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나쁜 일들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란 말씀인가요? 이
세상의 재앙과 재난들조차 어떤 면에서 보면 '참된 자신'의 대립물을 체험하기 위해
서 우리 자신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하는, 좀 덜 고통스런 방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게 좀 덜 고통스러운 방식은 없나요?
나는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 하나하나가 다 좋은 질문들이다. 자, 그것
들을 한번에 하나씩 다뤄보기로 하자.
아니다. 너희에게 일어나는, 소위 나쁜 일들을 다 너희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자각된 감각으로는 아니다. 그것들
은 모두가 너희 자신의 창조물들이다.
너희는 항상 창조하는 과정 속에 있다. 순간순간마다, 일분일분마다, 그리고
날마다. 너희가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지금은
그것에 대한 내 이야기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라. 너희는 하나의 커다란
창조기여서 말 그대로 너희가 생각하는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새로운 현상
들을 드러내간다.
일과 사건과 조건과 상황들은 모두 의식에서 창조된다. 한 개인의 의식만
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둘 이상의 의식이 내 이름
으로 모일 때마다 어떤 종류의 창조 에너지가 분출될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중의식이라면? 우와! 그 힘은 너무나 막강하여 세계적인
중요성과 지구적인 결과를 갖는 사건들과 환경들을 창조할 수 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식으로, 너희가 그런 결과들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 만큼이나
너희도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너희 역시 나처럼 그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에 비추어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고 어떤 악당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
들의 선택으로 네가 희생되는 일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희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 전부를 너희 자신이 창조
해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앞선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모든 선각자들이 늦든 빠르든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부라도 바꿀 힘을 얻는 것은 그들이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그따위 짓을 하는' 어떤 것이나 어떤 자가 저밖에 있다는 관념을
즐기고 있는 한,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말할 때라야 비로소 너희는 그것을 바꿀
힘을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걸 바꾸는 게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바꾸기보다 훨씬 더 쉽다.
뭔가를 바꾸는 첫 단계는 네가 그렇게 되도록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사 너희가 개인 차원에서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너희의 오성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는 어떤 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바꾸고자 노력하라.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딱 한가지 이유가 있을 뿐이다. 즉 우주에게 '자신
이 누구인지'를 진술하는 것으로서만.
삶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때 삶은 '자기' 창조가 된다. 너희는 자신을 '자신'
으로, 그리고 '항상 되고자 했던 자신(Who You've always wanted to be)'으
로 창조하기 위해 삶을 이용한다. 어떤 일을 하지 않는 이유 역시 딱 한가지
뿐이다. 즉 그것이 더 이상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진술이 되지 못한다
는 이유. 그것은 더 이상 너희를 반영하지 않고, 더 이상 너희를 대변하지
(represent) 않는다(즉 그것은 너희를 재표출(re-present)시켜 주지 않는다)
만일 너희가 정확하게 재표출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영원 속에 투영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는, 삶의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은 너희가 선택한 것
들이다. 잘못은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은 너희 자신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창조한 것이 너희 자신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런 꼬리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나쁘다는 꼬리표를
달기 보다는 그것들이 너희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너희가 세상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게 바로 이 지적(知的) 영적
(靈的) 부정직함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받아
들였다면, 혹은 책임감을 깊이 느끼기만이라도 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이 책임감을 느꼈다면 틀림없이 그렇
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는 바로 그 점이, 그것을
그토록 완벽한 고통으로 만들고, 그토록 신랄한 역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재해와 재난들, 즉 회오리와 태풍, 화산폭발, 홍수 따위의 물질적
소동들을 특별히 네가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창조하는 것은 이런 사건
들이 네 삶에 미치는 강도(强度)다.
우주에서는 그 어떤 분방한 상상력으로도 네가 조장하고 창조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런 사건들을 창조해내는 것은 인류의 결합된 의식이다. 세상 전부의 공동
창조가 이런 체험들을 낳는다. 너희 각자가 하는 일은, 그것들이 뭔가 의미가
있다면 자신에게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것들과 관련해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판단하면서 그것들을 경험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영적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집단으로, 또 개인으로 너희
가 체험하는 삶과 시간들을 창조하고 있다.
너는 이런 과정을 좀 덜 고통스럽게 겪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부체험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겪는 세상 체험과 세상 사건들에
서 연상하는 고통을 줄이려면, 너는 그것들을 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네가 외부 사건을 바꿀 수는 없다.(외부 사건은 너희 다수가 창조해낸 것이다.
집단이 창조한 것을 개인이 바꿀 수 있을 만큼 네 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면 체험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삶을 깨닫는(mastery) 길이다.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건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잘못된 생각
의 결과다. 그것은 생각의 오류이다.
선각자들은 가장 쓰라린 고통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선각자들은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고통은 너희가 어떤 것에 관해 내린 판단 때문에 생긴다. 그 판단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고통이 사라진다.
판단은 흔히 과거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한 너희의 관념은
그것에 관한 이전 관념에서 나온다. 이전 관념은 그보다 더 앞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고, 또 그 관념은 다시 그보다 더 앞의 관념에서 나오고...... 마치
벽돌을 쌓듯이. 이 거울의 방 속에서 내가 '맨처음 생각(first thought)'이라
고 부르는 것으로 거슬러올라 갈 때까지.
모든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으나 어떤 생각도 원래 생각(Original thoutht)
보다 더 강하지는 못하다. 이따금 이 원래 생각을 원죄(Original sin)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죄는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맨처음 생각이 틀렸을 때이다. 그러고 나서 그
틀림은 너희가 그것을 두번 세번 생각해감에 따라 몇번이고 합성된다. 성신이
하는 일은 너희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날 새로운 오성에 이를 수 있도록 너희
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굶어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불의, 브라질
에서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지진에 대해 유감스럽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
하시는 겁니까?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너를 반영하는 것, 너 자신의 위대한 변형으로서 너를 재표출해주는 일을
하라. 유감스럽게 느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심판하지도 비난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
지도,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을 명심하라. 너희가 비난하는 것이 언제고 너희를 비난할 것이며,
너희가 심판하는 것이 언제고 너희를 심판하리란 것을.
차라리 네 가장 고귀한 '자신'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는 것들을 바꾸려 노력하
거나, 그런 것들을 바꾸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하라.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라. 그 모든 것이 다 신의 창조이
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조이기에.
여기서 잠시 멈추고 제가 좀 따라잡게 해주시겠습니까? 좀 전에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없다고 말씀하신게 맞나요?
맞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당신의 세계에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어디에 존재
하는 겁니까?
호오, 어디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디에 나타난다는 거죠?
당신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요.
너희의 상상 속에.
하지만 옳다 그르다, 하라 하지 마라,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에 대해 제
게 가르쳐준 사람들은 그 모든 규칙들을 당신, 곧 신이 설정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를 가르친 사람들이 틀렸다. 나는 한번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라'거나 '하지 마라'는 걸 설정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즉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고 그 결과를 체험해볼 기회와, 너희가
'참된 자신'의 모습과 닮은 꼴에 비추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기회와, 또 자신
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더욱더 고귀한 자신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선물 빼앗는
것이 되리라.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르다'는 것은 너희가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너희 자신을 금(禁)
하는 것이다. 너희를 금하는 건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며, 자신을 제한하는 건
'참된 자신'이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창조하고 체험
할 기회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내가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리라
주장한다. 무슨 그런 자유의지가 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은 우리 사이의 진짜
관계가 아닐 뿐 아니라, 신을 조롱하는 짓이기도 하다.
자, 이제 우리는 제가 논의하고 싶었던 또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군요. 천국과
지옥을 둘러싼 그 모든 논란의 영역으로요. 지금 제가 여기서 주워들은 것들에서 보면
지옥 같은 건 없군요.
지옥은 있다. 하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
이 너희에게 제공하는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지옥을 체험하는 건 아니다.
지옥이 뭐죠?
지옥은 너희의 선택과 결정과 창조들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체험하
는 것이다. 그것은 나(神)를 부정하는 모든 생각, 즉 '자신'과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모든 생각의 당연한 귀결이다.
지옥은 잘못된 사고로 너희가 겪는 고통이다. 그러나 '잘못된 사고'란 용어
조차도 틀린 것이다. 잘못된 것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은 기쁨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음이다. 그것은 '자신
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으되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못난 존재다. 그
것이 바로 지옥이며, 너희 영혼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없다.
하지만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곳, 불길 속에서 영원히 불타거나, 고통스런
상태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그런 곳으로서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내가
그런 곳에 무슨 의미를 둘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내가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지극히 신(神)답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달지라도, 무엇 때문에 내가 너희의 실패에 대해 앙갚음하거나
벌하려 들겠는가? 너희를 처치하는 것쯤이야 나로서는 손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내 어떤 부분이 복수심에 불타서, 굳이 너희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종류와 말
로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에 영원히 처하길 요구하겠는가?
만일 너희가 정의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천국에서 나와 가까이 지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정의라는 목적은 간단하게 달성되지 않겠는가? 끝없는
고통의 형벌도 필요하다고?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두려움에 근거한 신학들 속에서 쌓아올린 식의,
죽음 뒤의 체험 같은 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극히 불행하고 불
완전하며, 전체보다 지극히 모자라고 신의 더없이 큰 기쁨과는 한참 거리가 먼
영혼의 체험이란 건 존재하니, 너희 영혼에게는 이것이 바로 지옥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그 곳으로 보내지도 않으며, 이런 체험
이 너희를 찾아가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런 체험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너희 자신을 자신에 대한 가장 고귀한 생각에서 떼어낼 때마다, 또
아무리 떼어낸다 해도, 그런 체험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너희
가 자신을 부정할 때마다, 너희가 '참된 자신'을 거부할 때마다, 너희는 그런
체험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런 체험조차도 결코 영원하지는 않다. 너희가 영원히 영원히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건 내 의도가 아니기에. 사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너희가 '자신'을 부정해야 할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한
쪽이 너희에 관한 진실을 간직하는 한, 궁극에 가서는 그 진실이 이길 것이다.
그런데 지옥이 없다면, 그건 제가 응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무슨 행동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진정으로 옳은 것이 되고 옳은 것을 하고 옳은 것을 가지려 할 때, 네게 필요한
것이 두려움인가? 너는 '착해'지려면 굳이 협박을 받아야 하느냐? 그리고 '착하
다는 게' 무엇이냐? 누가 그것에 관해 최종 판결권을 갖는가? 지침들을 정하는
건 누구이며, 규칙들을 만드는 건 누구인가?
내가 말하노니, 바로 네가 너 자신의 규칙을 제정하고, 바로 네가 그 지침들을
설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해 왔고, 지금 얼마나 잘해 나가는지 판단하
는 사람도 너다. 왜냐하면 너야말로 '자신이 참으로 누구이고 무엇인지'와 '자신
이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지'를 판단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야
말로 자신이 얼마나 잘해가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너희 이외에 어느 누구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왜, 어떻게 자신
의 창조물을 심판하고 나쁘다고 규정하겠는가? 만일 너희가 완벽하길 바라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랐더라면, 나는 너희를 너희의 고향인 절대완벽
상태에 그대로 남겨뒀을 것이다. 이 과정의 전체 핵심은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
는 것이요, 참된 자신으로서, 그리고 너희가 참으로 되고자 하는 바대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선택권까지
갖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 스스로 너희 앞에 놓아준 선택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너희를 벌
주어야 하는가? 너희가 두번째 것을 선택하길 원치 않았다면, 왜 나는 첫번째
가 아닌 것을 창조했는가?
이것이 너희가 비난하는 신의 역할을 내게 배당하기에 앞서, 너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네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그렇다이다. 너희는 응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그 귀결을 깨닫는 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리라.
귀결(Consequence)이란 결과(Result)다. 당연한 결말(Outcome). 이것들은 응보
나 징벌과는 전혀 다르다. 결말은 그저 단순히 결말일 뿐이다. 결말은 자연
법칙의 자연스런 적용에서 결과하는 것이다. 결말은 이미 일어난 것의 귀결
로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모든 물질적 삶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일단 너희가 이 법칙들을 기억해
내고 적용하기만 하면, 너희는 물질 수준에서 삶을 지배하게 된다.
너희에게 징벌처럼 비치는 것, 혹은 너희가 악이나 불운이라 부르는 것들은
스스로를 주장하는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제가 이 법칙들을 알게 되고 그것들을 따른다면 앞으로 단 한순간도 근심거리
를 갖지 않게 되는 겁니까? 당신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런 건가요?
너희는 소위 '근심거리' 속에 놓인 자신을 체험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너희는 삶의 어떤 상황이 문제거리가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는 공포스런 어떤 상황도 맞닥뜨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근심과 의심과 두려
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너희는 육체에서 벗어난 절대계의 영혼들로서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상대계의 영혼들로서,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고 너희가
상상하는 식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희는 온갖 자유와 온갖 기쁨과
온갖 평온과, 너희 영혼의 온갖 지혜와 오성과 권능을 갖게 될 것이다. 너희
는 완전히 실현된 존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너희 영혼의 목표이다. 육체 속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완전히 실현
하는 것, 참된 모든 것의 화신(化身)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너희 영혼의
목적이다.
또한 이것이 너희를 위한 내 계획이다. 내가 너희를 통해 실현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개념을 체험으로 바꾸고,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 이것
이 내 이상이다.
우주의 법칙들은 내가 설정한 법칙들이다. 그것들은 물질 세계를 완벽하게
작용케 하는 완벽한 법칙들이다.
너희는 눈송이보다 더 완벽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복잡함, 그 문양, 그
대칭성, 그것의 자기동일성과 다른 모든 눈송이들에 대한 독창성 - 이 모든 게
하나의 신비다. 너희는 자연이 펼치는 이 외경스런 기적에 감탄한다. 그런데
내가 겨우 눈송이 하나로도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때, 내가 이 우주를 가지
고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해왔다고 생각하는가?
너희가 가장 큰 물체에서 가장 작은 입자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대칭성, 그
도안의 완벽함을 알게 된다면, 너희의 현실로는 우주의 진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그 진리에 흘깃 눈길을 주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너희는 아직
그것이 뜻하는 바를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뜻하는 바가 있다는
것, 너희의 현재 이해능력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놀라운 뜻들이 들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의 셰익스피어
는 이것을 멋지게 표현했다. "호레이쇼, 이 천지간에는 자네의 지혜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네"(햄릿 제1막5장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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