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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노인:그래,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며) 이 집에서 산 지가 꼭 사십칠 년이고 그 강 약방이 사십 년이 되니까, 그러고 보면 나도 무던히 오래 살았어……. 이 종로 바닥에서 자라서 장가들어 자식 낳고 길러서 이제는 환갑을 맞게 되었으니……. 어머니:(마루 끝에 앉으며) 정말……, 근 오십 년 동안에 이웃 얼굴 바뀌고 저렇게 집이 들어서는 걸 보면 세상 변해 가는 모양이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제가 당신에게 시집왔을 때만 하더라도 어디 우리 이웃에 우리 집 담을 넘어서는 집이 있었던가요? 최 노인:사실이야! 빌어먹을 것! (좌우의 높은 집들을 쏘아보며) 무슨 집들이 저 따위가 있어! 게다가 저것들 등쌀에 우린 일 년 열두 달 햇볕 구경이라곤 못하게 되었지! 당신도 알겠지만 옛날에 우리 집이 어디 이랬소? 경?哉?웃으며) 아버지두……, 세상이 밤낮으로 변해 가는 시대인데요……. 최 노인:변하는 것도 좋구 둔갑하는 것도 상관치 않지만 글쎄 염치들이 있어야지, 염치가! 경?哉봇翎? 최 노인:제깐 놈들이 돈을 벌었으면 벌었지 온 장안 사람들에게 내로라는 듯이 저따위로 층층이 쌓아 올릴 줄만 알고 이웃이 어떻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걸 모르니 말이다! 경?哉뵉피彎遮? 최 노인:(화단 쪽을 가리키며) 저기 심어 놓은 화초며, 고추 모가 도무지 자라질 않는단 말이야! 아까도 들여다보니까 고추 모에서 꽃이 핀 지는 벌써 오래 전인데 열매가 열리지 않잖아! 이상하다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저 멋없는 것이 좌우로 탁 들어 막아서 햇볕을 가렸으니 어디 자라날 재간이 있어야지! 이러다간 땅에서 풀도 안 나는 세상이 될 게다! 말세야 말세! (이때 경재, 제복을 차려 입고 책을 들고 나와서 신을 신다가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는 깔깔대고 웃는다.) 경?髥봇?아버지두……. 최 노인:이눔아, 뭐가 우스워? 경?髥봐仄?세상에 남의 집 고추 밭을 넘어다보며 집을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 노인:옛날엔 그렇지 않았어! 경?髥봇쓱?일이 오늘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오늘은 오늘이지. (웅변하는 연사의 흉내를 내듯) 역사는 강처럼 쉴 새 없이 흐르고 인생은 뜬구름처럼 변화무상하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이 역사적인 사실을 똑바로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소한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에헴! <중략> ▶현대 사회의 변화를 못마땅해하는 최 노인 최 노인:(부엌 쪽으로 나오며) 아 저 배라먹을 녀석들이 남의 집에다가 구정물을 버리다니, 저, 저런……. 어머니:누가요? 최 노인:(좌편 건물을 가리키며) 저 이층 다방에서 버린 물이 뒤안 나무 밑에 흥건히 고였어! 이층에서 내리는 수채통이 터졌나 보군! 망할 자식들! 돈 벌 줄만 알았지 남의 집 망치는 줄은 모르는 모양이지……. 도대체 요즘 녀석들은 염치가 없다니까! 어머니:설마 알고야 그랬겠어요? 최 노인:아따 속이 넓기는 동해 바다 이상이군!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듯 소리를 지르며) 그래 내 집이 다 썩어 가도 설마야? 어머니:허지만 이웃들이 집터를 높이 돋구어서 집들을 지으니까 우리 집이 낮아서 물줄기가 일로 모여드는 거지 누가 일부러……. 최 노인:아니 이이가……. 그래 우리가 잘못이란 말이오? 어머니:(고소를 뱉으며) 누가 잘하고 못 하고 있어요……. 우리 집터를 옆집보다 더 높이든지 하지 않은 다음에야…. 최 노인:돈, 돈이 있어? 돈이 어디 있어? 장사가 안 되어 가게 문을 닫고 세금도 못 내는 판국인데 그래 내 돈 들여서 집터를 돋아 올리자구? 어머니:누가 그렇게 하자구나 했길래 이리 성화시우? 최 노인:그럼 뭐야? 어머니:낸들 알겠수, 여편네 얘기라면 문풍지 소리로나 아는 당신인데……. 최 노인:(넋두리 외듯이) 나 원……. 일이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비틀어지다니 정말 집을 옮기든지 해야지……. 자식 놈이라고 벌어 대기를 하는가, 장사가 제대로 되는가……. 나 원……. 게다가 가게 문을 닫은 지가 두 달이나 되었는데 무슨 놈의 세금은 세금이야!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저 빌어먹을 낮도깨비 때문에 화초밭이 망쳐지는 것은 고사하고 집 기둥까지 썩게 되었으니……. 에잇 참! <중략> ▶최 노인과 어머니의 인식 차이 최 노인:이건 내 집이라는 걸 알아야 돼! 어머니:사람이 살기 위해서 집이 있지 사람 죽고 집만 있으면 뭘 해요, 글쎄……. 최 노인: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이 집뿐이야. 어머니:누가 그걸 모르나요. 허지만 이 집을 여엉 없애 버리자는 것도 아니고 좀 작은 집으로 가자는 게죠. 최 노인:이 집은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사 주신 집이야! 어머니:그렇다고 자식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기도 못 펴는 꼴을 보고만 있겠어요? 최 노인:뭐라고? 어머니:경수만 하더라도 빈손으로 취직을 하자는 것이 틀린 채산(採算)이죠. 요즘 세상에 공 안 들이고 되는 일이 있답데까? 최 노인:(화를 내며) 그래 경수 취직 자금을 얻기 위해서 집을 팔자는 거야? 어머니:그것뿐이 아니죠. 경애도 시집보내야겠고, 내년이면 경재가 대학에 가야 하고……, 앞으로 돈으로 메꾸어야 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예요? 최 노인:(긴 한숨을 내쉰다.) ▶집을 팔자는 어머니와 최 노인의 대립 - 차범석, <불모지(不毛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