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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구당서와 신당서에 대한 글을 읽고 유추하는수 밖에요..
《당서》는 당고조(唐高祖)의 건국(618)에서부터 애제(哀帝)의 망국(907)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나라 역사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단지 《당서》로 이룩하였지만, 송나라 때 내용을 고쳐 《신당서》로 편찬하였다. 그래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로 나누어졌다.
《구당서》는 200권으로 되어 있는데,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가 부족하여 후반부가 부실하다. 전반부도 여러 사료에서 대강 발췌한 것이라 체제에 일관성은 없다. 그러나 당나라 때의 원사료의 문장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신당서》는 225권으로 되어 있는데, 송나라 때 《구당서》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한 것도 많다. 표(表)가 많은 것도 특징이고, 처음으로 병지(兵志) ·선거지(選擧志)를 갖추었다. 문장은 당시 중시되던 고문으로 간결하게 기술하여, 정사 편찬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원사료의 문체까지 고치고, 간략이 지나쳐 사료적 가치는 구당서에 비해 떨어진다.
발해는 중국사인가 한국사인가?
고구려가 붕괴되고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는데 발해의 구성원이 부여계 고구려후손이라는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발해의 영토는 동쪽으로 연해주지역을 포함해서 아무르강까지 서쪽으로 요동지역, 남쪽으로 대동강 원산 이남, 북쪽으로 송화강 이북의 말갈지역이며 5경 15부 62주를 설치한 중앙집권체제였고 지방 수령들은 발해의 관리로 임명합니다.
지도- 발해의 영토
고구려 왕조가 붕괴하고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대조영이 고구려계라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구당서>'발해말갈전'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신당서>'발해전'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덧붙여, 성은 대씨이다]
<구당서>
大祖榮驍勇善用兵
[대조영은 날쌔고 용감하며 병사를 잘 활용하였다]
<발해고>
高王諱祖榮, 震國公子也, 嘗爲高句麗將, 驍勇善騎謝
[고왕의 휘는 조영으로, 진국공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였으며, 날쌔며 용감하고 말타기와 활을 잘 하였다]
대조영을 고려별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려계라는 것이며 고왕이라고 한 것은 대조영의 성씨가 고씨(高氏)로서 고구려의 왕족이거나 귀족출신이라는 것이다.
<구당서>에 따른다면 대조영은 고구려 사람이며 <신당서>에는 발해구성원을 말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三國史云,儀鳳三年高宗戊寅 高麗殘類聚 北依太伯山下 國號渤海
[삼국사에서 의봉 3년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이 북쪽의 태백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삼국유사>
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祖榮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이 내용에서 <신라고기>를 인용해서 대조영의 출신을 설명하고 있는데 <신라고기>는 고려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구당서> <신당서>보다 신빙성이 높고 <삼국유사>에 말갈의 역사를 포함시킨 것은 말갈이 한(韓)민족 역사의 범위라는 것입니다.
<속일본기>의 내용에는 발해의 문왕 대흠무가 스스로 고려국왕 대흠무언이라 하였고 일본의 회답서에도 발해를 고려국이라 칭하는 기록이 있는데 일본에 외교적 관계를 요구하는 국서의 내용에서 발해가 주변국들을 주관하고 고조선(부여)과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구려 왕실은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반도 북부의 오메리 절터에서 고구려 금동판이 발견되었는데 천손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모두루 묘지나 광개토대왕비문에 고구려 왕실을 하늘의 자손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발해 왕실도 천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환단고기>'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발해의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大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949년 길림성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발해의 문왕 대흠무가 연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란 쓰고 있습니다.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속일본기>권10
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다]
<위서>'고구려전'
高句麗疆界 北至舊夫餘
[고구려의 강역은 북으로 옛 부여지역에 이른다]
<무경총요>
渤海 夫餘之別種 本夫餘之地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부여의 땅이다]
말갈족은 <구당서>에 고구려의 별종이라 칭하는데 중국 길림지역의 부여는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부여가 살던 곳이 속말수(송화강)지역이라서 말갈이라 불렀던 것이다. 말갈이 부여계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발해가 부여계가 아니라면 부여의 풍속을 가지고 있을 수 없으며 고구려가 부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고 거주하던 송화강 상류는 한(韓)민족의 예맥족이 살던 지역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나라라고 하는데 이 말갈은 시대에 따라서 숙신(潚愼; 은.주시대), 읍루(邑婁; 한나라), 물길(勿吉; 남북조), 말갈(靺鞨; 수나라), 여진(女眞; 금나라), 만주족(滿州族; 청나라)으로 불렸는데 숙신은 고조선을 말하고 읍루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 열국시대에 나타나고 물길, 말갈은 고구려와 발해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말갈은 고조선의 분파이며 이들이 살던 만주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강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발해의 묘장법은 동북지역의 초기 석관묘(石棺墓)의 전통적인 특징과 고구려 봉토석실묘를 계승하고 여기에 당나라의 전실묘가 융합되어 있습니다.
<책부원구>권970
[속말말갈의 추장 돌지계가 수에 투항해 오자 그를 부여후로 봉했다]
<구당서>
[신주는 속말말갈 오소고부에 두었다. 여주는 신주를 나우어 돌지계가 수에 투항해오자 그를 부여후로 봉했다고 했다]
이렇게 말갈은 부여였고 사서의 내용에서 [부여별종] [고려별종] [부여후로 봉했다]라는 기록은 말갈이 부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말갈이 나중에 여진족이 되었고 만주족이 됩니다. 만주족의 주축이 되는 족속은 말갈이고 고구려의 부여입니다.
따라서 말갈은 부여의 유민이고 발해는 부여유민과 고구려유민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한(韓)민족의 정통왕조인 것이다.
고구려의 적자가 발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북경지역의 하북성 연안을 발해만이라 하고 그 아래 명칭이 발해해협(渤海海峽)이라는데 북평, 태원, 상곡의 하북성지역이 고구려 영토였으므로 발해는 고구려 땅을 회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북경대학교 교재에는 북경 아래 부분에 국도(國都)인 발해(渤海)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발해는 15왕 229년을 지속하다가 926년에 거란에 멸망한 후에 세자 대광현등 많은 유민이 고려로 투항하고 1116년까지 정안국, 오사국, 흥료국, 대발해국등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합니다.
이렇게 발해가 한(韓)민족의 국가인데 강단학계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붕괴하고 난 후에 서라벌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분류하는데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 당시를 발해와 후기신라의 남북국시대라고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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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7세기말의 건국 이후 멸망까지 唐이나 日本, 그리고 新羅와도 교류관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의 문화나 종교를 말할 때 지금까지는 불교와 유교만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이것은 발해 당시 주변국이 불교, 유교 이외에 도교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사상이 존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발해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흐름에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가임은 여러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발해 문화가 고구려의 문화만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발해의 중심지는 고구려 영역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자적인 문화전통을 지닌 곳도 아니었다. 따라서 건국 이후 발해의 문화는 자연히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당의 문화와 고구려의 문화가 그것이다.
▶ 건국 초기의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기의 도성체제와 고분양식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 문화가 지속적으로 고구려문화를 고수한 것은 아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당의 문화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기층문화는 말갈 문화가 중심이었으면, 여기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요소도 있었고, 그 속에서 발해인들 고유의 문화도 창조되었다.
▶ 이처럼 발해문화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가 보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활발한 대외관계를 통해 습득된 성과였다. 그렇다면 발해문화에서 볼 수 있는 각각의 문화요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고구려 문화
▶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 중 대표적인 것은 지붕을 장식하였던 막새기와(瓦當)이다. 연꽃잎을 배치한 막새기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에서 각각 특징적으로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 발해의 막새기와는 부조가 뚜렷하고 힘이 넘치는 고구려의 것을 계승하였다. 발해의 지배계층은 고구려인들이었고, 기와가 사용될 수 있는 건물은 궁궐, 관청, 사원이었을 터이니 그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 발해인의 종교는 불교인데,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고구려의 불교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흙으로 둥글게 구워만든 전불은 바로 고구려의 양식인 것이다. 이밖에 무덤 양식에서도 고구려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발해의 무덤은 흙무덤, 돌무덤, 벽돌무덤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에서 돌무덤은 바로 고구려적인 요소로서, 특히 석실봉토묘(石室封土墓)는 고구려 지배계층의 무덤을 발해에서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정혜공주의 무덤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 한편 발해의 성터를 살펴보면, 평지성과 산성이 있는데, 평지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고 산성은 돌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다. 발해의 초기 성은 이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바로 고구려시기 집안의 환도산성과 국내성을 모델로 하여 계승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후 8세기 중반에는 당 문화의 영향으로 장안성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제로 전환된다.
2) 당나라 문화
▶ 발해가 당나라로부터 받아들인 대표적인 문화요소는 정치, 군사제도라고 할 수 있다. 3성6부제도, 10위의 군사제도, 지방행정제도, 관료제도 등은 모두 당나라의 제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명칭에 있어서 독자성을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 등의 3성과, 충부(忠部), 인부(仁部) 등의 6부 명칭이다.
▶ 또한 당나라의 3성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기초로 하였다면, 발해의 3성은 행정실무기관인 중대성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것 또한 발해 중앙행정제도의 특성이라고 할 만하다.
통일신라의 집사성(執事省)이나 고려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도 모두 권력이 집중된 곳인데, 발해의 중대성에 비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밖에도 무덤 양식에 있어서 벽돌로 쌓는 방법, 현실(玄室) 벽화 인물의 화풍이나 복식 등이 모두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문왕 이후에 채택된 평지성을 중심으로 한 도성체제도 당나라에서 유입된 것이다. 또한 발해인의 활쏘기, 타구, 격구 등은 페르시아를 거쳐 당나라로 전파된 것인데, 이것은 다시 발해에 전해졌고, 9세기 초에는 발해를 거쳐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3) 말갈 문화
▶ 발해 건국의 중심지는 원래 말갈족의 거주지였다. 따라서 말갈족이 발해 사회의 기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발해 문화에는 당연히 말갈족의 문화요소가 남아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흙무덤인데, 이것은 고구려의 돌무덤, 당나라의 벽돌무덤과 구분되는 말갈의 전통이다.
▶ 그릇에서도 다양한 양상이 보이는데, 몸통이 홀쭉하고 입술이 두 겹으로 된 것 등은 모두 말갈적이 전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계통의 것은 물레를 사용하였고 굽는 온도도 높았는데, 이에 비하여 말갈 계통의 것은 손으로 직접 빚었고 굽는 온도가 낮았다고 한다. 이처럼 그릇의 제작기법에 있어서도 다른 문화요소와 구별되는 말갈의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4) 고유 문화
▶ 발해 문화에서 창조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덤 양식의 경우 벽돌로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덤 위에 탑을 쌓았는데, 이것은 바로 발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그 좋은 예이다.
▶ 무덤의 매장방식에 있어서도 발해 고유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발해는 1부1처제를 기본으로 하여 부부합장이 이루어졌지만,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한 가족인지 순장인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왕릉급 무덤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발해에도 순장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 또한 현지의 토착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밖에도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에 도자기를 씌워 빗물로 인한 부패를 방지한 것이라든가, 구멍이 많이 뚫리고 형태도 다양한 허리띠 장식, 독특한 기와 문양 등에서도 발해 고유의 창조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 이상 발해문화에 영향을 끼친 여러 문화요소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적 요소도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해주에서 발굴된 유물의 경우이다. 연해주는 현재 러시아의 영토이지만, 과거에는 발해 영토의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연해주에서도 발해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곤 한다. 그 중에는 독특한 장식의 도기, 소그드 화폐, 경교 십자가 등도 있는데, 러시아 학자들은 이런 것들이 중앙아시아나 남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 발해 문화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초기에는 고구려 문화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 후 8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유입하여 더욱 다양한 요소를 띄게 되었다. 하지만 지역적으로는 편차가 없을 수 없었다. 과거 고구려 영역이었던 함경도 등지에서는 고구려전통이 많이 남아있었던 반면, 그렇지 않았던 길림성, 흑룡강성 등지에서는 고구려 외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 우리는 흔히 발해 문화가 고구려 문화를 단순하게 계승한 것으로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러나 발해 문화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주변 및 토착 지역의 여러 문화를 발해인들이 혼합하여 만든 창조적 양식인 것이다. 발해 문화가 당나라 문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중국 측의 입장을 우리는 공정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발해 문화가 그저 고구려의 것을 계승하였다고만 하는 것 역시 우리의 지나친 주관적 판단일 것이다. 발해인의 입장에서 발해 자체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를 살펴보려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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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적 특징 : 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 당 문화를 가미
2. 주요 문화재
상경성의 주작 대로(당의 장안성 모방), 정혜.정효공주 묘(고구려 양식-무덤의 모줄임 구조), 이불병좌상, 돌기와, 석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