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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가 미신이라구요?
영가(죽은 이)를 위한 진리의 만찬
49재는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매 칠일째마다 이곱 차례에 걸쳐 49일 동안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천도의식입니다. 그래서 ‘칠칠일’ 또는 ‘칠칠재’라고도 부릅니다. 49재는 불교의 천도의식이므로 대부분 사찰에서 거행되기 마련입니다.
망자의 장례가 끝나고 나면 영가(죽은 이)의 위패와 사진을 사찰에 모셔놓고 매 칠일마다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기도와 공양을 올리는 의식입니다.
이때 영가를 위해 제단에는 정성껏 마련한 다과(茶果)와 음식을 차려 놓기도 합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방황하고 있을 영가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뜻입니다.
49재는 천도의식(염불)을 집전하는 스님을 모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덕이 높으신 스님이 시방세계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을 청하는 대령 ․ 관욕을 시작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영가에게 바른 가르침을 일러 줍니다.
법을 설하는 데 있어서는 스님께서 직접 설법을 하는 순서도 있지만, 대부분의 염불식순은 주로 부처님 말씀을 빌어 설합니다. 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이 주로 49재에 독송하는 경전인데, 그 내용을 보면 물거품 같은 육신과 허상에 매이지 말고 참된 자기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아미타부처님(아미타불)과 지장보살 님에게 모든 죄업을 참회하여 소멸하고 극락왕생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아미타경과 지장경을 독송하기도 합니다.
스님의 염불과 독경소리를 듣고 깨달은 영가는 지난 생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부질없이 집착하였던 스스로의 모습을 참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의 무상을 바로 깨달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는 고요한 세계로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이렇게 칠일마다 스님의 염불과 설법을 들은 영가는 49재의 마지막 의식인 봉송(奉送)을 끝으로 아미타불의 영접하에 극락세계로 인도됩니다.
간혹 업이 무거워 49일이 지나도록 다음 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49재를 마친 뒤에도 영가가 세상을 떠난 지 백일 되는 날 100재를 지내드리고, 여건이 된다면 1주기, 3주기까지 천도재를 지내주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49재 때나 죽은 이가 이 세상을 떠난 지 100일째 되는 날 지내는 100재 때에는 참석한 분들과 기타 여러 불자들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경전을 나누어 주는 것을 불교에서는 ‘법보시(法布施)’라고 합니다. ‘법보시’란 부처님의 가르침(法)이 담긴 책을 보시한다는 뜻으로 이 역시 영가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자손들이 법보시를 합니다.
49재 의식의 순서나 규모는 각 사찰이나 집전하는 스님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뜻과 중요절차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49재는 부처님가 보살님들의 힘을 빌어 영가가 모쪼록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염원한다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스님의 법문과 가족들의 정성어린 기원으로 영가가 비록 죽은 뒤에라도 한생각 돌려 해탈에 이르도록 하는 데 참뜻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49재는 영가를 위해서 베푸는 법회요 진리의 만찬인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받는 시간
49재에서 말하는 49일이란 죽은 이가 중유기(中有期)에 머무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중유기란 임종 후부터 새로운 생을 받기 전, 즉 죽은 후 다음 생이 결정되는 그 사이를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윤회의 굴레는 그렇게 쉽사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한 생을 마감하면 선악의 결과에 따라 마치 새 옷을 갈아입듯이 극락이나 지옥, 축생(짐승)이나 아수라 등 그 어떤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49일 동안 중유기에 머무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로 악업을 아주 많이 지은이나 선업을 아주 많이 쌓은 이의 경우는 중유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지옥이나 극락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은 대체로 선한 일도 하고 악 한 일도 해서 선업을 많이 지었는지 아니면 악업을 많이 지었는지를 심판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 기간이 49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중음신(中陰神)으로 떠도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죽으면 생전에 지은 선과 악의 무게에 따라 지옥이나 극락 등 업보에 맞는 세계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 결정을 7일 만에 1번씩 심판하여 늦어도 49일 안에는 모두 심판합니다. 그래서 죽은 지 49일 동안은 죽은 뒤 어떤 삶을 다시 살게 될 것인가가 판가름나는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유기는 왜 꼭 49일인가? 구사론과 유가사지론 등에 따르면 중유기에 머무르면서 다음 생을 만나지 못하면 수차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게 되는 데 그 기간이 7일 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죽어서 7일마다 생사를 반복하면서 출생의 인연을 찾는데 그 최대기간이 49일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49일 이전까지는 다음 생이 결정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49일째에는 반드시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49재를 임종 후 매 칠일째마다 일곱 차례에 걸쳐 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칠일째마다 49재를 지내는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왕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유명계(저승)의 시왕(十王)이 죽은 이들을 심판하는데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레마다 심판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49일째가 되면 반드시 심판을 내려 내세의 과보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49일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경전에서 등장합니다.
지장경에는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자기의 죄와 복을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매다가 염라대왕 앞에서 생전에 지은 업보의 옳고 그름을 따진 뒤에야 업에 따라 다음 생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까지 49일 동안 영가는 중음신으로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나고 죽기를 반복하며 전생의 업보를 냉엄하게 심판받는 세계, 그 혼미한 세계에서의 49일은 영가에게 진정 두렵고 막막한 시간일 것입니다. 육신을 벗기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나 죽음과 동시에 이러한 중유기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스님들도 이 49일 간의 힘겨운 여정을 누누이 일러 주시며 죽음을 미리미리 준비하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신비의 땅 티베트에서는 천년이 넘도록 성전으로 모시고 있는 교전이 있습니다. 바로 티베트어로 <바르도 퇴돌>이라는 책인데 우리나라에는 《사자(死者)의 서(書)》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이 책은 깨달음을 터득한 고승들이 중생구제를 위해 다시 이 세상으로 환생한 후에 스스로 체험한 중유기에 대하여 써 놓았는데, 49일 간의 중유기가 어떤 현상으로 영가에게 펼쳐지는지 세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중음천도밀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을 보면 죽은 날로부터 49일 동안 영가가 맞이하게 되는 현상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마치 영상으로 보여 주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꾸만 이승으로 돌아가려는 영가, 그러다가 그리움과 회환으로 애달파하는 영가, 마침내는 두려움으로 혼미해진 영가가 어떤 생을 선택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죽음과 맞닥뜨리기 전에 수행 전진할 것을 권유하며 설혹 부지불식간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남아 있는 이들이라도 영가의 죽음을 예사로 보지 말고 49재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영가를 바른 세계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49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이며 동시에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데 주어진 시간입니다.
사후 49일 간의 방황, 혼돈, 그리고 선택
영가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작정 과거의 업연을 따라 갑니다.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은 축생(짐승)의 세계로 가게 될 것이고, 이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다면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지옥의 세계로 가게 됩니다.
영가는 환영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이 한평생 지어온 업(業,습관)대로 어둡고 혼탁한 세계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49일이 지나고 나면 영가는 부지불식간에 축생세계나 여러 가지 지옥세계로 깊게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만약 영가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부른다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영가는 중유기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환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진실로 그가 찾아가야 할 곳을 알게 됩니다.
49재는 영가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 지혜의 눈을 밝혀 주는 의식입니다. 사후 49일 간의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소중한 손길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죽음 저편의 세계까지 헤아리는 혜안
자장스님은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는 율사스님으로 명망이 높았던 큰스님입니다.
스님은 항상 계행을 철저히 지키면서 일념으로 수행 정진하셨습니다. 그런 스님에게 오랫동안 세워온 서원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님을 친견하는 것입니다. 문수보살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스님의 염원은 그야말로 지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의 정성에 감응하신 문수보살이 거지의 모습으로 자장스님의 수행처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도 스님은 기도정진을 하고 계셨는데, 웬 거지가 찾아왔다는 시봉의 말을 듣고 스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를 내보내라고 시봉에게 일렀습니다. 문수보살이 찾아 왔건만 잠시의 교만과 아상으로 그만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문수보살은 그런 자장스님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청사자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뒤늦게야 스님은 그가 바로 문수보살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참회와 회한으로 괴로워하던 자장스님은 마침내 스스로 육신을 버리고 문수보살을 따라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장스님이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려고 내려와 보니 이미 스님의 육신은 화장되고 없어진 뒤였던 것입니다.
숨이 끊어지면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다 끝이라고 여겼던 데서 빚어진 일입니다. 이 일화를 계기로 사람들은 49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전설이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보이는 것만을 진실로 여기며 허상에 집착하는 우리네 중생심과 죽음이 모든 것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외에도 여러 가지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49재나 영가 천도의식이 신라시대부터 행해졌으리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불교의 전래, 그리고 1,600여 년 간 도도히 흘려온 불심(佛心)의 강물, 그 속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세뿐 아니라 죽음 저 건너까지도 미리 헤아리고 준비 할 줄 아는 깊은 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영가를 부르면 영가는 들을 수 있나?
이미 죽은 사람이 뭘 알 수 있으며, 또 재를 지내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음식을 차려 놓고 불경을 독송하고 염불하는 것이 다 부질 없어 보이고, 한편으로는 그저 민간신앙쯤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뭘 알까? 그리고 음식을 차려 놓고 스님을 모셔와 49재를 올린다 한들 영가가 자신의 왕생극락을 위한 자리인 줄 어떻게 알며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그것은 애지중지 여겨 온 육신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몸이 없어지고 나면 끝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몸은 앉아 있어도 우리의 생각은 못 가는 곳이 없습니다. 바다를 생각하며 바다에 가 있고, 산을 생각하면 이미 마음은 대청봉 혹은 그 어떤 산꼭대기에라도 가 있습니다. 그리운 이를 생각하면 그의 얼굴이 어느 새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문제는 이 육체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일과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모두 육체를 염두해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벗어버리고 나면 영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아집니다. 그래서 영가들의 영혼은 우리들보다 무려 아홉 배나 맑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서 불러도 단박에 찾아오며 또 아무리 어려운 법문일지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뭘 알까? 혹은 혼령이나 부르는 미신적인 행위 아닌가? 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귀신을 달래는 것이 아니다
자연히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마을 가까이에 있는 무당을 청해 49재나 천도재를 올렸고, 그 요란한 굿판 소리는 마을 전체를 울려댔습니다. 어떻게 생각 하면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재의식이였던 셈입니다. 그만큼 굿판의 이미지는 넓고 깊고 강렬하게 각인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어느 정도 나이 드신 분들이라면 그런 굿판을 보았던 기억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겁니다. 무당이 펄쩍펄쩍 뛰고 그 앞에서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두려워하던 광경 말입니다.
무당은 용케도 죽은 이의 성품이나 회환을 짚어내고, 가족들 중 한 사람과 죽은 넋을 접신시켜 생전에 못다 한 말을 다 풀어내도록 해 줍니다. 그 광경은 사뭇 충격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후세계가 정말 있구나! 사람이 죽으면 정말 귀신이 되는구나! 귀신이란 게 있긴 있구나! 하는 등등의 모호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저도 어렸을 적 몇 차례 굿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몇 살 때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광경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아무개 집에서 오늘 굿판이 열린다는 소식으로 마을 전체가 떠들썩했습니다.
굿판이 뭔지는 몰랐지만 어떤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담 너머로 들려 오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이미 마음은 들떠 있었고, 마침내 그 소리를 따라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무당은 이쪽저쪽을 오가면서 정신없이 소리를 내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손바닥을 싹싹 빌면서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 점점 달아오르고 드디어 무당이 작두에 올라선 순간 갑자기 무당의 표정과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졌습니다. 그리곤 빠르고 성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 말씀으로는 무당의 표정과 행동이 죽었던 그 집 딸의 목소리나 행동과 영판 똑 같다고 했습니다. 맏딸로 태어나 집안 일을 도맡아 고생만 내내 하다가 병으로 세상 떠난 것을 한탄하면서 제 부모 원망을 그렇게 하더라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신들려 있던 무당은 할 말을 다 하고 나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처방을 내려주었습니다. 영가를 위해 좋은 옷과 돈, 그리고 음식을 장만해서 다시 한번 굿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이 맺힌 영가를 달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을에서는 그 뒤로 이야기가 분분했습니다. 굿을 한 뒤 그 집의 액운이 다 없어졌다는 둥, 귀신이 한을 풀어 더 이상 장난질을 치치 않는다는 둥 결과적으로 무당의 천도재가 영험을 발휘했다는 쪽의 평가였습니다.
이렇게 무당의 처방대로 하는 것, 여기까지가 무당에 의지해서 올리는 천도재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영가는 천도가 되었을까요?
불교에서의 49재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와 내용으로 올려집니다.
우선 불교의 49재는 구신을 달래는 의식이 아닙니다.
먹고 싶은 것 못 먹었다고 우는 영가, 출세하지 못했다고 우는 영가, 자식 걱정으로 사무치는 영가. 그렇습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마음의 짐 하나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무속(무당)은 그러한 마음의 짐을 풀어 주는 데 주력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마음의 짐, 한을 풀어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맛나는 것 한번 먹었다고 다음에는 안 먹고 싶어지나요? 대통령이 되고 나면 출세에 대해 아무런 욕심이 없어질까요? 과연 그 한 번의 출세로 만족할까요?
자식이 대학만 좋은 데 갔다고 아무 걱정이 없겠습니까? 아닐 겁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해야 하고 결혼도 잘 해야 하고 출세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욕심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문제는 당장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자리를 바로 갖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며, 우는 아기 달래듯이 사탕이나 쥐어 주고 마는 것이 무속에서의 천도재라면 불교에서의 천도는 육도윤회를 벗어나 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걱정과 회한으로 동동거리는 영가가 삶의 무상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한생각 돌려 주는 것이 불교에서의 천도재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불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49재의 참뜻입니다.
사후세계를 아예 부정하거나 아니면 무속을 통해 형성된 사후세계에 대한 왜곡된 믿음으로 우리는 은연중에 49재를 미신과 연관지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무속에서의 굿판과 불교의 49재, 천도재는 엄연히 다른것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곳으로 떠나소서
우리는 간혹 신이 들렸다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승과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중음신으로 떠돌던 영가가 한 사람의 몸으로 들어온 경우입니다. 한 번 신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이상 자시의 의지대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신이 하라는 대로 신의 뜻대로만 움직이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무서운 신병을 앓게 됩니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죽은 귀신의 장난으로 집안 일이 잘 안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집안에 큰 병이 돌기도 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꿈에 죽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함으로써 우환의 원인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제대로 천도되지 못한 중음신으로 인해 빚어지는 일입니다.
중음신이라 하면 죽은 후 49일까지의 영가를 의미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오래도록 떠도는 영가들이 많은 것일까요? 이는 마음에 회한과 그리움을 끊지 못하고 이승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9일이 되면 각자의 인연과 업보에 따라 새로운 생을 받아 윤회를 해야 하는데 한이 많은 영가는 49일이 지나도록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며 남아 있습니다.
무주고혼(無主孤魂)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로 연고 없는 외로운 영혼들을 뜻합니다. 머무를 곳 없이 하공을 떠도는 영혼, 그 얼마나 외롭고 막막하겠습니까? 그 고통을 지장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복을 알지 못하고 49일 동안을 바보처럼 귀머거리처럼 되었다가, 중생의 죄업을 심판하는 곳에서 업보의 옳고 그림을 따져 심판을 받고 그것을 결정한 뒤에야 그의 업대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그 사이에도 근심과 고통이 천만 가진데, 하물며 저 악도에 떨어졌을 때의 고통뿐이겠습니까?”
캄캄한 중음계를 기약도 끝도 없이 떠도는 일은 영가에게 대단히 괴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가는 어리석어 스스로는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업이 두터운 까닭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의 가족이나 인연 있는 이들이 그를 위해 정성껏 49재를 올려 주었다면 영가는 중음신으로 떠돌지 않고 좋은 곳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의 법문을 49일 동안 들으면서 집착과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장경 제1 서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지 49일이 지나도록 망자를 위하여 공덕을 지어 고난에서 건져 주는 이가 아무도 없거나, 살았을 적에 착한 일을 하 바가 없으면 결국 본래 지은 업을 따라 지옥에 가게 됩니다.”
49재는 남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를 위해 베풀어 주는 마지막 도리입니다. 나아가서는 현세에서의 인연을 더욱 좋은 인연으로 가꾸는 일이기도 합니다.
죽었으니 이제는 끝이라는 무관심이 영가를 무주고혼으로 혹은 지옥세계를 떠돌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더 좋은 곳으로 극락왕생케 할 수도 있음을 상기하며 진심으로 49재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빈손으로 떠나는 길
이러한 문화는 얼핏 보면 따뜻한 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저승길 가는 길에 배고프지 않았으면, 또 외로운 길에 허전할까 염려스러워 생전에 손때 탄 물건들이라도 가지고 갔으면 하는 배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전에 어른들은 저승길 가는 데 노잣돈이라도 있어야 한다면서 돈봉투를 상여나 영단에 올려 놓기도 했는데, 이러한 풍습은 요즘에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49재의 참뜻을 헤아려 볼 때 이러한 배려는 영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이승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영가에게 이러한 행동은 그리움과 회한을 부채질할 뿐입니다.
살아 생전에 탐했던 것, 좋아했던 것, 편안해 했던 건,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음을 일깨워 줘야 할 마당에 오히려 가슴이 꼭꼭 담아 준다면 영가가 어찌 훌훌 털고 새로운 생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49재는 다른 모든 것을 여읜 오로지 진리의 만찬이어야 합니다. 바른 삶을 보여 주고 바른 법을 이야기 해 주고 거듭 정진할 것을 권유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저승길에 허전하고 고생스러울 것이라며 금은보화를 쥐어 주는 것보다 빈손으로 가는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고, 자손을 그리워하는 이에게는 이별과 죽음을 자연의 순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49재를 통해 우리가 진정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천도의 공덕
누구에게나 소중한 등불
부처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씀입니다. 마음이 편할 때는 편한 대로 더없이 그윽하고, 마음이 불편할 때는 의원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고요해집니다.
영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업이 두터운 영가에게는 등불이 될 터이고 복을 많이 지은 영가에게는 지혜를 밝히는 법등이 될 것입니다. 설사 영가가 좋은 곳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천도재를 지내 준다면 불법에 의지해 해탈의 길로 성큼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음을 얻는 선사들에게도 재를 올립니다. 깨달음을 얻은 영가를 각령이라고 하는데 이분들은 이미 해탈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재를 통해 공경하는 마음을 염불로써 전합니다.
또한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다시 사바세계에 와 주시기를 청하는 종사영반이라는 의식도 거행합니다. 이것은 영가를 좋은 곳으로 이끄는 천도의 의미는 아닐지라도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큰 공덕이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천도재는 영가에게나 남아 있는 이에게나 큰 공덕이 되므로 가능한한 천도재를 올려 주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이 기회를 통해 지난날의 죄업을 참회하고 업장을 소멸하여 단지 명복을 비는 재가 아니라 수행의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임종한 지 오래된 영가를 위한 천도
영가법문은 저승길을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혼미하기만 한 저승길에 업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가에겐 나침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극락정토문이 있으며 해탈문이 있는지 영가는 영가법문에 의지해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임종 후 49일 동안 영가를 위해 49재를 지내줍니다.
그러나 미처 49재를 지내주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전쟁으로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자령 영가(낙태한 아이의 영혼)까지 그 사연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비록 때가 늦었더라도 반드시 천도재를 지내주어야 합니다.
중음신으로 떠도는 영가는 무척 외롭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위해 천도재를 올려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때를 놓쳐 오랫동안 중유기에 머물렀지만 늦게라도 천도재를 올려 주면 영가는 그 법문을 듣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됩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수많은 무주고혼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주인을 찾지 못한 영가는 이승 주변을 맴돌게 되는데, 그것은 영가에게도 대단히 괴로운 일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피었던 꽃도 흙으로 돌아가야 비옥한 토양이 되고 풍요로운 내일을 준비할 수 있듯이, 사람도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야 세상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절에선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해지면 무주고혼을 위한 천도의식을 올립니다. 영가를 위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맑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란분재를 잘 아실 겁니다. 목련존자가 무간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한 것을 두고 기리는 의식입니다. 이 우란분재라는 말뜻은 “거꾸로 매달려 있는 중생을 말과 입과 뜻을 깨끗이 함으로써 구제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만큼 큰 공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외로운 영가를 남이라 여기지 말고 불자님들은 적극적으로 천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천도재는 49재와 달리 보통 7일 동안 지내는데 49재를 못 올린 영가를 위해서는 49일 동안 지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49재를 올릴 때도 더불어 무주고혼의 천도까지 함께 배려하는 자비심을 내신다면 더욱 여법한 49재가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무병의 고통은 천도로서 이겨내야
영가가 49일 간 천도되지 않으면 이승 주변을 떠돌게 됩니다. 이때 영가는 새로운 몸을 받지 못하고 그저 정처 없이 방황하느라 몹시 지치게 됩니다. 따라서 외로움과 이승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져 살아 있는 사람 곁으로 자꾸만 찾아옵니다. 그래서 간혹 ‘신들렸다’ ‘신을 받았다’는 등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들리고 나면 몸과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뚜렷한 병명도 없이 병을 앓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신병(神病), 무병(巫病)이 그것입니다. 한번 신을 받아들이고 나면 신의 뜻을 거역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거역하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다 신의 뜻대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내림굿을 받으면 무병은 씻은 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뜻대로 말을 하고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무속인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병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귀신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가야할 곳으로 떠나야 하는데 받아 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집착만 커져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장은 머물곳이 있는 듯 싶지만 결국 방황의 시간만 더 길어지는 셈입니다.
이렇게 신들린 사람은 반드시 법력 있는 스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대게의 경우는 무속인을 찾아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스님을 찾아가서 무병의 고통을 상담하고 영가천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를 절에서 구병시식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는 영가를 부처님 위신력으로 잘 다스려서 가야 할 곳으로 떠나보내는 의식입니다.
며칠이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면 영가는 괴로워 하면서 떼를 쓰지만 마침내는 저승길로 떠나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영가에겐 천도를 해 주어서 좋고, 남아 있는 사람은 건강한 자유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니 더 없이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도재에 음식을 차려 놓는 이유
영가는 자신의 업에 따라 나타나는 여러 가지 환영에 시달립니다. 그 괴로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고 합니다. 영가는 업에 따라 중음기에서 여러 괴로움을 겪으면서 몹시 지치게 되는데 이때 심한 배고픔을 느끼게 됩니다. 육신이 사라져 먹을 수가 없는데도 생전에 음식을 먹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음식에 대해 대단히 집착하게 됩니다.
식(識)이 맑은 스님들은 천도재를 지낼 때 영가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합동재를 지낼 때 보면 수많은 영가들이 모여 음식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도재를 지낼 때 영단에 음식을 차려 놓는 것입니다.
물론 영가는 육신이 없는 까닭에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냄새로 음식을 먹게 됩니다. 냄새가 많이 나는 부침개나 전을 천도재나 일반 제사 때 빼놓지 않고 올리는 것도 바로 그러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 음식을 영단에 올리기 전에 항상 부처님 전에 먼저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천도의식이 시작될 때 부처님전에 음식을 차려 놓았다가 영가를 청하는 고혼청을 하고 음식을 베푸는 향연청을 할 때 비로소 불단에 놓여 있던 음식을 영단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준비할 때 영가에게 올릴 음식 이전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고 공경과 지극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가 끝날 때까지 그 음식을 입에 넣거나 함부로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배고픔을 풀어 주고 난 다음에 영가의 죄업을 씻겨주고 해탈복을 입혀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영가의 마음을 돌리는 법문을 들려 주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죽어서까지 남아 있는 무서운 습관과 업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하라는 부처님 말씀은 영가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장 습관이 사라지진 않지만 천도 기간 내내 여러 번 경전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영가의 마음은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49일이 되고 나면 좋은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천도란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입니다. 업을 참회하고 마음을 다스려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하는 의식입니다. 나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가의 괴로움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점점 조상천도재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상이 편해야 자손이 번성하고 영가가 편안해야 세상이 맑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마음에 뿌린 씨앗
“모든 죄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다 행하라(@惡@@ @善@行)
아함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향산거사 백낙천에게 조과도림 선사는 이 경구로써 대답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착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다 행하고 나쁜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짓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진부하기도 하고 누구나 다 아는 시시한 소리로도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되짚어보면 이것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작은 잘못을 짓는 일에는 관대해지고 작은 선행을 쌓는 일에는 무관심해지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왜 착한 일은 다 해야 하고 나쁜 일은 티끌만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요? 불교사상 가운데 하나인 윤회사상과 인과사상은 그 이유에 대해 답해 주고 있습니다.
인과라는 것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즘 인과에 대해 간혹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라는 회의적인 생각, 혹은 나쁜 사람들도 잘만 살더라는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생각들입니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은 일을 하고 나면 누구라도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뭔가 부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구요. 반대로 나쁜 일을 하고 나면 공연히 조급해지고 또 다른 욕심으로 마음자리가 쉴 틈이 없어집니다. 품행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것이 부럽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담긴 일그러진 얼굴까지 염두에 둔다면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진 못 할 겁니다.
인과란 보이는 결과로도 나타나지만 그 이전에 마음속에 먼저 결실을 맺기 마련입니다. 선업이 드리우는 자비의 빛, 그것만큼 보배롭고 소중한 수확이 어디 있겠습니까. 윤회사상은 이 인과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윤회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바퀴가 돌듯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한 생이 끝나면 다른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생을 시작해야 하고, 그 다음엔 또 다른 생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전생과 현세 그리고 내세로 모든 생명은 거듭거듭 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연과 인과(因果)즉 업에 따라 윤회를 합니다.
선업을 많이 지은 이는 자연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되고 악업을 많이 지은 이는 나쁜 곳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꼭 심판을 내려서라기보다는 자신이 그렇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평생 나쁜 마음과 나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새삼스럽게 죽음을 맞아 좋은 생각을 어떻게 낼 수 있겠습니까?
업이란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 속에 씨앗을 뿌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다 행하라”는 가르침은 내일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죽음과 그 너머의 삶까지를 준비하는 첫걸음입니다.
업을 따라 도는 수레바퀴
이러한 이치는 현재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전생과 현세 그리고 내세 영겁에 이르도록 이어집니다. 오늘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내세의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고리는 그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민하고 번뇌하고 마침내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았던 것도 바로 윤회하는 삶을 끊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현상에만 급급해 내일의 일은 나몰라라 합니다. 그리고 고난에 처했을 때 근본 원인을 되돌아보지 않고 신세를 한탄하기만 합니다.
모든 일의 원인을 생각하고 내일을 미리 준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윤회사상입니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을 수 있듯이 현세의 삶은 윤회의 어느 한 지점임에 불과함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49일의 중유기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간 동안에 결정되는 새로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윤회는 흔히 육도윤회라고 말합니다. 각자의 업연에 따라 윤회하게 되는 세계가 여섯 곳이라는 것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짐승),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곳인데, 지옥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곳으로 악업을 아주 많이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귀는 몸은 수미산(큰산)만하며 탐욕 또한 아주 많은데 그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 가 없습니다. 수미산만한 몸과 탐욕스러운 마음을 충족시키고 싶어도, 먹을 것이 쌓여 있어도 먹지 못하는 고통, 그것이 아귀들의 고통입니다. 이곳은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욕심을 부리던 사람이 죽어서 가게 되는 비참한 세계입니다.
축생은 아시는 바와 같이 네 발 달린 짐승과 새, 벌레들, 미물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아수라는 우리가 흔히 “아수라장이다”라는 말을 하는 데 늘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세계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움을 많이 한 업보로 가는 세계입니다.
그 다음은 인간과 천상의 세계입니다. 인간세계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되풀이 하는 세계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몸을 가지고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에 선업을 많이 쌓은 이라야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곳입니다.
끝으로 계유를 잘 지키고 공덕을 많이 쌓은 이가 가게 되는 곳이 천상입니다. 우리는 언뜻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해탈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천상은 육도윤회의 세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록 그 세계가 다툼이 없고 조용하며 모두가 즐겨 수행을 한다고 해도 만약 이곳에서 나태해지면 그 과보가 다해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래도 천상이 육도윤회 가운데 좋은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다섯 곳 보다는 고통이 적은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육도를 윤회하고 있는 한 우리는 삶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업력에 이끌려 육도 이곳 저곳을 떠돌게 되기 때문입니다.
윤회를 벗어나 대 자유인이 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원인을 없애 열반에 이르는 성도해탈문이 그 하나이고, 아미타불의 원력에 기대어 육도윤회에서 바로 벗어나는 왕생정토문이 또 하나입니다.
그러니 육신이 있을 때 부지런히 수행 정진과 염불 정진으로 마음을 밝혀야 합니다. 혹시 선근이 부족해 공부를 하지 못했더라도 세세생생을 두고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반드시 대자유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다음은 사유(死有)인데 수명이 길고 짧은 것에 관계 없이 오로지 죽는 그 순간을 의미합니다. 숨이 끊어진 자리, 이 육신과의 인연이 마침내 다 소진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 단계가 바로 중유(中有)입니다. 죽은 후부터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기 직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때가 바로 49일 간의 중유기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각자의 인연대로 살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또다시 49일 간의 중유기를 거쳐 어머니의 태 안에 잉태되는 과정을 영겁토록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존재를 그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만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우리는 인연에 따라 업연에 따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윤회를 거듭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이치는 주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우유가 버터가 되는 것, 꽃이 피었다 지지만 이듬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 늘상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 모든 현상은 극히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윤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란 없습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입니다. 피고 지는 꽃처럼, 뿌린 대로 수확하는 대지처럼 우리의 생명도 그렇게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생의 ‘나’ - 현세의 ‘나’
그러나 그것은 이승에서 인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또 전생의 업연에 따라 형성된 ‘나’일 뿐입니다. 이 몸을 지녔을 때만 존재하는 ‘나’인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육신을 벗고 나면 그 이전에 ‘나’란 존재 하지 않습니다.
사후 49일 간의 중유기를 거쳐 새로운 몸을 받으면 그 이전에 ‘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몸과 주변 조건 속에서 어떻게 예전의 ‘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여기는 자아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변화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물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업이라는 바다에 그때 그때의 바람과 주변 상황에 따라 잠시 ‘나’라는 자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 생명의 모체는 다름 아닌 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음에 이르러 49일 간의 중유기를 거칠 때까지는 누구나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49일 간의 중유기에는 육신은 없지만 육신이 있었을 당시의 감정과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49일이 지나면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게 됩니다. 악업이 두터웠던 사람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가게 될 것이고 선업이 많았던 사람이라면 인간세계나 천상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됨과 동시에 이전에 ‘나’라고 하는 의식은 없어집니다. 49일 간의 중유기를 지나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모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영가는 기절(과거 전생의 모든 것을 잊어버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보다 무려 식이 9배나 맑았던 영가지만 잉태되는 순간, 그 찰나에 영가는 전생의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새로운 환생을 그렇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간혹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어디어디에서 살았다’, ‘누구 집안 자손이었다’등 등 제법 상세하게 기억합니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낯선 길을 가는데 익숙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거나 전생에 한 번쯤 왔던 곳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과거를 기억한다기보다는 생명체에 내재된 직관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람은 지금의 몸을 벗고 새로운 몸을 받은 다음에는 전생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49일 간의 여정을 상세하게 그려놓고 있는 티베트의 성전 《사자의 서》를 보면, 태 안에 들어서는 순간 영가는 기절을 하고 동시에 모든 의식이 캄캄한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전생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이들의 환생은 조금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 전생을 이야기하듯 깨달음을 이룬 분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스스로 환생을 선택한 까닭에 전생을 기억합니다. 어쩔 수 없이 육도윤회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의 경지에서 중생구제라는 큰뜻을 펴기 위해 선택한 환생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하는 것
무언가 하려고 해도 잘 풀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흔히 업이 두텁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좋은 말을 아무리 해줘도 요지부동인 사람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줘도 그 가르침의 수승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두터운 업이 지혜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엔 부처님 말씀을 한 번만 듣고도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선근이 있어서 단박에 진리를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법회에서든 스님들이 법문을 하시기에 앞서 “할”을 하거나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면서 좌중을 둘러봅니다. 선근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고 이 ‘할’소리(큰 고함 소리) 한 번으로, 주장자 내리치는 소리 하나로 한 생각이 퍼뜩 돌아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말로써 법문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쉼없이 정진하는 스님에게 “힘들지 않으십니까?”하면 “금생에 성불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이 업으로 내생에 다시 스님이 되어 수행하고 또 그 다음 내세에 다시 수행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부처를 이루지 않겠습니까?”하고 대답합니다.
지장경이나 아미타경 그리고 그 외 수많은 경전을 보면 많은 불보살님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수기(授記,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는 것)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불보살님도 현세에 단박에 부처를 이룬 분은 없습니다. 몇 겁에 이르도록 수행 전지해 온 결실로 부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무량수경에 보면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법장비구는 어느 날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48대원을 세웁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법장비구에게 앞으로 부처가 되리라하고 수기하셨고, 법장비구는 무려 다섯 겁이 지난 다음에야 불국토를 건설하고 부처가 되었습니다.
업이란 이런 것입니다. 쌓이고 쌓여 이루어지는 하나의 힘과 같은 것입니다. 나쁜 힘이 커지면 더욱 험악해지고 좋은 힘이 쌓이면 더 널리 그 뜻을 펴게 되는 이치입니다.
지금이 ‘나’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업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한 평생 수행 정진해온 이는 그 수행력이 업력이 되어 내세에도 그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전생에 닦아놓은 바가 있으니 그 근기가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남의 것을 탐하고 욕심만을 부렸던 사람이라면 좋은 곳으로 가려고 해도 그가 쌓아놓은 업력이 무거워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누가 못 가게 해서가 아니라 세세생생 쌓아온 습관이 그러하기에 그가 지은 선악에 따라 내세애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세의 과보를 두려워하며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이유가 지금의 ‘나’를 아끼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을 ‘나’, 가난과 불행에 찌들지도 모를 ‘나’를 생각하면 그만큼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윤회하는 존재가 지금의 ‘나’가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의 ‘나’를 전혀 기억할 수도 없는 새로운 존재라면 인과나 윤회를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영겁에 이르도록 거듭된 또 다른 ‘나’가 항상 험난하고 어두운 무명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오직 평소에 지은 선과 악밖에 없습니다. 재물도 명예도 사랑하는 이도 어느 것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평생 지어온 업만은 그대로 지니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업을 바탕으로 내세의 과보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업이 보(報)를 어기지 않고 보(報)는 업을 어기지 않는다”는 경구가 나옵니다.
금생에서 좋고 나쁜 일들, 금생에서의 인격과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업’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업’이란 윤회의 뿌리이고 생사윤회의 원인이며 종자인 셈입니다.
그런데 업 가운데 의업(意業)이란 것이 있습니다. 의업은 다음 생의 내용을 결정할 수도 있는 것으로 임종 직전의 마지막 의식,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할 때 지난날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연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좋았던 기억들을,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회환과 아쉬움이 남는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 마지막 의식이 바로 내세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마지막 의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지나온 삶이 어떠 했던간에 임종을 맞아 한 생각 돌이켜 마음을 크게 비울 수만 있다면 그의 내세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임종을 맞는 사람에게 주변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생전에 그가 했던 좋은 일들을 떠올리게 해 주고 좋은 마음을 갖도록 도와 준다면 그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그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도록 도와 무상(無常, 덧없음)의 이치를 깨우치도록 한다면 그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을 준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인연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
그렇습니다. 분명 부처님과 전생에 맺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불교에 쉬이 귀이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과는 유독 마음이 잘 맞고 어떤 사람과는 뭘 해도 삐걱거리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음식 ,책, 취미, 등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와 잘 맞는 것이 있고 나와 잘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쌓아온 인연에서 비롯됩니다. 전생을 뚜렷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나온 업연이 그렇게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가 다 인연에서 비롯됩니다. 나쁜 것은 지난 생의 나쁜 인연에서 생겨나고 좋은 것은 지난 생의 좋은 인연에서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나와 무관한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싫든 좋든 모두가 인연에 의해 빚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조은 인연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인연은 어려울 때 힘이 되고 좋을 때 벗이 되어주지만, 악연은 회복하기 힘든 깊은 상처만을 남깁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인연을 전생의 업보려니 하면서 돌릴 일은 아닙니다. 금생의 인연은 전생에서 빚어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인연은 내세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금생의 삶을 지어야 내세에 좋은 인연을 만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임종하는 사람에게 불경을 들려 주고, 영가에게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금생의 좋은 인연을 짓는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내세의 좋은 만남을 기약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해탈문을 향해서
그리고 이 잘못된 믿음으로 빚어지는 갖가지 현상에 대해 집착을 하고, 생로병사를 겪으면서도 그 무상함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삶에 집착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 집착이 윤회의 원인임을 알아 이로부터 벗어나 대해탈의 길로 들어선 인류의 스승이십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 그것은 무상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무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 환경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한생각 돌이키는 데 해탈의 길이 있음을 부처님은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열심히 수행 정진해서 한 생각 돌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비록 근기가 부족하고 인연이 닿지 않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면 49일 간의 중유기가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49일 간의 중유기는 윤회의 대기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생을 마감하고 또 다른 생을 준비하는 단계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49일 동안 한 번이라도 마음을 바르게 돌릴 수 있다면, 49일 간의 중유기는 깨달음을 위한 더 없이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영성이 맑을 뿐 아니라 육신에 대한 집착도 없어진 상태라 불법을 보다 간절하게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한 번 돌아봅시다. 순간 순간마다 변하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라지는 그야말로 요지경 같은 것이 우리네 마음입니다. 도무지 마음먹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써봐도 뜻대로 잘 안 되는 게 이 마음입니다.
절에 가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경을 읽을 때면 ‘아, 정말 공부해야겠구나’ ‘이 세상에는 미련을 둘 게 하나도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바로 뒤돌아서면 자식문제로 아웅다웅하게 되고 돈 문제로 욕심이 슬슬 머릿속을 까맣게 덮고 맙니다.
단지 한 생각 돌리는 일이지만 그 한 생각을 돌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법문을 듣고 수행 정진해야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세세생생을 두고라도 윤회를 벗어나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있어 항상 허둥지둥 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일상사에 묻혀 마음을 내놓고 살아온 까닭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아 육신을 벗고 나면 전생의 습(습관)이야 남아있지만 그 영혼은 맑아 참으로 법문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죽음을 맞이해서야 비로소 삶을 냉철히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49일간의 중유기가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삶의 무상을 깨닫는 시간, 우리는 영가로 하여금 49일 간의 중유기를 육도윤회에서 성도해탈관문으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떠나간 사람을 위해 진실로 49재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죽음
겨자씨 한 톨로 건진 슬픔
부처님 당시 기사고타미라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의욕도 없고 오로지 아들을 다시 살려 내야 겠다는 생각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은 부처님을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며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여인에게 지금까지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았던 집을 찾아 겨자씨 한 톨을 얻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찾아다녔지만 사람이 죽지 않았던 집은 한 집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여인은 부처님이 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을 시켰는지 그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이란 피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자연의 이치임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아함경)
지장경에선 49재의 공덕에 대해 “죽은 이를 위해서 재를 지내 주면 그 공덕이 7분의 1은 죽은 이에게 가고, 나머지 7분의 6은 재를 지내는 사람들에게 간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 선업을 쌓으며 수행 정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49재의 공덕 중 7분의 6은 재를 올린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죽은 이를 위해서 49재를 올리는데 왜 그 공덕 가운데 7분의 6이 재를 올리는 자신에게 돌아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덕이란 우리가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받는, 흔히 말해서 복을 받는다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49재를 올려줌으로써 또 49재를 올리는 과정에서 남은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 자체가 공덕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만 급급하고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고, 하물며 내세를 생각하는 일에는 신경쓸 겨를조차 없었지만, 49재를 올려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면서 자연 재를 지내는 이들의 마음도 달라져야 하며 윤회를 바로 생각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치르는 일쯤으로 대충 49재를 올린다면 우리는 그러한 공덕을 스스로 저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죽음은 누구나 언제고 맞이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 것, 다시 말해 열심히 오늘을 가꾸는 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내세를 만드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는냐?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아직 공부가 덜 되었다고 하시면서 다시 다른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 제자는 “숨쉬는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대는 도를 잘 알고 있구나.”하시면서 그를 칭찬해 주었습니다(사십이장경).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목숨, 그러나 그 목숨은 들숨과 날숨 사이 그 찰나에 존재합니다. 한번 들이쉰 숨을 다시 내쉬지 못하면 곧 죽음인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말하고, 듣고, 웃고, 울던 모든 작용도 정지합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을 움직이며 서로 손을 맞잡았는데 한 찰나에 그 움직임을 멈춥니다. 들숨과 날숨이 멈추고 서로 간절히 마주보던 눈빛도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맙니다.
죽음이란 그렇듯 명백하면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믿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죽음이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사대(地,水,火,風)가 흩어지는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조건과 인연에 따라 모인 네 가지 기운이 생명체를 이루었다가 그 조건의 스러짐으로 인해 흩어지는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생명체가 죽음을 통해 흙(地)과 물(水) 그리고 불(火) 바람(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모든 인식작용도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자세히 일러 주시면서 ‘나’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계는 성주(城主壞空), 현상계는 생주이멸(生住異滅), 인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이 네가지 과정은 결코 변치 않는 엄연한 법칙이므로 모든 중생이 이를 바로 알아 무상의 이치를 깨닫기를 염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죽음이든 간에 늘 우리는 느닷없이 맞이했다는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죽음은 탄생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온 과정이지 돌발사건이 아닙니다. 들숨과 날숨이 멈추고 사대가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생명의 윤회를 준비하는 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바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은 지금의 삶을 새롭게 정비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와 무관한 죽음은 없다
그러나 죽음의 현상은 아름답지 않지만 그 이치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때가 되면 돌아갈 줄 아는 모습, 새로운 생명을 위해 흙이 되고 거름이 되는 모습이 바로 거뭇거뭇한 죽음 속에 담겨 있는 자연의 이치인 까닭입니다.
만약 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나뭇잎이 낙엽으로 지지 않는다면 지금의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즘 많이 얘기되는 엘리뇨현상이나 라니뇨현상으로 여름에 눈이 오고 겨울에 꽃이 피는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가 뒤엉키면서 세상은 점점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순리란 세상을 풍요롭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거대한 질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네 죽음도 이러한 자연의 순리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간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토양이 되듯이, 편안한 죽음은 다음 세상에 좋은 인연으로 깃들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나와 무관한 죽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듯이 말입니다.
절에서 예불을 드릴 때 무주고혼을 위한 축원을 빼놓지 않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입니다. 특히 요즘엔 스님들이 원력으로 위령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징용되었다가 외롭게 숨긴 영령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해마다 일본에서 올려지고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6․25 당시 전투지에서 뜻 있는 스님들에 의해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자리가 여러 곳에서 마련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각 사찰에서 스님들이 무주고혼 천도를 염원하면서 천일기도를 드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기나긴 세월에 묻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 석자도 모르는 그들의 죽음을 이제라도 천도를 하는 이유는 자연의 도리에 순응하기 위함입니다.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고 그 다음에는 또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에 순응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중음신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중생구제에 뜻이 있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밝게 하는 데 있습니다. 꽃이 피고 질 때를 알아야 자연이 풍요로워지듯이 사람 사는 세상도 떠나야 할 때 떠나줘야 세상이 밝고 넉넉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중음신의 장난으로 신이 들리고 또 가정사에 괴로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무당 들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잃어버린 채 신들이 시키는 대로 믿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국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혼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 무주고혼들까지 모두 구제하려는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와 무관한 죽음은 없습니다. 꽃, 나무, 동물 어느 하나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죽음이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자신과는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임종소식을 접하면 시간을 내서라도 가능한한 천도재나 49재에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행스럽게 요즘 불교계에서는 재가불자님들이 뜻을 모아 비록 생전에 인연이 없었다 하더라도 임종 시달림(임종시에 행하는 염불의식)을 위해 기꺼이 달려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불자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을 구제하고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그 걸음마다 소중한 불연이 영글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그러나 이는 임종을 맞이하는 이를 위해서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가뜩이나 떨어지지 않는 발 걸음을 주저앉히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가 되어 제자들에게 곧 열반에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모든 비구들은 비통함에 몸을 구르며 슬픔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은 근심하고 슬퍼하지 말라. 천지나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느 한 가지 나서 죽지 않는 것이 있는가.”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임을 알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임종 맞이도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임종을 맞이하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아쉬움도 많을 것이고, 또 한도 많을 것입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안함과 걱정으로 저승길이 까마득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죽긴 왜 죽느냐면서 흥분을 하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슬퍼하는 것은 임종자의 갈 길을 더욱 험난하게 할 뿐입니다.
예전에는 임종을 맞아 주변 가족들이 우는 소리를 내며 슬픔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망자의 제단 앞에서 목을 놓아 곡을 함으로써 슬픔을 베가시켰고, 그것이 하나의 도리요 망자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표현으로도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지 망자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그가 갈 길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망자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의식(意識)을 놓게 되면 금생에 그랬던 것처럼 맹목적이고 혼돈된 상태 그대로 다음 생으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임종을 맞은 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해 주고 차분하게 도리에 맞도록 대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집착과 탐착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염불이나 부처님 말씀을 자주 들려준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아미타경을 들려주고 독송케 한다면 한결 임종을 맞이하는 이의 마음이 조용해질 것입니다.
또한 주변 가족들과 임종자가 함께 불경을 독송하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업보에 끄달려 방황하지 않고 극락세계를 향해 그야말로 편안하게 떠나갈 수 있습니다.
떠나는 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어야
제가 아는 한 노인은 숨이 몇 번이나 넘어갔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7일 동안 반복했습니다. 멀리 있는 딸이 보고싶었던 까닭에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7일째 되는 날 외국에 있던 딸이 급히 왔고 그 노인은 딸의 손을 잡자 마자 바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하는 고종명을 오복 가운데 하나로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듯이 보이면 서둘러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락해 임종을 함께 지켜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임종자의 유언을 잘 받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지, 당부하고 싶었던 말을 잘 들어 기록하고 임종자에게 뜻을 받들겠노라고 반복해서 말을 해 주어야합니다. 그래야 임종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임종자를 위해 미리 수의를 준비하는 것도 좋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막막한 임종자에게 수의란 죽음을 준비했다는 안도감을 줍니다.
그리고 임종자는 죽은 뒤 자신의 모습이 가능하면 깨끗하고 청결하게 남기를 원하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에 깨끗한 수의를 준비하면 여러 모로 임종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숨이 넘어가 임종을 맞이하면 우선은 정확하게 생사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섣불리 판단했다가 큰 잘못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으니 가능하면 의사를 불러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운명했음이 확인되면 망자의 팔과 다리를 곧게 펴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굳기 마련이니 나중에 염습을 하고 입관할 때 구부러진 채 팔이나 다리가 굳어 있으면 이를 펴기 위해 험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략적인 준비가 끝나면 부고장을 만들어 임종자의 죽음을 알리고 장례의식 준비를 하나하나 시작합니다.
이때에도 남은 가족들은 망자의 곁에서 아미타경과 지장경 등 부처님의 경전을 계속해서 들려 주십시오.
설사 외형상으로는 숨이 끊어졌다고는 하나 망자의 넋은 49일이 지날 때까지는 중음기에 남아 떠돌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후 삼일까지는 망자가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가족들 곁에서 맴돌면서 극한 외로움과 절망감에서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부처님 말씀을 자주 들려 주고 불보살님 명호를 불러 주면 망자에게는 어두운 저승 길에 밝은 등불을 얻은 듯 큰 의지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손길로 단장하는 마지막 길
사람이 죽고 나면 바로 제단을 마련하고 장례식을 치릅니다. 그 기간은 보통 3일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생전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찾아와 영가의 넋을 기립니다.
이 3일 동안 임종자를 염습하고 입관식까지 마치게 됩니다. 앞서도 얘기를 한 바 있지만 이 시기는 영가가 채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해 황망해하는 시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족들의 진심어린 기도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혹여 영가가 생전에 삼귀의와 오계를 받지 않았다면 스님을 모시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케 하여 계를 받도록 하면 좋습니다. 그리고 염습, 착의, 착관, 입관의 절차가 이루어지는 동안 내내 무상계를 독송해 주고 틈틈이 나무아미타불 계속 염송해 주십시오.
이때 가족들은 그저 입으로만 염송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왜 아무타불을 염송해 주는지, 왜 무상계를 독송해 주는 지 영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영가가 그 뜻을 바로 알고 함께 아미타불을 염송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일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열반의 세계로 떠나시는 영가시여!
삼라만상이 흩어져도 변함없으며 생사에도 걸림이 없으며 천지만물보다 먼저 존재하였고 천지 만물보다 오래 존재하는 한 물건의 정체를 바로 아시고 평화로운 열반의 세계로 향하도록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일러드리고자 하오니 이 법단에 오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 인연 다해 목숨이 사라졌으니 모든 것이 덧없음을 다 알아 열반을 얻으면 즐거움이 되오리다.
또한 평생 동안 지은 죄도 임종시에 일념으로 염불하거나 자손들이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선업으로 변하나니 함께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시옵소서.
3일 간의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나면 영구를 상여로 옮겨서 장지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 지내는 제사를 발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떠나는 의식을 영결식이라고 합니다. 불자님 가정의 경우라면 이때에도 스님을 모시고 불보살님의 위신력에 의지해 영가를 천도해 주면 좋습니다.
불교의식으로 치르는 발인제 절차를 대략 살펴보면, 부처님을 청하는 거불, 영혼을 법단으로 불러오는 창혼과 반혼착어, 향과 차 등의 공양물을 올리며 영가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가지공양, 보공양진언, 아미타불 정근, 그리고 영구를 옮기는 기감, 관을 들고 절을 하는 보례로 이루어집니다.
발인제와 영결식은 임종자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애지중지 해 왔던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영가에게 참을 수 없는 큰 슬픔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발인제와 영결식문은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시는 중생 몸 받지 말고 극락으로 향하소서. 이 한마디는 임종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 가장 보배로운 마음의 전언인 까닭입니다.
49재에 읽으면 좋은 경전
금강경은 부처님 십대제자 가운데 해공제일 즉, 공(空)사상의 으뜸인 수보리존자와 부처님이 대화로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금강경의 주된 내용은 한 마디로 공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無@住而生@心)” 즉 일체의 것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메시지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금강경은 다른 경전에 비해 유독 선사들에게 더욱 많이 읽혀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육조 혜능조사도 이 금강경을 읽고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금강경은 그만큼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법등과 같은 경전인 것입니다.
또한 금강경 사구게에 보면 “모든 모습을 모습 아닌 것으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라는 경구가 나오는데, 이는 중유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환영으로부터 영가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천수경과 반야심경 또한 49재 때 빠지지 않고 독경됩니다. 천수경은 제불보살 모두를 칭송하면서 그 공덕으로 집착을 여의고 마침내 부처가 되기를 서원하고 다짐하는 경전입니다.
천수경은 그 내용이 구체적이라 다른 경전에 비해 독경할 대 그 내용이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영가에게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홀로 가기엔 두렵고 막막하기만 한 저승길에 듣는 천수경은 제불보살님에 의지해 반야선을 탄 듯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대반야경 600권의 사상을 260자로 짧게 함축해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만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육신이나 감각에 구애되지 말고 또 그 모든 것이 허구임을 바로 알아 무상정각(최고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라면 누구나 수지 독송하면서 피안을 향하는 수행의 걸음을 늦추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49재 때에 빠지지 않고 항상 독송하는 것으로는 무상계가 있습니다. 무상계는 영가에게 무상의 법을 설하는 내용으로 49재 뿐 아니라 모든 불교의례 과정에서 항상 읽혀지고 있습니다. 육신이 어떻게 흙으로 돌아가며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소멸되어 가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영가가 비로소 무상의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에 들 수 있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무상계란 열반에 들어가는 문이요 고통의 세계를 뛰어넘는 문이다”라는 첫 구절이 말해 주듯이 무상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길임을 영가와 남아 있는 우리 모두가 깊이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아미타경과 지장경 또한 49재에 빼놓을 수 없는 경전입니다.
아미타경은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관장하시면서 법을 설하고 계신 아미타부처님의 대원력과 위신력을 설해 놓은 경전입니다. 고통도 미움도 괴로움도 없는 극락정토는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겐 그립고 또 그리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아미타경을 읽어보면 극락세계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중생구제의 원력이 큽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생각하면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임종자에게나 영가에게 아미타불을 염송하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정리하면서 일어나는 복잡한 마음을 오로지 아미타불께 의지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왕생극락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이며 위신력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갑작스럽게 아미타불을 염송한다고 입에서 술술 나오지는 않습니다. 매순간 틈틈이 계속해서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염원해야 삼매에 들듯이 아미타불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영가의 가족과 친지들은 영가가 다른 환영에 끄달리지 않도록 49일 동안 정성을 다해 들려 주어야 합니다.
지장경은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설해 놓은 경전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일찍이 정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되기를 마다하신 분입니다.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또 사바의 중생들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고통받는 중생들 곁에 있겠다는 대원력을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지장보살님께 귀의 참회하면 그 동안 쌓아온 크고 작은 모든 업이 지장보살님의 원력으로 소멸됩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지장보살님을 일념으로 염하면 업장이 소멸되어 더 이상 업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업이 두터운 영가는 중음신으로 떠돌면서 무섭고 험악한 환영 때문에 큰 괴로움을 겪게 되는데, 이럴 때 지장보살님께 의지하게 해 준다면 영가의 업장은 소멸 되어 바른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법성게를 비롯해 법화경, 원각경 등 다른 대승경전도 영가에게 들려주면 좋습니다. 그리고 삼칠일 동안 영가를 위해 광명진언(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을 외우는 것도 좋은데, 광명진언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힘으로 영가가 좋은 인연을 맺도록 하는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합니다.
49재를 맞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경전을 읽어 주는 것은 영가의 바른 천도를 위해서입니다. 어느 경전이 더 좋다 나쁘다 할 것 없이 모두 다 영가에게는 법등(진리의 등불)의 역할을 해 줍니다. 영가가 생전에 특별히 가까이 했던 경전이 있다면 그 경전을 읽어 주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시면 49일 동안 위의 경전들을 사경(손수 베껴 씀)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법보시를 한다면 그 공덕이 수승할 것입니다.
1백 개의 돌을 물 위에 띄우는 힘
밀린다왕문경에 보면 밀린다왕과 수행자 나가세나와의 흥미로운 대화가 나옵니다.
밀린다왕이 어느 날 수행자 나가세나 스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스님! 세상에 있으면서 백 년 동안 악행을 한 사람이라도 임종시에 염불을 하면 죽은 후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나가세나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조약돌 한 개라도 물 위에 올려 놓으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1백 개의 돌이라도 배 위에 올려 놓으면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뜹니다. 부처님을 염원하는 것은 바로 1백 개의 돌을 뜨게 하는 배와 같습니다.”
한 개라도 가라앉는 돌을 1백 개라도 뜨게 만드는 배, 부처님은 이러한 배와 같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설사 그 업이 수미산만큼 두터운 영가라도 진심으로 염불을 한다면 반드시 천도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장경에도 보면 죄를 많이 지은 어미를 찾아 한 바라문녀가 지옥을 찾아가는 대목이 나옵니다. 지옥으로 들어선 바라문녀 앞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환영이 나타납니다 이때 바라문녀는 환영에 끄달리지 않고 염불로써 두려운 마음을 씻어내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만큼 염불의 공덕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력으로 수행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마음이란 늘 흔들리고 정처 없는 방황을 거듭하는 터라 수행의 마음을 곧게 지켜 나가기란 어렵습니다. 그때마다 제불보살님께 의지한다면 언제고 반드시 피안의 세계로 가 닿을 것입니다.
불보살님을 닮는 마음으로
경전을 보면 수많은 불보살님이 등장합니다. 깨달음을 가르쳐 주시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자비의 손길을 펴는 관세음보살님,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세우신 지장보살님 등등, 이렇게 저마다 다른 손길로 다른 음성으로 그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타정신입니다. 남을 위하는 마음, 남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제불보살님들은 수많은 원력을 세웠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소원이나 서원을 세웠던 분은 다 한 분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많은 중생들을 정토 세계로 이끌까, 어떻게 하면 수많은 중생들을 고통없는 마음을 가지게 할까, 오로지 중생들의 눈빛과 마음을 헤아리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불교에 귀의하였다면 우리는 이러한 이타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비우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자비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49재는 그러한 행보의 하나입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 더 이상 내게 득이 될 것도 해가 될 것도 없는 사람, 그의 열반과 극락왕생을 위해 49일 동안 일념으로 기도 정진하는 것이 49재의 참뜻입니다.
그러기에 49재를 올리는 동안만은 부처님을 닮는 마음으로 아니 부처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영가는 좋은 인연으로 새로운 생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49재에 스님을 모시는 이유
그러나 평소 존경하고 진심으로 경외하는 이로부터 듣는 좋은 말 한 마디는 때로 해답으로 다가옵니다. 문득 마음이 열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그 말씀이 아주 특별해서라기보다는 존경하는 사람이 들려 준 말이기 때문에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49재 때 법력 있는 스님을 모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이 건네는 한 마디보다는 법력 있는 스님이 무상의 이치를 설명해 줄 때 영가는 더욱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부처님의 말씀을 빌어 영가에게 법문을 들려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지혜로써 관할 수 있는 부처님의 위신력이야말로 영가에게 큰 경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찰에서 제불보살님을 모두 모시고 법력 있는 스님의 집전으로 올려지는 49재, 거기다 가족과 친지들의 불심이 더해진다면 여법하게 영가 천도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혹시 식순이나 순서를 잘 모르더라도 집전하는 스님의 말씀을 잘 따라 하면 됩니다.
영가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건성으로 하거나 아니면 슬픔에 젖어 울며 불며 49재를 지내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극락왕생으로 염원해야 하고 진심으로 불법을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가의 생각을 결코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도 간혹 누군가에게 나의 의견이나 생각을 이해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상대방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만약 상대방이 나름대로 자기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충 성의 없이 설명을 한다든가 스스로도 확신이 없어서 어물어물 얘기를 하면 상대방은 절대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심어린 자세와 확신에 찬 설명을 할 때 상대방은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됩니다. 한 사람의 생각을 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영가는 우리들보다 의식이 무려 아홉 배나 밝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진심이 아닌 건성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영가는 다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얽힌 어느 스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49재를 집전하기로 한 스님이었는데, 그날따라 스님은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한 끼도 공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49재를 집전하면서 내내 떡 생각만 했습니다.
제단 앞에 올려진 떡을 보면서 빨리 재가 끝나서 저 떡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식순에 맞게 염불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영가는 49재가 올려지는 두 시간 동안 불경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하고 스님이 마음 속으로 외치는 ‘떡, 떡’하는 소리만 들었다고 합니다. 영가 또한 입으로 외는 소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49재를 올릴 때 가족들은 진심으로 영가의 해탈과 극락왕생을 염원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영가가 감응을 받고 한 생각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고 49재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얼마나 작은 습관 하나에도 끄달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 모두 다 자신의 오랜 습으로 선택하는데,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당장 그만둘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커다란 의식의 변화를 겪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가 천도 또한 그러합니다. 한 평생 짓고 또 지어왔던 업을 한순간에 놓아버리고 해탈을 하라고 그냥 말 한 마디 한다고 영가가 수긍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49재를 매 칠일재마다 일곱 차례에 걸쳐 올리는 참뜻도 이러한 영가에 대한 깊은 배려에서 비롯합니다.
선근이 있고 죽음을 통해 삶의 무상을 느낀 영가라면 법문을 듣고 바로 깨우침을 얻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해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수시로 정법(正法,올바른 가르침)을 들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가의 마음을 흔들어 삶의 무상을 뼈아프게 깨우치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무상함도, 윤회의 이치도, 극락왕생의 염원도 자꾸만 들려 주어야 영가도 듣고 또 들으면서 점차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 가족들은 49재를 올리는 49일 동안 단 하루도 마음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나쁜 일도 하지 말고 험한 말도 하지 말고 오직 불심으로 영가 천도를 염원해야만 합니다.
9재에 임해 서로 나눠야 할 이야기
반드시 지켜야 할 일들
예로부터 상갓집에 가서 쌈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상추쌈을 싸서 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입니다.
영가는 세상을 떠났는데 조의를 표하려고 온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 먹거리를 탐한다면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언제부턴가 상갓집에 가면 곡소리보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영가를 위해 곡을 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잔칫집처럼 마음껏 술자리를 벌이는 것 또한 좋지 않습니다. 보기에도 그렇고 영가에게도 외람된 일입니다.
임종 후 49일 동안 우리는 내내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떠나간 사람을 위해 마지막으로 지켜줘야 할 도리입니다. 이제 49일 동안 지켜야 할 것들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살생을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영가 천도를 위해 49재를 올리면서 정작 본인은 악업을 짓고 있다면 오히려 영가에게 큰 해가 됩니다.
지장경 제7품에 보면 지장보살이 부처님께 영가 천도를 위해 지켜야 할 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추려 보면 “산 목숨을 죽이거나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으로는 털끝만큼도 망자를 이롭게 하는 일이 못 될뿐더러, 업연만 맺어서 더욱 죄를 깊고 무겁게 한다. 또한 영가가 내세나 현생에 성스러운 인연을 만나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하더라도, 임종할 때에 그 가족들이 악을 지으면 그 원인으로 죽는 사람에게 큰 해로움을 주게 되는데, 어찌 차마 권속들이 업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49일 동안 살생과 악업을 짓는 것은 자신 스스로에게도 해가 되지만 영가를 위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장례음식에는 고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가족들도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49일 동안 영가를 위해 염불을 해야 합니다. 모든 중생들이 임종할 때에 부처님 명호나 보살님 명호만 들어도 모두 다 해탈하게 된다고 지장보살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영가가 생전에 자신이 염불을 하였다면 더욱 좋을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권속들에 의해 염불소리만 들어도 그 업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넷째, 늘 정성스럽게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해 영가 천도를 기원하는 것이 49재입니다. 그런 만큼 그 정성이 지극해야만 합니다.
49재를 마련할 적에 또는 49재가 끝나기도 전에 음식을 먼저 먹는다거나 혹은 음식을 함부로 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를 어겨 먼저 먹거나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영가는 복력을 다 얻지 못하고 맙니다 매사에 정성과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공덕을 많이 지어야 합니다. 목련존자가 죄 많은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기도할 때 부처님께선 목련존자에게 스님들을 비롯해 사부대중에게 공양을 올리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바라는 마음보다는 베푸는 마음이 먼저 앞서야 모든 일이 여법하게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남에게 베풀 줄 모르면서 바라기만 하는 것은 업을 더 두텁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영가를 위해 거룩하고 자비로운 일을 많이 행해야 합니다.
지장경에 죽은 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 그 공덕의 7분의 6은 재를 지내준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을 쌓는 것은 자신에게나 영가에게 좋은 일이 됩니다.
여섯째, 유흥장소에는 되도록 가지 말아야 합니다. 술집, 노래방, 나이트클럽, 도박장 등등 유흥을 목적으로 하는 곳은 정신이 흩어져 영가를 위한 오롯한 마음을 지켜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영가의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발원문과 자신의 서원을 적어서 하루에 한 번씩 읽어주십시오. 그리고 49재에 부처님전에 올렸다가 회향 때 태우십시오. 영가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생활 곳곳에서 마음을 잘 써야 할 것입니다. ‘49재는 스님이 알아서 해주겠지, 절에 위패 올려 놨으니까’ 하면서 자신은 아무렇게나 생활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비용은 형편껏
‘빈자(貧者)의 등불’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부처님이 계실 때였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길을 단장했습니다. 꽃을 한아름 사서 공양하는 사람, 금은보화를 길 위에 뿌려 놓는 사람, 화려한 등을 밝히는 사람, 저마다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난한 난다 여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처님께 등 하나도 공양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궁리 끝에 머리카락과 옷을 팔아서 촛불을 하나 샀습니다. 화려한 등 사이로 놓인 작은 촛불이었지만 그녀는 부처님께 등공양을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온 거리가 불을 밝힌 채 밤이 지나고 마침내 새벽이 왔습니다. 모든 등불은 새벽을 맞아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작은 촛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아난존자가 촛불을 끄려고 했지만 촛불은 꺼지지 않고 더욱 밝게 타올랐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촛불을 끄려고 하지 말라. 그 촛불은 정성으로 밝힌 등이라 꺼지지 않을 것이다(현우경 근본약사품).”
부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49재를 올리는 데 있어 비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정성껏 그리고 형편껏 지내는 것이 49재에 드는 적절한 비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9재에 필요한 준비물은 미리미리
49재는 보통 사찰에서 올리는 까닭에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찰의 스님이 웬만한 것을 다 알아서 준비해 주시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정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냥 무심히 참여하지 마시고 가기 전에 49재 의식 순서를 한 번 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스님이 49재를 집전하실 때 한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스님대로 집전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슬픔에 젖어 있거나 어리둥절해 있으면 산만해지기 쉽습니다. 요즘 각 사찰에서 나오는 법요집을 보면 49재 의식의 순서가 실려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준비해야 할 점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발원문을 작성하십시오. 그리고 49재가 시작될 때 조용히 영가에게 읽어 주고 부처님 전에 올리시면 됩니다.
둘째, 49재에 동참할 인원을 점검하고 사찰에 통보하십시오. 그래야 사찰에서도 준비하기가 수월하고 참여하는 이의 입장에서도 산만하지 않습니다.
셋째, 49재 비용을 가족들이 함께 상의하여 전하도록 합니다.
넷째, 극락세계로 가는 해탈복을 입혀드리는 관욕의식에 쓰일 수건, 비누, 치약, 칫솔, 고무신, 영가의 옷 등을 미리 준비합니다.
다섯째, 상복을 깨끗이 하여 정갈하게 입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여섯째, 독경 때 필요한 경전과 법요집을 준비합니다.
일곱째, 국화 등 꽃을 준비합니다.
이 외에도 49재에 필요한 사항을 잘 헤아려 49재를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한 생명의 마지막 가는 길이며 또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의식인 만큼 그 정성이 각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