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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천년을 살려거든 동백숲에 가라!
선연한 그리움으로 각인된 붉은 동백꽃
아름다운 꽃을 보려면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성급한 마음으로 피어나는 꽃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수(長壽)와 다자다남(多子多男)을 상징하는 동백꽃을 보려면 뼈끝시린 모진 추위를 견뎌내야만 한다.
동양 삼국에서 잘 자라는 동백은 중국에서는 산다화(山茶花), 일본에서는 춘(椿), 한국에서는 동백(冬柏)이라고 지칭된다. 가끔 동백과 유사한 나무로 일본이 원산지인 다매(茶梅)가 있어서 혼동을 일으킨다. 광주 서강 정보대학의 언덕에 있는데, 꽃 피는 시기도 가을에서 겨울이고 꽃 모양이 유사하나 자세히 보면, 잎이 좁고 꽃잎도 동백과 달리 한두 잎씩 진다. 또 김유정의 <동백꽃>도 실은 생강나무이지 동백은 아니다.
붉은색,흰색,그리고 분홍빛 나는 동백꽃은 있어도 결코 노란색 동백꽃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꽃은 오랜 기다림 후에 동백나무의 학명은 카멜리아 자포니카(Camellia Japonica)인데, 여기서 동백나무 종류를 총칭하는 속명 카멜리아는 17세기경 체코슬로바키아 선교사 케멜(Kamell)이 세계를 여행하면서 동백을 수집하여 유럽에 소개한 연유로 붙게 된 것이다.
차나무과인 동백나무는 조매화(鳥媒花)라는 점이 참 재미있다. ‘조매화’란 꽃가루받이를 벌이나 나비가 아닌 새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크고 화려한 꽃이 많은 열대지방에서는 간혹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동백나무가 유일하다. 동백나무의 꿀을 먹고 사는 새는, 황금색과 녹색 그리고 흰색의 깃털이 아름다운 동박새인데 이 새는 곤충도 잡아먹지만 겨울에 동백꽃이 피면 꿀을 빨고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것이다. 더디게 자라는 동백나무는 전정을 싫어하고 특히 추위에 약해서 군락을 형성하고 자라는 곳이 주로 남쪽이다. 자생하는 내륙의 북방 한계선은 지리산 화엄사이고 해안으로는 충남 서산이며 섬으로는 대청도까지 올라가고 동쪽으로는 울릉도 까지다. 이른 봄 동박새도 보고 동백꿀을 빨고 싶다면, 간지러운 바다가 있는 완도 수목원 동백 숲으로 떠나라. 이때 반드시 고개 빳빳이 처든 동백꽃에 꿀이 겁나게 많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라. 세계적으로 동백의 원예종은 600여 가지인데, 일본의 동백나무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서 많은 품종의 원에종이 일본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가운데 오색팔중(五色八重)의 귀한 동백을 소개한다. 울산광역시청에 있는 이 동백은, 임진 때 가또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발견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하여 교토의 지장원에 식재되어 자라던 것이다. 1989년 이곳에 들러 그 유래를 알았던 울산 사람들의 노력으로, 1992년 제2세목을 울산 시청 뜰에 심어 잘 자라고 있다. 이름 그대로 한 송이 꽃에 다섯 가지 색깔이 있고 여덟 겹의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지는 점이 특이하다. 이제는 완도 김해식 님의 푸른 농원에서 2세목이 자라고 있어 만나볼 수 있다.
눈 속에 능히 꽃을 피우니 동백을 노래한 시인과 묵객 그리고 화가들이 많지만 남종화의 대가 허백련은 송죽매(松竹梅)의 세한삼우(歲寒三友)에 비겨 동백,매화,수선화를 삼우군자(三友君子)라고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시(漢詩)로 동백을 읊은 이는 이규보인데 문헌상 ‘동백(冬柏)· 이란 식물명이 쓰이는 최초의 기록도 된다. [동국이상국집]에 전하는 그의 시 <동백화(冬栢花)>를 보자.
복사꽃 오얏꽃이 비록 아름다워도 가벼운 꽃 믿을 수 없도다.
송백(松柏)은 아리따운 맵시 없어도, 추위를 견디기에 귀히 여기도다.
여기 좋은 꽃 달린 나무가 있어 눈 속에서도 능히 꽃을 피우도다.
곰곰 생각하니 잣나무보다 나으니 동백(冬柏)이란 이름이 옳지 않도다.
성삼문은 그의 문집 [성근보집]에 <설중동백(雪中冬柏)>이란 작품을 남겼다.
고아하고 조촐함은 매화보다 낫고
아리따움은 너무 지나칠 정도인가
이 꽃이 우리나라에 많으니
봉래라는 이름이 마땅하도다.
고전에도 많지만 근래의 시인들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정훈은<동백>에서,
백설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무치는 정화(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라고 노래했고,
미당은 <선운사 동구>에서,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향기로 남았습데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데다
라고 발길을 확 당기는 개미를 주고 있다.
지금은 찾기 어렵지만 거문도에서 볼 수 있었던 섣달 그믐날의 ‘동백꽃 목욕·은 임신을 돕고 피부병에도 좋을뿐더러 종기에도 약이 된다니 건강과 미용의 참살이 목욕으로 권해 봄직하다. 더구나 곱게 머리 빗고 동백기름을 발랐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체취도 알고 보면 동백기름 냄새가 아니겠는가.
어머니 체취로 남은 동백꽃이여
이계절에 남도의 꽃 동백(춘백)을 찾아 떠나는 분들에게 한번쯤 꼬옥 가보기를 권하는 국내 동백꽃 군락지나 명목 몇 곳을 소개한다.
1.전남 강진군 만덕산 백련사 골짜기
2.여수 오동도
3.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동백 숲
4.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정 신당 숲:천연기념물 169호
5.경기도 옹진군 백령면 대청도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66호]
6.경상북도 울릉군 울릉도 망향봉 동백숲
7.울산광역시청의 五色八重 동백
8.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진리의 동백 당산
9.경상남도 거제도의 팔색조와 동백숲
10.전라남도 장흥군 관산면 천관산 동백숲
11.해남군 송지면 달마산 미황사 동백
12.완도군 전남 도립 완도수목원의 동백 군락
13.여수 돌산읍 율림리 임포의 동백 당산나무
14.전남 신안군 거문도의 백동백과 분홍 동백
15.광양 백계산 옥룡사지의 동백 군락
동백꽃은 서식 장소의 기후와 환경에 따라 꽃의 크기와 색에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원예종도 좋고 다양한 색깔과 크기도 좋지만, 이곳 서천 마량의 동백꽃은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 때문인지 남쪽에서 피는 꽃보다도 크기가 작아 화려함은 없지만 동백의 붉은빛은 더욱더 선명한 것 같다.
*대동문화 36호[숲에서 만난 행복 -겨울 동백숲]에 난 기사입니다.
3. 서천의 문화유산
<보물>
** 비인5층석탑
명 칭 : 비인오층석탑(庇仁五層石塔)
분 류 : 석탑
수 량 : 1기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 183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서천군
지방적인 특색이 강했던 고려시대의 탑으로, 옛 백제 영토에 지어진 다른 탑들처럼 부여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하였는데, 단층기단(單層基壇)에 5층(五層)의 탑신을 갖추는 등 백제계 석탑양식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은 목조건축의 기둥과 벽과 같이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판판한 돌을 세워 막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을 기단에서처럼 기둥과 벽을 따로 마련하여 세워 놓았는데, 각 면의 모습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몸돌 위로는 지붕돌을 얹기 전에 지붕받침을 2단 올려놓았는데 그 모습이 정림사지 5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1층 몸돌의 각 기둥들이 아래로는 기단을 누르고, 위로는 지붕받침을 이고 있어, 마치 신을 신고 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느린 경사를 이룬다. 경사면의 아래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끝에서 위를 받치듯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형태의 크고 작은 돌이 겹쳐 얹혀져 있고, 그 위로 네모난 돌이 놓여있다.
전체적인 세부양식이 정림사지5층석탑을 따르려 힘을 기울인 흔적은 보이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큰 지붕돌, 1층에 비해 갑자기 줄어든 2층 이상의몸돌 등에 의해 균형이 깨지고 있다. 하지만,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분포에 따라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목은이색영정
문화재명 : 이색영정 (李穡影幀)
분 류 : 초상화
수 량 : 3폭
지 정 일 : 1995.03.10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463
시 대 : 영조31년 (1755)
소 유 자 : 목은영당한산이씨대종회
관 리 자 : 목은영당한산이씨대종회
여말삼은<麗末三隱> 가운데 1인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영정<影幀> 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의하면, 원래 관복과 평상복의 초상화 2본<本>이 있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동형동규<同形同規>의 초상화가 서천 영모영당<永慕影堂>과 예산 문정공영당<文靖公影堂>(누산영당<樓山影堂>)에 모셔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기간 보관과정에서 초<초>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해 효종<孝宗> 5년<年>(1654) 후손들이 2본<本>을 모사하여 영당에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예산<禮山> 누산영당소장본<樓山影堂所藏本>은 1654년 사대부화가였던 허의<許懿>(1601~?)와 유명한 화사<畵士> 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지며 사모<紗帽>를 쓴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에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공신도상형식<功臣圖像形式>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목은영당소장<牧隱影堂所藏>의 소본<小本>은 비록 사방이 잘려나가 본래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반신상<半身像>이지만 필세<筆勢>에 골격<骨格>이 감지되고 안면처리<顔面處理> 역시 섬세하여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과 같은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전체적으로 고격<古格>을 견지하고 있다.
대본<大本>은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 동형동규<同形同規>의 것으로 화폭<畵幅> 우측상단<右側上端>에 추근<椎近>의 찬문<讚文>이 적혀 있는데 1526년 김희수<金希壽>(1475~1527)가 제기<題記>를 썼던 영정을 1711년에 다시 개형<改模>하여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봉안<奉安>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고식<古式>을 충분히 따르되 약간씩 내비치는 선양기<渲梁氣>가 이 초상화의 이모년대<移模年代>를 말해준다.
영모영당<永慕影堂>의 영정<影幀> 역시 동일<同一>한 상용형식<相容形式>인데 화폭 우측상단에 권근<權近>의 목은선생화상찬<牧隱先生畵像讚>과 제기<題記>가 적혀있어 이 초상화가 1755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본<本>은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에 비해 수염처리나 창의<창衣>의 묘사 등 표현 기법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이는 이모<移模>를 거듭한 이유 외에 화사<畵師>의 기량이 못미친 때문으로 보인다.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화기<畵記>에 의해 조선 헌종 10년(1844)에 이모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예산 누산영당본과 동형동규<同形同規>의 본<本>으로 서대<犀帶> 및 족좌대<足座臺> 위의 문양표현이나 연폭<聯幅>를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양식적으로 고식을 띠고 있으며 공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뛰어난 화사에 의해 이모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상에서와 같이 이색영정은 재세시<在世時>의 본<本>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중기<朝鮮中期> 일류화가의 솜씨가 노정<露呈>된 원본<原本>에 충실한 반신상<半身像>과 전신상<全身像> 역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초상화 양식을 갖추고 있고 연대<年代>가 올라가는 원본에는 거듭 중모<重模>한 것으로 3본<本> 모두 작품의 수준이 높고 비교적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피사인물<被寫人物>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므로 회화사연구<繪畵史硏究>에 귀중한 자료<資料>로 평가<評價>된다.
<천연기념물>
**마량리동백나무숲
종 목 : 천연기념물 169호
명 칭 : 마량리동백나무숲(馬梁里동백나무숲)
분 류 : 자생북한지
수 량 : 8,265㎡
지 정 일 : 1965.04.01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14
소 유 자 : 서천군
관 리 자 : 서천군
마량리에는 큰 규모의 발전소가 있고 발전소 뒷편 바닷쪽에 표고 약 30m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을 덮고 있는 약 80그루의 동백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발전소의 뒷길을 따라 가다가 언덕 돌계단을 지나 잠시 올라가면 언덕 윗쪽에 동백정이란 누정(樓亭)이 있다. 이 언덕에 나는 동백나무는 그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고 나무모양은 원형에 가깝다. 이 동백나무숲은 방풍의 목적으로 심어졌다 하나 방풍의 기능을 찾아보기 어렵다.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서도초등학교에서 4.5㎞ 정도 떨어진 바닷가의 낮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언덕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동백정(冬栢亭)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 8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흩어져 자라고 있다. 강한 바람을 받아 키가 작은 편이며, 2~3m에 이르는 나무는 땅에서부터 줄기가 2~3개로 갈라지면서 곁가지가 발달하여 나무의 모습이 둥근모양을 하고있다.
이 숲은 500m쯤 떨어진 마을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 기능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약 300년 전 이 지방의 관리가 꿈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꽃다발을 보고 바닷가에 가보니 정말 꽃이 있어서 가져와 심었는데, 그 심은 꽃이 현재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1월에 이곳에 모여 제사를 올리며 고기잡이에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고 한다.
한편,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동백나무숲으로서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높다. 또한 풍어제 및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숲으로서 문화적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마량리 동백나무는 춘백(春栢) 상록활엽교목으로 잎이 두텁고 표면이 진한 녹색으로 광택이 있고 잎이 많이 빽빽하게 붙어 있어서 아름답게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라 늦겨울철부터 피어나는 붉은 꽃은 늧은 봄까지 만발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 서천신송리의 곰솔
종 목 : 천연기념물 353호
명 칭 : 서천신송리의곰솔(舒川新松里의곰솔)
분 류 : 노거수
수 량 : 1주(231㎡)
지 정 일 : 1988.04.30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신송리 262-3
소 유 자 : 서천군
관 리 자 : 서천군
곰솔은 잎이 억센 까닭에 곰솔이라 부르며, 바닷바람에 강해 남쪽 해안선을 따라 주로 분포하므로 해송이라 불리기도 하고, 줄기 껍질의 색깔이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보통 소나무의 겨울눈은 붉은색인데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서천 신송리의 곰솔은 마을 뒤 언덕진 곳에 고립되어 자라고 있으며 나무의 나이는 약 400살 정도로 추정한다. 높이 17.4m, 가슴높이의 둘레 4.48m의 크기로 사방으로 가지가 길게 뻗어 있어, 그 모습이 우산과 비슷하다.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자정에 당산제를 지내는데 제주는 자손이 없는 사람으로 일주일 동안 목욕을 하고 제를 올리면 자손을 얻을 수 있으며, 당산제를 지내야 마을이 평안하고 재앙이 없다고 한다.
서천 신송리의 곰솔은 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서낭림으로서 민속적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무형문화재>
**한산세모시짜기
종 목 :무형문화재 14호
명 칭 :한산세모시짜기(韓山세모시짜기)
분 류 : 공예기술
지 정 일 : 2002. 8.22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23
모시는 오랜 기간동안 이용되어 온 직물로서 일명 저포․저치라고 하며, 모시풀 줄기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한다.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중국 당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었다.
한산세모시는 한산에서 만드는 모시로 예로부터 품질이 우수하며 섬세하고 단아하여 모시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태모시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의 9과정으로 나뉜다. 우선 재배를 해서 수확을 한다. 태모시는 껍질을 벗겨 인피섬유를 만드는 것인데 모시째기는 태모시를 쪼개는 과정이다. 모시삼기․모시굿만들기는 쪼개진 인피섬유를 이어 실을 만드는 과정이며, 모시날기는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한다. 모시매기인 풀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해 모시를 짠다. 마지막으로 모시표백은 물에 적신 다음 햇빛에 여러 번 말려 백저포, 곧 흰모시로 만드는 과정이다.
모시는 습도가 모자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더위에도 통풍이 안되는 움집에서 짜야 했고 바람이 불거나 비오는 날에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요즘은 개량베틀을 개발하고 외기를 차단한 밀폐된 공간에서 인공으로 모시를 짤 수 있는 조건을 맞춰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한산세모시는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여름 전통 옷감으로, 제작기술을 보호하고 전승하고자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살고있는 무형문화재 제14호 방연옥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산소곡주
종 목 : 시도무형문화재 3호
명 칭 :한산소곡주(韓山素穀酒)
분 류 : 음식
지 정 일 : 1979.07.03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한산소곡주는 한산지방의 이름난 술로서 빛깔은 청주와 같다. 백제 때의 궁중술로서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빚어 마셨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 가장 많이 알려진 술로『동국세시기』․『경도잡지』․『시의전서』․『규합총서』등에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소곡주를 만드는 방법은 찹쌀을 빚어 100일 동안 익힌다. 이때 며느리가 술맛을 보느라고 젓가락으로 찍어 먹다보면 저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닌다고 하여 ꡐ앉은뱅이술ꡑ이라고도 한다.
한산소곡주는 술맛이 독특한 뛰어난 민속주로 기능보유자 우희열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서천 대목장
종 목 : 시도무형문화재 10호
명 칭 : 서천대목장(舒川大木匠)
분 류 : 공예기술
지 정 일 : 1990.05.24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문산면 금복리 632
대목장은 나무를 재목으로 하여 집 짓는 일에서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설계는 물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목수를 말한다. 대목장은 문짝, 난간 등 소규모의 목공일을 맡아 하는 소목장과 구분한데서 나온 명칭이며, 와장․드잡이․석장․미장이․단청장 등과 힘을 합하여 집의 완성까지 모든 일을 책임진다. 즉 현대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축이 모두 목조였다. 따라서 목수에게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지고 다만 사찰과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기술의 명맥이 전수되어오는 형편이다.
대목장은 그 기법이 엄격히 전승되기 때문에 기문(技門)이 형성되어 있다. 기문은 기술로서 한 가문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문에서의 대목장은 절대 권위를 누린다. 대목장은 능력에 따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기도 하고 기능이 향상되기도 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대목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그간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외 52개소의 지정 및 비지정 문화재를 보수하여 문화재 원형보존에 기여해 왔으며 특히 목공(도편수)부분의 건축기술이 뛰어난 서천의 정영진씨를 무형문화재로 인정하여 대목장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정영진씨는 1921년 3월 26일 서천군 문산면 금복리 632번지에서 부친 정규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일찍이 부친께서 문화재보수공사 및 기타건축공사에 종사하여 오던중 부친의 대를 이어 20세가 되던때부터 부친을 따라 우리의 고전건축을 살자는 집념으로 문화재보수기술을 연마하여 1981년 2월 16일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지정문화재 수리기술자 제101호로 등록되었으며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종 목 : 시도무형문화재 13호
명 칭 :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舒川苧産八邑길쌈놀이)
분 류 : 놀이와의식
지 정 일 : 1991.07.09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147
모시는 충남의 특산물로 특히 한산(韓山)을 중심으로 인근 8개시군(팔읍(八邑)) 즉 한산(韓山), 서천(舒川), 비인(庇仁), 홍산(鴻山)과, 임천(林川), 남포(藍浦), 정산(定山), 보령(保寧)은 모시길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며 이 중에서도 한산은 예로부터 모시짜기의 본고장이다. 또한 모시는 옛부터 나라에 진상함은 물론 외국에도 수출도 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생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길쌈의 경연대회가 있었다는 문헌(삼국사기)을 통하여 볼 때 일찍부터 모시길쌈과 관련된 민속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상거래(商去來)가 성행하면서 보부상(褓負商)의 조직이 전국 각지에 있었고, 모시의 유통이 이러한 조직하에 거래되어 왔다.
서천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모시짜기로 유명한 한산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베짜기에 관한 민속놀이로 주로 부녀자들의 가내수공업이었다. 신라 유리왕(재위 24~57)이 두 왕녀로 하여금 부내의 여자들을 나누어 길쌈을 하게 하고, 추석날에 결과를 심사하여 진 편에서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는 『삼국사기』기록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모시길쌈이 있었으며,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쌈놀이는 모시를 베어다 모시베끼기, 모시삼기, 모시꾸리감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노래와 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노래는 민요풍으로 여인네의 애환과 체념, 그리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저산팔읍을 예찬하는 노래에 맞추어 흥겹게 춤추면서 농사의 고달품을 잊고, 이웃과 화합을 꾀하며 협동을 다진다. 발표가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장원을 한 마을을 축하해준다.
서천 저산팔읍 길쌈놀이의 전통은 근래까지 전승되어 농촌 부녀자들이 7월에서 8월까지 일정한 장소에 모여 공동으로 길쌈을 하였으며, ꡐ두레길쌈ꡑ이라고 하여 서로 겨루기보다는 함께 돕는 품앗이 같은 두레의 성격이 짙다.
오늘날 한산(韓山)은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모시의 명맥을 잇고 있으면서 매 5일마다 모시시장이 형성되어 전국 각처에 모시를 공급하고 있다. 한산 모시의 우수성을 널리 보급함은 물론 민속놀이를 보존․계승코자 모시길쌈놀이를 체계적인 고증과 구성 연출을 통하여 「저산팔읍(苧産八邑)길쌈놀이」를 발굴하여 1922년 제23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그후 '86년에도 도대표로 출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한바 있다. 매년 모시문화제 행사시 시연을 통해 국내외에 홍보하고 있다.
<유형문화재>
** 가정목은선생문집판(稼亭牧隱先生文集板)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77호
명 칭 : 가정목은선생문집판(稼亭牧隱先生文集板)
분 류 : 전적류
수 량 : 975판
지 정 일 : 1978.03.31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312
소 유 자 : 한산이씨종중
관 리 자 : 이향규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李穀,1298~1351)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한산군으로 봉해졌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성리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태조 이성계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현존하는 목판은 975판이 있으며, 문헌서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은 한국 문화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자료>
** 문헌서원
종 목 : 문화재자료 125호
명 칭 : 문헌서원(文獻書院)
분 류 : 서원(부동산)
수 량 : 1동
지 정 일 : 1984.05.17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
소 유 자 : 한산이씨종중
관 리 자 : 한산이씨종중
이 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분을 배향(配享)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宣祖) 27년(1594)에 이곳에 건립되었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고 인재 이종학․음애 이자․배옥헌 이개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 이색 신도비
명 칭 : 이색신도비(李穡神道碑)
분 류 : 석비
수 량 : 1기
지 정 일 : 1984.05.17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8
소 유 자 : 한산이씨종중
관 리 자 : 한산이씨종중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비석에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색(1328~1396)은 고려 후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충절을 지켰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는 전제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여러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원․명교체기에 있어서는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며, 고려 후기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를 배척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다. 조선 태조 4년(1395) 조정에 머물라는 왕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여강지역으로 가던 중 생을 마치었다.
비는 낮은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비문에는 ꡐ선생은 후에 죄를 얻어 폐출되었으나, 하늘과 땅만이 그의 고결한 마음을 알리라ꡑ라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세종 15년(1433)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현종 7년(1666) 후손들이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명 이색신도비(李穡神道碑)
본 신도비는 이조 세종 15년(1433년)에 건립된 비로 비문에는 ꡒ선생은 후에 득죄하고 폐출되었으나 천지마니 선생의 고결한 심사를 알리라 ꡓ는 것이 기록되었다. 이색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 이곡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했고 원나라 국자감생원이 되었다가 공민왕 22년(1373)에는 한산군으로 피봉되었다. 문학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이 있으며 고려말의 학문과 정치의 거족이었다.
<기념물>
** 이상재선생생가지(李商在先生生家址)
종 목 : 시도기념물 84호
명 칭 : 이상재선생생가지(李商在先生生家址)
분 류 : 생가(지)
수 량 : 1,434㎡
지 정 일 : 1990.12.31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3회 4필
소 유 자 : 서천군
관 리 자 : 서천군
조선 후기 사회 운동가인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월남 이상재선생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로써 1927년 3월 29일 타계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을 치루어진 인물이며, 그는 종교가․정치가로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광무 2년(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다.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징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 없이 생가터에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이다.
** 이색 선생 묘일원
명 칭 : 이색선생묘일원(李穡先生墓一圓)
분 류 : 묘
수 량 : 1,150㎡(1필지)
지 정 일 : 1993.11.12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산1-1
소 유 자 : 한산이씨종중
관 리 자 : 한산이씨종중
고려 후기의 문인이며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1328~1396)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다.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진사가 되고, 충목왕 4년(1348)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귀국하여 공민왕 1년(1352)에 전제개혁,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한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였으며, 1355년 원나라의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귀국하여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위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1391년에 한산부원군에 봉해지고, 태조 4년(1395)에 한산백으로 봉해졌다.
이색 선생의 묘소는 문헌서원의 좌측 기린산(麒麟山) 중턱에 있는데, 묘자리는 무학대사가 정한 것이라 한다. 무덤의 형태는 원형이며, 무덤 앞에는 망주석․문인상․마상(馬像)이 각각 2기씩 양쪽에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 비석이 서있다. 비는 단순한 형태이며 앞면에 ꡐ목은선생 이색지묘(木隱先生 李穡之墓)ꡑ라고 새겨져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2층누각으로된 6칸의 강당, 4칸의 진수당(進修當), 3칸의 목은영당(牧隱影堂), 5칸의 재실(齋室), 3칸의 전사청, 3칸의 수호사(守護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목은선생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색, 이곡을 주벽(主壁)으로 이종학, 이자, 이개, 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재실인 진수당은 유림의 화합 및 학문토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장소로 수호사는 관리인의 숙소로 사용하며, 목은영당에는 이색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4. 서천8경
* 마량리 동백숲과 해돋이, 금강하구둑 철새도래지, 한산모시마을, 신성리 갈대밭, 춘장대해수욕장, 문헌서원, 희리산 자연휴양림, 천방산풍광
**마량리 동백숲
진초록 잎사귀 사이로 붉디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동백꽃. 떨어져도 시들지 않고 함초롬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해서 더욱 애닯게 보이는 동백꽃은 송이가 통째로 바닥에 떨어질 때는 사뭇 처연해 사무치는 애처로움과 슬픔으로 표현되어 지기도 한다.
서천의 마량리에는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동백나무숲이 있다. 이 숲의 명칭은 ꡒ마량리 동백 숲ꡓ이며 조그만 동산으로 서천군의 서쪽 바다와 마주한 자리에 위치해 있다. 숲 정상의 동백정(冬柏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中層)누각이다.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정면 2째칸 누아래 기둥 사이로 오력도가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는 누를 지을 때 관람객을 배려한 프레임의 배치인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마량리 동백숲은 바다 반대편 동쪽에 위치한다. 동백숲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매우 좁아 초등학생도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잎과 가지가 무성하다.
잔뜩 허리를 숙이고 들어선 오백년 동백나무 숲은 500년의 세월을 말하듯 나뭇가지가 굵고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 있다. 서해바다의 세찬 겨울 풍파를 견디며 3월부터
4월까지 유난히 붉은 꽃을 피우는 이곳에 들어서면 밖과는 사뭇 다른 감흥을 느끼게 하는데 때가 꽃이 지는 시기인 5월까지도 듬성 듬성 피어난 동백 꽃이 제철인 듯 피어 있어 숲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늦은 봄까지 반긴다.
꽃이 ꡒ후두둑ꡓ 떨어져 애잔한 마음마저 드는 동백숲을 나와 동백정에 올라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아름다운 오력도와 그 앞을 오가는 낚시배와 고깃배가 어우러져 평온한 바다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서해바다의 풍광과 어우러진 오력도의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또 이곳에 서면 동백숲 전경과 해송림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주차장 방향으로 동백숲 너머 바닷가에 근사한 해송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관광을 마친 관광객들의 휴식과 담소처로 송림사이로 보이는 서해바다의 풍광이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앙증맞은 아름다움이 있는 오력도가 지척에 있어 더욱 아름다운 마량리 동백나무 숲.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쪽빛이라 할만큼 서천의 바다중 유난히 맑은 곳이다. 또 서천은 리아스식해안이라는 천혜의 자연을 갖고 있어서 아름다운 일몰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춘장대, 동백정, 마량포구, 장포리 등의 일몰 중 이곳 동백정의 일몰은 그중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해질 무렵이면 사진작가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 곳이다.
동백정은 바다쪽 절벽으로 기암 괴석이 웅장하게 펼쳐져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파도를 맞는 바위 언저리에 듬성 듬성 앉아 있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낚시꾼으로 바다와 맞닿은 기암괴석과 그곳에 올라 입질을 기다리는 낚시꾼 들은 원래 하나였던 듯 썩 어울리는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며, 이곳은 바다낚시꾼들의 낚시터로 애용되어지고 있다. 마량리 인근 바다에서는 우럭, 놀래미, 강성돔 등이 많이 잡히고 있다.
마량리 동백나무숲은 3월부터 4월까지 유난히 붉은 꽃을 피운다. 이때에 맞추어 동백나무숲 매표소 입구 주차장에는 마량 앞 바다에서 주민들이 잡아 올린『동백꽃주꾸미 축제장』이 설치된다. 주꾸미를 잡는 방법은 『소라방』과『낭장망』두 가지의 전통적인 방법이 있는데 마량리 앞바다에서 잡는 주꾸미는 소라껍데기를 줄에 메는 『소라방』을 이용, 산채로 잡기 때문에 싱싱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민들이 직접 나와 주꾸미를 재료로 볶음,회,무침,샤브샤브 등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어촌의 미각을 선 보인다.
행사기간중에는 동백꽃 및 저녁노을감상, 활어장터 운영, 문화행사개최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돼 관람객들에게 즐길거리를 제공 한다.
마량리 동백나무 숲과 연계되는 관광지로는 서천8경의 하나인 춘장대해수욕장과 낚시와 회를 즐길 수 있는 홍원항, 한곳에서 일출과 일몰을 볼수 있는 마량리 해돋이 해짐이 마을, 서천해양박물관, 부사방조제 등이 있다.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우리나라 유일의 해돋이, 해짐이 마을인 서해바다의 끝마을 마량리 마량포구는 한 장소에서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서해바다의 싱싱한 자연산 활어회를 음미 할 수 있는 곳이며, 11월에서 2월중순까지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서울 이남에 사는 해돋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한자리에서 낙조를 감상할 수도 있어 자연의 신비함에 대한 감동과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다. 서천군에서는 마량포 해돋이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하여 매년 마량포 “해돋이 축제”를 연다
다음코스인 서천해양박물관은 세계적인 희귀 어종과 현존 어종 등 15만여점에 달하는 바다동물을 전시한 서해안 최대의 해양 박물관으로서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높은 어린이들에게 신비한 바다 속 해양생태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산교육의 해양전시관이다. 특히 이곳은 환상적인 일몰,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포구 풍경 등 넉넉한 자연의 숨결이 살아있는 서해안만의 숨겨진 매력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전망대가 박물관 2층에 설치 되어 있다.
마량리 동백숲의 3번째 연계관광지는 홍원항이다. 홍원항은 춘장대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바다낚시와 자연산 회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바다로 뻗은 방파제와 희고 빨간 등대가 있어 아름다운 곳이다.
다음은 4번째 연계관광지로 춘장대해수욕장이다.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푸르른 해송과 어우러진 9만여평의 부지에 조성되는 해양종합관광레저 시설인 춘장대해수욕장은 서천8경중의 하나이며 서해안의 새로운 해양휴양문화의 메카로 자리잡고 나아가 서천군이 21세기 서해안시대를 선도하는 중심도시로 발돋음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곳이다. 푸르른 서해의 물결이 만든 잡힐 듯 몰려왔다 밀려가는 흰 포말의 파도와 고운 찰 모래의 활처럼 휜 비릿한 바다 내음의 백사장은 말 그대로 절경이다.
다음은 마량리 동백나무숲의 마지막 연계관광지인 5번째, 부사방조제이다. 3km에 달하는 방조제인 부사방조제는 바다와 민물낚시를 동시에 할 수 있으며 방조제가 완만한 타원형의 곡선을 이루고 있어 방조제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방조제위에 서면 맏닿은 서해바다를 볼 수 있고, 반대편으로 너른 들판과 멀리 산이 어우러져 눈 맛이 시원한 곳이다.
**금강하구둑 철새도래지
우리나라 4대강 중의 하나인 금강이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에두르고 휘돌며 구비마다 충청도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싸안고 흐르다 마침내 서해바다에 이르는 곳 금강하구둑은 매년 겨울이면 각양 각색의 철새들이 찾아드는 철새도래지이자 200리에 이르는 아름다운 서천의 해안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제철이 따로 없이, 철새가 자리를 비운 봄과 초가을 사이에도 대규모 수리 시설인 금강하구둑의 웅장한 모습과 호수같이 드넓은 금강 하구의 장엄한 풍경이 있어 서천을 찿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서천군은 금강하구둑의 철새 도래지를 많은 사람들이 관람토록 하기 위하여 넓은 주차장과 휴게시설을 갖추고 철새전망대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현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잇는 교량 역할도 겸하고 있는 금강하구둑은 농어촌진흥공사가 8년동안 1천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1990년도에 완공하였으며 1억3,000만톤의 담수량을 가진 1,840m의 제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5. 서천의 인물
** 이색(李穡 1328-1396)
고려 (충숙왕15-태조5) 문신, 학자
본관 한산(韓山). 자 영숙(潁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이제현(李齊賢)의 문 하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 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한 고려말 문 신
1. 출사 및 관직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2. 고려말 창왕옹립과 유배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이23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3. 사상과 학문
그는 원․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이개(李塏 1417-1456) - 조선(태종17-세조2) 절신
본관 한산(韓山). 자 청보(淸甫) ․백고(伯高). 호백옥헌(白玉軒).
시호 의열(義烈), 뒤에 충간(忠簡)으로 개시(改諡).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 1441년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했던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1417(태종 17)~1456(세조2). 조선 제6대왕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색(穡)의 증손이며, 중추원사 종선(種善)의 손자이고, 계주(季疇)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文)으로 《운회 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사(賞賜)를 받았다.
1447년 9월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하여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그는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하였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고 있던 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에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되는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써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의 총명을 모독하였으나 한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2월에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질18)의 고변에 의하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되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하였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ꡒ우정(禹鼎: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하여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홍모(鴻毛: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현릉(顯陵: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ꡓ. 이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許#조21)도 자결하였는데, 단종복위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이 그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하여 단종복위사건의 주도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는데, 이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 1691년(숙종 17)에 와서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조선, 항일기(철종1-?) 정치가,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
주미공사(駐美公使) 1등서기관으로 근무를 첫 공직으로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정치가이자 민권운동가이다.
1. 출사 및 관직
이상재(李商在)는 1850(철종 1)~1929. 정치가․민권운동가․청년운동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출신. 아버지는 희택(글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김창룡(金昌龍) - 조선, 항일기(고종9-?) 판소리 명창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배우고, 후에 이날치(李捺致)에게 1년간 사사하여 30세 무렵에 상경하여 연흥사(延興社) 창립에 공헌하였고, 이동백(李東伯) ․송만갑(宋萬甲) ․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설립하여 창극의 보급과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조선 항일기의 명창.
1872(고종 9)~1935. 판소리 명창.
고종 말기와 민족항일기에 활약한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충청남도 서천군 횡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진양조를 처음으로 판소리에 넣었다는 김성옥(金成玉)이고, 아버지는 판소리에 삼공제비를 응용하였다는 김정근(金正根)이다. 따라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난 셈이다. 아우 창진(昌鎭)도 명창으로, 한때 고종으로부터 참봉의 직계를 받기도 하였다.
7세 때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이날치(李捺致)에게 1년간 판소리를 배웠다.
그뒤 오랫동안 홀로 공부하다가 32세 때 서울에 올라와 연흥사(延興社)창립에 공헌하였고, 1933년에는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과 조선성악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적벽가〉와 〈심청가〉를 잘하였고, 특히 〈심청가〉 중에서 ꡐ꽃타령ꡑ과 〈적벽가〉 중에서 ꡐ삼고초려(三顧草廬)ꡑ 대목을 잘하였다.
원래 그의 집안은 경기도 및 충청도지역에 전승되는 중고제(中古制)소리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김창룡도 또한 자기 가문의 소리제를 그대로 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전승이 끊어졌고 취입한 음반만 남아 있다. 그의 소리는 오늘날 전승이 끊어진 중고제 판소리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음반 중에서 〈적벽가〉 중 ꡐ삼고초려ꡑ,단가 중 〈장부한 丈夫恨〉, 〈수궁가〉에서 ꡐ수정궁(水晶宮)들어가는데ꡑ, 〈심청가〉에서 ꡐ화초타령ꡑ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 참고자료>
서천군청 자료
서천문화원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동문화 36호[숲에서 만난 행복 -겨울 동백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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