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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봉화산의 철쭉 & 억새
0. 일시 : 2007. 03. 03.
0. 위치 : 전북 남원시 아영면, 장수군 번암면
0. 코스 : 사치재-복성이재-봉화산-월경산-중재-지지리
0. 산행 : 7시간
0. 날씨 : (남원지방) 11 ~ 18도C 아침 구름 많음 오후 개였다 구름 많음
이제 산행을 하기에 아주 좋은 3월로 접어들었다. 월2회 산행에 2월 두 번째 산행일은 소위 까치설날인 섣달 그믐날로 설 연휴와 맞물려 부득이 건너뛰고 3월 첫 산행을 맞게 되었으니 그 사이 음력 丙戌년에서 丁亥년으로 바뀌었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보태어서인가 그만큼 많은 공백이 생긴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기야 계절적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인 만큼 주변이 하루가 다르게 다가서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조바심인가 눈길이 자꾸 나뭇가지 끝에서 머무른다.
많은 양은 아니어도 어제부터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지금은 그쳤지만 마음껏 배설을 하지 못한 탓인가 하늘마저 다소 불만에 쌓인 듯 축축이 젖어 좀은 눅눅하니 구질구질하다. 마치 걸레처럼 쥐어짜면 금세라도 주르륵 물기가 쏟아질 것만 같다. 산천초목은 말이 없어도 빗물을 흠씬 받아먹고 잽싸게 싹을 틔워 올릴 수 있어 내심 반기리라만은 산을 오르는 사람은 아무래도 주춤거린다. 그렇지만 대간 길을 가야만 한다. 어찌 마음에 드는 날만 가려서 갈 수 있을 거냐. 의연한 마음을 갖고 발길을 내딛는다.
88고속도로 지리산휴게소를 이웃한 남원 땅 사치재에서 들머리다. 진달래나무 망울이 서둘러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곧 빨간 입술을 드러낼 성싶다. 여기도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일부는 시원시원하게 간벌을 하였다. 흙바닥에 물기가 흠씬 스며들어 발길이 편안하나 간혹 미끄러운 구간이 있다. 솔잎이 금빛 양탄자라도 펼쳐놓은 듯 수북하게 깔려있는 길을 가노라니 마음이 붕 떠오르며 괜스레 으쓱해지는 기분이다. 겨우내 숙면에 빠졌던 초목이 깨어나며 기지를 폈던가, 계곡마다 가득했던 안개가 걷힌다.
돌무더기를 넘어야 한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좀 더 관심 있게 살펴보면 무너진 성벽이다. 이곳이 바로 아막성터다. 삼국시대 백제에선 아막성, 신라에선 묘산성으로 불리던 곳으로 백제와 신라가 영토 확장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움을 하던 곳이다. 아주 처절한 전투에 수많은 병사들이 피비린내를 뿌렸겠지만 지금은 어느 영혼 하나 느껴볼 수 없이 까마득히 잊혀간 평범한 돌무더기다. 천수백 년 세월은 모두를 깨끗이 씻어 내리고 이제는 신라도 백제도 아닌 그 터전 위에 오직 하나 된 대한민국만이 있을 뿐이다.
두 시간쯤 가니 복성이재로 오른쪽이 남원시 아영면이다. 오늘은 양력 3월3일이지만 날씨가 하도 포근하니 마치 음력 3월3일의 삼짇날 같다. 강남에 갔던 제비가 지지배배 거리며 어디선가 날아들 것만 같다. 흥부가 밭을 일구며 박구덩이를 파고 있을 것만 같다. 바로 저 아래가 성리마을로 일명 흥부마을이라 불리는 곳이다. 박춘보(흥부의 본명)가 이웃 인월면 성산마을서 태어나고 형 놀부에게 쫓겨나 많은 자녀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 굶기를 밥 먹듯 하다 제비와의 인연에 발복한 곳으로 권선징악의 표본이 되었다.
목장 울타리를 타고 무명봉에 올라선다. 철쭉이 절정을 이룬다. 빈틈없이 빼곡하기가 마치 콩나물시루를 연상시킨다. 건너편에 봉화산 정상이 늠름하다. 그러나 민둥산 같아 보인다. 이제는 봉화산은 봄이면 철쭉으로 많은 사람의 발길이 오가며 사랑을 받는다. 철쭉 군락이 산사면 곳곳에 널려 있는데다가 장수와 함양 땅으로 뻗은 암릉길이 온통 철쭉꽃길이다. 봉화산 철쭉꽃의 피크는 대개 5월 중순이라는데 올해는 엘니뇨 영향에 온난화로 개화시기가 보름쯤은 빨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1996년 말에 이 철쭉 명소에 그만 산불이 났다. 산불은 산등성이의 동쪽 비탈 즉 남원시 아영면 지역의 주봉과 무명봉(870m) 일대를 무자비하게 불태워버려 그만 흉측하니 처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한 번 산불이 나면 50년은 지나야 겨우 제 모습을 찾는다고 한다. 산불이 나고 6~7년쯤의 세월이 흘러갔다. 불탄 자리에 억새가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그야말로 억새 판이 되었다. 이제 가을이면 억새평원으로 탈바꿈하고 애수에 찬 그리움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봄이 오는 길목 한 자락에 서서 철쭉꽃도 억새꽃도 그저 마음속에 그리며 담아볼 뿐으로 그들을 그냥 한 줌 바람처럼 흘려보낼 따름이다. 때문에 같은 길이라도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제때 기회를 잡아야 제대로 볼거리를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치재를 넘는다. 주변에는 보리똥나무가 유난히 많아 저들이 익을 때쯤은 입이 심심치 않겠지 싶다. 가파른 기슭을 오르며 꼬부랑재를 넘어 다리재 능선에 닿는다. 잡힐 듯한 봉화산烽火山 정상(919.8m)을 향하여 치달았다.
사람이 아주 많다보니 같은 이름도 많듯이 또한 산도 많다보니 곳곳에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곳이 있다. 특히나 봉화산은 봉화대가 있던 산으로 춘천 남면의 봉화산(487m)이나 북산면의 봉화산(736m)에 포항 죽장면의 봉화산(637m)이며 여기 남원의 봉화산(920m) 등 여러 곳에 있다. 말하자면 동명이인이듯 동명이산인 셈이다. 본래 봉화는 횃불이요 봉수는 연기다. 그러나 지금은 통칭되고 있으며 거의 관리되지 않아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데 이곳도 이름만 남았을 뿐 평범한 산이다.
적이 쳐들어온다든지 반란이 일어난다든지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도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어 겨우 사신이나 보내고 파발을 띄우며 연이나 새를 이용할 정도로 미약하고 불확실할 뿐더러 즉각 연락을 취할 수 없었던 시대에 봉화는 획기적인 통신수단으로 생겨난 제도이다. 봉화는 연기와 횃불로 연결되기 때문에 봉화대를 밤낮없이 누군가가 반드시 지켜야 했다. 요소요소에 설치하여 한양으로 연결되었던 봉화가 만약 한 군데라도 봉화대를 비웠다가 단절되는 날에는 여간한 낭패가 아니었다.
육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섬 지방에도 봉수대와 봉화대가 설치되어 중요한 연락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烽)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였다. 당초 봉화는 밤에 피우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낮에 올리는 연기까지도 포함해서 흔히 봉화烽火라 통칭하였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넘어와 각 도에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여 650여 곳에 이르기도 하였다. 각종 병기를 준비하고 봉수군(봉화군)과 봉수군을 통솔하는 오장伍長을 두었다. 봉화는 전황에 따라 5구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각 봉수마다 5기의 봉수대가 있다. 이들 봉수는 경흥·동래·강계·의주·순천의 5개 봉수대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 목멱산(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 봉수대로 집결되었다.
함경·강원도는 제1봉수대인 양주 아차산에서, 경상도는 제2봉수대인 광주 천림산 봉수대에서, 평안·황해도는 제3봉수대인 무악산 동봉 봉수대에서, 평안·황해도는 제4봉수대인 무악산 서봉 봉수대에서, 전라·충청도는 제5봉수대인 양천 개화산 봉수대에서 올라온 정보를 병조가 총괄하여 매일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들 봉수제도는 1894년에 와서야 현대적인 전화통신체제로 바뀌면서 비로소 폐지되었다.
봉화산은 우뚝 솟아 있다. 사방이 툭 터져서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다. 이만하면 봉화대를 설치하기에 흠이 없었을 것이다. 어느덧 날씨가 활짝 개여 그늘이라고는 없는 이곳에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정상 주변에는 거대한 억새밭이다. 겨울을 나면서 색깔이 바래고 그간 눈이며 바람에 많이 짓이겨져 부러지고 너부러져 아주 혼란스럽다. 그러나 비록 대궁만 남았어도 강렬한 햇살을 조명처럼 받으니 아직껏 금빛 찬란한 모습을 연출하며 위안을 준다.
이제 저 모습도 곧 그루터기마다 새싹이 움터 오르며 슬그머니 자리를 비워주어야 하리라. 새싹은 저들을 아낌없이 자양분으로 삼아 더 억세게 자라나며 그들만의 영토를 넓혀갈 것이다. 무인 산불감시초소가 멀건이 바라보고 있지만 이 너른 초원에 막상 일이 닥치면 사실상 무슨 힘이 있으랴 싶다. 북쪽으로 저 멀리 다음 산행지인 백운산(1279m)이 어서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성싶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내려가다 그늘을 찾아 점심식사를 했다.
휴식도 잠깐 갈 길이 멀다. 능선을 가노라니 철쭉이며 억새가 계속하여 따라 나선다. 광대치를 지난다. 그런데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진다. 점심도 반밖에 먹지 않았는데 속이 부글거린다. 머리가 다소 띵하다. 무엇을 잘못 먹었는가? 습기가 많은데다 날씨가 너무 후텁지근하여서 적응이 안 되는가 싶기도 하다. 일행을 먼저 보내고 내 나름대로의 페이스로 천천히 걷는다. 월경산月鏡山(980.4m) 옆을 가까스로 지나친다.
내려서는 가파른 비탈길 등산로가 훼손되어 우회로를 여러 곳 만들었는데 마치 시궁창 속을 드나드는 것 같다. 중재에 다다르면서 일행을 따라잡았다. 왼쪽으로 꺾어 함양군 백전면 지지리 마을로 향한다. 지지천인가, 커다란 냇물을 만나면서 오늘 일곱 시간 산행은 사실상 끝났다. 물이 많아 그냥은 못 가니 신을 벗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얼음 같은 차가운 물속에서 너도나도 신바닥에 덕지덕지 들어붙은 흙은 씻어내며 하루치 피로를 닦아냈다. - 2007. 03. 03. 文房
ps: 대전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 7명은 다른 3명과 합세했다. 오늘은 마침 3월3일 삼겹살 데이라는데 이를 마다했다. 한 대원의 친구가 서해에서 싱싱한 주꾸미를 다량 공수하여 왔다. 여기에 정월 열나흘이라고 오곡밥에 여러 산나물까지 맛보며 그럴듯한 만찬을 즐겼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복이던가, 아직껏 속이 편치 않아 그저 바라만 보면서 콜라 사이다를 소주 맥주 삼아 세 병이나 마셔야 했다. 그래도 함께 했던 그 시간이 뿌듯하기만 한 것은 역시 사람은 사람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해 주며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이런 자리를 기꺼이 마련하여 백두대간을 뛴다고 영양식을 공급해준 최사장 님께도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꾸벅>
첫댓글 대간을 두루 휘몰아치며 산사나이 같은 기개가 돋보이고 또한 깜짝놀래버릴려고 하다가..무명봉에 철쭉이 흐흐 속아버렸네 ㅎㅎㅎ.수고하시고 고생하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또 마음에 담은것도 많을듣 싶습니다. 왜 속이 ...그 좋은 쭈꾸미가 ...건강이 최고입니다 ..제가 직접 같다온것같은 느낌으로 .. 잘 읽고 감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