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사태 배후에 정치 세력 있었다. 윤상원과 전남대 학생회장과 김대중 세 인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________________
박관현 은신처에 전화, "투쟁조적 재편하라"
5월 18일 아침 라디오뉴스를 통해서 윤상원은 계엄 확대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즉시, 청년 운동가와 재야 인사 등에게 전화해 그들이 예비 검속 되거나 피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윤상원의 광천동 자취방에는 뜻밖에 계엄 수사 당국의 검거를 피한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과 일행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근처 빈 공터에서 그들은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협의했다. 윤상원은 계엄 수사 당국의 최대의 표적인 박관현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면 지체없이 지도할 것 등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진행되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 해 가며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해어졌다. 박관현이 가장 신뢰하는 선배 윤상원.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최후의 만남이 되어 버렸다.
윤상원은 광주의 학생 ·시민들의 절대적 호응과 지지를 받는 박관현 등이 연행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우선 김상집(5 · 18사건으로 후일 구속, 녹두 서점 김상윤의 동생)을 찾아가 형님이 연행되었음을 알리고 녹두 서점을 지키며 제반 연락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발길을 전남대 방향으로 돌렸다.
오전 10시경,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시위가 약속처럼 이뤄 졌다. 그러나 대학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리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했다. 학생들은 분노했고 급기야 시내로 진출했다. 학생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금남로 가 차단되고 기동 경찰대에 의해 거리는 최루가스로 자욱했다
윤상원은 시위 대열을 따라 다니며 그 소식을 녹두 서점에 전했다. 그리고 화염병을 제조하도록 김상집 에게 지시했다.
오후로 접어들어 화염병이 등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화염병은 극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염병이 터질 때마다 학생 ·시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투입된·공수부대는 시위 예방, 시위 진압 지침을 무시한 채 시민 포획, 옷 벗기고 구타 등으로 일관했다. 그들이 투입된 곳에는 유혈이 낭자하고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윤상원은 시위 현장을 쫓아다니며 이러한 광경을 수 없이 목도했다. 그는 투쟁 지도부, 시민 홍보, 투쟁 방법론도 없이 싸움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태풍의 눈이 되어 있는 박관현의 은신처에 전화를 걸었다. 총무 부장 양강섭이 전화를 받았다.
"예비 검속(연행)을 피한 학생회 집행부의 조직을 투쟁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고, 시가지 투쟁 에 나서야 한다. 또한 화염병을 만들어 시가지 투쟁 현장에 배급해야 한다. "
양강섭은 윤상원이 화염병의 제조 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하더라고 기억하고 있다. 양강섭은 윤상원의 제안에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이미 학생 투쟁 조직은 와해되었고 박관현도 광주를 빠져나갈 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18일 오후 늦게 박관현과 몇 사람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양강섭은 다음날도 윤상원의 위와 같은 전화를 받았으나 그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서 단지 대답만을 했을 따름이었다.
여하튼, 윤상원은 항쟁 초기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항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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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은 이런 객관적 조건을 가진 들불 야학과 아파트 지역 빈민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들불 야학의 수업 지도 및 총체적 관리, 광천 공단 노동자 실태 조사의 기획(78. 12∼79. 2), 아파트 지역 빈민 운동에의 참여, 김상윤 등 청년 운동가들과의 만남, 노동운동 소그룹 활동 구상 기획, 직장 출근(그해, 1월 양동 시장 신협 직원으로 취직), 학생 운동가들과의 만남 등으로 정신없고 숨가뿐 나날이었다.
이곳 광천동 들불 야학에서 그는 80년 전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 민주 운동 선상에서 활동하는 많은 후배들을 만났다. 박기순, 신영일, 박관현, 박용준 등 열사들과 김영철, 박효선, 전용호(현 문화 운동가, 출판사 경영), 서대석(오월동 지회 활동), 고희숙, 김경옥, 이영주, 배환중(교육 운동) 김상전 정재호 동근식(청년운동) 등 많은 활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윤상원 이었다.
윤상원은 시내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시민의 입과 귀가되자 면서 유인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윤상원의 말 즉 단호한 의도와 심사숙고가 곁들어 있어 이견의 제시 없이 통과되었다. 통금 단축 등의 상황 때문에 19일부터 제작하기로 하고, ‘절대보안’을 지킬 것을 서로 약속했다. 그가 문안을 작성하고 박용준이 필경 하며 야학 교사들이 등사 및 배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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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들불 야학팀이 제작할 전단에는 이런 내용이 그대로 실렸다. ‘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나가자.’ 이러한 윤상원의 생생한 목소리가 문자화되어 시가지 투쟁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20일, 시위 상황은 광주 항쟁 전기간 동안 가장 치열한 날이었다. 이날 시위는 종일 시내 각처에서 진행되었고 저녁 운전기사들의 차량 시위로 시민들의 사기는 절정에 달했다. 또한 공수부대의 만행도 가장 극심한 날이 어서 사상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시위가 치열하게 격화될수록 전단 제작팀인 들불 야학 성원들의 일손은 바빴다. 16절 갱지에 수동 등사기로 밀어야 하기 때문에 1만장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원 지를 10여장씩 써서 등사해야 했다. 초기에는 야학 교사들만 참여했으나 20·21일 넘어서면서 야학의 학생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방안에 촛불을 켜고 철야로 그들은 작업을 했다.
원고를 써 오고 제작된 전단을 가져가 배포하면서도 윤상원은 시민 홍보의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시위 현장에 있다가 근처의 인쇄소에 들어가 즉석에서 전단을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21일 오전 녹두 서점을 거점으로 운동권 사람들이 광주의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하였다. 투쟁 지도부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윤상원을 필두로 김영철, 정상용(한국회 의원) 이양현(현 한겨레신문 지사장) 박효선 (현 극단 광대 대표) 정해직(현 교사 운동가) 윤강옥(현 오월 동지 회장)김상집 등과 다수의 학생들이 모였다. 항쟁을 외부에 알리는 문제, 투쟁 지도부 구축, 시외 통화 개통 및 방송국 접수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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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홍보 작업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투쟁의 방항을 설정하고 시민들의 행동 방향, 무장 시위대의 임무 등을 제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들은 민중 언론 ‘투사 회보’를 간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문안 작성은 윤상원, 전용호가 맡고, 필경은 필체가 좋은 박용준, 동근식이, 물자 조달 등사 배포는 2인1조가 되어 김경국, 정재호, 서대석, 김성섭, 나명관 등 20여명 내외의 학생들이 담당했다.
투사 회보는 21일부터 26일까지 총9호가 간행되었다. 16절 갱지의 양면에 등사된 투사 회보는 볼품없이 조잡한 것이었지만,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 하는 시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소식지였다. 피해 실상, 집회 홍보 시민의 행동 방향, 투쟁 방향, 요구와 주장 등의 내용을 담아 매회 1,2만장씩 등사되었다.
투항 파 수습 위에 대한 비판
계엄 공수 부대가 퇴각한‘해방 광주’는 닷새 동안의 피 비린내나는 투쟁의 성과였다. 도청이 점령되고 전 시가지 일원이 시민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날, 오후부터 녹두 서점에 청년 학생 운동 세력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령탑 격인 윤상원은 이날 진행되는 모든 사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뛰었다.
저녁에 윤강옥, 정해직, 김영철 등과 송백회 여성들 박효선, 김태종 등 극단 광대 패의 성원들, 안길정 등 학생 운동가들, 들불 야학의 성원 일부가 모였다. 그들은 투쟁 지도부가 없고 무장 세력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이미 계엄사 정보 당국의 분열 공작이 시작되었다며 일차적으로 시민 궐기 대회를 꾸미는 것과 시민 홍보에 주력하자는 윤상원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튿날인 23일 오전 10시경, 그는 윤강옥 등과 함께 학생 수습 위원장인 김창길을 만나 서로 도우며 일하고자 제의했다. 그리고 궐기대회의 개최와 시민 홍보 부분을 자신이 청년 학생 운동 세력과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창길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시민 수습 위나 학생 수습 위는 무기 반납, 피해의 최소화, 질서 회복, 헙상 등의 입장으로임하고 있었기에 윤상원의 얘기가 반가 울리 없었다. 수습 위 내에도 그것이 부당하다며 항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윤상원은 수습 위 내의 무장 세력과도 만나 이 같은 취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호의적이었다.
이날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 윤상원 등의 준비에 의해 민주 수호 범시민 귈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날의 집회와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달랐다. 전두환 처단 계엄 철폐 김대중 석방 등 프래 카드가 내걸 렸고 계엄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 등이 시민 대중과 함께 외 쳐졌다.
이렇게 민주의 열정이 충만한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26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 궐기 대회는 무장 시민 군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계엄군 부의 진압을 지지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23 · 24일 궐기대회가 종료되고 반성 및 평가 모임이 YMCA에서 연이어 개최되었다. 윤상원을 중심으로 정상용, 이양현, 김영철, 정해직, 박효선 등 지도부들은 향후 투쟁의 방향 등을 심도있게 논의하고 불철저한 도청 ‘수습위’를 혁파하고 새로운 투쟁 조직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들은 향후 투쟁 목표로 ①최규하 정부의 퇴진 ②계엄 해제 ③전두환 처단 ④구속 자 석방 ⑤시민 명예 회복 및 사상자 피해 보상 ⑥민주 정부 수립 등을 설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①시민 궐기 대회의 지속적 개최 ②도청 수습 위에 참여하여 강력한 투쟁 지도부의 결성 ③청년 학생들의 무장 화 및 무장 시민 군과 합세 ④무기 반납 결사 반대, 협상 반대 ⑤투쟁의 타 지역 확산 등의 투쟁 방향에 합의했다.
당시 도청 내 시민 수습 위와 학생 수습 위는 수습 방향을 놓고 연일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 수습, 무기 반납 질서 회복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사랑들과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청 상황실 등 무장 세력들은 항전을 주장하는 편이었다.
윤상원은 22일 이후 연일 도청에 들어가 밤낮없이 활동했다. 궐기 대회팀, 홍보팀 등은 필요할 때 짬을 내서 만나고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윤상원 에게는 투항파 수습 위를 축출하고 강력한 투쟁 지도부 결성을 위하여, 사전에 도청 내에서 조정 작업을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 졌다. 그는 김종배, 허규전 등 학생수습 위 일부와 박남선 등 상황실 무장 세력과는 입장의 일치를 봤다.
이날 저녁 7시경, 학생 수습 위 회의가 무기 반납, 질서 회복 등으로 기운다는 소식을 접한 윤상원은,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회의실로 뛰어가 끝까지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 항전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날, 저녁 9시쯤, 윤상원,정상용, 김종배, 허규정 등이 모여 투항파를 배제한 시민 학생투 쟁위원회의 결성에 합의하고 조직과 책임자 인선 등을 마무리했다.
위원회 간부들은 위원장 김종배, 외무부 위원장 정상용, 내무부 위원장 허규정, 기획 실장 김영철, 기획 위원 이양현, 윤강옥, 대변인 윤상원 등이었다.
윤상원은 투쟁 위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스스로 투쟁 위의 대변인을 자청하고, 정상용 등 동료들은 순발력이 뛰어나고 가장 정화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대변인으로 밀었다.
윤상원등 지도부의 미국인식정도
이즈음 윤상원을 비롯한 투쟁 지도부는 미국의 개입, 즉 미 항공모함의 내항, 미국의 동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논의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살육 만행을 묵인 방조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지만 한편으로 전두환 일파가 군을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고 미국이 살인 군부에 지지를 보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민 대중들은 친 미 반공 의식에 젖어 있어 반미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 항공 모함의 입항을 전두환 군부의 견제로 해석해 대자보나 궐기대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이 살인 군부의 만행을 저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윤상원 등 일부는 광주 주재 미국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때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26일, 항쟁 지도부의 대외적 창구 ·광주 시민들의 대변자 윤상원은 두 차례의 내 외신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에게는 광주 항쟁의 진실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항쟁의 확산을 꾀하며, 도청 투쟁 위의 공신력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 의무였다.
도청 투쟁 위 집행부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숨 돌릴 겨를 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날은 계엄군 진압 임박 설이 파다하게 퍼져 시민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불안이 역력한 가운데 저녁이 되었다.
오후7시경, 도청 회의실에서 일부 수습 위원들과 김창길 등 구 학생 수습 위원들이 무기 반납을 결의하고 반납 절차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 소식에 접한 윤상원은 김영철, 정상용, 박남선과 함께 회의실인 부지사 실로 뛰어들어갔다. 박남선은 권총을 발사하며 무기 반납은 이적행위라고 소리치고, 김영철은 싸울 뜻이 없으면 도청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윤상원은 흥분 분위기가 가라앉자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광주 항쟁, 국내외 정세, 투쟁의 방향, 정당성 등을 논리 정연하게 설파했다. 이어 그는 진압 작전이 두려워 무기를 반납하고 투쟁을 포기하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며 끝까지 힘을 합해 싸우자고 역설했다.
20∼30분간에 걸쳐 윤상원은 비장한 각오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은 숙연한 자세로 경청했으며 일부 수습 위원들은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윤강옥은 신들린 사랑처럼 얘기하는 윤상원의 의연한 목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며 오월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말한다.
밤이 깊어 가면서 도청 내 에도 정적이 깃 들기 시작했다. 그간 끼니도 거르며 연일 활동 해 온 대부분의 도청 시민 군들은 피곤에 지쳐 가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윤상원 등 투쟁 지도부들은 결사 항전의 대응책을 논의하고 내일의 투쟁 방향 등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해서 윤상원은 광주 항쟁 최후의 날을 맞이한다.
(출처: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4.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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