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정 붙이기 힘든 삭막한 도시보다 할아버지가 살던 시골 마을 풍정(風情)이 더 살가운 것도 그곳이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북 완주군 고산 지방은 한국 천주교 창립과 더불어 형성된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어 우리 믿음의 고향과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고산은 전주시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다. 갈대가 널브러진 만경강을 지나 읍내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고산성당(주임 이태주 신부)이 있다. 성당 부지인 동쪽 대나무 숲을 경계로 해 고산초등학교가 있고, 북동쪽 고산천변에는 향교가 있다.
고산본당이 설립된 것은 1958년이지만, 그 모태는 1893년에 설립된 되재본당이다. 고산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이다.
고산 지역은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를 피해 각처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에 저구리ㆍ넓은바위ㆍ다리실(천호)ㆍ차돌박이(백석)ㆍ석장리ㆍ되재 등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이 지역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현재 천호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베드로)ㆍ손선지(베드로)ㆍ정문호(바르톨로메오)ㆍ한재권(요셉) 등 순교성인 4위와 김영오(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명이 고산 지역 출신이다. 또 한국전쟁 당시 대둔산과 천호산 일대 창궐한 빨치산에 의해 순교한 신자들도 상당수 있다.
고산출신 성직자로는 이약슬ㆍ이종필ㆍ허일옥ㆍ김종택ㆍ김순태ㆍ경규봉ㆍ강명구ㆍ장상원ㆍ김광태 신부 등 9명이 있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고산 지역에서는 성당이 세워지는데 1895년에 완공된 '되재성당'이다. 되재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성당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성당을 지을 때 화엄사와 쌍계사에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되재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그러나 되재성당터는 지난해 7월30일자로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돼 올해부터 국가와 도 지원을 받아 되재성당 복원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현 고산성당은 본당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 1994년에 완공했다. 성당 외관은 한옥과 교회의 전통 건축양식인 바실리카 형식을 절충한 건물로 장방형에 종탑이 있는 독특한 구조로 돼 있다.
고산성당을 설계한 김승배(단국대 종교건축연구실)씨는 "옛 되재성당이 보여주었던 교회 건축의 토착화 의지를 계승해 설계했으나 복고적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뿐 아니라 성미술ㆍ조명ㆍ설비 등 모두가 복음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고산성당은 우선 해발 55m 언덕에 자리한 지리적 공간미를 잘 살리고 있다. 사방에서 보이는 위치에 종탑을 배치해 놓았고, 성당 전면에 넓은 광장을 두어 남서쪽 원경과 북동쪽 수려한 근경을 그대로 살려 주변 자연환경과 성당 건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제대 벽면에 '하늘과 땅의 만남'을 주제로 한 벽화가 있다. 조광호(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 작품이다. 벽화는 무명 순교자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앙고백을 보여주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둘 사이를 이어주는 19개 계단(지상의 12계단과 천상의 7계단)이 있고, 계단 양편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 천상의 붉은 빛 십자가는 한국 순교자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형구에 나 있는 7개 구멍은 7성사를 상징한다. 또 좌우 생명의 나무는 고산지방의 특산물이요 우리 농촌을 상징하는 감나무로 땅과 농촌이 우리 삶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당 네 면의 유리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유리화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왼쪽 유리화는'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과 기적의 빵과 물고기로 나타내고 있다. 제대 정면 2층 성가대석 뒷편에 있는 7개 유리화 창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데 청색 주조에 붉은 색을 대담하게 배열해 강렬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제대 앞 면에는 성부의 '손'과 성자의 '십자가',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와 함께 삼위일체의 상징인 삼각형이 양각돼 있으며 제대 좌우로 'A'(알파)와 'Ω'(오메가)가 부조돼 있다.
이태주 신부는 "지난 2년 동안 54명의 장례미사를 거행할 만큼 본당 신자들이 고령화돼 유구한 신앙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해 안타깝다"며 "올해 되재성당터 복원공사를 본격화해 옛 교우촌 전통을 이어가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리길재 기자 평화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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