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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쓴 글처럼 매끄럽지는 않지만
성도님들!
괴롭거나 힘들때 이글을 한번 읽어 보세요
사람이 산다는것 ...
건강하기만 하다면 무엇인들 못하리요
재물과도 바꿀수 없는 것 그것은 오로지
건강입니다...
제2의 인생
하나님과 함께 할수 있는 영광교회가 있어
아니 성도님들의 따뜻함이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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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유수와 같다고들 하던가~!
벌써 내 아들 재환 이가 신검을 받는 날이다.
오늘도 안양천 꽃길을 달리며 지난 시간과 나를 생각해본다,
까마득한 시간,
지금은 조금이 나마 마음의 여유 속에 이 글을 적어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01년8월28일 강서 건강검진 센터에서 유방암검사를
하고 아무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아 직장에 열심히 다니던 중
갑자기 몸에 이상이 있는듯하여, 여러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았는데 이상이 없다 하였다.
그런데 감기증세가 오고 연이어 오는 추위에 그전 겨울에는 내복이라고는
모른 체 겨울을 났는데,
그 겨울에는 내복에다 앙고라 세터에
코트까지 걸치고 다니는 대도 추위에 온몸이 떨렸다.
계속되는 감기로 병원에 다니는데 올 감기는 유난히 지독하다는 말……
약한달 보름이상 치료를
받았는데 차도는커녕 몸이 추워 견딜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 이상이 있는 모양이라 생각이 들어
2002년1월4일에 일산 국립 암 센터를 방문했다.
강서건강센터에서 찍은 유방사진을 보더니,
다시 사진을 찍어보자며 예약도 하지
않고 그날 바로 사진촬영을 했고 조직검사도 했다.
그전에는 주사로 유방조직을 떼어냈다는데 요즘은 의술이 좋아진 때문일까?
가슴에 총으로 쏘듯 하여 조직을 떼어 낸다.
제발 아무일 없기를 바라고
바라며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왜이리 무겁기만 한지.
아니 내가 유방암에
걸리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고 아무일 없을 거라 자부하며.
집으로 돌아 왔다고나 할까.
2002년1월8일 결과를 확인하러 남편과 국립 암 센터
이 은숙 박사님 방을 노크 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태연한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섰는데 컴퓨터에서 내 검사 결과를 확인한 박사님 말씀,
“암” 입니다
이말 한마디에 하늘은 무너지고,
눈앞이 캄캄하며, 지난 세월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고, 두려움과 공포감에 휩싸여
한없이 울기만 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 말없이 지켜보던 남편도 울고
선생님은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초기에 발견하여 수술을 하면
완치 될 수 있다고.
달래보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고 두려움에 놀란 난 그칠 줄
모르는 눈물에, 엉엉 소리까지 내며 급기야 기절을 했던 것 같다.
며칠 내에는 예약손님이 많아 수술을 못하는데.
나 같은 사람은 일 저지를
확률이[자살] 많다면서 일주일 후로 입원 날짜를 잡아주시며 초기니깐,
걱정말고 입원 날짜에 오라 하신다.
일주일, 어떻게 보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아들은, 딸은, 남편은,
내 부모는, 막막하기만 한 것을 좌절감과 두려움에 시간!
그 두려움의 시간 속에 마음은 진정이 안되고
온통 죽고 싶은 생각과 지난날의 인생의
허망함에 사로잡힌 그 일주일의 시간은,
내~생의 마지막 시간 인지도 모른다는 소중함보다는
두려움의 나날들이었다.
내가 “암”에 걸린 것이
창피 하기도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희망도 꿈도 삶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시간,
남편과 가족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 생각하니 가족의 사랑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힘과 용기를 주었는지
힘들고 아찔한 시간이었다.
내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낀 시간이기에……
2002년1월14일 암 병동 802동에 입원을 했고
수술하기 위해 검사에 들어 갔다.
무슨 검사가 그리 많았던지,
태어나 병원이라고는 다녀 본적이 없던 나였는데!
“암”에 걸려 뼈 스캔에 CT에 생소한 기구명칭을 대할 때 마다
희망보다는, 절망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검사는 끝나고 16일, 수술 시간이 잡히고 내가 두 번째 수술대기자인데,
이상하게 자꾸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다.
어라? 왜 그러지,
조급한 마음에 남편이 간호사에게 사정을 물어보니 뼈 스캔 찍은 사진 중에
오른쪽 눈 위에 이상이 있다 하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조직검사 결과 1기라는데
혹시 눈까지 전이 되었다면
학계에 보고 해야 할 일이라며 그런 일은 없을 거라 하였다.
한숨과 함께 다시 검사를 해야 했다. 보험도 되지 않는
PT영상단층촬영 이라는 것을 찍어야 하는데
백 만원 정도의 비용이 예상 된다며.
다른 환자는 하지 않아도 될 촬영까지 끝내고 전이된 것이 아니라는
판명이 났는지.
갑자기 수술을 해야 한다며 내 침대를 밀고 나간다.
순간 온몸에 전해지는 두려움.
침대난간을 잡은 손은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삶의 욕망인가,
힘이 들어가고 흐르는 식은땀에 긴장되는 마음을 누가 알까,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술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공포 속에 정신을 놓은 듯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얼마나 지났는지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떠보니 수술이 끝나 병실에 와 있었다.
병실침대 옆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울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살아 있음에 감사함과
고마움의 눈물이 절로 흘렀다.
수술은 끝났고,
일주일에서 보름이면 퇴원한다는데 내 눈 위에 있는 병명이
밝혀지지 않아 뇌종양 박사님들이 오셔서 눈을 만져
보고 시력이 어떤지 평소에 눈은 아프지 않았는지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곤
선생님들끼리 상의도 하시고,
시간은 자꾸 가는데 불안한 마음뿐.
아마 암 센터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간호사들이 없을 정도였다.
국립 암 센터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이비인후과가 없어 난 이비인후과가 있는
일산백병원서 눈 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데 너무 섭섭했다.
자기환자가 아니라고 건성으로 봐서 암 센터에 전화했더니
그냥 오라 한다
이렇게 마음고생 몸 고생까지 항암제를 맞아야 하는데
눈 위에 있는 것이
“암” 덩어린지 아닌지 알아야 알맞은 치료방법이 결정이 난다
하는데 어찌해야 할지 병원에서도 손을 놓고 급기야는 또 다른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에 계신 분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바로 입원하고 조직검사를 해야 한단다.
그런데 상당히 위험한 검사라고.
잘못하면 시신경을 건드려 실명 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검사 라고 하였다.
무사하기만을 빌며 2월25일에
조직검사를 하기 위해 수술실로 향하고 암 센터에서는
기절하여 아무것도 몰랐는데
여기서는 마취 하는 것도 기억이 난다
마스크를 입 에대고 하나 둘 세라 한다.
둘도 못 세고 마취 된듯,숨을 쉴수가 없다,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점점 가슴이 답답해 오기만 한다.
옆을 보니 나와 똑같이 누워있는 환자뿐.
수술 후 간호사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병원 일이 바쁜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지 그냥 침대는 밀쳐두고 아무도 없다.
난 죽을 힘을 다해 침대를 흔들고,
소리 지르려 하지만 마취약에 취해 버린 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이러다가 죽지 하는 생각에 온몸으로 소리를 내니
그때서야 간호사가 달려오고 산소마스크를 입에 대니 살 것 같다.
정말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때 아무도 없었다면 지금 난 이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서울대병원서 사흘 만에 퇴원하고 외래진료를 근 보름간 했다.
조직검사 결과를 가지고 암 센터에 가니 다행 이도
“암”은 아니라며 선천적으로 있는[의사용어라 기억이 나질 않음]
약물투여에 들어가자 한다.
나와 같이 수술한 사람은 벌써 항암제3차를 맞고 있었다.
머리도 다 빠지고. 항암제1차를 맞고 보름 되니깐
머리가 반은 빠진다면서……
2002년3월21일 제1차 항암제 맞는 날이다.
선생님의 항암제 투여 시 일어날일에 대하여 설명을 들으며
“암 환자들이 느끼는 불안함과 공포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남편이 옆에 있어 약간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남편의 손을 힘주어 잡아본다.
주사실에 누워 항체반응 검사 후 검정비닐에 싼
항암제가 내 손등에 꽂힌 뒤 한 시간이 넘게 잠이 들어 버린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나니 남편의 걱정 어린 말이 들려온다.
“속 괜찮아”? “응”
하고 대답은하였지만. 일어서려는데 도저히 일어설수가 없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두어 시간은 더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 오는 도중에
몇 번의 구토가 나오고 힘이 들었다.
힘겹게 집에 도착하여 꼼짝도 못하고 몇 날은 누워만 있었다.
나의 삶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중에 상담하여보니 우울증 초기라고 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정말14일전까지만 해도
머리카락이 빠지질 않았는데 보름이 되는 날 마음
조아리며 머리를 물에 담그고 손으로 빗질하듯 쓸어 내리는 순간
아~~악~~나의 절망의
왜 마디 절규, 소리치며,
흘러내리는 눈물,
아~너무 무서웠다.
세수대야 안에 까맣게 빠진 머리카락, 바닥 가득
널 부러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대성통곡,
온몸에 소름이 끼쳐온다.
순간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날 낳아주고 길러주신 엄마의 굵은 주름이 선명하게 보여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제2차 항암제 맞을 땐 남편이 바빠서 혼자
항암제를 맞고 좌석버스를 타고서 암 센터에서 영등포 까지 서너 번은
내려서 구토하며 쉬어가기를 반복하며 온듯하다.
제6차 항암제까지 혼자서 힘겨운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잘 견디어냈다.
그러나 33번의 방사선치료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어렵고 힘들어서 죽고 싶었지만
나는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정부위에만 방사선을 쪼여야 함으로
가슴에 표시를 해야 하는데 처음에 표시할 때는
약간의 비용이들어간다.
그래서 샤워를 할 때는 주위 하라는 말과
함께 의사선생님이 가슴에 표시를 하고,
방사선 치료에 들어갔다.
의사선생님께 배드민턴을 하면
매일 샤워 해야 하는데 불편하시더라도 표시를 다시 해 주면 안될까요?
하고 양해를 구해 보았다.
선생님께선 방사선 치료 동안은 참아 보라 한다
하지만 운동을 접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계속 운동 후 샤워하여 표시 한곳이 흐려 저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선생님께선 아무 말없이 다시 표시를 하여주셨다.
[2002년10월2일]무사히 33번의 방사선치료가 끝나고
약간의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동안 수고하신 선생님께
미안한마음과 고마운 마음에 양말2켤레로 인사를 대신 했다.
마음의 여유도 잠시,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길래 이런 무서운 벌을 받을까……!
“
죽고 싶은 충동의 나날들”
2002년11월11일,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에 정기검사를 받으러 갔다.
유방에는 아무일 없이 깨끗하게 잘되었다는데.
8월21일부터 먹은 호르몬 억 재제 때문일까~?
자궁에 혹이 있는데 검사를 해봐야 한단다.
11월18일 암은 아니라면서 3개월
후에 다시 보자 한다
2003년2월10일 유방촬영술 결과 아무 이상이 없어
마음 놓고 자궁센터로 갔다.
자궁센터 의사선생님이 다른 의사선생님께
가보라면서 다른 선생님을 소개하여주셨다.
무엇인가 있구나!
하는 직감에 긴장된 마음으로 의사선생님과 상담하니
[2003년3월2일] 자궁에도
암세포가 0기에 있다 하여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설명해주신다.
난소, 나팔관, 자궁을 다 들어내는 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후유증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해주시며
남편과 상의하고 일주일 뒤에 오라고 하셨다.
이 수술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이미 알고 있다.
너무 가슴이 아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눈물이 또 한번 앞을 가로막았다.
수술을 해야 될지 안 해야 될지 남편과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유방으로 보아서는 수술을 해야 하고
내 몸을 보아서는 수술을 안 해야 좋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어찌 해야 할지. 수술 이고 머고 난 그냥 죽고만 싶었다.
하지만 암세포가 점점 퍼지게 되면
또다시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해야 된다는 선생님
말씀에 수술하기로 결정하고……
내가 다섯 번째 수술대기자였는데
서울대병원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
첫 번째로 수술해달라고 부탁 드렸더니
다행이 두 번째로 수술해주셨고
그리 오래 입원 하지 않고 무사히 퇴원 할수 있었다.
자궁 수술 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는 증상이 한 시간에 다섯 번은 넘게 나타나.
너무 견딜 수 없어 암 센터에 전화하여
상담하였더니 다시 와 보라 한다.
며칠 후 상담하니 호르몬이 없기 때문에 오는
후유증으로 갱년기 증상이란다
잠 못 이루고 머리가 터질 듯 아프다 하니.
운동을 해야만 나의 살길이라고
말씀하여주시며 무슨 약 인가를 주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면제였다.
한달 분, 한 시간에 다섯 번씩 오는
갱년기증상 때문에 우울증까지
겹치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유방 수 술시 림프절에 전이가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확인 하기 위해 절개 했던
왼쪽 유방에 있는 팔에 후유증이! 온 것이다
“림프 부종”
림프부종이 올 확률은 그리 많지 않다 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팔이 종아리크기만큼 부어올라
남편은 밤을 새가며 주물러주었고,
병원에 전화하니 담당 선생님께서 학회에 가셔서 2주 후에 나오신다는 말에
또 한번 하늘이 무너지고
응급처치라도 알려 달라는 나의 말에 신통치 않은 대답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아들이 인터넷을 검색하여
“림프부종”응급초치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니
팔을 심장보다 높게 올려야 한단다.
무작정 팔을 심장보다 높이 올리며. 지낸2주일……
병원에 가니
“림프부종”은 한번 발병하면 풍선이 부풀어 올랐다 빠지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평생 가지고 가야 할 병이라며
밤낮으로 붕대를 감고 재활
치료를 한평생 하여야 한단다,
붕대 감은 팔은 심장보다 높이 올리고 있어야 하고 잠잘 때도 감은 상태로
심장보다 높이 올리고 자야 하기 때문에
천정에 못을 밖아 끈을 묶어놓고 팔을 하늘로 치켜세우고 잠을 자려니
팔이 저리고 잠도 오지 않고 머리는 터 질듯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림프 마사지 후유증으로 림프액이 흐르다 뇌나 심장으로 가면 정말 무서운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여,
림프마사지법 도
배워 밤을 새워가며 마사지 하여보지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절망감이 밀려오며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삶을 포기
하고 싶은 충동에 차라리
“죽자”
죽으려고 그 동안 먹지 않고 두었던 수면제를 찾았다.
내가 죽어버리면 남편도 가족도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것 같은 생각에 편한 죽음을 택하자
울고 또 울며 급기야는 약을 찾았지만……
나의 절재 하지 못하는 행동에 이상한 느낌을 여긴
남편이 이미 감추어 버리고 없었다.
온몸은 이미 지쳐가고 뼈 마디 마디는 아파 흐린 날은 거동조차
힘이 들어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야 했고,
무릎에는 물이 차있어 병원에서 물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나의 몸은 망가져만 갔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할까!
내가 뭘 잘못 하였길래,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일까,
나 자신이 너무 밉다,
나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다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눈물마저도 말라버렸다.
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다시피 했고,
살아야 한다는 욕망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처절한 나와의 싸움은 시작되고,
힘겨움에 지쳐 쓰러지기를 여러 번 아~이대로 날 버려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마음속으로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왜 치며, 운동이 살길이다,
그리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의사생활10여 년 동안
항암제를 맡고도 머리가 남아 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 라고 할 정도로 건강한
나였는데 비록
“암” 이라 할지라도,
“싸워보자”
싸워서 이겨보자는 마음에, 모자를 눌러쓰고,
나를 도와주신 고마운 분과 함께 배드민턴 장에서 열심히 운동을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날 데리고 운동을 시켜 주신 분,
이 글을 통해 감사함도 함께 전하고
우울증으로 자신감을 잃어갈 때 친구가 되어주고,
나의 스승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격려와 질책도 아끼지 않으시고,
늘 관심을 기울여주시며,
게임 중 나의 모자가 벗어져서 창피 했을 텐데도 내색 한번 안 하시고,
한 게임 하기 위해선 몇 번을 쉬었다 해야만 했다.
그래도 늘 걱정 어린 얼굴로 날 위로하여 주신 분이시다.
절망 속에 희망이,
먹을 수도 없었다~!
먹는 것 조차 힘이 들었다~!
무엇이 몸에 좋은지,
암 환자에게 좋다는 것은 왜이리 많은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임에 시간,
몸은 야위어만 가고 먹어야 산다는 절박한 마음에 먹는 것 조차도 힘이 들었지만,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퉁퉁 부은 팔에 붕대를 감고 운동을 하니 어찌나 무겁고 아프던지……
아픈 팔을 다치기라도 하면 면역성이 없어 감염이 되어 팔이
썩어 들어가 절단해야 된다는 절박한 상황 이었는데도……
땀에 젖은 팔을 끌어 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팔을 심장 보다 높게 올리기 위해
자전거 핸들도 높게 개조하여 만들어 자전거 타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의도와 한강으로 달려가기를 생활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시간은 흐르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며 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 하였고,
운동을 좀더 하기 위해 클럽도 옮겨서
체계적으로 운동을 배워보려 배드민턴 레슨신청도 하였다.
레슨을 받으려고 한달 수강료를 내고 서너 번 받은 듯……
따라 할 수가 없었다.
힘이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주기에 더 이상의 레슨은 곤란하다고
선생님이 말씀하며
그냥 건강을 위하여 천천히 운동하라 하신다.
그때의 아픈
마음~!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클럽가족들이 처음에는 내가 아주 건강한 사람인줄 알았다 한다.
아픈 나의 이야기를 알고 몇몇 분들이 조금씩 도와주시기 시작하였다.
하나부터 조금씩 나에게 맞는 운동 양을 조절하며.
나의 몸은 신기하게 조금씩 운동에 적응되어가고,
남들은 게임에 열중 할때
난, 기본을 더 배워보려고 남들이2~3개월이면 싫증을 느끼는
초보의 길을 지금도 걷고 있다.
잠시 쉬는 틈이 있을 때면 나의 퉁퉁 부은 팔을
마사지해주며 격려의 말로 날 위로해주는 정감 있는 말에 가슴이 뭉클함과 감사의
눈물을 삼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낮에는 배드민턴과
자전거타기, 밤이면 안양천 뚝방길을 달리며
주일이면 산에 오르고 정말 많은
땀을 흘리며 남보다
노력하며 보낸 시간이 벌써5년이 넘어가내요.
어느 날에는 남편과 같이 자전거를 타다 소낙비를 만났는데 감기 들까봐
조바심 내는 남편의 가슴에 묻혀 한없이 울기도 했다.
함께 달리며 지쳐 쓰러지는 날 위로하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랑을 준 당신이 없었다면,
남몰래 흘린 당신의 눈물이 없었다면……
그런 당신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느 부모인들 안 그럴까~!
엄마~! 당신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딸이 지금 이순간 엄마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기었겠지요.
여식이 아파 울때 함께 아파하던 엄마,
힘든 고통의 나날 속에
고통을 함께하여 주신 엄마,
이산 저산 혹한의 추위도 아랑곳 않고 몸에 좋은 약초 산신에게
빌고 빌며 정성껏 대려 이 여식 생각에 잠 못 이루시고 곱디고운 얼굴,
여식생각에 잔주름마저도 굵어지신 엄마,
당신의 따스한 손길로 나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함께 울어주던 엄마
다시 한번 진한 사랑을 느끼어 봅니다.
진정한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나에게 용기도 힘도 없었을 것이며
지금의 내가 있었겠는가~?
갱년기 열 오름 내림 횟수도 줄어들고 무릎에 고인 물도 자연 없어지고
지금은 정상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는
나를 발견한다!
삶의 소중함과 사랑을 가리켜준 클럽회원님들 특히 나와 함께 달리고 산행하며
늘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며
나의 몸에 좋은 것이 있으면 언제나 아끼지 않은,
클럽동생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희망 속에 보람이,
2006년3월22일. 항상 병원에 갈 때면
긴장을 하고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지금 여느 날처럼
오늘도 암 센터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
골 밀도 검사를 하는데 일반인들보다 높은 골
밀도수치가130이나 좋다고 하며 그 동안 복용하던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다.
약을 먹는 고통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공복에 먹는 약은 온몸에 퍼져야 하기 때문에
물을 1 리터를 먹고 눕지도 못하고 앉거나 걸어야 한다.
헛배가 부르고 구토가 나온다~!
약을 먹는 것 조차도 고통의 순간 이였는데……
날아 갈듯 기뻐 어쩔 줄 몰라 싱글벙글 눈가에 기쁨의 눈물이 아~~조금씩
나와의 싸움에서 이겨 내는 나를
보며 대견하고 주위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하며 달려온 시간,
긍정적인 사고방식 생활습관,
아무리 높은 산일지라도 넘을 수 있다는 의지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그 동안 수많은 대회를 참가하여 많은 메달도 따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것 몇가지 간추려본다.
2005년5월 광명시 시장기 배드민턴시합이 있던 날 난
아침부터 밝은 모습으로 평소에는 하지 안았던 치장을 곱게 하였다.
클럽을 대표하여 광명시대회 피켓을 들기로 약속 한날이기에,
곱게 차려 입은 나의 모습에 나 자신도 놀라고 날 도와주신 분들도 놀랐답니다.
광명시 시의장 이신 분이[같은 클럽 회원 이었기에]
대회격려사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나를 도와주신 분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이것이 보람의 눈물인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절망감에 싸여있는
내가 지난 경기도마라톤대회[2006년4월23일 배
번9573번]으로
출전하여5키로 부분에서, 당당히 여자8위에25분56초의 기록으로 골인 하였다.
지난4월30일 날에는 철산1동 대표로
배구대회에도 참석하여 성적은 못 내었지만
나 자신의 건강한 모습에 박수 보낸다.
포기 하지 않고 열심히 운동으로 이겨낸다면
“암”은 반듯이
“완치”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끌어 준 운동,
운동만이 살길이라고 말씀하여주신
이 은숙 박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
아니 “암” 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다,
아니 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더 간절했는지 모른다.
지난 시간 주위에
“암”으로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죽을 힘을 다해 운동하며
살아보려는 마음가짐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노력한 대가 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나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암”
나의 생활과 생각마저 바꾸어 놓은 “암”
규칙적인 생활과 가족의 관심 속에 꾸준히 운동하며,
지금도 난 재활의학과 와 유방암 센터를 정기적으로 검진 받아야 하는,
힘겨운 생활이지만 운동을 계속하며 힘차게 헤쳐나가고 있다.
“암”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지만
오늘도 남편과 가족의 사랑을 느끼며 운동화 끈을 조여 매며 달리고 달리렵니다.
완치되는 그날까지~여보 사랑해요.
내일을 향하여 나의 건강을 위하여 아 자~ 아 자~ 순 분 파이팅
2006년5월10일 이 순 분
아직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차츰차츰 다가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자상함과 성도님들의 따뜻함에 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너무 은혜가 됩니다. 제2의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천에서 오종범
암~~이겨낼수있다는 희망의글 감사합니다 누구나 절망하며 좌절하지만 좌절치 안코 싸워이겨내는 모습속의시간이 스크린처럼 이어지내요~♬~감사하라 내영혼아~♬ 감사하라 내영혼아~♬ 내속에 있는것들아 다감사하라~~*^^*
옆에서 당신의처절한 암과의싸움을 지켜본저로서는 이글을 다시한번 대하며 지난시간의모습속에 눈물이 흐르내요 이모든것이 주님이 당신을 크게사용하시려고 고난과좌절을 이겨내게하신것같아요 비록주님을 몰랏던 때라도 주님이지켜주심에 감사함을 느낌니다 이제 주님안에자녀로 주님안에 기도하며 지난시절의좌절과아픔을 주님이 함께하여주실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는 당신의 모습이 보고싶내요~요즘 마음의여유랄까 아님조금바쁘다는이유로 지난날의기억을 조금씩 잊어가는 님을 바라볼때 안타까움마음이 들곤합니다 이글을 보며 다시한번 님의옛모습이 그립내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을 새 생명으로 주심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 을 깨닫고 , 하나님의 사랑 에 감사하며 ,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날마다 누리며 사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부족한 종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도님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이 곳 영광교회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드립니다. 이제 성도님을 하루라도 못뵈면 허전함을 느낄정도로 자매님은 나의 목회사역의 일부(동역자)가 된 것 같습니다. 자매님의 지금이 있기까지 삶의 열정과 인내에 박수를 보냅니다. 병을 이겨낸 회복의 기쁨과 삶의 아름다움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암을 첫번째로 발음하면 암이구나 라는 절망감.. 암을 두번째로 발음하면 암 ~ 이제 다나았구나 !! 라는 희망과 기쁨 사람의 의지로 할수 있는 끝까지 보다 더한 인내를 가지고 여기 까지 .... 뒤돌아보면 내가 하였고 가족의 끊임없는 사랑이라고 ... 이 또한 얼마나 ...말로 표현 할수 있겠습니까 !!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이끌어 오시고 이제부터 또한 새로운 사랑을 받을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가운데 새 힘을 얻고 사는 저또한 이젠 주님을 저 만치서 살아온적도 많습니다;;
언제나 씩씩하고 건강한 자매님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자매님곁에는 영광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에 사랑과 기도가 있음을 잊지마세요.(출17/15)'여호와 닛시"를 찬양하는 자매님이 될수있도록 저희들이 좋은 믿음의 벗이 되어드릴께요.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