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傷處를 안고
나는 내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나던 전후의 일기를 더듬어가며 눈물겨운 추억의 이글을 쓴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뒤에 나는 미국유학을 해보겠다고 섣불리 여권 청구를 했다가 실패를 하고, 2년 후에 다시 독일 여권을 주선하다가 또한 실패를 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양행(洋行)이란 것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또 혹시 이다음에 사주팔자가 좋아서 백만장자나 된다면 그때에는 별문제려니와 그렇지도 못한 나로서는 부질없이 양행이란 허울 좋은 이름 아래에서 팔자에 없는 객고(客苦)를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같이 단념하고 지내기를 10년 가까이 한 5년 전(1931년) 봄 3월 12일에 나의 마음에는 뜻하지 않은 커다란 변동이 생겼던 것이다. 그때의 심적 변동이란 거의 잊어버리게 된 지금에 있어서 새삼스럽게 회고하고 싶지도 않고 또 여기에 다 말할 필요도 없지마는, 하여튼 그때의 나로서는 평정(平靜)한 생활을 해갈 수 없었던 것만은 지금에도 잘 기억되는 사실이였다.
그때에 나는 마치 정신병 환자가 전지 요양하듯이, 실연을 당한 사람이 새 애인의 품에서 전날의 상흔(傷痕)을 씻어 보려는 듯이, 이 강산을 떠나서 산 설고 물 설은 만리타향에서 방랑의 생활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나는 때를 머물지 않고 곧 나의 가장 신뢰하는 벗, D씨에게 나의 심중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때에 만일 D씨가 “글쎄...” 하기만 했더라도 나는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D씨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기가 마치 나와 꼭 같은 심경에 있는 것처럼,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당한 것 이상으로 몹시 앙분(昻奮)하여, 나의 양행설(洋行說)에 공명해 준 것이다. 그날 밤이다. 나는 곧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글을 썼다. 아무리 해외 방랑이라고 하지마는 터무니없이 무모한 짓을 할 수는 없어서, 그래도 좀 안전지대가 되리라고 생각한 미국으로 방랑의 첫 걸음을 내어 놓기로 결심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미국에 입국하려면 나중에는 어찌되었던 간에, 우선 그 나라 노동 장관이 승인한 학교의 입학 승낙서(入學 承諾書)가 없이는 여권수속을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아래에서 나는 입학 승락서를 얻어 보내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B데크 120호실.
그 후 2개월이 지난 5월 7일 아침에 미국으로부터 일봉(一封)의 서류 우편이 떨어졌다. 이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입학 승낙서였던 것이다.
민적등본(民籍謄本)을 만든다, 사진을 찍는다, 부형(父兄)의 양해를 구한다, 사실 문자 그대로 동분서주한 끝에, 그 다음다음 날인 5월 9일에는 여권수속에 필요한 일절 서류를 만들어서 경기도청(京畿道廳)에 내어밀었다. 그러나 전년에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여권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하고 D씨나 또는 나의 형까지도 이 약속만은 굳게 지키기로 했다. 5일이 지난 후, 경찰서로부터 여권이 나왔으니 찾아 가라는 전화가 왔다. 그때 풍설에 들리기는, 여권 발급까지에는 적어도 2~3개월은 걸린다고 하므로, 나는 이 전화를 받고도 반신반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너무도 의외로 속히 나왔다는 말에 나는 일종의 낙망(落望)과도 같은 명상(名狀)할 수 없는 심적동계(心的動悸)까지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청각에 갑자기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여권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히 들은 사실이다. 더구나 여권 수령에 필요한 십원(拾圓) 인지를 사가지고 오라는 말까지 들었은즉, 나온 것만은 확실했던 것이다.
장난하듯이 시작된 일이 여기까지 진척되고 보니, 못갈 때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실을 언제까지나 숨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 영사관에 가서 사증(査證)을 받느니, 우선회사(郵船會社)에 가서 선실을 예약하느니, 이러한 종류의 표면적 행위가 나의 미국행을 자연히 세인(世人)에게 알리고 말게 되었으며, 사실상 내 자신도 양행의 준비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5월 29일에는 서울에 있는 유한양행(柳韓洋行)을 통하여 일본 우선회사에 선실을 예약한 바, 그때로부터 2개월 후인 7월 30일에 요꼬하마(橫濱)를 출항하는 배가 2개월 전인 그날에 2등은 벌써 전부 만원이라는데 저윽이 놀래었지마는, 그렇다고 더 늦게 떠날 형편도 못되고, 또 중도에 호눌룰루 항에 하륙(下陸)하여 연주회를 하기로 교섭이 되어 있은 즉, 다른 항로를 취할 수도 없어서 진소위 울며 겨자먹는 격으로 주제넘게 1등 실을 예약했던 것이다. 몇일 후에 동경 N. Y .K. 본사로부터 선표가 왔는데, 내가 타고 갈 배는「순요마루(春洋丸)」요, 선실 번호는 「B 데크 120호실」이며 그 방에는 외국손님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같이 하여 나의 북미 유학은 확정된 사실이요, 이제는 7월 30일이란 출항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惜別의 눈물
그러나 그때의 나의 생각은 유학이라는 것보다도 방랑에 있었고, 여권 수속상 편의와 그 밖의 일신상의 사정으로 미국을 택하기는 했지마는, 실상인즉 미주(美洲)를 거쳐서 유럽대륙을 편력(遍歷)해 보려던 것이다. 하여간 정 깊은 고국산천을 등에 지고 산 설고 물 설고 무의무친(無依無親)한 이족(異族)의 나라로 떠나려는 나에게 있어서는, 더구나 환향(還鄕)할 기약조차 망연하고 보니, 어찌 고국에 대한 한 줄기 석별의 눈물이 없었을 것이랴. 6월 16일 밤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열렸던 고별 연주회 때, 순서 마지막에 있던 「고별의 노래」를 연주할 때에는, 사실상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떠날 날이 차차 가까워짐에 따라서 여러 친우들의 송별의 잔치도 잦았고 가구 서책 등의 처리에도 다망했을 뿐 아니라, 도미(渡美) 이후의 생활비나 학비를 한 푼이라도 더 만들어 보려기에, 낮이 되면 눈 코 뜰 새도 없었지마는, 그러나 늦은 밤 외로운 방안에 나의 침상에 홀로 누웠을 때에는, 까닭을 모를 만치 착잡한 정회(情懷)에서 솟아나는 눈물이 베개를 적신 적도 한두 때가 아니 엇던 것이다. 남은 외국에 가지를 못해서 애를 태우는 일도 있는데 나는 영년(永年)의 숙원을 풀게 된 이때에 있어서 무엇이 그다지 슬펐던가. 이것은 차마 쓸 수 없는 눈물의 기억이지마는 그러나 일기에 역력히 씌어 있는 것을 그냥 묵과할 수도 없어서 새삼스럽게 울렁거려지는 가슴을 누르고서, 그때의 나의 심경을 윤곽만 그려 보련다.
옥임(玉姙)이와 금영(錦榮)이
그때에 나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의 여성이 있었다. 하나는 나의 친조카로 나에게 가장 귀엽게 굴고 따르던 당년 21의 옥임이, 하나는 나의 제자요 동시에 의매(義妹)로 내일을 위하여, 특별히 나의 장래를 위하여 성심껏 애써주던 당년 21의 금영이,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유일한 이성의 동무로 나와 일생을 같이 하겠다는 약속까지 한 K양. 그런데 3월 12일이란 날은 K와 나 사이에 아무 불만, 아무 시의(猜疑), 아무 부실(不實), 아무 저어(齟齬)도 없이, 말하자면 서로 눈물을 흘려가며 서로 헤어지기를 애석해 하면서도, 그러나 전날의 약속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부디쳤던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운명의 신(神)의 악희(惡戱)였던 것이다. 의외에 생긴 이 사실은 옥임이와 금영이의 어린 가슴에도 적지 않은 수탄(愁嘆)과 낙망을 던져주었다. 물론 이 두 소녀도 K를 잘 알았고 K의 사랑도 많이 받았으며 또 내가 K를 알게 된 것도 말하자면 이 두 소녀의 아리땁고 고마운 생각에서 비로소 싹이 트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헤어진 것이 아니요, 울며 원통해 하며 헤어진 일인 이상, 옥임이의 순정도, 금영이의 지성도, 여기에는 하등의 효험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두 여성은 매일매야(每日每夜) 틈만 있으면 내게 찾아와서 나의 쓰라린 심중을 위로해 주기에 애썼던 것이다. 이것이, 이 고맙고 아릿다운 생각이, 후일에 나의 마음에 영원토록 사라지지 못할 큰 가시못을 박아줄 줄이야. 그 애들인들 어찌 알았으며 낸들 어찌 알았으랴?
우연히 한 일도 어떤 때는 우연으로 생각할 수 없이 되는 적이 많다. 나의 사진 앨범의 어떤 장에는 세 사람의 사진이 붙어있다. 한복판에는 내것, 왼쪽에는 금영이의 것, 그리고 바른쪽에는 옥임이의 것이. 속담에는 세 사람이 사진을 박으면 중앙에 있는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미신의 말이 있지마는 나의 경우에는 그것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옥임이가 세상을 떠나고, 두어 달 후에는 왼쪽에 있던 금영이 마저 타계(他界)의 사람을 당할 때에, 나는 이 속담이 적중되지 않았음을 얼마나 슬퍼했으랴! 무위(無爲)의 내 한 몸으로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이 두 소녀를 대신했던들 얼마나 기쁜 일이었을지! 그러나 인사(人事)는 재천(在天)이라는데 생사를 어찌 사람의 맘대로 할 것이랴. 이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비통절통(悲痛絶痛)할 뿐이다.
옥임이의 철도자살
4월 9일! 내 가슴의 피 묻은 상처가 오히려 선려(鮮麗)한 이 날에, 나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이 애지중지하던 옥임이는 지극히도 악착스러운 주검을 수행했다. 제 부모의 비통해 하는 정상(情狀)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내 손으로 그 애의 유해(遺骸)를 추려가지고 생전에 처음 보는 화장장(火葬場)의 무시무시한 홍염(紅焰)속에다가 내 손으로 불을 살을 때에, 사람이 이런 때에 미치지 않는다면 어느 때 미칠 것인가. 고인의 동창(同窓)되는 어린 소녀들의 입으로부터 통곡과 함께 섞여 나오는 찬송가의 소리는, 이세상의 지비지참(至悲至慘)을 그대로 그려놓은 최대 비극 그것 이였다.
이날부터 이다. 내가 밤의 장안(長安)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니기 시작한 것은-. 나는 사실로 반광란상태(半狂亂狀態)에 빠졌던 것이다. 애인과의 본의 아닌 이별, 지애(至愛)하던 조카의 절참(絶慘)한 횡사(橫死), 여기에서 받은 나의 마음의 상처는 정향 없는 거리로의 방황(彷徨)과 새벽하늘의 음험(陰險)한 한기에 한층 더 악화하여, 나는 그날 중순에 늑막염(肋膜炎)이란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병마에 사로잡힌바 되어 드디어 세브란스병원 병상에 들어 눕고야만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병은 건성이요, 초기였던 까닭에 10여일 후에 퇴원은 했지마는 그러나 기거음식(起居飮食)에 있어서 상태를 벗어난 지 이미 오랬고, 이것이 하루 이틀 계속되는 동안에는 위장병을 병발(倂發)하여, 1일 3식을 제대로 한 날이 없었으며, 요코하마에서 배 타던 전날 밤까지도 미음이나 죽으로 겨우 연명해 가던 것이였다.
고별연주회
이렇게 지나는 중에서도 경향(京鄕) 수삼 처에 고별연주회를 열었으니 이것은 수입을 위하여서 보다도 평소에 나와 가깝게 지나던 동무들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보기 위하여 한 것에 불과하였다. 6월 27일 밤에 목포에서 연주회를 열고, 그곳 교회병원에 재직하던 나의 사질(舍姪-맏조카) 재유(載裕) 군과 함께 대구로 와서, 29일 밤에 대구극장에서 다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가 목포로 돌아갈 기차시간의 관계로 말미암아 연주하다 말고 극장 뒷방에서 재유 군과 분수상별(分手相別) 할 때에 우리 숙질(叔姪)은 무언중에도 이것이 영이별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서 남아로서의 비장한 눈물을 머금고서 앞날의 성공과 재회를 심축(心祝)할 뿐이었고,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 두 곳의 연주회에도 나는 여관의 병석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가지고 출연했지마는, 경성에 돌아온 후에는 신체의 쇠약이 더욱 심하여, 사실상 그때 나의 생각으로는 출항기일 전에 어떠한 일이 생길지 예측키 어려웠던 것이다. 바로 그 전후해서 일어난 일이다. 경성에서 고별연주회를 열던 6월 16일을 2~3일 앞두고서 금영이는 우연히 득병(得病)하여 자리에 누운 것이 하루 이틀 갈수록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도저히 집안에서 치료를 시킬 수는 없으므로, 필경은 의전(醫專) 병원에 입원 시켰던 것이다.
아아, 그러나 이 무슨 인과(因果)일까! 그 애의 병은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장질부사(腸質扶斯)였던 것이다. 매일 간병을 하러 가던 내가 목포, 대구 지방의 연주 여행을 마치고 또 다시 7월 4일에 평양에서 고별 연주를 하고 돌아온 때에는, 그의 병은 이미 생사의 분기점에서 일진일퇴(一進一退)하여 가엷은 명맥이 간병하는 친척들의 하염없는 눈물을 자아낼 뿐 이였다.
금영이 마저 가고
7월 12일 새벽! 밤새도록 계속되던 악몽에서 눈을 채 뜨기 전에, 금영의 사망을 알리는 놀라운 비보는 기어이 날라 오고 말았다. 옥임의 참혹한 주검을 본지 백일이 못되어, 옥임이 보다 못하지 않게 사랑하고 귀해 하던 금영의 주검을 또 당하고, 또 다시 내손으로 관을 들어다가 지긋지긋한 그 화장장의 같은 화구(火口)에다 집어넣어 회색 연기를 만들어 버리고 온 나는, 정말로 더 살고 싶은 생각은 촌분(寸分)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세상사 허무하다 한들 어찌 인생처럼 무상할까 보냐. 첫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울며불며 갈팡질팡하여 겨우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때는 밤 8시 30분 경이였다. 종일토록 비워둔 뱃속에서는 응당, 영양물을 요구함도 심했겠거늘,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 다 잊어버리고서도 무슨 정신엔지 바이올린을 꺼내서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서 한껏 켜(彈)다가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던 것이다.
아무 정신없이 아무 생각없이 켠 이 곡조가 단장(斷腸)의 비곡(悲曲)이 되었던 것은, 그 이튿날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유하던 집 옆에 있는 중앙보육기숙사(中央保育寄宿舍)의 사생들과 사감 선생은 이 밤에 켜던 곡조만은 어찌도 슬피 들렸던지, 내 방밖 창밑에 와서 밤이 늦도록 울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 나는 나의 이 곡조가 애처롭게 세상을 떠난 고인의 영을 위조(慰弔)하였으리라고 믿어져서 슬픈 중에도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신음하는 K
이러한 불행이 계속되는 동안에 또 한편으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전날에 사랑하던 K양이, 내가 병원으로부터 나온지 열흘이 지나지 못하여 내가 앓던 병과 꼭 같은 늑막염으로 부인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안 것이다. 내가 알고 내가 사랑하던 3인의 여성 중에서 두 사람은 이미 타계로 가버리고 나머지 한사람마저 병상에서 오랫동안 신음함을 볼 때에, 비록 그는 나와 사랑의 인연은 끊었다고 하지마는, 몇 일전까지도 나의 애인 이였었고, 또 몇 일후에는 그가 사는 이 강산에서 내가 떠나 가리라는 것을 생각하매, 인정상으로도 모른척하고 지낼 수는 없었다. 가끔가끔 그러나 거의 매일같이 그의 병석에 찾아가서 문병을 했지마는, 그러나 내가 K양을 찾아다니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떠날 날이 가까워온 7월 20일 경부터는 매일매야 친우들의 정다운 작별의 잔치가 뒤를 이어서, 그 덕분으로 나의 심통(心痛)은 저윽이 가라앉은 것 같았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면적에 불과한 것이요, 속마음에는 미칠듯이 불붙듯이 일어나는 슬프고 아픔이 쌓이고 뭉쳤다가는 밤중이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와서 가슴이 터질듯 태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이 같은 심경 속에 파묻혀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가지고 만리 해외에 객고(客苦)의 길을 떠나게 된 나는, 앞날의 어찌될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겠지마는, 그러나 오직 주검을 찾아서 주검의 나라로 가는 것과 같은 흐릿한 생각만이 나의 심중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랑의 스타트
7월 25일 밤 9시 5분, 다수한 친지의 전송리(餞送裡)에 나는 경성역을 등지고 우렁차고도 몹시 구슬피 들리는 기적 일성에, 머나먼 방랑의 길의 첫걸음을 내어놓은 것이다. 용산역까지 쫓아와 준 D씨와 마지막으로 악수를 할 때까지도 나는 몹시 흥분된 채로 나의 의식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내 자리에 돌아와서 홀로이 앉게 되자마자,
심안(心眼)에서 솟는 눈물은 육안(肉眼)에까지 뻗쳐 올라와서 두 뺨을 적시며 새삼스럽게도 고국에 대한 애착심과 영별이나 하는듯한 비참한 정회(情懷)가 나의 좁은 가슴을 빠개는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아침, 연락선에 오른 나는 떠나가는 뱃머리에 나와 서서, 안개가 낀 부산항의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부두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지! 미워도 내 곳이요, 싫어도 내 땅이다. 하물며 거기에는 나를 낳고 기른 부모가 계시고, 나와 같이 자라나던 동무들이 있고, 나의 여신(女神)같이 귀하고 중하게 알던 전날의 애인까지 있었음에 리요!
그러나 비록 일시는 단념까지도 했었지 마는, 그래도 심중에 항상 동경하던 구미(歐美)의 친지를 구경하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매, 고국의 산천이 차차 멀어질수록 새로운 용기와 조바심쳐지는 호기심에 마음이 끌리어서, 일종의 통쾌한 맛을 느끼지 않음도 아니였던 것이다.
선실로 들어온 나는 긴- 한숨을 내어 쉬며 좁디좁은 침대에 들어 누웠다. 어제 저녁에 D씨가 손에 쥐어주던 명함(名啣)을 다시 꺼내어 들고 두 번 세 번 다시 읽으니 읽을수록 새로운 용기와 굳센 마음을 얻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같이 쓰여 있었다.
오른 길 높곤 해도 그 위에도 또 몇 층을
늦은 양 바쁜 걸음 기 더욱 못 막을 손
상상봉 오르는 길 마음모아 받드네
몸 부디 평안하소 마음 또한 기쁘소서
품은 뜻 이뤄지고 다시 더욱 크사이다.
그 후에 일장검(一長劍)들고 주유천하(周遊天下) 하옵소
나는 다시 감격했다. 더구나 무슨 일에나 감격하기 쉽던 그때의 나로서는 명함에 적은 이 짧은 노래에 얼마나 많은 감격의 눈물을 뿌렸던지, 그러나 아무리 감격하고 아무리 용기를 얻었다 치더라도 그때의 나로서는 몸 평안해지고 마음 기쁘게 될 때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운 거리
27일 밤에 요꼬하마(橫濱)에 도착하자 곧 진전옥(津田屋) 여관에 투숙하고, 이튿날은 일찍이 동경(東京)가서 모교도 찾아보고 그곳 있는 동무들도 만나 보았다. 만나는 이마다 축하를 하고 부러워도 했지마는 나는 그런 꼴을 당할 때마다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불일 듯 했던 것이다. 이같이도 떠나기 싫은 길이 것만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이 내 신세를 생각하니, 미국유학이라는 훌륭한 간판을 집어 치우고, 아무도 모르게 귀신도 모르게 홋가이도(北海道) 수도원으로 가서 여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든 몽상이요, 공상이다.
내일 모래면 산더미 같은 크고 훌륭한 배에 몸을 실어, 넓으나 넓은 태평양 上을 나르는 새와 같이 횡단할 것을 생각하매, 그 얼마나 통쾌(痛快)하였을까. 이리 생각하면 눈물이요, 저리 다시 생각하면 기쁨이다. 이 희비 교차된 심연(深淵)에서 헤매던 나는 무엇이 되거나 어서 바삐 양상(洋上)의 몸이 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였다.
늦은 밤의 동경의 거리를 혹은 도보로 걷기도 하고, 혹은 택시로 달리기도 하여 전날 동경 유학시대에 보던 그리운 거리를 샅샅이 휘돌아서는 자정이 훨씬 지나서 다시 요꼬하마 여사(旅舍)로 돌아갔다.
여관 주인에게 승선에 필요한 모든 일을 부탁하고, 온종일 동경에서 묻혀가지고 온 먼지와 땀을 시원스럽게 씻어버린 후,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단잠을 잤다.
이튿날 다시 동경으로 가서 나와 동선(同船)할 하와이(布蛙)청년회 총무 이태성(李泰星)씨 부처와 동경청년회 총무 최승만(崔承萬)씨를 찾아본 후, 그분네 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나 서는 긴자(銀座)의 밤거리를 다시 배회했다. 그러나 하와이, 센프란시스코(桑港) 등의 미지의 대도시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그때에, 동경쯤이 다 무엇이며 긴자에서 무었을 볼 것 이랴는 생각이 나서, 그길로 곧 여사로 향하였다. 일등 선표를 가진 까닭에 검역이고 무엇이고 다 없을 줄만 알고 온종일 돌아다니다 들어가니, 여관 주인은 강둥강둥 뛰며 야단이다. 종두(種痘)를 하지 않고는 배를 타지 못할 터인데, 이번 배의 승객들은 벌써 오전 중에 종두를 넣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을 지금에 어찌할 것인가. 한일 없이 그 이튿날 아침 일찍이 검역소에 가서 특청(特請)을 해보기도 했지마는, 그러나 심중에는 저윽이 미안했었다.
7월 30일! 배 떠날 날은 왔다. 종두만 한다면 배탄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 나는, 일찍이 일찌기 서두른 것이 오전 10시가 지나서 종두장(種痘場)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의사도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 낙담! 사실로 나는 그날 배를 놓치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곧 여관으로 전화를 걸고 주인을 청(請)해다가 그와 함께 N. Y. K. 회사로 가서 이 사유를 말했다. 알고 보니 쓸데없는 걱정 이였던 것이다. 일등객은 종두를 해도 그만이요, 안 해도 그만인 것이다. 또 만일 필요하다면 선중에서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한번 속아본 마음이라 배를 타기 전에는 안심이 안 될 것 같아서, 곧 짐짝을 배에 실리게 한 후, 점심 먹을 생각도 없이 일찍이 배로 뛰어 올라갔다.
미국에 입국할 때에는 입국세를 받는 법이 있다고 세금을 미리 청구하므로, 경험 없는 나는 그네들이 하라는 대로 일일이 응한 후에 수상서원(水上署員)의 간단한 여권 검사를 치르고 순요마루(春洋丸) 갑판에 오르니, 때는 오후 1시 10분이였다.
조선아 잘 있거라.
출항 시각인 오후 3시가 가까워 오자 굉장하게도 우렁찬 기적이 엄마 찾는 송아지 울듯이 요코하마 부두를 흔들어대며 맷방석 같은 동라(銅鑼)를 두들기는 소리가 마치 전시 상태를 연상시킬 적에, 부두에 열립한 수천의 남여 전송객(餞送客)과 갑판에 나와 선 수백의 선객(船客)들 사이에는, 오색이 찬란한 테이프를 던져 주고받고 하여, 검푸른 물위에는 오색의 지교(紙橋)를 만들었다.
어떤 젊은 부인이 던진 테이프의 한끝이 내 앞으로 날러 올 때에 나는 서슴지 않고 덥석 받아 쥐었다. 물론 나에게 던져준 것은 아니겠지마는 그러나 내 것이 아니라고 고지식하게 물 아래 떨어뜨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때에 나의 머리에 전광과 같이 떠오른 생각은 아아, 만일 나에게 애인이 있어서 그가 이 테이프를 던져주고 내가 그것을 받아 들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일까.... 할 때에, 나의 눈은 갑자가 흐리어 졌었다. 그러나 본시 이 길이 그러한 달콤한 여행의 길이 아니 였던 이상에, 비록 그것이 솔직한 진심의 발로라 한들 나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망상 이였던 것이다. 나는 쥐였던 테이프의 뭉치를 슬그머니 힘없이 놓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물위에 떨어질 때까지 루안(淚眼)으로 지켰다. 아아, 물위에 풍덩 떨어져 들어갔다가 이윽고 다시 솟아나올 때에, 나는 얼마나 후회하였던가. 그러나 이러한 여성적의 쎈티멘탈한 생각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자 유량(劉喨)하게 울리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전송객들의 아우성치는 만세성에, 배는 서서히 그 거체(巨體)를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참동안, 아마 30분 이상이나 종선(從船)에게 끌려가던 모함(母艦) 순요마루는, 넒은 바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한 번 웅장한 기적을 불더니만 자체가 항행(航行)하기를 시작했다. 2~3일 전에 연락선에 오른 때는 부산항을 바라보며 부산아 잘 있거라, 조선아 잘 있거라를 불렀지마는, 지금 이때에는 요꼬하마여 잘 있거라, 동양아 잘 있거라를 심중에 외치게 될 때에 비장하다 할지, 통쾌하다 할지, 무엇으로 명상 할 수 없는 무한대의 감격과 함께, 쏟아지는 눈물은 일대의 온폭(溫瀑)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윽고 눈물을 씻고서 갑판 위의 안락의자에 걸터앉아서 아물아물 나의 안계(眼界)에서 사라져가는 요꼬하마 항을 바라볼 때, 내 눈에는 오히려 일본의 천지가 보이지마는 내 몸은 이미 태평양 上에 뜬 몸이요, 이윽고 내 발이 땅에 닿는 때에는 그것이 요꼬하마도 아니요 부산도 아닌 것을 생각하매, 슬프고 섭섭한 중에도 이제야 사는듯 한 삶을 맛볼 것 같고 자유의 천지에 호흡하는 것 같아서 젖은 두 눈이 채 마르기 전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나의 선실로 들어갔다. 서울서 선표를 살 때에, 내가 기거할 선실에는 이인의 외국인이 동승하리란 말을 들었으므로, 나는 그 이인의 외국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다. 내가 미리 짐작하기는 그 외국인은 필시 구미인(歐美人) 이려니 했고, 또 그렇다면 항해 중에 영어회화라도 연습을 할 수가 있으려니 했던 것이 급기야 만나보니 그들은 나의 예상과는 아주 딴판이었음에 나는 적지 않게 실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