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Ⅰ. 머리말 Ⅱ. 東明神話와 東明信仰의 재평가 Ⅲ. 多元的 天下觀과 東明神話의 긍정 Ⅳ. 맺음말 |
Ⅰ. 머리말
지금까지 이규보에 대한 연구성과는 적지 않은데 이들 연구성과를 크게 나누면 사학사적 위치, 서사문학으로서의 위치, 당시 이규보가 처한 정치적 ? 군사적 현실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이규보와 동명왕편에 대해 규명을 해주었다. 동명왕편에 내포된 작자의 의도나 사상에 대해 기존 연구성과에서 지적된 중요한 한가지는 고구려 계승의식이다. 하지만 동명왕편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의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는 지적은 인정될 수 있지만 이규보의 다른 글들, 그의 문집 50여권에 수록된 2,000여편의 글들을 보면 고구려를 정통으로 삼는다거나 고구려를 삼국 중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평가한 글들은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오히려 이규보는 삼국시대 신라에 대해서 千年 王業과 聖王의 통치를 언급하고 있어 신라의 역사적 전통이 신성함을 언급하는데 그렇다고 봤을 때 동명왕편 자체를 놓고 보면 그가 역점을 둔 부분이 고구려 계승의식이 아닌, 보다 큰 비중을 갖는 점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이규보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은 주변 문화권들과 교류하고 부딪히는 속에 나름으로 전통문화를 평가하는 문제와 그 국제적 위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하는 天下觀과도 직결된다. 이 점은 동명왕편 자체에서도 직접 천명하고 있는 命題이고 그의 글들 상당수는 이와 관련된 그의 고민이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Ⅱ. 東明神話와 東明信仰의 재평가
이규보가『舊三國史』를 얻어 보고「東明王篇」을 지은 것은 26세 되던 해인 명종 23년(1193)이다. 74세의 일생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던 그에게 동명왕편은 초창기 작품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당시 이규보의 학풍은 유교를 중심으로 도교적인 영향도 받았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교를 중심으로 도교와 불교도 일부 겸하는 것은 당시 識者들에게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규보는 젊었을 때 유교의 영향으로 동명신화를 부정하였지만 후에는 나름의 오랜 비판 과정을 거쳐 고대 신화의 의미를 긍정하고 인정할 부분이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무비판적 또는 복고적 긍정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고려 전 ? 중기에는 개방적인 전통주의자들이 다수였는데 이규보에게 있어 도교, 불교적인 색채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를 유교사상 계열이 아니었다, 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규보는 당시 오히려 유가 계열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만년에 불교에 심취하면서도 그는 유교적 자세를 견지했었기에 그의 젊었을 때 작품인 동명왕편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구삼국사』의「동명왕본기」를 보고 “역시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어 생각하기를 鬼나 幻이라 하였는데 세 번 거듭 읽으며 음미하고 그 근원에 조금씩 다가가 보니 幻이 아니고 聖이었으며 鬼가 아니고 神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귀’와 ‘환’은 부정할 대상이며 ‘신’과 ‘성’은 긍정할 대상인데 그렇다면 이규보에게 있어 이런 구분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전자는 당시의 토속신앙 일반과 연관되어 있는 미신적인 면의 부정이었다. 당시 동명신화는 기록으로 전해진 화석화된 내용이 아니라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하층민들조차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대중적인 내용이었다. 실제 이러한 토속신앙은 고려 북부에 오래도록 전해지는데『高麗圖經』에도 그 모습이 확인되며『高麗史』가 편찬되는 조선초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옴을 확인할 수 있다.
이규보가 동명신화에 특별히 주목하여 동명왕편을 남기게 된 동기는 바로 동명신화가 당시에 동명신앙과 함께 사회적으로 신성시되며 이야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현상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전혀 새로운 내용의 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규보가 동명신화의 신성함을 언급한 것은 당시의 토속신앙과 연관된 인식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므로 양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규보의 일생에 있어서 미신적인 부분의 배격은 철저하리만치 일관되게 확인되는데 이런 현상은 동명신화를 재평가하여 긍정한 후에도 ‘귀 ? 환’의 배격으로 계속되고 있다. 물론 이규보가 유교적인 多神的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하여 이것이 ‘귀 ? 환’의 배격과 동일시되는 부분은 아니다. 당시의 식자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만년에 불교에 심취하였을 뿐, 그의 삶은 신앙에 깊이 의존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즉, 그는 미신적인 부분은 철저히 배격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사상적으로 유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소극적이나마 토속신앙들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고 동명이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받는 존재였기에 동명신화에 대한 초기 부정적인 평가가 비판적인 재평가 이후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었던 셈이다.
이 점이 김부식과 다른 점인데 김부식 역시 유교적인 다신 관념과 다신적 제례를 수용하면서도 중국의 토속신앙과 제례법에 뿌리를 둔 유교적 신격을 긍정하고 중국 신화들을 긍정한데 반해 고려 자체의 것들은 부정하였다. 심지어『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정통론자로 볼 수도 있는 그였지만 신라의 건국신화마저도 그는 부정하고 있다. 김부식은 잘 알다시피 대국의 명을 어기면 망해도 마땅하다는(백제가) 화이론적 천하관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것이 양자간의 큰 차이점이다. 김부식은 중국것은 신성한데 반해 한국것은 괴의하여 믿을 수 없다 하였지만 이규보는 동명신화뿐만 아니라 신라의 건국신화도 신성한 史蹟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合理的 儒敎史觀’이라는 김부식과 ‘神異史觀’이라는 이규보의 차이는 신화의 전면적 부정과 긍정이 아니라 중국 신화를 긍정하지만 우리 신화를 어떻게 보는가의 차이였던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고려시대의 유교이념이 동일하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양자간의 차이는 단순히 건국신화에 대한 인식차이뿐만 아니라 고려의 전통적인 문화의 차이, 더 나아가 천하관의 차이로 나타났다.
이규보가 동명신화의 ‘신 ? 성’을 긍정하게 된 변화는『구삼국사』의 서술로부터 온 감흥과 함께 그가 그 긍정의 근거로 삼을만한 새로운 사실에 착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의 신화와 동명신화를 비교검토함으로써 중국의 것과 동명신화가 별 차이가 없다면 동명신화 역시 긍정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즉,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대한 평가는 초기에 동명왕편의 ‘神異’ 그 자체만을 따지던 것에서 중국 고대 신화의 ‘神異’의 인식에 대한 비교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명신화를 통해 고려가 본래 신성한 나라이며 중국의 고대 신화와 나란히 둠으로써 우리도 중국과 같이 신성한 나라에서 출발한 전통이 있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 일반의 사조와 달리 1천년도 더된 신화에 의지하여 고려가 신성한 근원을 갖는 나라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고려가 천하의 신성한 나라로 높여질 수 있다고 이규보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규보가 이런 주장을 한 이면에는 고려 사회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며 장기간에 걸쳐 내려오는 자주적 천하관이 존재하였다. 즉, 이규보의 동명신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그러한 천하관의 연장선상에서 천하의 중심으로서의 고려의 역사적 전통을 고대에까지 확대하여 확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Ⅲ. 多元的 天下觀과 東明神話의 긍정
고려의 주류는 다원적 천하관을 지닌 계열이었는데 실제로 각종 공문서 ? 사문서를 비롯하여 국가체제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고려의 팔관회가 열리는 때에는 여진을 비롯한 주변의 군소세력들을 비롯하여 宋商이 와서 방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또한 여진 집단들의 고려에 대한 朝貢 형식의 교역은 금이 일어나 요를 멸망시키기 몇 년 전인 1120년대 초기까지도 계속 이어졌었다.
이러한 고려 전기의 상황은 이규보의 천하관과 같은 類의 인식이 보다 광범하게 존재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의 속악 풍입송을 보면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나있다. 고려의 이러한 속요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규보 이후에는 이러한 노래의 내용이 만들어져 사회적으로 정착될 상황이 아니고 늦어도 무신란 전, 고려 전기로 생각된다.
이런 이규보의 천하관을 살펴보면 대략 2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천하관이 고려 전기로부터 내려오는 多元的 天下觀의 계통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이 전기의 천하관의 전통과 연결되면서도 일부 달라진 면모를 가졌다는 것이다. 즉, 그의 천하관에서는 실질적 대외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약화되는 반면, 관념적인 문화적 기준의 華夷觀의 비중이 커짐으로써 고려후기에서 조선시대에 보이는 小中華論的 天下觀의 色調가 짙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중심을 다원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국제적 상황은 이미 고려가 건국된 초기부터 이규보 당시인 13세기까지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규보가 고려의 군주만을 천자 혹은 황제로 부르지 않았음에서 그러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송은 북방 왕조들에게 군사적으로 압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해서 역대의 어떤 한족 왕조에게서 볼 수 없던 파격적인 대우를 하면서까지 고려를 이용하려고 했었다. 그렇기에 고려는 송의 책략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할 필요성이 있었고 더 나아가서 북방 세력들의 군사적 압박에 대처하는 공동의 상황 속에서 송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은 고려의 강력한 자주적 태도를 요구하고 있었고 좀더 적극적으로 만주 방면 세력들을 영향력권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고려에서 이들 세력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를 취하면서도 자체적으로는 천자 ? 황제를 칭하며 독자적인 천하의 중심으로서 고려의 위치를 설정하려 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필요성을 배경으로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규보의 다원적 천하관도 점점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고려는 금의 등장으로 1120년대 중반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대내적으로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이어 무신란까지 맞이하면서 크게 흔들리게 된다. 비록 그가 연등회의 敎坊致語에서 夷와 夏를 구분하였지만 결국은 華夷圖라는 일종의 중국 중심의 세계지도 속에서 고려를 小中華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화와 이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人才의 유무인데, 이 역시 중화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화이론적 천하관에서 중국의 문화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인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겠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문화는 가장 선진적이라 할 수 있는데 고려초 이래로 중국 문화는 중요시 취급되었으며 그 수용 태도는 크게 2가지였다. 첫째는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볼 수 있듯이 꼭 필요한 것은 수용하지만 전통적인 것은 지키라는 다원적 천하관적인 것이며 둘째는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서 볼 수 있듯이 화이론적 천하관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문화가 아무리 선진적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시대적 ? 지역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 수용태도가 화이론의 경직성을 갖는다는 것은 건전한 문화의 발전 방향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정책에 따라 화이적 문화가 발달하면 할수록 문화적 종속성은 더 커지게 되고 편향된 외래 문화 수용의 극단화와 함께 보다 다양한 문화 발전의 가능성을 축소시키게 된다. 실제로 성종대 전반을 주도했던 최승로 계열의 세력은 거란의 침입에 대처능력을 잃음으로써 위기를 맞고 성종대 후반 이후 주도적인 위치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렇게 봤을 때 이규보의 경우는 김부식이나 최승로와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고에도 중국문화에 기울어진 부분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주적인 부분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규보라 하여 시대적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검토하는 방법이 바로 중국 신화와의 비교 검토인데 여기에는 ‘중국에서도 신화가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전승된다고 해서 고대의 신화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어느 시대에나 흔히 있는 문화인식의 시대적 장벽 안에 갇혀 한시대의 가장 앞선 선진문화라도 한계가 존재함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Ⅳ. 맺음말
동명왕편을 통한 이규보의 동명신화에 대한 평가와 이해는 단순한 복고적 의식에서 나오는 긍정이 아니라, 동명신화나 당시의 동명신앙에 대한 비평적 재평가를 통한 긍정이었다. 그러한 ‘비평적 재평가’는 이규보의 유교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학식과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도 역시 經史였다. 하지만 고려 전 ? 중기의 유교적 계통이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김부식 등의 화이론적 계열인물과는 다르게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분명 巫俗에까지 퍼져있는 동명신앙의 미신적 요소는 비판하였지만 동명신화 속에서 我國(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이 중국의 그것과 대등하게 신성하였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점은 동명왕편 序에서도 분명히 언급되었는데 그러한 역사인식은 이규보가 가졌던 고려도 하나의 독자적인 천하의 중심이라는 다원적 천하관의 역사적 근거를 확립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인들의 공적 ? 사적 글들에서 고려의 군주를 皇帝 ? 天子로 칭한 것들이 확인되는데 이는 곧 고려가 天命을 받은 군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독자적인 천하의 중심 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규보는 이러한 독자적인 천하의 중심 국가로서의 전통을 고대에까지 소급하려 하였고, 그 그 한 근거를 동명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통한 동명신화의 긍정적 재평가는 그러한 천명의 전통이 이미 고대에까지 소급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규보의 천하관이 다원적 천하관의 계열에 속한다 하더라도 고려 전기의 다원적 천하관과 비교하면 퇴영적인 면을 가져 화이론적인 小中華論의 색채를 가볍게나마 띠었던 것도 주목된다.
Ⅴ. 비평
이 논문은 필자가 쓴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이하 해동천자로 약술)’보다 2년 먼저 발표된 연구 성과물이다. 그래서 ‘Ⅲ.多元的 天下觀과 東明神話의 긍정’의 내용에 있어서는 양자가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이미 이 논문에서부터 필자는 3개의 천하관을 분류하고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같은 다원적 천하관을 언급하면서도 이규보의 다원적 천하관이 다른 계열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고 밝힌 점이었다. 이 부분은 앞서 본인이 해동천자에서 지적했던 부분으로서 당시의 관념적인 부분을 일정한 기준에 맞춰 동일한 그룹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즉, 같은 다원적 천하관을 가진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가 화이론적 혹은 자국중심적 천하관을 조금도 수용하지 않고 있으리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명왕편의 저자인 이규보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 아닐까 본인은 생각한다.
우선 동명왕편을 두고 단지 고려인의 자주정신이 잘 드러난, 고구려 계승의식이 표방된 문헌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본인에게 이 논문은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마치 동명신화 혹은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가 아니라 당시 동북방에 널리 분포하고 있던 보편적인 문화적 요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만큼이나 본인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동명왕편은 다원적 천하관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思潮와 맞물려 탄생한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작품을 쓴 이규보는 다원적 천하관이라는 당시 고려의 주류적인 인식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사상을 지닌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상당한 공부를 쌓아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는데 그 사상과 학식의 기반은 바로 유교였었다. 즉, 그가 보는 다원적 천하관은 유교라고 하는 토대 위에서 형성된 관념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당연히 다른 다원적 천하관 계열과는 상이한 점이 존재한다. 그 하나가 小中華라는 개념의 도입인데 이는 후대 조선시대에서도 확인이 되는만큼 엄밀히 말해서 다원적 천하관, 각각 별개의 천하관이 공존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천자로서 천명을 얻어 휘하의 여러 군소 세력들을 거느리는 천자국이 여럿이라는 소리는 곧 각각의 천자국이 차지한 천하가 여럿 있다는 소리이며 그 각각의 천자국이 대등한 지위에서 존재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비록 여진이나 일본보다 문화적인 선진국이라는 자부심 아래 소중화를 자처했다 하더라도 조선은 결국 명의 속국이었다.
필자가 이 논문에서 말하는 소중화는 바로 그러한 조선에 걸맞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大)중화가 아닌 소중화, 즉 이 말은 소중화라는 존재보다 더 큰 존재가 있었다는 소리이며 그것은 소중화의 천하는 대중화의 천하와 대등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가 될 것이다. 즉, 병렬이 아닌 종속의 관계로 인식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고려는 조선과는 약간 다른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이미 당이 출현한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중화문명의 보급은 필연적인 부분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주변의 독자적인 문화 속에서 중화 문명의 영향을 찾는 것 또한 흔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문화들을 모두 중화문명에 속한, 혹은 그 영향받은 것만을 강조해서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당의 문화 자체가 주변 문화와의 공존(그것이 대등하든지, 아니었든지)과 교류 속에서 형성되고 완비된 뒤에 중화라는 겉포장지가 새롭게 싸인만큼, 주변 문화에서 중화문명의 흔적이 보인다해서 그것을 모두 중화의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즉, 고려가 중화문명적 요소를 차용하고 흡수하였지만 그 기반은 고려 자체의 문화였다. 즉,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한, 고려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던 나라였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이규보가 비록 유교를 기반으로 사상적 체계를 쌓았다고 하지만 그 역시 다원적 천하관을 인식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같은 다원적 천하관 계열의 인물이더라도 그 정도의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규보의 경우를 소중화론에 입각한 다원적 천하관이라고 보는 것에는 분명하게 반대한다는 거이 본인의 생각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에서 중국의 문화적 양상이 확인되고 문헌에서 그것이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이규보는 소중화론에 입각한 다원적 천하관 계열의 인물이 아니라는 소리다. 굳이 그런 부분을 지적하고 싶다면 다른 명칭을 써야 옳을 것이다. 소중화론이란 이규보의 경우가 아닌 조선의 경우에 어울리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규보의 경우를, 발해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필자는 발해를 과도기적인 단계의 독자적 문화권 설정을 실시하는 왕조로 이해했다. 즉, 여기서 과도기적이라는 표현은 당 출현 이후 재편된 세계에 대한 관념의 재편이라는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규보에 대해서도 과도기적 다원적 천하관을 지닌 인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발해에서 당의 영향이 많이 확인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발해가 건원칭제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발해를 두고 당의 문화에 종속된 이른바 소중화적인 국가로 보지는 않는다1). 이와 같이 이규보의 史蹟에서 화이론적 입장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소중화로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상적인 체계는 단일화된 표현으로 나타내기가 어려운만큼 필자의 이런 체계적인 구분도 중요하지만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같은 다원적 천하관 계열의 인물들이 100% 모든 부분의 인식에 있어서 동일하지는 않을 터인데 그 모든 것들을 다 분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분류하고 싶다면 소중화라는 표현보다는 과도기적이라는 표현이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이 연구의 가치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에게 있어 동명왕편이라는 것을 고구려가 아닌, 그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보는 잣대로 보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논문은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 박시형/송기호, 1979,『발해사 연구』, 이론과 실천, 75p. 저자는 발해가 건국후 40~50년을 경과하는 기간에 국력이 더욱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서방 당나라 침략 세력의 영향이 거의 완전히 봉쇄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북한학계의 연구경향의 영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실제 발해에서 당 뿐만 아니라 고구려, 읍루, 북방 민족의 문화적 요소가 확인되는 예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첫댓글 이 논문은 게시판에 올라와있지 않은 것 같아서 같이 첨부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