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온 글
저가 담아 온 글입니다. 참고하여 읽어주신면 감사하겠읍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대대적으로 사육신에 대해 "사육신은 기존에 알려진 '유응부'가 아닌 '김문기'선생이다"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이것은 굉장한 사실이다.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리고 또 믿고 있는 역사란 것이 얼마나 진실과는 먼 이야기인지는 지금부터 쓰는 사육신에 관한 일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사육신"은 세조가 자신의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이를 잇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그에 반대하다가 세조에 의해 극심한 고문을 받다 참형을 당한 사람들 중 고위직으로서 가장 주도적인 입장이었던 여섯사람을 가르킨다. 그런데 이 사육신을 사람들은 조선시대 중반에서 부터 현재까지"남효온" 선생이 지은 <육신전>에 의거하여 "하위지, 박팽년,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만이 진짜 역사라고 믿었었다.
현 한국사의 최고 대가 이자 기둥인 "이병도"박사까지 처음에는 사육신이 유응부가 맞다고 했었으니 "남효온"선생의 <육신전>은 그 자체로 몇 백년에 걸쳐서 거짓없는 역사책으로 믿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전, 정확히는 28년전, 학자들의 자존심을 걸고 진짜 사육신은 "유응부"가 아님 "김문기" 선생임이 밝혀졌다. 그 당시 세조에 의해 처형당하던 당시부터 사육신이란 말은 있었고 그 사육신이란 말은 세조에게 반대한 수 많은 사람들 중 직책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여섯 사람을 가르킨 말이었다.
하지만 "유응부" 선생은 그 당시 벼슬의 위치로 봤을때 세조에게 반대하다 참형을 당한것은 사실이겠으나 사육신에 들 만큼 높은 벼슬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김문기 선생은 삼군을 통솔하는 다시 말해 조선의 모든 군대를 움직일수 있는 군의 최고위 벼슬이었다.
거기다 그 세조 사건당시 "남효온"의 나이는 고작 3세에 불과했는데 훗날 성인이 된 그가 어떻게 똑바른 눈으로 그 당시를 기술할 수 있겠으며 육신전을 쓰며 김문기 선생을 빼는 실수까지 더함으로써 희대의 충신을 역사의 뒷면으로 묻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한가지 더 의심되는 것은 남효온은 육신전을 쓰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세조의 왕위 계승을 도와준 한명회등과 같은 인물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같은 말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육신전을 쓰고 생육신으로 불리고 충신이 된 일이다.
거기에 유응부와 남효온과는 먼 친척관계이어서 육신전에 김문기 선생을 뺸 것이 실수가 아닌 고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져 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성종임금이 육신전을 보고 "무슨 이런 헤괴한 거짓으로 일관된 책이 있느냐"며 그 책에서 "유응부"가 아닌 "김문기" 선생임을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육신전>이 현대까지 사람들이 굳게 믿고 믿은 역사가 됬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더 어이 없는 것은 고문당시 불에 새빨갛게 달군 쇠꼬챙이를 배에 쑤시자 성삼문이 "불이 식은 것 같은데 다시 달구어 오시오" 라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는 등등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 모든 말을 김문기 선생이 혼자서 했다는 것이다.
김문기 선생 혼자서 한 말을 다른 다섯사람 한 사람 한사람씩이 한 말로 지금까지 모든 역사책에선 기록했던 것이다.거기다 고문에 못 이겨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뜻을 함께한 이들을 자백하고 죄를 인정하였는데 거기에 유일하게 불복한 사람이 역시 "김문기"선생이었다.
사람들은 "사육신"이 김문기든 유응부든 무슨 상관이냐, 둘다 존경하면 되지 할테지만.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김문기"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육신전>에 의해 후손 대대로 피해를 입고 자랐다. "김문기" 선생의 죽음 이후 "김문기" 선생은 <육신전>에 의해 사육신에서 빠진것 이외에도 희대의 충신이었으면서도 어느 기록에선 역적이었던 것으로 몰아 그 자손들은 역적의 자손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썻었다. 그래서 그 자손이 억울한 마음에 궁궐에 가서 북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역적의 자손이라 하여 그를 잡아 죽이고 또 그의 자손이 가 북을 두드리자 그 자식마저 죽은 그런 기막힌 사연까지 있다.
사육신 중 으뜸이었고, "김문기" 선생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죽음 바로직전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했는데 오직 "김문기" 선생 혼자만이 단종을 비웃으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 하셨다.그런데 그런 "김문기" 선생에 대한 평가는 역도라는 평가외에도, 사육신과 함께 밖에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는데 군사를 일이키지 않았다는 식으로 배신자로 몰기도 하고... 이광수님이 지으신 <단종애사>만을 보더라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육신들이 처형당할때 김문기 선생은 저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라고 써 있을 정도이다.
이 얼마나 억울하지 않은 사연인가!!!!! 누구보다 당당하셨고 사육신중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활을 맡으셨으면서 결국엔 두 마차에 의해 사지가 찢겨 나가는 형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분을.. 오해되고 와전되고 잊혀진체 몇 백년의 역사를 흘려 보낸것이다.
그에비해 "유응부" 선생의 자손들은 사육신의 자손이라 하여 그 대단한 자부심과 존경의 시선으로 단 한권에 책에 의해 전혀 다른 삶을 보내왔으니 이 얼마나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앞서 말한 것을 다시 말하지만, "유응부" 선생또한 세조에 반대하다 참형을 당했다는 사실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사육신이였다는 그 위치로로서의 역사적 자부심을 김문기 선생의 후손에게서 뺏어서 누려왔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육신이 "유응부" 선생이 아닌 "김문기" 선생으로 밝혀진 데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조선왕조실록>이 있다 하여도 그 양이 보통 어마 어마 한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 <조선왕조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500년간 하루도 안 빠지고 쓴 일기가 있다고 할때 그것을 어떻게 다 읽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필요한 시대의 필요한 부분을 때어 읽는데 한국사의 대가였던 "이병도" 박사까지도 사육신 부분만큼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거기에 "유응부" 선생의 후손들이 사육신이 자신들이 조상이었다며 <한국사편찬위원회>에 항의 했었기 때문에 "김문기" 선생의 후손들의 요청에도 <한국사 편찬 위원회>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조선왕조실록>의 정확한 기록과 육신전을 제외한 다른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기록등에서 "김문기" 선생의 이름을 밝혀내고 유응부 선생 후손들의 항의 에도 불구하고"학자들의 자존심을 걸고 사육신은 김문기 선생이 맞다" 라는 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1977년 그 회의 내용을 요약해서 보면 이렇다.
이 : "저희들의 자존심을 걸고 사육신 중에 한분은 김문기 선생님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사육신으로 알려진 유응부 선생님을 빼고 김문기 선생님을 넣는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김 : "그렇다면 김문기 선생님을 포함해서 사육신의 칠인이라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 이 : "지금까지 여섯으로 알려져온 사실을, 그리고 실록에도 명확히 적혀 있는 사실을 그렇게 저희의 마음데로 고치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진행위원장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병도 : "실록에 의거해 정설로서는 사육신을 하위지, 박평년, 이개, 성상문, 유성원, 김문기로 발표하고.. 사선(민간에 떠도는 역사)으로는 유응부도 포함되어 있다로 발표 하는 것으로 끝을 맺읍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상당히 많은 고심과 회의 끝에 조심스럽게 내려진 결론이었다. 학자의 자존심을 걸고 사육신은 "김문기" 선생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당연하게 알려져온 역사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유응부" 선생의 후손들에 의한 항의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이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모두가 사육신은 <육신전>에 쓰인 그 사육신 뿐이다라고만 알고 믿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역사란 것이 얼마나 잘못되기 쉬운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완용이 사실은 독립운동가였다라는 것과 같은 정도의 충격인 것이다. (물론 이건 예로 설명한 거고 이완용은 시대의 친일파다)
이것은 1977년에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음에도 아직 세간에는 거의 아는 사람들이 없다. 벌써 몇 십년이 흘렀는데도.. 2002년까지 교과서에선 "김문기" 선생님의 이름을 찾아 볼수 없었다. "남효온" 선생의 <육신전>이나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말하는 "김문기"선생의 이름에 대해 알뿐 그 분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볼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단편적인 사실들로 만들어졌는지, 또 어떤 오류가 숨어 있는 지 깨우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의제기 내용추가 (2005-10-22 23:07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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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김문기 선생의 문집을 후손들이 편찬한 ``(金忠毅公 遺事) 김충의공 유사``와 ``(白村遺事) 백촌유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것입니다. 문집내용중에는 후손들이 수많은 선현들에게 받아놓은 글들이 있습니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드리자면, ^<沃川遺墟碑文>옥천유허비문, <行狀>행장, <諡狀>시장 ,<剡溪書院奉安祝文>섬계서원봉안축문,<春秋享祀祝文>춘추향사축문, <御製配食壇常用祝文>어제배식단상용 축문,등.... 수 많은 글들이 충의공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2권에는 <六臣傳>육신전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충의공 김문기선생께서는 (六臣)육신과 함께 돌아가셨다고 했지, ``육신(六臣)이다``라고 한것은 전혀 없습니다. 본인 선조의 문집을 간행하는데 후손들이 거짓으로 올렸겠습니까? 그리고 추강 남효온 선생께서 어릴적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못믿겠다던 `야사`라고 주장하는 육신전은 왜 수록되어 있는지 김문기선생이 사육신이라고 주장하는 분들께 묻고 싶군요. 충의공 김문기 선생은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덕(德)에 손상이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 참고로 충의공 김문기 선생의 시장(諡狀)은 1,2,3,면으로 포토앨범에 올렸습니다. 보시고 싶으신 분은 검색창에 `김문기` 치시고, 이미지를 누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白村遺事(백촌유사) - 백촌 김문기 선생 실기(實記) - 규장각 소장번호 <古 4650-139> |
이의제기 내용추가 (2006-02-28 01:24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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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는 서문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의 1977년의 오류를 인정하고.. 1982년 11월 11일에 재심의 한 결과 종래의 사육신 구성을 변경한바 없음.. 이라 하셨는데.. 이는 사육신은 그전까지 알려진 "하위지, 박팽년,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가 맞고, 김문기 선생은 아니다.. 라고 해석해도 되겠는지요? 세조왕조실록은 승리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다.. 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만...
그렇다고 한다면.. 님께서 참고하여 보내주신..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내용에 적혀 있는 것과 님이 하신 말은 서로 합치가 되지 않는다고 보이네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보낸 답변 내용만을 보면.. 1977년에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 사건의 주모자가 맞음을 인정하되, 그 묘역에 관하여서만 자신들의 권한이 아님을 말하고.. 1982년에 내려진 재심의 에서는 "종래의 사육신은 변경된 바가 없고, 김문기 선생을 현창한다" 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뜻은 사육신에는 여전히 유응부 선생이 포함되어 있지만 사육신의 주모자.. 다시 말해.. 중요역활을 맡았던 인물로 김문기 선생이 맞다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제가 올린 글에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글이..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지금과 비교해 볼때.. 당시에 제가 너무나 형편없는 수준이었기에 "사육신은 유응부 선생이 아니고 김문기 선생이 맞는데, 그동안 우리는 날조된 역사를 알고 있엇던 것이다" 라고 오해되게끔 쓴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분명히 제가 부족했던 탓이지요.
그러나 당시의 결정 내용만을 봤을댄, "1977년 12월 29일 육신관계 결의 내용에서 김문기를 사육신에 현창하여야 한다고 사단하고 조선실록은 사관이 기록한 정사(正史)이고 추강집은 전문한 것을 사선한 것임을 밝힘." 이라고 했었습니다.
제 글에선 사선으로는 "유응부"도 포함되어 있다.. 라고하며 사선이란 말 역시, 민간에 떠 도는 역사정도로 가치 절하하여 쓰기는 했지만.. 이 모두는 당시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단 제가 부족했던 탓이지요.
아무튼 이렇다고 한다면.. 미루어 보건데... 사육신에 김문기 선생이 현창되셨고 그 분이 주된 역활을 하신.. 당시의 주모자였다는 사실엔 이의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제 글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가 아니라.. 그동안 누구도 알지 못했던 김문기 선생이 새롭게 현창된 사실입니다. 유응부 선생 또한 당시에 세조에 반대하다 참형을 당하신 분들 중 한분이신 훌륭한 분이심이 분명한데 누가 맞고 누가 틀리고가 중요하겠습니까?
다만 현창과정 또한 기존의 사육신으로 알려지신 분들의 당순한 동료로서가 아니라 가장 주요한 역활을 담당하셨던 분으로서 김문기 선생이라는 그 이름 석자가 알려진 것이 중요한 것이라 보이는군요. 그리고 또 그동안 잘못 알려져 내려온 사실때문에 어느 곳에선 역적의 후손들이라며, 또 어느 곳에선 비겁한 배신자의 후손들이라며 피해를 본 그 후손들의 기막힌 사정을 소개한 것이 제 글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의 골자라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역시 벼슬의 위치를 보나, 다른 상황으로 보나..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내신 김문기 선생님께 비중을 더 드리고 싶은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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