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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진의 문화 읽기·10
다시 ‘여배우’를 위하여.
글 | 사진·이화진 (mysleepwalk@naver.com))
“하루를 살아도 은하랑 살래.”
<너는 내 운명>에서 투박한 시골남자 석중(황정민 분)은, “하루를 살아도 은하랑 살래.”라고 울부짖었다. 이 인상적인 장면을 예고편으로 처음 봤던 날, 심은하가 결혼을 발표했다. 그날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은 그녀의 결혼 소식을 알리느라 무척이나 분주했다. 심은하는 물론이고 신랑 될 사람과 신랑의 부친 이름이 인터넷 검색어 순위 1, 2위를 다투었고, 심은하의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행보가 차근차근하게 정리되어 올라왔다. 그날 나는 실상 나와는 별 관계도 없는 한 여배우의 결혼 소식 덕분에 뭐랄까 갑자기 10년이 훌쩍 흘러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심은하의 단아한 외모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무색하게 했지만, 마침내 결혼으로 공식화되는 은퇴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우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애인 같았을 그녀의 결혼 소식이 나에게는 한 시대의 마침표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되었던 그 해, 신문은 '코리안 뉴웨이브 시네마'를 점치며 들떠 있었다. 그리고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90년대의 여배우 트로이카'로 주저없이 심은하, 전도연, 고소영을 꼽았다.
그러나 그 후 십년 동안 세 사람이 걸어간 길은 매우 달랐다. 고소영은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필모그래피를 만들지 못했다. 광고에서 기존의 발칙하고 당당한 이미지를 소비해 가며 '아직 고소영'으로 지내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영화에 간간이 출연했으나 구설수에만 오르내렸다. 심은하는 한 편의 깜찍한 영화와 몇 편의 미스테리한 영화에 출연한 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돌연 모습을 감췄다. 아니 감췄다기보다는 감추고 싶어 했으나, 사람들이 그녀를 조용히 내버려 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모두가 심은하의 스토커가 되어,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궁금증을 감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전도연은 고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소비해야 하는 광고 출연보다는, 매번씩이나 캐릭터 색깔을 만들어가며 자기를 갱신하는 영화에 출연해서 어느 감독이나 남성배우 못지않은 이력을 쌓았다.
<너는 내 운명>의 전도연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지금까지의 스코어로는, 그 세 사람 중 배우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람은 전도연인 듯하다. 그러나 '-스타일'을 만들어낸 배우는 심은하였다. 그것이 심은하의 능동적 수행이든 대중이 만든 이미지든 간에. 그것이 연기의 깊이든 그저 이미지의 수준이든 간에. 사람들은 지금도 심은하식 스타일과 이미지에 연연해 한다. 심은하의 빈 자리는 청순한 외모의 신인 여배우라면 한번쯤 욕심낼 만한 것이었다. 황정민의 “하루를 살아도 은하랑 살래.”라는 절규에서 ‘은하’는 전도연의 배역 이름이었지만, 극장의 관객들은 모두가 사랑하고 동경하고 기다려온 1990년대의 한 스타 여배우 ‘은하’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들이 걸었던 이 세 가지 길은 ‘한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면서, 동시에 한국 여배우가 놓이는 선택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어떤 누군가의 길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지 않은 길'이 되는 선택이었는데, 어느 쪽이든 그녀는 그 길 위에서 ‘여성’과 ‘배우’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의하게 될 것이었다.
여성과 배우 사이
연말에 TV에서 청룡영화제와 대한민국영화대상 시상식을 지켜보다가, 등과 가슴이 깊이 파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여배우들을 보는 것이 영화제의 주요한 재미 가운데 하나겠구나 생각했다. 때로는 시상 멘트나 수상 소감보다 그녀들의 외모와 의상이 더 감격적(?)이었으니, 전혀 엉뚱한 생각은 아니다. 시상식장 앞에서 기자나 관객들에게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들은 누가 더 멋진 드레스를 입고 누가 더 관능적으로 보이는지를 경쟁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날의 그녀들은 여배우가 남성배우들에 비해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미감을 강하게 표출해야 하는 존재들이며, 그것이 스타덤에 걸맞는 의례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그날만큼은 여배우가 “시각적 쾌락Visual Pleasure”을 주는 관음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여배우가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바로 여성의 몸에 대한 “시각적 쾌락” 때문이었다. 여배우의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는 여성 예능인은 동·서양 공히 매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 종교적 금기(禁忌)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극히 낮았고 공인된 무대에 등장할 수 없었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 연극의 전성기인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도 여자역은 소년배우가 대신했다. 합리주의와 사실주의를 기조로 한 근대에 와서야 여성배우는 예술적 ·사회적 위치를 확립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여배우의 등장이 뒤늦었던 것은 아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 같은 전통 연극에서 여성의 출연은 금기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공공 장소에서 보여지는 여성이란 몸을 파는 여성과 동일시 되었다. 옥내극장이 없었던 한국의 경우에도 직업적인 여성 예능인들은 최하층 천민으로 걸립(乞粒)으로 유랑생활을 하며 폐악을 끼치는 부정적인 존재로 대우받았는데, 낮에는 연희를 하고 밤에는 밀매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극장과 같이 밀폐된 공간에서 여성의 몸이 공적으로 보여지고, 이를 보기 위해 돈을 내고 입장한다는 것을 음란하고 저속한 문화로 치부했던 엘리트들 덕분에 본격적인 직업 여배우의 출현은 상당히 늦었다. 남성배우가 여성을 연기하던 시절이 지나고 ‘진짜 여자들’이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섰던 때, 처음에는 <춘향전>(동아문화협회, 1923)에서처럼 소문난 기생이 영화에 출연했고, <장화홍련전>(단성사, 1924)처럼 “(광무대에서) 소리하는 애들”을 모아다가 촬영하기도 했다. 집안에서 얌전히 부녀자의 도리를 배우고 있어야 할 양가집 규수들이 온갖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극장 무대에 선다니, 그 자체가 몸을 파는 일인 양 수치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감독들은 기생을 섭외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비록 조선총독부가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한 계몽영화였지만 조선인의 각본과 감독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되는 <월하의 맹서>(1923)는 주연배우로 출연한 이월화의 존재 때문에 더욱 이채로운 영화다. 이월화는 기생이 아닌 배우로서 출발한 첫 여배우였다. 이전에 <의리적 구토>를 비롯하여 <장한몽>, <인생의 구> 등에 출연한 연쇄극 시절의 마호정이 있기는 하지만 필름상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확인하기 어렵고, 설사 마호정의 비중이 미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풋풋하고 꽃다운 처녀’의 여주인공 이월화의 등장은 궁중 나인 출신의 40대 여걸이 맡던 계모 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파장을 불러왔다. 한국에서 “女俳優”의 ‘기의’가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월화부터였다.
여배우가 드물던 시절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한때나마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월화는 <월하의 맹서>에 뒤이어 <해의 비곡>(1924)에 출연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작은 토월회가 공연한 <부활>이다. <부활>은 일본에서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시마무라 호게츠가 각색해 그와 염문을 뿌렸던 마쓰이 수마코가 카츄샤로 출연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연극인데, 조선에서는 신극 운동의 선구였던 토월회의 박승희가 지휘하는 가운데 이월화가 카츄샤를 연기했다. <부활>에서 젊은 귀족 네플류도프의 유혹을 받아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일로 해고되어 매춘부가 되고, 끝내는 범죄를 저지르는 카츄샤의 인생유전은 보는 사람들 누구나의 눈물샘을 자극할 만했다. 그런데 관객의 눈물을 쏙 빼서 스타덤에 올랐던 이 배우들은, 배역의 운명 때문이었는지 마쓰이 수마코나 이월화 모두 카츄샤와 같이 불행하게 살다갔다. 배우로 출발했던 이월화는 부호의 아들과 도주했다가 돌아와 기생으로 전락했다. 이 전락한 여배우는 대중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가 ‘조선의 카츄샤 이월화가 죽었다’는 쓸쓸한 한 줄의 부고 기사를 남기고 영영 사라졌다.
이월화와 동시대에 활동을 시작했던 여러 여배우들(복혜숙, 신일선, 윤심덕, 석금성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보통의 여성들처럼 평범하게 살지는 못했다. 파트론이 있다든가, 누구누구의 첩살이를 한다든가, 어디서 카페 여급으로 살고 있다든가, 남편에게 내쫓겨났다든가 하는 온갖 소문들 속에 파묻혀서 배우로서의 연기력이나 역량으로보다 사생활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대중문화를 양적으로 팽창시키고 대중의 소비와 관심을 조장하는 데 여배우만한 미끼는 드물었다. 대중은 여배우의 외모와 스타일은 물론, 그녀들의 사생활을 소비하며 대중문화를 향했다. 하지만 정작 대중에게 “시각적 쾌락”을 제공해 온 여배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충돌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눈물의 여왕’으로 살다간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며 대중의 “시각적 쾌락”을 훼손하지 않는 외모여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들을 괴롭혔다. 예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나이가 들면, 예쁘장한 또래 여배우를 며느리로 둔 시어머니 역할을 연기해야 했다. 예쁠 뿐 아니라 젊어야 여주인공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여배우를 한정하는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그녀들을 이중으로 옥죄었다.
여배우 트로이카 - 늙지 않는 여배우
해방 후에도 여배우들이 놓인 기본적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전쟁 후, 어느 정도 한국 영화의 기틀이 마련되고,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영화에도 전성기가 도래했을 때, 여배우는 한국 영화의 흥행을 주도하는 중요한 흥행 요건으로 부상했다. 순위를 매기거나 분류해서 명명하기를 좋아하는 저널리즘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의 흐름 속에서 ‘여배우 트로이카’를 탄생시켰다. 1960년대가 문희, 윤정희, 남정임의 시대였다면, 1970년대는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의 시대였다.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운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가 또한 멜로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흥행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여배우는 사랑받는 존재, 혹은 사랑하는 존재일 때 그 가치가 최상일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의 ‘新트로이카’ 역시 이때가 새로운 감성의 멜로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접속>의 전도연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는 이 영화들을 통해서 스크린의 스타 배우로 거듭났다.
최근 저널리즘은 전도연을 필두로 해서 ‘30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꼽아보느라 애를 쓰고 있다. 예전에 여배우들은 20대 초반 꽃 같은 나이에 반짝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또는 결혼과 함께 화려한 은막을 뒤로 하고 사라져 버렸으나, 오늘의 여배우들은 철저하고 꾸준한 자기 관리와 매니지먼트로 그 활동 가능성이 20대 여배우들을 능가한다. 30대 여배우들은 선배들처럼 한창 때에 ‘좋은 곳으로 시집’가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거나 이혼 후 돌아왔다. 이혼 후 신드롬을 몰고 돌아온 고현정과 활동 재개를 선언한 고소영의 외모는 여전히 20대 같다. 그들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 먹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그녀들은 아직도 20대 남성과 연애하고 사랑과 성공을 꿈꾼다. 그러니 이들은 매우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운도 좋아서 20대 여배우들은 많지만 30대 여배우들을 대체할 만한 ‘트로이카’가 눈에 띄지 않으니, 앞으로도 한동안 30대 여배우들의 고공비행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팬과 함께 나이먹어 가는 건재한 배우들이 있어 기분이 좋으면서도,(그것은 3·40대도 문화산업의 주요한 소비자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중문화에서 소외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아직도 늙지 않고 영원히 젊을 것만 같은 30대 여배우들에게 한편 서운하고 아쉬운 생각도 든다. 늙어가지 않는 여배우는 아직도 ‘여성’이라는 수식어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녀들은 여전히 여성성으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언제나 사랑받는 여성을 연기할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그녀들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사랑과 연애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같은 세대들의 욕구를 대리 만족시키는 면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녀들의 영원한 젊음을 보며 이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는 팬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팬과 함께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늘고 기미가 생기고 선이 흐트러지는 여배우들을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일까.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아듀, 심은하
역설적이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절정에 있을 때 은막에서 은퇴한 심은하가 여전히 그리워도,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를 몹시 열망했던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년 전과 달리 한국 영화의 장르는 다양해지고 있다.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어야 최고의 여배우가 될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다양한 장르에서 연기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들이 있어야 한국 영화의 미래도 밝다. 근대 대중문화의 역사에도 혹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여배우가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뛰어 넘어 배우로서 당당하게 자기 위치를 확보하는 과정이 이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심은하를 대체할 포스트-심은하를 구하려 들 것인가. 언제까지 늙지 않는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여배우에 목을 맬 건가. 이제는 정말 심은하를 보내줄 때가 된 것이 아닐까. ●
이화진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식민지 시기 대중문화로, <식민지 영화의 내셔널리티와 ‘향토색’>, <소리의 복제와 구연공간의 재편성> 등을 썼다. 현재, 연세대에 출강하고 있다.
윗 글은 월간 사진예술의 협찬으로 제작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