며, 모범생이 못되는 소위 문제아가 되어야 한다. 담배 피우고, 싸우고, 교복을 찢어 입고, 성적은 꼴찌에 술먹고, 교실에서는 잠만자는 녀석이 ( ①)의 범주에 드는 녀석이다. 이들 중 어느 것을 가져다 놓아도 2연은 성립된다. 따라서 ①②③은 자연 동등한 자격의 언어들로 채워지면서 자연 해결된다. 다만 여기서 읽기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글자 수를 염두에 두면 된다. 그리고 ④는 ①∼③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단어거나 아니면 1연 마지막 행의 반복으로 써서 1연과 2연을 도입부로 할 수 있다. 조재도 시인은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희망'이란 시어를 반복하는 것은 시의 내용을 확대시키지 못하므로 다른 시어를 선택하면서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다. 소중하다. 귀중하다. 버릴 수 없는 녀석 등등의 말썽꾸러기지만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2연은 1연의 반복적 구조를 가지면서 동시에 의미 확대를 기하고 있다.
이처럼 한 편의 시는 다음 행이나 연을 유추할 수 있는 구조로 짜여 있다. 이러한 유추의 과정이 빗나가거나 전혀 이해되지 않는 시행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그걸 난해시라고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난해시는 전편을 읽고나면 이해가 되거나 그 개연성을 받아들일 수 있으나, 잘 빚어지지 않은 시는 도저히 앞 뒤의 행과 연을 유추해낼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흔히 T.S 엘리옷의 <황무지>를 난해시로 꼽기도 한다. <황무지> 시보다는 그에 대한 주석이 더 길고 어렵기만 한 것이 '난해시'로 분류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문화가 기독교 사상과 그리이스 로마 신화 속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에 대한 박식함이 없고서는 이해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어릴 때부터 기독교 문화와 다야한 유럽문화 속에서 성장한 지식인으로서는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