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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홰치기도 전인 이른 새벽 3학년 학인 스님들이 승방에 모여 경전을 공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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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니의 맑은 눈을 보며 묻고 싶었다.
꼭 머리를 깎아야만 했었는지, 속가의 삶을 그렇게 모질게 끊어야만 했었는지를….
하지만 묻지 못했다. 아니 묻질 않았다.
책을 쓰면 몇 권을 남겨도 모자랄 장구한 사연을 물어 무엇하고 말해 무엇하며 들은들 무엇하랴.
대신 법랍 56세의 비구니 고승이 나지막이 의문을 깨우쳐준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게지요.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를….."
그 때문일까. 비구니 승려의 평균 출가 연령이 서른에 달하는 것이.
어지러운 세상사.
긴 장마를 알리는 먹장구름을 번뇌처럼 머리에 이고 청도 운문사의 불이문을 넘었다.
속가와는 또 다른 부처의 세상.
이곳에서 가슴에 품은 저 마다의 화두를 풀고자 치열하게 자신을 사르는 비구니 스님들을 만났다.
'또르르~똑 똑 똑'.
닭이 홰치기도 전인 새벽 3시 정각. 어김없이 도량석 목탁 소리가 적막한 경내를 깨웠다. 동시에 모든 승방에 불이 켜지고 승려들이 하나 둘 잠을 털어낸다. 분주해도 소란하거나 어수선하지 않다. 윤회하듯 반복되는 운문사의 긴 하루가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다.
잠시 후 산문의 범종루에서 법고를 시작으로 사물(四物·법고 목어 운판 범종)의 시연이 새벽예불을 알린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탄했던 운문사의 그 새벽예불. 장삼가사를 두르고 대웅보전을 가득 메운 250여 비구니 승려의 일동 오체투지 광경은 숨이 멎을 듯한 비장미가 서려 있다. 50분 가까이 진행되는 예불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목숨 다해 부처에게 귀의함)'로 압축된다. 숨 죽이며 읊조리는 염불소리. 하지만 무지렁이 귀에는 그저 두어번 되풀이되는 '마하반야 바라밀다'만 또렷이 들릴 뿐이다. 운문사의 모든 예불은 일반인에게도 산문을 열어 두지만 궂은 날씨 탓인지 이날 외부인들은 보이질 않았다.
지금 전국의 선방은 하안거 철. 그러나 승가대학인 운문사는 안거 대신 한 달의 늦은 봄방학을 접고 2학기를 시작한 지 열흘이 조금 넘었다.
종무소 맞은편 사교반(3학년)의 승방으로 쓰이는 금당. 학인스님들이 책상다리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경상(승려의 개인 책상)을 마주하고 경전 공부에 한창이다. 아침 발우공양 전까지 가지는 간경 입선시간. 참선 위주의 선방과 달리 강원에서의 수행은 경전 공부가 핵심. 50여 학인스님들이 노래하듯 한 목소리로 독송하는 풍경은 예전 과거 공부에 매진하던 선비처럼 고고해 보인다.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이 새벽 4시 25분을 가리키고 있다.
흑판 같은 어둠이 걷히고 청록빛으로 주위가 달라질 쯤 산사를 감싼 호거산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간밤의 비구름이 거대한 솜이불이 돼 산자락에 내려앉았다. 지형을 연꽃에 비유하면 운문사는 정중앙 꽃술에 해당될 터. 시방세계가 온통 운무에 휘감겼다. 넋을 놓을 비경이다. 불국토 수미산을 현세에서 찾는다면 이곳 운문이 아닐까 할 만큼….
■비구니 승가대학 운문사
운문사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위치한 사찰로 대구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 창건,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다.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학풍이 엄격한 4년제 비구니 승가대학이다. 수강 학인 승려만 250명(대학원 포함) 내외. 입학 자격은 사미니계를 받은 출가 수행승. 연중 3학기로 이루어지며 학기 중에는 매달 음력 1·15일 이틀만 쉰다. 1년에 한 달씩 3번의 방학이 주어지고 이때 자신이 출가했거나 소속된 절로 돌아간다.
번뇌…눈물…웃음…그리고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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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력을 위해 승방을 나서는 운문사의 학인 스님들. 4년의 승가대학 생활을 마치면 소매·목 둘레의 갈색 의제를 떼어 내면 정식 비구니 스님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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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보다 엄한 구도의 길
오전 6시. 아침 발우공양을 알리는 목탁 소리와 함께 소임자 스님들이 각 승방으로 밥과 찬거리를 날랐다. 승방은 입선 수행의 공간인 동시에 침실과 식당 역할도 겸한다.
1·2학년(사미니·사집과) 학인스님은 가장 넓은 청풍료를, 3학년(사교과)은 금당, 4학년(대교과)은 설현당을 각각 승방으로 사용한다. 엄숙하면서 진중한 20여 분의 발우공양. 불가에선 먹는 것도 수행의 일환이다.
아침 공양을 끝낸 학인스님들이 절 마당과 요사를 쓸고 닦느라 분주하다. 오전 7시께 장삼에 붉은 가사를 곱게 두른 학인스님들이 경전 수업에 앞서 청풍료에 모여 상강례(上講禮·부처의 가르침 받는 것에 올리는 감사의 예)를 올렸다. 열어 놓은 문 틈으로 엿보이는 250여 비구니들의 오체투지 광경, 예불 못지 않게 장엄하다.
짧은 상강례 후 학년 별로 2시간 동안 경전 수업을 받는다. 이때만큼은 여느 대학의 강의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비들이 수업시간 내내 승방 안을 마음대로 날아디니는 것만 빼면.
학인스님들의 승복 소매와 목 둘레에는 '의제'라고 부르는 갈색 띠가 둘러져 있다.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구족계를 받아 정식 비구니가 되면 비로소 의제를 떼어 내고 정식 법복을 입는다.
하지만 갈빛 의제를 떼어 내는 4년의 수행은 혹독한 시련과 인내를 요구 받는다. 운문사의 학풍은 국내 5곳의 비구니 강원 가운데 가장 엄격하다.
잠자리 시간을 제외한 하루 18시간의 일과는 조금의 빈틈과 곁눈질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루 세 번의 예불, 8시간 가까운 입선, 공양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공동 노동인 '울력'에 소요된다. 울력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청규의 정신을 실천하는 수행. 1학년은 잔심부름이나 설거지·화장실 청소, 2학년은 밭에서 사찰 생활에 쓰이는 먹을거리를 가꾼다. 운문사는 쌀을 제외한 모든 식재료를 주위 텃밭을 가꿔 자급자족한다. 3학년은 주로 후원(식당)에서 부엌일을, 4학년은 회계나 서기 등 큰 소임을 맡는다.
휴식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울력이 없을 때 쉰다. 휴일은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이틀만 주어지며 주로 산행을 하며 보낸다. 샤워는 언제든 가능하지만 목욕은 한 달에 두 번 휴일 전날에만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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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스님들의 양치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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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下心) 또 하심
고요하던 경내가 어수선해졌다. 울력시간이다. 승복과 이불을 빨아 줄에 널거나 시커먼 가밭솥에 여전히 나무 땔감으로 밥을 짓는 풍경은 더없이 정겹다. "가마솥 밥이 훨씬 맛있고 철 성분이 나와 몸에도 좋다"며 어느 학인스님이 가마솥 찬송을 읊었다. 텃밭에서 밀짚모자에 장화를 신고 밭을 가는 학인스님들의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힘든 울력인 데도 얼굴 빛이 맑고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사찰 입구에 놓인 커피 자판기. "커피 맛이 원체 좋아 멀리 밀양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게 스님들의 자랑. '물이 좋아서인가 커피가 좋아서인가'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 "자판기를 항상 청소하거든요."
운문사의 조금 독특한 가람 구조에 시선이 머문다. 대가람에서 흔한 일주문이나 서슬 퍼런 천왕문이 보이질 않는다. 사찰을 경계 짓는 기와돌담들도 경내의 불이문(이 너머부터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는 승려들의 수행 공간)을 제외하곤 어깨 높이 정도여서 위압감을 풍기지 않는다.
학인스님들은 정식 비구니 스님이 되기 위해 모인 예비 승려들. 4년의 수행은 속가와의 연을 끊는 과정이다. 따라서 관광객들이 별 생각없이 사진으로 자신들을 담는 것에 극히 민감하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숙이거나 돌릴 뿐 좀체 손사래 치거나 표정을 일그러트리지는 않는다. 사찰 입구에 보일듯 말듯 붙여 놓은 '스님 사진 찍지 마세요'라는 작은 글귀가 금기의 전부다. 싫다하여 내치지 않는 게 절집의 인심이다. 모든 가지를 땅으로만 내려 놓는 경내의 처진 소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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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새벽 3시 도량석 목탁 소리에 잠을 깬 학인 스님들 ②새벽 예불 때 벗어 놓은 스님들의 고무신 ③ 승방에서의 경전 공부 ④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울력 ⑤각자 맡은 소임에 맞춰 움직이는 학인 스님들 ⑥저녁 예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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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란 머리,
고와서 서러워라
점심 공양에 별식으로 '(고기를 뺀)스님 짬뽕'이 준비됐다. 불가에선 면 음식을 가르켜 승소(僧笑)라고 부른다. 스님들이 면을 유달리 좋아해 '면 요리가 나오면 웃는다'는 뜻이다. 방학을 맞아 산문을 벗어난 학인스님들이 맨 먼저 달려가는 곳이 인근 중국집이라고 한다. '스님 자장'을 먹기 위해서다. 그 다음으로 들르는 데가 영화관이다. 금욕의 수도승도 피해갈 수 없는 유혹인가 보다.
운문사 학인스님들의 연령대는 20세부터 55세까지 넓은 편. 하지만 속가의 나이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선후배와 사제 간의 규율이 군대 못지 않게 엄격하지만 승려들 간은 모두 존대한다.
공교롭게 한 달에 세 차례(음력 9일·19일·29일) 행하는 삭발식이 있었다. 같은 학년으로 보이는 나이 든 학인스님 한 명이 방금 삭발을 마치고 나온 어린 도반의 파르란 머리를 정성껏 어루만진다.
너나 할것 없이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회색 승복. 그리고 구별 불가능한 흰색 고무신들. 자기 고무신을 귀신같이 찾아 수백 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비결은 고무신에 '비표'를 새기기 때문이다. 만자( 卍), 화살표, 영어 이니셜 등 '구별'을 위해 각종 문자와 문양이 동원된다. 더러 아무 표시가 없는 것들이 가장 눈에 띈다. 댓돌 위 마루 면에 붙여진 개인 번호도 혼란을 막아 주는 데 한몫한다. 순번은 학년과 서열에 따라 정해지며 중도 퇴출자가 생기면 앞번호로 당겨진다. 식당 옆 벽면을 가득 메운 양치 도구함의 끝 번호는 219. 수행 승려가 모두 219명이란 뜻. 무슨 일인지 5곳은 비어 있다.
●낮보다 경건한 운문의 밤
저녁 공양과 예불을 끝낸 산사에도 한지에 먹물이 번지듯 어둠이 스며들었다. 잠자리에 들기까지 또다시 입선 시간. 승방마다 불을 밝히고 논강과 다음날 수업 준비를 위한 글공부에 빠졌다. 온통 한자로 뒤덮인 경전. "한자 세대가 아니여서 한문 익히는 게 무척 어렵다"고 4학년 대교반 스님이 심경을 털어 놓았다.
밤 9시. 가로등 불빛 몇 개만 남긴 채 모든 요사의 불이 꺼졌다. 일순 산사는 적막 속으로 빠져 든다.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일절 승방을 나설 수 없다. 3, 4학년은 뒷뜰 삼장원(도서관)에서 밤10시까지 남은 공부가 허락된다. '사각 사각' 가는 자갈토로 된 경내 바닥은 아무리 까치발을 하고 걸어도 발소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취재진은 사찰에서 내어 준 객방에 누워 마지막으로 불을 내렸다. 야경을 도는 처사(사찰 경비원)의 랜턴 불빛만 문풍지에 가끔 어른거릴 뿐 주위는 암흑천지. '후두둑' 내내 찌푸렸던 하늘에서 드디어 빗자락이 흩날렸다. 비 소리를 타고 반딧불이 한 마리가 객방에 넘어 들었다. 까만 방안을 부유하듯 떠도는 영롱한 불빛. 어쩌면 이날 사미니 수도승들이 털어낸 하루치의 번뇌는 아닐까.
■ 운문사 학장 명성 스님
"348개 비구니 계율은 '지악작선(악을 멈추고 선을 행함)'으로 귀결"
"구족계를 받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가 모두 348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지악작선(止惡作善·악행을 멈추고 선을 행함)' 하나로 귀결됩니다."
천년가람 운문사의 회주이자 승가대학의 학장인 명성 스님(사진)은 "수행은 선방이나 강원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무릇 생활 자체가 수행 공간"임을 늘상 강조해 온 한국 비구니 승단의 좌장. 세수 79세, 법랍 56세의 연세에도 한치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과 말투에 대나무의 기개가 어려있다.
승가대학 운문사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명성 스님이다. 스님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1952년 23살의 나이로 합천 해인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운문사와 인연은 1970년 사찰의 강주로 부임하면서부터. 이후 37년간 주지와 학장을 거치면서 협소했던 강원을 국내 최대의 교육 도량으로 변화시켰다. 상량식만 40례가 넘었다고 한다. 칼 끝보다 엄한 운문의 학풍도 그의 교육 철학에서 비롯됐다. 그간 스님이 배출한 비구니 제자만 1533명. 조계종 산하의 비구니가 7000명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 비구니의 산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운문사의 극락교 너머 죽림헌에 기거하며 수도에 전념하는 스님은 "학인스님을 포함해 모든 수도승의 목표는 부처님의 자취를 좇아 부처님을 닮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승단의 원로 비구니 스님들의 '삼고초려'에 못 이겨 2003년부터 전국 비구니회 회장도 겸하고 있다. 김성한 기자
■ 운문 학인스님들의 하루 03:00 기상 03:30 새벽 예불 04:20 입선(아침공양 전까지 자율학습 혹은 경전 독송) 06:00 아침 공양(부엌일 소임자 스님과 내방객 등은 식당서 식사) 07:10 상강례 07:30 오전 수업 10:00 울력 10:50 사시 예불 11:30 점심 공양(오후 울력 때까지 자유시간) 14:00 울력 17:30 저녁 공양 18:15 저녁 예불 18:30 입선(논강이나 자율학습) 21:00 취침(3·4학년은 밤 10시까지 도서관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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