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례 류씨 운조루(雲鳥樓,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가. 운조루
220년 내려온 구례 류씨 운조루: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에 있는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집이다.

![[구례] 운조루(雲鳥樓)](http://i3.search.daumcdn.net/simg/image/G01/thumb/0x120_85_hr/4dT7mdlas5E)



나.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의 정신
◐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새긴 뒤주 마련
99간의 대저택이었던 이곳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 지점에 곳간 채가 있고, 그 곳간 채에 지금도 쌀뒤주가 하나 놓여져 있다.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뒤주라서 네모지지 않고 둥그런 원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뒤주의 특이한 장치는 하단부에 가로 5센티 세로 10센티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류씨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다. 보통 가난한 동네사람들이 주 대상이었고, 그 외에도 운조루를 찾아오는 지리산 일대의 과객들도 조금씩 쌀을 가져가곤 하였다.
왜 주인이 직접 쌀을 주지 않고 이처럼 곳간 채에 별도로 뒤주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가져가도록 했을까? 자존심을 배려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주인에게 직접 쌀을 받아 가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곳간 채에 설치한 쌀뒤주는 주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쌀을 가져갈 수가 있다. 아름다운 마음씨는 이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법이다.
◐ 낮은 굴뚝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설치,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배려했다. 운조루에 남아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또 한가지 유물은 굴뚝은 다른 집에 비해서 굴뚝이 아주 낮게 설치되어 있다. 1미터 높이도 안된다. 건축적으로 볼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술술 잘 빠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낮게 설치한 이유는 밥하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쫄 쫄 밥 굶고 있는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펑 펑 올라가는 굴뚝 연기를 보면 자연히 증오와 질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운조루의 나즈막한 굴뚝을 보면서 조선의 선비정신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동학과, 여순반란사건, 6.25의 한 가운데인 지리산에 있었으면서도 운조루가 불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강릉 선교장(船橋莊)
경포호수(鏡浦湖水)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집 앞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집으로도 불리는 선교장(船橋莊)은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內蕃, 1708∼1781)이 지금부터 311년전인 1703년에 터를 잡았다. 선교장(船橋莊)은 강원도 강원 강릉시 운정길 63에 위치한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으로서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개인 소유의 국가 문화재이다. 선교장 터는 하늘이 족제비 떼를 통하여 점지했다는 명당이다.

조선시대에 궁궐이 아닌 민가로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의 규모는 99칸이었지만 선교장은 102칸이었다.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행랑채, 사당, 활래정(活來亭, 순조 16년 1816년 이근우(李根宇)가 지음)에 하인의 집까지 더하면 300칸에 이를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지만 지금은 123칸만 전해온다.
강릉 안인진리(安仁津里)의 해변에서 염전(鹽田)을 일구고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한 이내번은 영동 일대에 대농장을 개간해 농민들에게 제공했다. 남쪽으로는 삼척과 동해, 북쪽으로는 속초와 양양, 서쪽으로는 횡성과 평창까지 선교장의 농토로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영동 일대에 다섯 군데나 있었다고 하니 조선 최고의 만석지기 부자였던 셈이다. 여느 고택(古宅)과 달리 집 이름에 ‘당(堂)’이나 ‘각(閣)’ 대신 ‘장(莊)’을 붙인 것도 독립영지(獨立領地)를 가진 유럽의 귀족처럼 자급자족경제(自給自足經濟, autarkic economy) 시스템을 갖춘 장원(莊園, manor)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선교장의 주인들은 단순히 부를 축적만 한 것이 아니라 나눔과 상생(相生)의 삶을 추구해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때 선교장을 공격한 농민군을 물리친 세력이 선교장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한 소농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선교장을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에 비견(比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교장의 넉넉한 인심은 자연스럽게 전국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을 불러모아 풍류문화(風流文化)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인근에 경포대(鏡浦臺)와 경포호(鏡浦湖)가 있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금강산(金剛山) 가는 길목에 위치해 시인묵객들은 선교장에 머물며 주인으로부터 온갖 편의(便宜)를 제공받았다. 손님들이 떠날 때 옷을 한 벌씩 지어 주기 위해 바느질을 하는 침방(針房)을 따로 운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김구(金九)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선교장을 찾았고, 여운형(呂運亨)은 1908년 선교장 주인 경농 이근우(鏡農 李根宇, 1877~1938)가 선교장에 세운 강원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인 동진학교(東震學校)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몇 년 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의 다회를 선교장에서 연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3. 경주 최부잣집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최부잣집은 신라 요석공주(遙昔公主)가 살던 요석궁(遙昔宮)터에 자리 잡고 있다. 월성(月城) 옆에 위치한 최부잣집은 300년 동안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배출한 명문 부자 가문이다. 최부잣집은 1700년쯤에 건립된 경주 최씨 종택(宗宅)으로 본래 99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최준, 1884∼1970) 선생이 돌아가던 해에 사랑채와 별당이 화재로 소실돼 70여칸으로 줄어들었다.

경주 최부자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존경받는 부자가 되었을까.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온 육훈(六訓)이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격조와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12대 만석지기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최진립이다. 후손들은 최초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이앙법을 도입하고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앴다. 또 만석 이상이 수확되면 나머지를 되돌려주는 나눔의 경영철학을 실천해 소작농들이 스스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정착시켰다.
최부잣집에서 눈길을 끄는 건물은 안채 앞 드넓은 공간에 위치한 목재 곳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곳간은 쌀 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최부자는 흉년 때 이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줌으로써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 자칫 부자로서 사기 쉬운 원성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崔浚, 1884년 ~ 1970년)선생에 의해 완성됐다. 일제 강점기 안희제(安熙濟)등 영남지방지주들과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정부 주석(主席) 김구에게 군자금(軍資金)을 보냈다. 최준 선생은 광복 후에는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鷄林學塾)을 설립했다.
경주 최부자
가. 1600년대 초반~1900년대 초반까지 300년간 12대에 걸쳐 만석(石-섬)꾼(1년 쌀 수확량이 만석인 대단한 부자)의 부를 유지
나. 철학 및 금기
◐ 흉년에 땅을 사지 않는다(관우와 황충).
◐ 파장(罷場)을 기다려 물건을 사지 않는다(떨이 안사기).
◐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소작료 일반 70%, 최부자 40%, 사촌이 논사면 배가 아파도 최부자가 논사면 박수친다).
◐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3000석중 식구 양식 1000석, 과객 대접 1000석 및 경주중심으로 백리 안에 1000석 사용 및 보릿고개가 닥치면 한 달에 100석 쌀 무료 분배)
◐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동으로 경주 동해안, 서로 영천, 남으로 울산, 북으로 포항)
◐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마라(9대 진사).
◐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이상 무명옷을 입어라.
◐ 보릿고개 때는 쌀밥도 먹지 않고 은수저도 사용 않는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이 모든 재산 털어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건립)(손자 최염(崔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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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석공주(瑤石公主, ? ~ ?)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영창부인(永昌夫人)의 딸로 김흠운(金歆運)과 원효(元曉)의 아내이자 설총(薛聰)의 어머니이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서는 원효와 만나기 전에 김흠운(金歆運)에게 시집 갔으나 김흠운이 백제와 전투에서 전사하여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소생으로 두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둘째 딸이 자신의 남매이자 신라 30대 국왕인 김법민(金法敏)의 큰 아들인 소명태자와 혼인하였으나 소명태자가 일찍 사망하여 시동생인 정명태자(政明太子)와 재혼하였으며 그 후 정명태자는 훗날 31대 국왕인 신문왕이며 그녀는 신문왕의 비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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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崔浚, 1884년 ~ 1970년)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기업인, 사회운동가, 교육인이다. 호는 문파(汶坡). 본관은 경주, 경상북도 경주 출신이다. '경주 최부잣집' 12대로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져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투자하였고, 일제강점기때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 일제의 치열한 감시 속에서 임정 등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의 설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