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뚜벅이 | 최초 작성일 : 2005 12 15 | 최종 수정일 : 2006 5 9
유홍준 선생에 의해 남도답사1번지로 간택을 받은 강진은 다산이라는 250여년전 천재지식인의 유배지라는 역사성으로 인해 답사 1번지의 의미가 더해진다.
과거 다산초당을 가기 위한 초입은 귤동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길은 옛길이 되어버렸다. 다산유물전시관이 생기고 나서 다산초당기행의 첫 관문은 바로 전시관이 된다.
전시관
다산 유물전시관은 1999년에 개관한 122평 규모의 깨끗한 건물이다(관람시간 09:00-18:00. 동절기는 17:00). 다산초당 남쪽 800m지점에 위치해있다. 이름 그대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다산의 영정과 연보, 다산의 업적과 유물등을 판넬, 조형물로 만들어놓았고 컴퓨터과 영상실을 통해서도 다산을 쉽게 이해할 수있게 준비해뒀다.
다산초당은 풍경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천일각이 있기는 하지만..). 또는 어떤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감상하러 가는 곳도 아니다 . 그 보다는 한 천재적 지식인의 삶을 반추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당을 가기 전에 전시관을 먼저 들르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실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의학자이자 음악가, 약학가까지 모든 분야에서 한국 역사속 최고의 천재로 추앙받는 르네상스형 인간, 다산은 과연 누구일까?
1762년(영조38년) 경기도 마현에서 태어난 다산은 남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22세에 경의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28세에는 대과에 갑과 이등으로 합격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이후 그의 벼슬은 승승장구, 순풍에 돛 단듯 진행된다. 한림원 예문관 검열과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과 홍문관 교리, 경기도 암행어사등 주요 요직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40세까지 정약용은 주류사회의 최고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이후 그는 서학(천주교) 박해의 희생양이 된다. 다산 나이 23세(1784년)때 이미 서교에 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다산이었다. 사농공상이 뚜렷하고 반상의 차이가 명백한 유교사회에서 만인의 평등과 인간에의 무한한 사랑을 주장했던 서학의 교리를, 왜 잘 나가던 다산은 받아들이려했을까? 변화를 거부하며 보수화의 특성을 가진 주류의 기본 속성을 거부하면서 그는 왜 진보적 사상에 탐닉했을까? 바로 이 부분이 다산을 일컬어, 시대를 앞서간 모범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많은이들이 추앙하는 지점이다.
여하튼 다산은 1801년 그의 나이 40세때 셋째형 약전과 유배길에 오른다. 두 형제는 율정점에서 서로 갈리게 되는데 약전은 해남으로, 다산은 강진으로 가게되는 것이다. 강진 유배 18년 동안 다산은 무려 23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한다.평균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집필한 셈이다. 인터넷 검색도 없던 시대에, 유배지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그는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쓸 수있었을까? 다산이 천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일테다. 베트남 호치민 주석을 비롯해서 소비에트에서도 사회주의 교본으로 숭상받던 목민심서도 강진 유배기간 중에 다산 초당에서 씌어진 역작이다.
전시관을 나와서 왼쪽으로 돌아 올라오면 다산 초당 가는 길에 나온다. 하늘로 쭉쭉 솟은 나무들이 호위를 해주는 길을 지나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한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이제 본격적으로 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올라야 한다. 만만하게 보기에는 오르는 길이 꽤 험하고 힘이 든다. 그러나 유배지를 가는 길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이 곳은 다산의 유배기간중 10년 동안 다산이 머물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쓴 곳이다. 초당에는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이 있다. 그리고 구강포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천일각의 전망은 이곳을 힘들게 방문한 여행자에게 다산이 주는 선물이다.
다산초당
정석
천일각
구강포 전망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길도 꽤 근사하다.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30여분 걸으면 백련사가 나온다. 바로 이 길은 다산과 백련사 주지 혜장스님, 당대 두 천재의 교분을 이어준 길이다. 천주교 사상을 믿어 유배온 다산과 속세의 연을 끊고 불가에 귀의한 혜장스님을 이어주는 끈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과 평등이라는 두 종교의 교리, 그것을 수용한 앞서간 두 지식인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