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6월발행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3'에 실린 글
사랑에 푹~빠졌나봐!
이종환형님 최유라 아우님 두 분은 혹시 사랑에 늪에 빠져 허우적 거려본 적 있나요?
만약 지금도 푹~빠져 계신다면 참으로 행복한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아직 그곳에 빠져 눈멀고 코까지 막힌 한사나이에 기막힌 사연하나 들려드립니다.
제 나이 45세. 때는 22년 전. 그러니까23살.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으니 그 처녀는 이름 하여 ‘하강한 천사’ 그 처녀는 여름날 하얀 반팔 블라우스와 검정치마를 즐겨 입었는데 하얀 것은 더욱 하얗고 검은 것은 더욱 검어 보이는 색의대비가 참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또한 그 처녀에 뽀얗고 포동포동한 팔꿈치에 나란히 두개씩 패여 있는 ‘팔 우물’합이 넷인 팔 우물은 저에 목구멍에 침 넘어가는 소리를 꼴깍 나도록했습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붉게 타는 노을이 아쉬운 듯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빛으로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을 때 긴 계단을 사뿐히 내려오는 그 처녀에 하얀 얼굴은 한 뼘밖에 남지 않은 태양에 약해진 빛에도 반사가 되어 광채가 났고 저는 마치천사에 하강을 본 듯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그녀에 실눈을 보고도 전혀 작은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실눈 그 속에 감춰진 작고 땡글땡글한 검은 눈동자는‘감춰진 것이 드러난 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저에게 깨닫게 한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 처녀에 시어머니는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을 ‘야. 니 마누라 눈은 쥐 눈 같다. 쥐 눈’하시더군요.
쥐 눈?
어떻게 천사에 눈을 쥐 눈에 비유할 수 있을까? 전 섭섭해졌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어머니의 놀라운 안목에 감탄하게 되었으니.......
때는 무더운 어느 여름날!
부엌에 들어온 쥐를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출동하였습니다.
어렵사리 쥐를 찾아 코너에 몰아넣고 막 내리치려는 찰라 쥐와 시선이 딱 마주쳤습니다.
아! 어디선가 본 듯한 눈. 살려달라는 애처로운 눈빛. 그건 어머님이 말했던 아내의 눈빛이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진 저는 결국 그 쥐에게 갈 길을 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전 아내의 눈을 보면 쥐라는 미물을 통하여 얻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내 손안에 달려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며 아내의 행복 또한 내 손안에 달렸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이 한 몸 다할 때까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이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때 처가의 반대로 벽에 부딪혀 사랑하는 처녀를 만나지 못했던 날들도 있었죠. 그날들은 내가 처음 본 세상의 끝이었습니다.
하얀 팔 우물은 날마다 저의 눈앞에서 하늘거렸고 저는 벽을 들이받고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내게 자신이 아니면 내가 죽을 것 같다며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면서 빈 털털이인 나하고 극적인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 천국을 버리고 하강한 천사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을 해주어야 보답하는 것일까요?
신혼 초!
나만을 위하여 준비된 예쁜 접시의 계란 후라이까지도 우리를 위한 두개가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작은 사랑의 실천부터 시작된 나의 마음 속 사랑의 서약은 10년을 눈 깜빡 할 새 보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엎드려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 밑의 일기장이 보였습니다.
잠자는 천사가 깰까봐 살짝 빼내어 흥건히 고인 침을 닦고 덮어두려다가 궁금해지면서 지난 10년을 훔쳐보았습니다.
○월○일 ○요일
오늘도 입덧이 심했다. 오징어가 먹고 싶어 말 한 번 꺼냈더니 남편은 총알같이 달려가서 오징어를 사왔다. 그것을 맛있게 먹다 속이 미식 거려 난 그만 그 아까운 것을 내 옷, 남편 옷, 그리고 남편의 얼굴에 세례를 퍼부었다. 난 미안해하는데 남편은 ‘괜찮아’하고 청소를 해주었다.
○월○일○요일
날씨가 몹시 추웠다. 늘 가던 마중도 싫었다. 자정이 가까워 들어온 남편의 품에서 따뜻한 만두가 나왔다. 직장에서 늦었다고 택시비 준 것을 택시비 아끼느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것이었다. 그 택시비로 나만을 위한 만두를 산 것이었다. 남편이 달려온 그 20분 동아도 만두가 식지 않은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
○월○일 ○요일
그이는 인적이 뜸한 곳에서는 가끔 나를 업고 갔다. 나는 가슴이 따뜻했고 남편은 등이 따뜻하다고 했다. 난 공존공생을 느꼈고 늘 잡은 손만 따뜻한 때하고는 사뭇 다른 행복감에 젖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그동안 둘이서 쌓아온 사랑의 향기가 아내의 일기에서 솔솔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여린 마음은 사소한 일에도 울었으며 섬세한 여자의 감정은 늘 슬픈 날만 일기를 쓰게 했으니 배부르고 등 따뜻한 날이 적혀 있을 리가 없었고 전 ‘중죄인’으로 적혀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감싸주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마음이 찡~ 해지면서 아내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배고픈 아침이면 가끔 구수한 그러나 조금은 짭짤한 된장 냄새가 내 코를 간지럽게 한 지 15년....... 그러나 막상 밥상을 대하고 보면 생각했던 된장국이 없어서 ‘다른 집에서 끓였나?’하고 지냈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스치는 아내한테서 ‘된장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음~’하고 냄새를 맡으며 물어보았습니다.
‘된장국 끓이려고 장독에서 된장 퍼왔어?’
‘아니. 나 지금 화장실 다녀오는데? 왜 된장국 먹고 싶어?’ 이게 웬일입니까 난 여지껏 그 냄새를 그 냄새로 착각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사랑에 눈멀었던 난 코까지 막혔던 것이었습니다.
난 완전히 사랑에 속고 변에 속았던 것입니다.
전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그 기이한 일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죠. ‘엄마. 나는 왜 마누라가 화장실에 다녀오면 된장 냄새가 나지?’ 욕쟁이 우리 어머니는 웃으시며 말씀하더군요. ‘미쳤다 미쳤어 썩을 놈. 그럼 어디 한번 찍어 먹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