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일본 세계 탱고 페스티발.
일본을 갈때마다 전날은 술을 마신다. 어제는 쏘주 각1병을 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6시 눈을 뜨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넣고 집을 나섰다. 하늘에는 제각각의 밝기를 거두어 낮은데로 임하는 별님들이, 햇님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인천공항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취기가 가시지 않는다. 숙취. 커피가 보약인지 두잔을 연거푸 마셨다.
인천공항.
하늘에서 인천을 바라보았다.
동경 나리따공항.
하늘에서 동경을 바라보았다.
우여곡절끝에 없는 약도 지도 찾아가며 걷기도 많이 걸었다. 다행으로 동경시내의 시장통을 걸어오며 생동감 넘치는 상인들 모습 보면서 일본 서민들의 경기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지금쯤 우리네 재래시장 영천시장은 어떠할까. 대구에는 부산에는 광주에는 춘천에는 어떠할까. 동경의 재래시장은 많이도 붐볐고 생선위주의 활어매장, 건어물 장터 앞에는 사람들이 많은 줄을 서 있었다.
호텔에 도착했다. Mariners Court Tokyo 호텔. www.hotel-mariners.co.jp
11일 오늘의 일정은 없단다. 조금은 허탈하다. 알고 왔지만 뭔가가 없다는 생각에 방안에서 거울보며 몇번의 탱고 모션을 취해본다. 808호 내방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인터넷 모뎀을 렌트해왔다. 나의 노트북과 모뎀은 기막히게 찰떡궁합니다. IT는 뭐니뭐니해도 우리가 강국이지...
일정이 없다는 11일 오늘. 시간은 6시30분. 탱고와 밀롱가 대신 해야 할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인포메이션 데스크 내려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2곳의 약도를 마킹했다. 지하철 은좌(銀座)역과 동경역. 은좌(銀座)란 한자지명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ぎんざ(긴자)가 된다. 긴자는 우리식으로하면 강남역 번화가, 중구의 명동, 대학로처럼 번화가임에 분명하다. 동경역은 아마도 우리의 서울역이겠지.
노트북 하나의 무게가 빠져나감으로 내 가방에는 덜렁 비디오카메라 한대만이 안방차지하고 있다. 나는 가방을 울러메고 걷기 시작했다. 일어는 모르지만 한자는 눈에 쏙쏙들어온다. 스쳐지나가는 일본인들의 숨결을 들으며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의 모습. 퇴근하는 기성세대는 한국과 다름없는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여고생 남고생. 여고생은 어김없이 삭스룩, 남고생은 교복에 넥타이를 메고 있다.
번화가 은좌 긴자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고로 일본 동경은 오후 4시면 이미 해가져 버린다. 어두움을 밝히러 별님들이 준비하는 예쁜 모습은 한국에서의 오늘 새벽과 마찬가지 였다.
미국. 왠만한 주는 차량으로 엄청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흔적들을 남기고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본은 비지니스 이슈로 왔다갔다하며 거리를 오늘처럼 여유있게 걸어본적이 없다. 왠지 그러한 여유가 내게는 사치인듯 하였고 일본인들의 문화에 동조하는 나 자신이 싫었던게 아마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일제 렉서스를 몰고 다닌적이 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엄청 인기차량인 렉서스를 깔아뭉개고 싶었고 그들을 슬그머니 이해하고 싶었던 그 이유에서였다. 일본인 직장 동료가 있었다. 녀석은 대학을 미국에서 나와 입사를 한 경우였고 나는 유학은 커녕 한국에서 영어회화 학원 한번 다녀본적 없이 동료학생들과 영어회화 연구모임 만들어 열심히 공부했던 그런 경험이 전부였었다. 열등감의 시작.
초창기 6개월간 나는 녀석이 부러웠고 때려주고 싶을만큼 미워지기도 했었다. 나는 6개월만에 녀석을 두손두발 다 들게 만들어버렸다. 당시 십몇년전의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인 격차가 엄청났었다. 녀석의 귀에는 귀걸이가 걸려있었고 나는 마냥 허름한 허허실실 그 자체였었다. 회의시간 녀석은 말도 잘하고 이래저래 양넘처럼 하고 다녔다.
양넘들이 잘 못하던 축구시합 이를 악물고 뛰었고, 회의시간 밤새 영작하며 프리젠테이션 데몬스트레이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회의장을 깜짝 놀라게도 했었다. 파티시간 노란피부 모아놓고 이빨까면 녀석은 할 수 없이 무리속에 들어와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파티문화에서 노란피부의 소수계들은 끼일틈이 없었다. 공통적으로 노란 우리들은 댄스를 할 줄 몰랐으니까.. 객기로 막춤을 추기도 해봣지만 곧 그들의 파티문화를 다시 공부해야만 했던 시기가 있었다.
오늘은 녀석 생각이 많이났다. 아마도 녀석도 나도 한갑이 지나면 멋지게 한잔 할날있겠지.
긴자거리의 화려함과 동경역의 복잡함속에 지나치는 일본인들을 보았다. 개중에는 들려오는 한국말 우리 민족도 스쳐지나갔다. 아는체를 하는 대신 나는 그들의 모습들을 내 눈속에 내 가슴에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애썼다.
일본인들의 친절함에 왜 나는 크게 감명받지 못하고, 아마도 느낌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내 탱고를 내가 바라보는 그런 느낌일까 ? 그들의 웃음띤 모습속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찾으려고 찾으려고 애써도 매칭이 잘 안된다. 왜 일 까 ?
영어로 길을 물어보았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얼굴 빨개진 원숭이 처럼 고개를 흔들고 숙이며 내게 무슨 큰 죄라도 지은양 도망치듯 사라진다. 영어가 되는 사람은 너무나도 친절히 내게 가르쳐준다. 나는 길이 궁금하지도 않았기에 그들의 모습을 더 담아보려 애썼다.
폴리스가 지나간다. Hey Man, Would you please help me ? Where am I ? I have to go to Tokyo Station, Which side is Tokyo Station, Right ? Left ? 20대중반으로 폴리스는 얼굴이 빨개져 어쩔줄을 모른다. 두손 머리 저으며 뒤로 물러선다. 나는 그를 다시 불러세웠다. Hey Man, Have you got a my question ? Where ? Don't eat my message ...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가 크져가고 있었다. 폴리스는 어쩔줄을 모른다. 긴자거리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폴리스와 나 사이를 둘러서고 있었다. 폴리스는 무전을 한다. 뭐라고 시부렁시부렁 댄다. 영어 못알아듣는 폴리스와 일어 못알아 듣는 나는 같은 처지인데 그는 죄지은이 처럼 내 앞에 머리 조아리고 나는 ... 곧이어 다른 폴리스 한명이 달려온다. 나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내 질문에 정확히 답을 해준다. 이미 그 답은 의미가 내게는 없었다. 나는 웃으며 새로운 폴리스와 죄스러워하는 폴리스의 등을 토닥토닥 거려주었다. I'm Korean. This GinJa Street is my first trip. Thanks. bye... 웃으며 돌아서자 둘러싼 시민들도 길을 열어준다.
왜그랬을까 ? 나는 오늘 왜이리 치졸한 짓을 한것일까 ?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도리어 답답함을 느꼈다. 긴자거리 도쿄역을 3시간동안 걷다보니 온몸 쑤시지않는 곳이 없어짐을 느꼈다. 생동감 넘치는 경기를 체감하며 가득가득 채워진 식당가의 손님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서울의 식당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한류라고는 하지만 한국식당은 가뭄에 콩나듯 3시간동안 내가 찾아낸 식당은 5군데 뿐이었다. 중국식당은 15곳 정도 되었다. 90프로의 일식당과 7프로 정도의 중식당, 3프로 정도의 한국식당 모두 문전성시였다.
3시간을 걷다보니 지칠대로 지쳤다. 마지막 찾은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가득찬 일본 손님들. 된장찌게 8천원. 흰쌀밥 천8백원 시키고 갈증을 해소하려 250cc 생맥주를 시켰다 5천원. 웃으며 맥주안주라고 오토리라는 이름으로 종지그룻에 한젖가락 양을 3천원에 내 놓는다. 김치를 웃으며 달라고 했다 4천8백원. 김치파동 사전에 막은 대단한 일본인들 우리보다 그들이 장하기에 4천8백원 김치 아깝지 않았다. 공기밥 한그릇 더 시켰다 된장찌게 기막히게 맛있었다. 맛있는게 허탈해서 맥주하나 더 시켰다. 돌아나오며 3만원어치나 한끼에 해치웠다는 생각에 걸어오기 대신 택시를 잡아탔다 1만3천원.
한류열풍이 대단하다고 한다. 내가 느낀 한류 열풍. 누구를 위한 한류인가. 반성해야할 대목이다. 일본은 배용준 캐릭터는 물론 다양한 라이센스 비지니스로 실익을 챙겼고, 중국은 이미 대장금 상표등록 해놓고 중국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다. 한류.. 우리가 한것은 배용준 촬영한 장소를 일본인들 관광 명소로 인식시켰다고 좋아했고 일인들이 관광오니 엄청난 한류라고 떠들고 있지 않았던가. 이영애가 중국에서 인터뷰할 때 이미 그들은 대장금 상표등록으로 한류를 비지니스화 했지않았던가. 4만원의 비용. 한류를 비지니스화 시킨 그들앞에 내가 쓴 4만원은 당연히 지불해야 할 수업료였다.
오늘 마주친 사람들에게서 나는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매칭이 되지 않아 더 답답했다. 과연 이사람들이 일제시대 우리를 핍박했던 그들인가 ? 우는 아이도 그치게 만들었다는 그 일본순사의 자손들이었단 말인가. 그들은 친철하다. 그 친절함이 아직도 내게는 거북함에 분명하다. 아니 나는 그들에게서 일제 순사의 모습을 하나라도 찾아보려 애썼다. 찾으려하면 할수록 나는 더 당혹감을 느꼈고 찾지 못하는 내 모습에 나는 더 큰 갈증을 느끼게되었다. 당시 선조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몸서리 쳤을까. 이런 좀만쓰까이들에게 일제강점기를 보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휴..
나는 국수주의도 아니고 더구나 파시즘도 아니다. 민족감정을 떠나 내 배짱이 꼴리지 않으니 아직도 거북할 뿐이다. 나는 오늘 일본땅에 와있다. 며칠뒤면 떠날것이다. 내일부터 웃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러했듯이 오래도록 걸음 걸을 수 있는 체력을 비축할 것이다.
호텔방에서 탱고코리아 시타고려 DataBase 동영상을 열어보았다. 멋진 모습들이 연구모임중이다. 나는 비로소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시간이 더 지난후에 시타고려 DataBase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웃음 지을 수 있다. 나의 치졸함을 반성해본다. 그래도 웃음이 슬며시 멈추지를 않는다.
그래.
별님은 제 밝기를 낮추며 햇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햇님은 그 밝음을 눈감으며 별님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낮은데로 임하고 있다. 더 이상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겠다. 잘 될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편안히 감싸않을 수 있는 넓은 아량과 그릇을 키우기위해 내일부터 그들에게 예쁜미소와 따스함을 보내야 겠다.
그래야겠다. 우리안의 우리와 우리밖의 우리가 어우러진 우리 '대 명 제'.
동경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 다윈.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