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벧엘
야곱의 인생은 곧 잘 우리들의 나그네 인생에 비유되어 설교되고 있다. 그것은 야곱의 사건의 구조가 우리의 인생을 비유하여 이해기에 아주 적절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집을 나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야곱이 겪은 20년의 세월은, 우리가 하나님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나와서 나그네 인생 길을 가는 동안,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구원을 받게 된다. 특히 야곱에게 벧엘은 신앙의 수련 도장이었다. 처량한 나그네 신세에 대한 감상적인 위로와는 그 차원이 다른 영원에 대한 차원 높은 메세지가 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처음 아버지와 형을 피해 쫒겨 갈 때 벧엘을 정하고 단을 쌓았으며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다시 벧엘에서 신앙을 정립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것들은 무슨 의미가 있나? 몇 가지 살펴보자.
1. 베개([4763] hv;a}r'm] [메라아솨])하던 돌이 성전이 되었다.
베개 하였던 돌을 일으켜 세우고 그 돌을 성전으로 삼았다. 베개란 단어는 [4761] hv;a;r]m' [마르아솨] 주권과, [7218] varo [로쉬] (우두)머리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즉 머리와 성전의 관계이다. 이것은 성전의 우리의 거할 장소인 성전이 바로 교회의 머리 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며(골1:18, 고전12:27) 다시 말하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산 돌이신 주님을 성전 삼고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것을 예언하고 있는 메세지의 사건이다.
2. 벧엘 이란?
벧엘이란 단어는 전능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집, 성전을 말한다. 벧엘이 바로 성전이다. [1008] lae-tyBe [베트-엘] 벧엘은 히브리어로 [1004] tyIB' [바이트]와 [410] laE [엘]의 합성어인데, 베들레헴은 벧엘과 레헴(양식)의 합성어이다. 즉 베들레헴은 양식집,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떡집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바로 양식을 나눠주는 집, 떡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3. 기름 부은 돌 기둥
성경에서의 돌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야곱의 이 장면은 장차 산 돌이신(벧전2:4)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고 (눅3:21-22), 더 나아가서는 야곱이 돌기둥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우리도 기름부음을 받을 것아(고후1:21, 요일2:20) 죽은 돌이 산 돌이 될 것에(벧전2:5)대한 예언적인 메시지이다.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지만(요2:21) 우리도 성전이 된다.(고전3:16, 엡2:21-22) 벧전 2:5에선 우리가 산 돌로 묘사되지만, 계시록에선 성전의 기둥으로도 묘사된다(계3:12). 돌과 기둥과 성전이란 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를 묘사하는 성경적인 표현이다. 마3:9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돌로 얘기했고, 마4:4에서는 돌로 떡을 만드는 얘기가 있다. 예수님은 떡을 만들되 정결한 떡 또는 산 떡을 만드시는 분이시지 마귀가 원하는 더러운 떡이나 죽게 하는 떡은 즉 썩는 양식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역시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이 대거 출현하기 전 구약시대부터 당시의 현실적인 사건을 통해 이를 예언하는 말씀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야곱의 이야기이전에 오늘날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보면 더욱 은혜가 될 것이다.
4. 벧엘에서 일어난 일
벧엘의 제단은 오늘날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무엇을 점검할까? 이 말씀의 교훈은 아주 많다. 간단하지만 인생전체를 대변하는 내용이니 얼마나 교훈이 많겠는가? 그 중에 몇 가지만 생각해보자.
첫째) 벧엘의 하나님은 고독한 사람을 만나 주신다는 약속의 메시지
고독 할 때 누굴 만나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고독 할 때 사기꾼을 만나면 허한 마음에 낭패를 볼 것이고, 술꾼을 만나면 방탕하게 되고, 부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비관하게 된다. 그러나 고독 할 때 긍정적이며 거룩한 사람을 만나면 인생이 발전 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야곱이 돌 베게하고 누워 있을 때 짐승이 나타났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인생이 어려울수록 자신의 주변에 있는 친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부터 점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잠 27:19)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라고 했다. 친구는 자신의 얼굴모습이기도 하다. 인생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천국을 인도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이는 최고의 성공이요 축복이다. 즉 예수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만남이다. 고난이 있을 수록 진리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 고독하고 절망스런 야곱을 만나주신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 만나주시려고 우리 곁에 와 계신다.
둘째) 돌기둥이 하나님의 전이되리라-敎會 中心의 삶.
야곱이 집을 떠나 정처 없는 발길을 가다가 멈추고 초롱초롱한 밤하늘에 찬이슬을 맞으며 되 뇌이며 고독하고 외로운 중에 결단을 하고 다짐을 했던 장소가 바로 벧엘이다. 그 나그네길을 멀리 가다가 이게 아닌가 싶어 돌아올 때도 다시 벧엘에 와서 엎드린다.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한다. 야곱이 벧엘을 두번 거치는 의미 또한 십계명 돌 판을 두 번 받은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상을 살기 위한 벧엘이(교회가) 있고, 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벧엘이(교회가) 있다. 즉 먼저 받아야하는 은혜가 있고 받은 후에는 나눠주는 은혜가 있다. 교회는 받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눠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란 우선은 나그네 세상을 살기 위한 훈련과 준비의 장소이다. 교회는 여러분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 대한 애착이 어느 정도인가가 그 사람의 정신적인 건강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고독하고 절망스러울 때도 교회중심의 멤버 속에서 상담과 만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고 헌신으로 표시를 할 줄 알아야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정말 믿는 다면 말이다. 교회는 나그네 인생길에서 기본적으로 삶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한다. 어떤 사람은 새벽등산이 정신적인 지주인 사람도 있고, 당구장이 정신건강의 지주인 사람도 있고, TV가 정신적인 지주인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게 시간과 물질과 정렬을 쏟는다. 세상말로 좋아서 한잔 괴로워서 한잔이란 말이 있다. 맞다 술도 성령의 새 술이 있다. 좋아도 교회 괴로워도 교회 이어야 한다. 정상적인 신앙이라면 서서히 교회로의 발걸음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은혜받은 대로 방황하는 인생들을 위해 참된 가치와 진리의 길을 인도하는 리더가 되어야한다.
사람은 바쁠수록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만 그 바쁜 시간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 정신없이 사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질 줄 안다. 주일예배 말고 최소한 몇 번 정도는, 조용한 찻집을 가기 전에, 친구를 만나기 전에 장소가 어디이든 성전이든 집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 조용히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야곱이 무릎을 꿇은 그곳이 바로 벧엘이다. 우리가 무릎을 꿇는 그곳이 주님의 계신 곳이다.
야곱이 고난을 시작하는 장소에서의 벧엘도 있지만 20년의 세월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다가 지친 인생의 종착역을 앞두고 다시 찾은 새로운 의미의 벧엘도 있다. 이것은 오늘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지친 상태에서 다시 깨달은 새 언약의 진리를 통한 새로운 성장이 있는 것이다. 12제자들도 3년 반의 훈련을 통해 종횡무진 휘젓고 다녔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어이없게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허탈하고 지친 상태에서 그 동안 받은 은혜를 뒤로하고 오순절 보혜사 성령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성숙한 과정을 겪었다.
인간은 보다나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한 원동력을 공급받을 정신적인 구심점이 필요하다. 취미도 친구도 그런 맥락에서의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교회를 삶의 중심터전으로 삼고, 그곳에서 훈련된 신앙적인 인격으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인생이 될 것이다. 교회중심의 삶을 통해 나그네길의 삶에 대한 믿음을 얻어야한다. 어쩌면 인생이 짜증스럽고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환경의 변화이전에 우리의 마음속에 성전중심의 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차는 인생의 희망을 갖고 그 다음은 영생의 길에 대한 믿음으로 인생을 유유히 살아가는 은혜의 진수를 경험해야할 것이다.
셋째) 서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야곱이 벧엘에서 단을 쌓고 서원을 했다. 인생이 힘들다고 생각할 때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재충전이 되어 발전 할 수 있다. 결단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여기에다가 우리는 신앙에 대한 발전을 위한 결단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성숙한 인격과 신앙은 결국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야곱은 고독하고 괴로운 중에 하나님 앞에 서원을 서원 즉 결단을 했다. 자신의 인격적인 발전을 위한 결단을 하라. 보다나은 삶을 위해 습관을 고치기로 결단하라. 보다 적극적인 신앙을 위한 결단을 하라. 학교의 우등생이 인생의 우등생이 아니란 말이 있다. 신앙은 학문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인생과 영생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메세지가 필요하다. 이 결단의 강도를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교회는 진리를 들려주고 결단 즉 믿음을 요구한다. 야곱이 이 결단을 벧엘에서 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우리의 결단과 서원의 장소이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개선의 결단, 신실한 신앙에 대한 성숙의 결단을 하게 된다. 믿음은 성공적인 영생의 삶의 원동력이다. 이 믿음이 있으면 나그네길이 가벼워지고 영생의 길이 감격스러워진다. 야곱의 이야기에 숨겨진 진실이 하나있다면 아버지 집에 돌아갈 야곱의 마음이다. 외삼촌 집에서 재산 증식하는데 약아빠진 야곱만 생각한다면 이는 야곱에 대해 그 속 얘기를 모르는 것이다. 인생과 영생에 대한 결단, 즉 믿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