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인생살이를 전쟁에다 비유하였다. 사람이 무슨 싸움을 하던지 싸움에는 승패가 있다. 간혹 운동에는 무승부가 있을지 몰라도 전쟁에는 승자가 아니면 패자로 갈라선다. 신앙생활이란 원수 마귀와의 영적 전쟁이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게 된다. 여리고성은 출애굽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앞에도 여리고성은 있다. 금번 새벽기도를 통하여 우리 앞에 있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체험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생명의 말씀
1.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하겠다.
☞ 수6:2 "여호와깨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 들을 네 손에 부쳤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우리는 금번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에 여리고성을 함락할 마음의 자세로 시작하자. 먼저 오늘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믿고 나아가자. 하나님은 미리 우리 손에 여리고성을 맡기셨다.
2. 연약궤를 따라 나아가자
☞ 수6:13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이번 40일 새벽 기도회에 본교회의 장로님들과 제직들은 앞장서야 하겠다. 여리고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제사장들이 앞장섰다. 오늘도 교회의 중직들이 앞장설 때 역사는 일어난다.
3. 크게 외치며 부르짖어야 하겠다.
☞ 수6: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외치라는 말은 크게 부르짖음을 의미한다. 금번 기회에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어 우리의 사정을 아뢰어야 하겠다. 특별히 오늘처럼 어려움에 직면한 때에 새벽을 깨우는 성도들이 되어 자신뿐 아니라 민족의 문제까지 해결되도록 하여야겠다.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 일 1998. 3. 4.
제 목: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 하신다.
본 문: 누가복음 8:43-48
오늘의 묵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은 세월이 흐른다고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일컬어 알파(시작)와 오메가(마침)가 되신다고 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심에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의 능력과 역사(役事)하심에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역사가 동일하다는 말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엘리야, 베드로, 바울등을 통하여 역사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들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동일하게 역사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역사가 이렇게 동일하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생명의 말씀
1. 우리는 그의 역사 하는 능력을 바라고 구해야 하겠다.
☞ 대상 16: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하겠다. 그리고 그 얼굴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주님 당시에도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능력>을 구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고 도움을 구한 사람들이었다. 오늘 본문은 12년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낳을 것을 믿고 그렇게 함으로 고침을 받은 내용이다. 혈루의 근원이 마르도록 주님의 권능을 바라보자.
2.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신.
☞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다. 말씀 가운데 역사 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 자체이다.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역사가 일어난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기적도 체험한다. 말씀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이다.
3.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을 가질 때 역사 하신.
☞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즉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나타난 것만 보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였다. 금번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 일 1998. 3. 5.
제 목: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
본 문: 시편 46:1-11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새벽이었다. 그것은 새벽의 여명(黎明)이 밤의 두려움과 악몽(惡夢)을 쫓아내듯이, 하나님께서 이 땅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광명의 새 시대를 동트게 한다는 사상에서 였다. 하나님은 어둠을 종식시키는 능력의 하나님이다. 가정, 직장, 사업, 인생의 어둠이 깔려 있다 해도 그것을 종식시킬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서 어두운 난관의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는 하나님께 새벽에 도우심을 구하자. 매일 매일 새벽 전에 엎드려 간 구하는 기도는 우리 앞에 있는 어둠의 문제를 종식시키고 광명한 새 아침을 동트게 할 줄 믿는다. 그렇다면 이번 새벽 기도회 중 어떤 자세로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생명의 말씀
1. 확신 위에서야 하겠다.
☞ 삼하 22:7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殿)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욕심이 아닌 간구(懇求)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왜 필요한 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나가야 하겠다.
2. 구체적 기도 제목을 준비해야 하겠다.
☞ 마 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 중에 생각이 집중되지 않고 딴 생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 사람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오랫동안 기도함으로 자기를 들어내 보이려고 하였다. 기도에는 진실뿐이다. 본래 진실은 말이 필요 없다. 간단하다. 거짓이 도리어 말이 많아진다.
3. 응답을 자기편에서 보다 하나님 편에서 기다리라
☞ 빌 3:15-16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오직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너무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도 잘못이다. 하나님은 급한 것은 급하게, 천천히 이룰 것은 천천히 이루신다. 그것은 다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함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 전체를 살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되 나의 생각에서 보다 하나님 편에서 응답을 기다려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4 일 1998. 3. 6.
제 목: 아브라함과 새벽 신앙
본 문: 창세기 22:1-14
오늘의 묵상
성경에서 「시험」이란 단어(單語)는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유혹(誘惑)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시험(試驗)이라는 말로 사용된다.
영어에서는 전자를 Temptation 이라고 했고, 후자를 Test 라고 했다.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여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과는 달리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여 온갖 은혜와 복을 주시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전에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해 보시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었을 때 기뻐하신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확인해 보려고 주시는 시험(試驗)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괴로움의 문제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은 시험(Test)을 어떻게 극복하여 복의 사람이 되었는가?
생명의 말씀
①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 찍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 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할까? 밤새도록 마음속에서 시험을 거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순종에는 반드시 고민이 따른다. 해야 하나?, 안해야 하나? 마음의 갈등을 거쳤을 것이다.
② 변질되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였다.
☞ 창 22: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 본지라"
아들을 잡아 번 제로들이기 위해 3일 길을 걸어가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그 마음이 착잡했을까! 귀한 아들, 100세에 얻은 아들, 그 아들을 번 제로 받치라는 명령을 준 행하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만은 아니했을 것이다. 중도에 얼마든지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이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났다. 끝까지 침묵으로 사흘 길을 걸어서 드디어 '제 삼일에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고 했다.
③ 더 큰 무엇을 준비해 놓았을 것을 믿고 나아갔다.
☞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 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가장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여기서 본다. '번 제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다. 사흘 길을 걸으며 고민하였으나, 최후로 얻은 결론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는 확신이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신앙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바로 이런 신앙이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5 일 1998. 3. 7.
제 목: 야곱의 새벽기도
본 문: 창 32:22-32
오늘의 묵상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여년간 살면서 큰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고향에서 이 소식을 들은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야곱은 과거로 인하여 형 에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밤새도록 얍복강가에서 기도하였다. 결국 기도 중에 천사를 만나 밤을 새우며 씨름을 하다가 마침내 새벽 해가 떠오를 때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 하나님의 보장된 복을 받게 되었다. 야곱의 얍복강의 기도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도 하나님께 매어 달려 씨름을 해야 하겠다. 밤새워 기도하다가 새벽에 응답을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기도했기에 응답을 받았는가?
생명의 말씀
1. 언약(言約)을 붙들고 기도하였다.
☞ 창 32: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자신의 조상들이 섬기며 믿었던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지금 자기에도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20년전 집을 떠날 때에 자기에게 나타나 약속했던 하나님의 그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기도한다. 우리들도 지난 세월 중에 나타났던 하나님을 상기해 보아야 하겠다. 숫한 어려운 자리에서 그때그때 마다 나타나 내게 살길을 열어 주었던 그 하나님께 오늘의 문제를 아뢰자.
2. 자신과 가족의 생사를 건 기도를 했다.
☞ 창 32:11 "내가 주께 간 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고생 중에 얻은 아내와 자식들이 다칠까 겁내서 기도하였다. 위기를 만났을 때에 먼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가정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요즘 실업 사태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일이 많아졌다. 지금껏 쌓아 온 노력이 허물어질까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 많다. 가정을 지켜 달라고 매어 달려 기도해야 하겠다.
3. 씨름하듯 놓지 않고 기도하였다.
☞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 하다가...." 씨름이란 힘씀을 의미한다. 씨름은 판정이 날 때까지 놓지 않는다. 이렇게 야곱은 땀이 배어 나도록 힘써 기도하였다. 힘쓰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끝까지 응답을 요구하면서 기도하였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매어 달렸다. 끊질기게 반복하여 기도하였다. 결국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기었다. 마치 아버지와 씨름하여 승리한 아들과 같이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냈다. 금번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기도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6 일 1998. 3. 8.
제 목: 새벽은 주님을 만나게 한다.
본 문: 막 1:35-39
오늘의 묵상
인생의 모든 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능한 문제라 할지라도 주님이 역사(役事)하시면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해도 주님과 함께 하면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면 그 자체가 복(福)이기 때문이다. 인생에게서 주님을 만난 것이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생명의 말씀
1. 주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다.
☞ 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는데 주님을 만날 수 있으려면 먼저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중에 내 심령 속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했다고 하는 것을 보아 우리도 새벽에 이렇게 나와 기도할 때에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더욱이 오늘은 주님의 날이다. 주의 날에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자.
2.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 이사야 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흘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란 바로 지금이다. 요즈음 우리 민족 전체가 여호와를 만날만 때이다. 지금껏 허랑 방탕한 의식 속에서 살던 우리들이다. 탕자와 같은 심리상태로 살아온 우리들이다. 죽게 된 지경에 이른 상태에서 탕자는 아버지를 기억했다. 바로 우리들이 탕자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억할 때이다. 다시금 아버지께로 향하는 마음 운동이 펼쳐야 할 때이다.
3. 교만의 죄를 자복하고 겸손해져야 하겠다.
☞ 호세아 5:5-6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하나님 앞에서 큰 죄는 교만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교만은 물리친다. 무엇으로 인하여 교만하여 졌는지 살펴서 하나님 앞에 다시 겸손해져야 하겠다.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다. 경제로, 권력으로, 지식으로 교만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어놓고 다시 겸손으로 무장해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7 일 1998. 3. 9.
제 목: 만나는 새벽에 내린다
본 문: 출애굽기 16:1-12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은 오늘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길에서 농사를 지었거나, 옷감을 만들어 입거나 하지를 않았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저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였다. 그러나 저들 가운데서는 「만나」만 먹고는 살 수 없다고 불평을 하였다. 저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여 정력이 쇠해졌다고 하면서 도리어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고 싶다고 했다. 광야 생활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 살면서 도리어 불평을 늘어 놓을 때가 많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올바른 자세가 무엇일까? 그리고 만나의 교훈이 무엇일까?
생명의 말씀
1. 만나는 하루 분씩 거두어야 한다.
☞ 출애굽기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거두게 하였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식구수 대로 거두게 하였다. 욕심으로 많이 거둔 자도 썩어 없어지게 만들었고, 안식일에는 쉬게 하여 내리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삶의 법칙이다. 그러면서 '나의 율법을 준 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신다.
2. 만나는 이슬이 내릴 때 함께 내렸다.
☞ 민수기 11:9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만나는 밤에 이슬과 같이 내렸다고 했다.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 밤에 이슬이 내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적 행위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슬을 내리게 못한다. 더욱이 밤에 이슬이 내린다는 뜻은 어려운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슬이 내리게 하는 것 같이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은 내리게 하신다는 뜻이다. 실제로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 죽게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3. 만나는 자신이 나가 거두어야 한다.
☞ 출애굽기 16:21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각기 나가서 자기 먹을 양식대로 거두었다고 했다. 그것도 아침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정확하게 시간에 맞추어 손수 거두게 하였다. 일해야 먹고살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땀을 흘리게 함으로 건강을 유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삶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8 일 1998. 3. 10.
제 목: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능력이다.
본 문: 마태복음 7: 7-11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육신의 아버지들도 자기의 아들딸들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먼저 구하라고 하였다. 물론 구하기 전에 하늘 아버지 깨서 우리의 요구가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였다. 기도에는 3가지로 응답한다고 한다. ① 오냐(Yes!)로 응답하는 것이 있고 ② 기다려(Wait!)로 응답하는 길이 있고, ③ 안돼(No!)로 응답하는 것이 있다. 어떤 것으로든지 기도는 모두 응답된다. 기도를 통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하늘 문이 열리는 체험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생명의 말씀
1.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구해야 한다.
☞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하늘 문을 열 수 있는 천국 열쇠가 주어진다. 대부분 믿음이 기복(祈福)적인 신앙이 되기 쉽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救援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 요한복음 10:7,9 "...나는 양의 문이라....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문(門)되신 주님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즉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求)해야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주님께 합당하게 인정함을 받아야 하고,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3. 간구(懇求)하는 자에게 이루어 주신다.
☞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고 하였고, 찾으라고 하였고, 두드리라고 하였다.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얻을 생각은 말아야 한는 말이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고 성취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9 일 1998. 3. 11.
제 목: 기도하면 해결의 길을 가르쳐 준다.
본 문: 시편 120:1-7
오늘의 묵상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였다. 환난 중에 기도했다는 경우는 성경에 많다.(시18:6, 시86:7, 삼하22:7) 대체적으로 그 환난이란 전쟁, 가난, 질병, 모함, 거짓 등의 인생의 위기를 의미한다. 특히 구약 시대에는 적군의 침입으로 약탈과 포로와 죽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인생의 환난 때에 기도하였더니 기도 중에 해결의 길을 가르침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의 환난은 무엇인가? 실직(失職)과 경제적 위기(經濟的 危機)일 수 있고, 병고의 고통일 수 있고, 실패와 좌절일 수 있다. 이런 환난 중에 기도하면 해결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가?
생명의 말씀
1.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심으로 가르쳐 주신다.
☞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하면 기도하는 동안에 영안을 열리게 한다. 영의 귀를 열어 준다. 그래서 지금껏 보지못하고 있던 것을 보게 하시며,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을 깨닫게 한다. 기도하는 중에 이사야는 제단의 숯불을 보았고, 자신의 입술에 와 닿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음성을 들었다. 기도하는 중에 뜨거운 경험이 있기를 바란다.
2. 문제 해결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 출애굽기 1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기도하면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주신다. 모세는 백성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칠 때에 하나님께 나가 부르짖으며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기도 중에 해결 방법을 얻게 된다.
3. 돕는 천사(손길)를 보내 주심으로 가르쳐 주신다.
☞ 민수기 20:16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 기도하는 중에 돕는 손길을 체험하게 된다. 생각지 못한 인도하는 손길이 함께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사들이다. 우리는 요행(僥倖)을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어는 안되겠지만, 기도하는 동안에 예측하지 못한 손길이 와 닿는 경험을 얻게 된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0 일 1998. 3. 12.
제 목: 합심 기도의 응답
본 문: 마태복음 18:15-20
오늘의 묵상
우리말 중에 "백지 장도 맞들면 났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지라도 혼자의 힘보다는 여럿의 힘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혼자의 힘보다 함께 하는데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어떤 중요한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 할 때는 기도의 짝이 더더욱 필요하다. <기도의 동지>처럼 강한 힘은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 공동체요, 사랑의 공동체요, 봉사의 공동체이다. 성도가 함께 교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다. 사탄은 이것을 방해하려고 서로를 갈라놓으려고 한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리라"고 하였다.
생명의 말씀
1.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경험한다.
☞ 사도행전 1:14, 2: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것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한 결과였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는가? 주님의 약속하신 분부의 말씀이었다. 내가 가면 나 대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는 그 약속의 말씀에 한마음으로 기도하였다.
2. 신유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 마가복음 2:3, 5 "사람들이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네 사람의 합심을 보았다. 누구를 위하여 대도(代禱)의 기도를 한다는 것, 그런 것에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면서 소경된 자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함께 외쳐 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함께 고함을 질러 아뢸 때 저들의 눈이 밝아졌다.
3.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게 하였다.
☞ 사도행전 12:6-7, 12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위 사자가 곁에 서매....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합심 기도 할 때에 옥문이 열렸다. 오늘도 우리의 문제들이 이번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통하여 해결되는 경험들이 있게 되기를 믿는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1 일 1998. 3. 13.
제 목: 예수님의 기도를 본 받자
본 문: 누가복음 6:12-19
오늘의 묵상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였다. 자신의 중요한 메시아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큰 일을 앞두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였다. 철야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내려와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여 12제자를 세웠다. 그리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님도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밤이 새도록 기도하였는데, 우리들도 그것을 본받아 이번 기회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명을 감당토록 하여야 하겠다.
생명의 말씀
1. 예수님은 중대한 일을 앞에 두고 기도하였다.
☞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신 주님이시다. 공생애의 첫 시작을 위해 그는 먼저 기도하고 제자를 선택하였다. 우리들도 어떤 중요한 일을 앞에 두었다면 기도하여야 하겠다. 기도하고 시작하는 것과 기도 없이 시작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하겠다. 사업, 결혼, 취직, 유학, 군입대, 기타 인생 삶에서 중요한 고비를 이루게 하는 일을 앞두고 기도하자.
2. 예수님은 기도후 다시 산에서 내려 오셨다.
☞ 눅 6: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섰다'는 말에 유념해야 하겠다. 기도한 후에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섰다는 것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자리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군중들 속으로 다시 내려왔다는 말이다. 기도는 세상을 등질 수는 없다. 일터로 내려와야 한다.
3.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 눅 6:18-19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예수님의 기도의 목적은 분명하였다. 그것은 <고난받는 자>들을 위함이었다. 우리의 기도에도 목적이 분명해야 하겠다. 그 목적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들을 위함이어야 하겠다.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던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 본 받아 살려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2 일 1998. 3. 14.
제 목: 풀러스 인생
본 문: 마태복음 25:14-30
오늘의 묵상
한 인생의 삶을 평가할 때 적자 인생(赤字人生)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다.
본인과 가족들에게 빚만 남기고 간 삶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실패한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구별된 능력(재능)을 주었다. 그러나 그 구별된 능력은 차별(差別)이 아니라 똑 같은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 모두 각각 다른 능력을 주었지만 열심히 힘쓰고 애쓰는 만큼 더 배(倍)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 힘쓰고 애씀이 누구 앞에서냐? 가 문제이다. 주인(主人)에 대한 건전한 의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즉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의식이 있을 때 그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게 되고, 그 노력에 대가는 플러스 인생으로 만들어진다.
생명의 말씀
1. 우리는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임된 재능이 다 있다.
☞ 마 25:14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각각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 구별된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하고 애쓰는가가 문제이다. 열심히 나가 장사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노력하는 대로 얻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이 법을 어기며 살 때는 반듯이 적자 인생이 된다. 그러기에 불법으로 얻은 것들은 다 바람처럼 날아간다.
2. 주인을 의식하고 누가 지켜본다는 의식에서 노력하고 힘써야 한다.
☞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저희와 회계할 새..." 주인이 당장 없다고 했어 아무렇게나 지났다면 주인의 것을 다 낭비했을 것이다. 또 주인에 대하여 잘못된 편견을 가졌다면 그렇게 애쓰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달란트 맡은 자는 땅에다 파묻어 버렸다. 그 동안 이 사람은 무엇을 했을까? 주인을 잊어 버린 채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즉 주인을 위하여는 무엇 하나도 남긴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노력하고 애쓰는 자들에게 더욱 더 많이 맡기신다.
☞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있는 자에게서 취하여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지 아니하고 없는 자에게서 빼앗아 있는 자에게 더 주라고 하였다. 이것은 노력하는 자에게, 힘쓰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는 자에게 비하여 더 많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능력(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들이 있어야 하겠다. 그러한 노력을 지켜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도 알아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3 일 1998. 3. 15.
제 목 : 말씀 중심의 생활
본 문 : 시편 119:97-107
오늘의 묵상
파도를 헤치며 물고기를 잡은 갈매기들을 보라!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도 파도를 보지 않고 그 파도 속에 물고기들을 보듯이 우리의 삶의 거친 파도 위에서도 성도는 말씀을 통하여 도리어 삶을 헤쳐 나아간다.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험한 파도가 오히려 믿음과 영적 성장을 가져다주고 더 아름다운 복으로 인도함 받는다. 그래서 고난이 없으면 감사도 없고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 고난 속에 숨겨 있는 말씀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열려야겠다.
생명의 말씀
1. <말씀>은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
☞ 시 119:99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생각하며 살 때 우리가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말씀은 거짓을 깨우치고, 말씀은 죄를 깨우쳐 그 자리에서 오래 머물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이 그 심령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국 죽음의 자리에까지 이르기 전에 돌아서게 한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음으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했다.
2. <말씀>은 우리를 바른 길로 안내한다.
☞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은 밤길을 비춰 주는 등불이다. 말씀은 인생 길의 노정기(路程記)이다. 죄악된 세상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안내판이다. 숫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한다. 과욕(過慾)과 탐심(貪心)의 눈이 어두워 사망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 말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것이 우리의 행복임을 깨닫게 한다.
3. <말씀>은 우리를 소성케(Revive)한다.
☞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말씀은 소성케하는 힘이다. 엘리야도 낙심 중에 말씀으로 소성케함을 입었다.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말씀이 우리를 다시 일으킨다. 절망 중에서도 말씀이 다시 살린다. 말씀이 아니면 죄악 세상을 이길 힘이 없다. 끝까지 의(義)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용기는 말씀의 힘이다. 말씀으로 진리를 지키었고 말씀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말씀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그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늘도 말씀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자.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4 일 1998. 3. 16.
제 목: 「성령을 좇아 행하라」
본 문: 갈라디아서 5:16-26
오늘의 묵상
인간의 마음은 선에도 악에도 속할 수 있다. 파스칼은 그래서 인간은 두 가지의 얼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는 천사의 얼굴이요 다른 하나는 악마의 얼굴이다. 지극히 고상한 마음을 지닐 수도 있고, 지극히 저급한 자리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도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동일하다. 우리 믿는 신앙의 생활에서도 두 마음은 항상 싸운다. 사도 바울도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다. 그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생명의 말씀
1.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였다.
☞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은 기도 중에 우리에게 성령은 말씀하시는데 그대로 행하라는 뜻이다. 소극적으로는 '성령의 감화(感化)감동(感動)을 소멸치 말라'고 하였다.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감동하심이 임한다. 그것을 묵살하지 말고 그 지시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갈등(葛藤)일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쳐서 성령에게 복종시킨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2. 성령의 열매는 그 나타나는 결과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였는지 아닌지는 그 나타나는 결과에서 입증된다. 아무리 말로는 성령을 주장하고 말하지만 그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올바른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우리가 현혹되지 말아야 하겠다. 육체의 열매를 달리면서도 성령을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된 일이다.
3.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들이라야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어 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일을 할 때에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 칭할 수 있다. 큰일이든 적은 일이든 주님께 먼저 아뢰고 묻고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열매로 스스로 간증 거리가 되고 그 간증으로 인하여 더욱 많은 은혜의 역사를 얻게 된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5 일 1998. 3. 17.
제 목: 열매 맺는 가지
본 문: 요한 복음 15:1-8
오늘의 묵상
새봄이 되어 모든 나뭇가지에는 물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연초록 닢이 돋고 다시 녹음이 우거질 여름이 오고 있다. 결국 가지에는 꽃이 피어 열매가 달린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요 법칙이다. 주님은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했다. 가지들은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이 기뻐할 열매들이 달리게 된다. 그러나 가지라고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 버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면 열매 맺는 가지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생명의 말씀
1.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
☞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일상생활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은 <말씀>안에 거하라는 뜻이고, 주님과의 기도의 관계를 의미한다. 매일 성경보고, 매일 기도하는 생활에는 자연히 성령의 역사가 함께할줄 믿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이것은 게으르지 말아야 하겠다.
2.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케 한다.
☞ 요 15:2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가지는 깨끗하게 하고,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가지는 찍어 버린다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구별시키는 일을 날마다 하신다. 죄악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죄악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인간 편에서는 아프고 고통스러운일찌 몰라도 신령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조치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려 해도 못하도록 사전에 막아 주신다.
3. 열매 맺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을 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을 농부로 비유하였다. 농부의 기쁨과 즐거움은 많은 열매를 보는데 있다. 열매를 보는 농부의 즐거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열매를 보면서 기뻐하신다. 부모들이 기뻐하는 것은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볼 때 제일 기뻐한다. 또 그것이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그럴 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였다. 주안에서 다 이루어 주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자가 된다고 하였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6 일 1998. 3. 18.
제 목: 「믿음의 시련」
본 문: 야고보서 1:2-8
오늘의 묵상
요즘처럼 경제적 위기를 만났을 때 딱한 처지에 처한 성도들이 있다. 믿음으로 양심껏 살아온 삶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터를 잃고 준비 없이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때 당황하기 쉽다. 육(肉)을 갖은 인간이기에 격(激)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예배 생활과 성도의 교제에서 멀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 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한 생이 될 것인가? 이러한 때에 자칫 잘못하면 금 보다 더 귀한 믿음까지 잃어버릴 수 있음으로 조심해야 하겠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생명의 말씀
1. 시험을 만날 때에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을 고통으로 여기지말고 시험(試驗)으로 여기면 잘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학생들에게 시험(試驗)을 통하여 저들의 실력(實力)이 향상 되는 것과 같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은 밤잠을 잘 자지 못한다. 초조하다. 불안하다. 그러나 결코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일 시험을 두려워하거나 시험을 앞두고 절망한다면 그것은 학생의 신분은 아니다. 간혹 학생들 중에서도 그것을 감당키 어려워 자살하는 경우도 본다. 얼마나 어리석고 미숙(未熟)한 생각인가?
2. 믿음(信仰)의 시련은 인내(忍耐)를 만들어 낸다고 하였다.
☞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러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였다. 인내를 이루라는 말은 인내할 수밖에 없는 시련을 만났을 때 피하려고 하거나, 두려워 낙심하지 말고 묵묵히 감내(堪耐)해 나가라는 말이다. 그것은 나의 의지력(意志力)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가능하다. 무엇인가 믿을 수 있는 언덕이 있어야 인내하게 되는데, 그 언덕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란 말이다. "내가 산(苦難)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우심이 어디에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서로다"고 하였다.
3.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모든 것에 온전하여 부족함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는 시련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시련이 없었으면 인내할 줄도 모른다. 믿음이 튼튼한 믿음이 되고, 생활이 튼튼한 생활이 되려면 반드시 시련을 통한 인내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을 통과한 믿음에는 어떤 형편에서도 당황치 않고 그때그때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지혜(智慧)와 힘으로 이겨 나아간다. 현재 당하는 시험의 과정들이 있는 분들에게는 그 시험을 통하여 온전히 인내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나가자.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7 일 1998. 3. 19.
제 목: 「요셉의 환난」
본 문: 창세기 37:12-28
오늘의 묵상
성경의 인물중 요셉처럼 환난을 통하여 성공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도 하고, 환난 당한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근거가 된다고도 한다. 요셉의 환난은 오늘 우리 모든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당하는 환난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환난을 당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당한 환난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사람들을 이러한 환난을 통하여 준비하시고 계획하시고 들어 높이 쓰신다. 그렇다면 요셉의 환난은 어떤 환난이었는가?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자.
생명의 말씀
1. 요셉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나섰던 길에서 환난을 당했다.
☞ 창37: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러 가던 요셉이었다. 그런 요셉을 형들은 죽이려고 물 없는 구덩이에 쳐 넣었다가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에게 팔아버렸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오늘도 말씀대로 순종하는 길에서 당하는 환난이 많이 있다. 도리어 세상들처럼 악하게 굴지 못하고 선하게 대하였더니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그렇다.
2. 요셉은 정직하게 일하는 중에서 도리어 억울한 일을 당했다.
☞ 창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한 말이다.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 개인 집의 몸종이 되어서 그 집을 위하여 정직하게, 충실하게 일했다. 그런 때에 도리어 환난이 닥쳤다. 참으로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의 손이 뻗혀왔다. 얼마든지 부정직한 길로 성공을 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이것을 거절했기에 도리어 감옥으로 가야 했다.
3. 요셉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의 할 일에 최선(最善)을 다했다.
☞ 창39:20-21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억울하게 들어간 감옥에서도 요셉은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겨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케 하고 무엇이든지 요셉에게 맡긴 것은 돌아보지 아니했다고 하였다. 전적으로 신임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도 어떤 경우에든지 요셉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8 일 1998. 3. 20.
제 목: 히스기야의 기도
본 문: 열왕기하 20:1-11
오늘의 묵상
사람이 살다 보면 몸에 병이 드는 경우가 있다. 육체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아무튼 병은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병은 우리를 쇠약하게 만들어 낙심케 만든다. 그러나 한편 병을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오게 되고, 병중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하게 기도하게 만든다. 히스기야왕은 병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을 더 살게 하였다. 신앙생활에서 병고(病苦)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서게 된다면 병중에서 들리는 음성을 올바로 들어야 하겠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처럼 우리도 응답 받는 기도가 있기를 바란다.
생명의 말씀
1. 병(病)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 왕하 20:1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예기치 못하게 죽음이 선언되었다. 물론 인간이 죽음에 걸려 있는 존재들이지만 막상 이런 일이 닥칠 때 대부분 당황하고 절망한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 들이기에는 모두가 아쉬운 여한(餘恨)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에게는 이런 때에 우리의 신앙이 값을 발휘하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을 홀로 맞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과 함께 맞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어떤 경우가 찾아와도 주님과 함께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다.
2. 병은 죄(罪) 때문만이 아니다.
☞ 왕하 20: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히스기야왕은 선정(善政)의 실적을 많이 쌓았던 왕이다. 그러나 병이 들었다. 병을 통하여 히스기야왕은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였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했는가! 병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게 만든다. 정말로 왕이 통곡할 정도라면 얼마나 그 간절성이 엿보이는가!
3. 기도의 능력은 약(藥)과 함께 나타나게 된다.
☞ 왕하 20:7 "이사야가 가로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병들었을 때 기도로 낳을 병도 있고 우리의 뜻과는 다른 경우도 있다. 다만 치유케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약(藥)을 쓰면 믿음이 없다고 하는 말은 성경적이 아니다. 기도의 능력은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난다. 약과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약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도 소경을 고칠 때 흙을 이겨 발랐고, 야고보도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였다(약5:14)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19 일 1998. 3. 21.
제 목: 다니엘의 기도 생활
본 문: 다니엘 6:10-28
오늘의 묵상
우리는 환경을 탓할 경우가 많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도는 필수과목이다. 기도할 수 없다는 이유들은 모두 자기 합리화의 변명이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호흡은 아무리 힘든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에도 쉴 수 없다. 힘들면 힘드는 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호흡은 계속된다. 신앙생활에서 기도야말로 쉴 수 없는 일이다. 그 좋은 모범이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도하는 인물로 우리 앞에 모범을 보였다. 그가 어떻게 기도하였기에 우리에게 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생명의 말씀
1.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하루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파사왕 다리오왕은 장관 120명과 그 위에 총리 3명을 임명하여 전국을 다스려 나갔다. 그때 다니엘은 모든 총리들보다 왕의 신임을 받았기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저들이 작당하여 왕 이외에 누구에게나 무슨 신에게 구하는 자들은 사자 굴에 던지기로 법을 제정케 하였다. 이 법에 걸리게 하여 다니엘을 죽이기로 하였다.
2. 기도는 사자의 입도 막아 해치 못하게 하였다.
☞ 단 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사자 굴에 들어갔으나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막았다고 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다. 가장 위급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비상수단으로도 지키신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 있는가? 평소에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3.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 단 6: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찌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이방의 왕의 입에서 하나니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도록 하였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기도는 위기를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고 감사가 되게 한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0 일 1998. 3. 22.
제 목 : 한나의 기도
본 문 : 사무엘상 1:9-18
오늘의 묵상
신앙인에게도 슬픈 마음의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사정들이 마음을 괴롭힌다. 그런가 하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불가항력적인 것들이 있다. 그래서 일평생을 그늘에서 무겁게 지내는 경우들이 있다. 한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잉태할 수 없는 일로 언제나 「마음의 슬픔」을 갖고 살아왔다. 그 슬픔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기도하였다. 그의 절실한 마음의 호소가 이루어져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사무엘 이었다. 그는 서약 한대로 그 아들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 키우도록 하였다. 이것이 한나의 위대한 점이다.
생명의 말씀
1. 한나는 마음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나와서 서원(誓願)기도로 아뢰었다.
☞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렇게 자신의 슬픔을 직접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아뢰었다. 우리에게도 때때로 이러한 서원 기도가 필요하다. 야곱도 도망쳐 가는 길에 노숙 하면서 서원 기도를 하였다. 서원 기도는 그만큼 절박한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도하는 기도이다.
2. 한나는 마음의 원통함을 말로 표현할 길 없어 속으로 기도하였다.
☞ 삼상 1:12-13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너무 슬픔이 크면 소리도 안나온다. 마치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울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내며 운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그런 경우에서도 한나는 들어 눕지 아니하고 속으로 자신의 슬픔을 아뢰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하였다. 얼마나 그 고통이 컸으면 그렇게 기도하였을까!
3. 한나는 기도가 성취되었을 때 서원 한대로 그대로 실행하였다.
☞ 삼상 1:27-28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 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보통 사람들은 구할 때와 응답 받았을 때는 다른 경우가 많다. 구할 때는 매어 달려 서원 기도 하지만 성취된 후에는 그 서원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나는 이점이 달랐다. 그 귀하게 얻은 아들을 자신이 서원 한대로 제사장에게 맡겼다. 그리고 평생토록 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받쳤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1 일 1998. 3. 23.
제 목: 복의 근원이 되리라
본 문: 창세기 12:1-4
오늘의 명상
누구나 복(福) 받기를 원한다.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준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복은 내가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복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복은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몰라 헛된데서 복을 찾으려고 한다. 또 복은 자신의 행위에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은 복(福)의 근원이 되어 그것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복을 받게 되겠는가?
생명의 말씀
1.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따라 나서야 한다.
☞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길, 하나님이 지시한 방법, 하나님이 지시하는 계획으로 순종하고 따라 나서는 것! 그것이 복의 시작이란 것이다. <지시하는 곳> 이란 하나님의 약속으로 기록된 이 성경 말씀이다. 이것을 일컬어 약속의 책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Testament 라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보증서이다. 말씀대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끝이 풍성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2.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이란 약속만 믿고 가는 길이다.
☞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아직도 손안에 잡힌 것이 아니다. 미래적인 동시에 약속일 뿐이다. 약속만을 믿고 가는 길이다. 인간이 발행한 약속 어음도 믿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겠는가! 이것을 못 믿겠다면 복은 다 받게 된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약속한 길인데 이것을 불신한다면 어디에서 복을 누리게 되겠는가? 시37:25절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하였다.
3.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으로 가는 길에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
☞ 창 12:3 "...땅에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순종하는 길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까지 복을 끼칠 수 있다. 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의 가정과 친족들을 구원해 낼 수 있다.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 참으로 귀한 일이다. 그러므로 새벽 제단에 나와 기도하는 이 일이 우리의 후대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줄 믿는다. "나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수천대에 이르러 복을 주리라"고 하였다. 복의 근원이 되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그 복을 나누어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2 일 1998. 3. 24.
제 목: 목자와 양의 관계
본 문: 요한 복음 10:1-18
오늘의 묵상
우리의 영원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는 나의 목자이고 나는 주님의 양이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목자 없는 양! 위태롭기 짝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다윗은 고백하였다.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 목자가 그 이름을 불러내는 양!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도 삶의 계곡에서 목자는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간다. 때때로 위태로운 상황(狀況)이 벌어져도 목자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목자와 같이 하는 양!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의 삶이 한 폭의 그림처럼 채색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명의 말씀
1. 목자는 양의 문(門)지기가 되어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
☞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문지기가 되어 양의 이름을 불러내신다고 했다. 주님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내심을 알아야 한다. 주님 마음에 내 이름이 기억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주님이 만일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 마지막 날 목자 되신 예수님은 양을 구별해 내겠다고 하였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2-33)
2.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앞서가는 그를 따라간다.
☞ 요10: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는 양들! 그 길에서 쉼이 있다. 지금도 마음에 쉼이 없이 걱정, 근심, 불안 속에서 잠못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 고집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주장대로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온 길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이 되자.
3. 목자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고 양을 지킨다.
☞ 요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가 나 같은 것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겠는가? 그것을 생각하면 감격의 눈물이 절로 나온다. 나를 위하여 울어줄 사람이 있어도 행복한데, 나를 위하여 죽어 준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황송한 감격일 뿐이다. 이러한 감격으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천국을 이미 마음에 소유하고 사는 삶이다. 오늘도 찌들고 짜증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주님의 기르는 양들임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승리하는 하루가 되자.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3 일 1998. 3. 25.
제 목: 주님이 기억하실 눈물
본 문: 시편 56:1-13
오늘의 묵상
한평생 살면서 흘리는 눈물은 다양하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을 끝내고 죽는 날까지 우리의 삶은 눈물의 연속이다. 슬퍼서 흘린 눈물, 기가 막혀 흘린 눈물, 고민하면서 흘린 눈물, 불안해서 흘린 눈물, 기뻐서 흘린 눈물, 우리의 흘린 눈물은 다양하다. 그러나 주의 병에 담길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오늘 시편 기자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 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였다. 우리도 이 시간 주님께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주의 병에 담길 눈물은 어떤 눈물일까?
생명의 말씀
1. 원수들의 핍박과 모함 속에서 주를 의지하면서 흘린 눈물이다.
☞ 시56: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우리의 삶 중에서 신앙 문제로 흘린 눈물이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며 흘린 눈물이다. 핍박하는 가족들과 환경 속에서 흘린 눈물이다. 더욱이 말씀에 순종하며 흘린 눈물이다. 이런 눈물은 모두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눈물이다. 욥기 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라고 했다. 조롱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흘린 눈물이다. 시 42: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성경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다.
2. 어려운 환경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흘린 눈물이다.
☞ 시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 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가난과, 질병과, 사별의 슬픔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흘린 눈물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눈물의 바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많은 눈물 중에서도, 그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흘린 눈물이다. 시 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나그네 같이 살다 갈 어려운 환경에서 주님 의지하고 흘린 눈물이다. 이런 눈물은 값진 눈물이다. 영원토록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눈물이다.
3.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내 뜻을 포기하면서 흘린 눈물이다.
☞ 시56: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흘린 것과 같은 눈물이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전적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흘린 눈물이다. 이런 눈물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눈물이다. 시 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라고 했다.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였다'고 하였다. 주님의 뜻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흘린 눈물이다. 이런 눈물에는 반드시 찬송이 따르게 된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그런 기쁨이다. 눈물 속에 찬송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쁨이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4 일 1998. 3. 26.
제 목: 겉사람과 속사람.
본 문: 로마서 7:21-8:11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육(肉)와 영(靈)으로 지었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다. 이 둘이 서로 잘 조화되었을 때 인격(人格)이 형성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본성(本性)이 사탄으로 인하여 타락(墮落)하면서 겉사람(肉體)의 욕망(慾望)을 좇아 살게 되었다. 타락한 본성은 한없는 탐심(貪心)과 다함이 없는 쾌락(快樂)추구를 위하여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들로 전락 시키었다. 신앙이란 이 겉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靈)이 하나님의 본래의 형상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이다.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가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
1. 육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육체만 생각하며 겉사람만 치장한다.
☞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행각 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겉사람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속사람은 영원한 삶을 추구한다. 겉모습만 평생 치장하고 얼굴로만 자랑하던 사람들, 즉 육신의 생각만 하면서 살던 사람들의 끝은 죽음으로 끝난다. 세월과 함께 퇴색되고 정욕과 함께 사라져간다. 결국 유행 따라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된다.
2. 육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
☞ 롬7:22-23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이 이유를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죄가 나로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하였다. 죄의 세력이 육신의 본성을 동원하여 그것을 충족시키도록 유혹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은 바로 이점을 이용하였다. 창3:6 "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본능욕을 동원하였다. 그 본능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도록 한다.
3. 육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육신에 있는 자>란 말은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가 자기 마음대로 타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한 삶이 아버지를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는 것 같이 육신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우리 안에 두 경우가 항상 있게 마련이란 것이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 수 있는 길과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지 못하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의 사람>은 못된다는 말이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5 일 1998. 3. 27.
제 목: 지혜로운 건축자
본 문: 고린도전서 3:10-17
오늘의 묵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의 외모만 보고서 그 집을 잘 지었는지, 혹은 잘못 지었는지를 말하곤 한다. 하지만 집을 건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집의 기초를 어떻게 놓고 건축하였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집이라고 할지라도 기초가 잘못된 집은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기초가 부실하여 무너진 건물들을 많이 보았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집을 지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초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도 무너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인생의 기초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생명의 말씀
1. 우리 인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라야 한다.
☞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가 그 마음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초 없는 건축물과 같다. 언제 무너질지 아무도 모르는 위험한 삶을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기초로 삼고 사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어떤 바람이 불어도, 세상의 물이 넘쳐흘러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온갖 쓰레기들로 메운 기초 위에 아무리 화려한 건물을 지어 겉보기에는 그럴듯해보여도 그런 건물은 넘어짐이 시간문제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터위에 어떤 집을 지어야 하겠는가?
☞ 고전3:12-13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의 터는 다 가지고 있지만, 하지만 그 믿음의 터 위에 어떤 자재를 가지고 짓느냐 하는데는 차이가 드러난다. 불에 타지 않을 것으로 짓는 경우도 있고 불에 모두 타 버릴 것으로 짓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불이 각각 그 공력을 시험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요즘 같은 경제적 위기의 광풍이 몰아닥칠 때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하겠다.
☞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그렇게 몸을 관리하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겠다고 하였다.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을 받으려면 몸을 성전으로 만들어가면 될 것이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6 일 1998. 3. 28.
제 목: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본 문: 이사야 48:1-11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 끝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이스라엘이 패역하고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이 있었어도 그들을 진멸하지는 않고,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렸다. 하도 완악한 마음으로 회개치 않을 때에는 강권적으로 저들을 쳐서 회개토록 유도하였다. 이런 과정에서도 끝내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의 예언과 함께 다시 아픈 상처를 싸매시고 어루만지면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가슴에 안았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향한 간절한 사랑의 회복의 말씀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명의 말씀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비밀스러움을 말하겠다고 하였다.
☞ 사 48:8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이는 네가 궤휼하고 궤휼하여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입은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지금껏 야곱집이라 일컬으면서 명목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산다고 하는 너희에게 내가 이제 비밀스러운 일을 말하겠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장차 나타날 메시아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지금껏 말로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 불리던 내게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2.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노를 참고 있다고 하였다.
☞ 사 48: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패역하고 완악하였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있다고 하였다. 다윗도 시편 23: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들이 비록 범죄하고 완악하고 패역한 일을 하였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명예를 위하여 참고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믿는 사람들게 향한 사랑이다. 우기 다 잘나서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이 참아주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3.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신다고 하였다.
사 48:10-11 "보라! 내가 너를 연단 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감격스러운 말씀이다.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하되 은처럼 하지는 않았다고 하고 거기서 건져내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고난의 역경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결코 방치하지 않으시고, 은처럼 연단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여 내겠다고 하였다. 이것을 믿고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7 일 1998. 3. 29.
제 목 : 야곱을 구원하신 하나님
본 문 : 이사야 44:21-23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엄위(嚴威)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죄를 용납(容納)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慈悲)와 긍휼(矜恤)의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한결 같은 마음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반복 되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따라 나섰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다.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관계를 끊었거나 원수처럼 대하였을 것인데 끝까지 버리지 않고또 권면(勸勉)하고 또 징치(懲治)하고 그래서 돌아오게 하였다.
생명의 말씀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 사 44: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여기 호칭(呼稱)부터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일인의 이름이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다. 즉 야곱기질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은 얍복 나루터에서 밤새 하나님과 씨름하고 얻은 이름이다.(창32:28) 즉 죄된 기질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불러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게 하심을 뜻한다. 이렇게 불러낸 우리를 하나님은 결단코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이미 사면(赦免)했으니 돌아오라고 하였다.
☞ 사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면(赦免)의 선언(宣言)이다. 집나간 아들이 스스로 면구스러워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 허물과 죄를 다 이미 용서하였으니 돌아 오라'고 신문에 광고를 내는 것 같은 말씀이다. 돌아가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제일 큰 죄는 바로 이 아버지의 사랑의 은총(恩寵)을 정면으로 거절(拒絶)하거나 불신(不信)하는 일이다.
3. 하나님은 <야곱>을 구속하여 <이스라엘>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다.
☞ 사 44:23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 찌어다 산(山)들아 삼림(森林)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인가! <야곱>을 구속하였기에 <이스라엘>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첫째 되는 목적이다. 그래서 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함에 있다'고 하였다. 야곱을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8 일 1998. 3. 30.
제 목: 자신이 모르는 죄의 병
본 문: 마태복음 8:1-4
오늘의 묵상
모든 병은 통증이 있어 의사를 찾고 약을 먹으려고 한다. 그러나 문둥병은 통증 없이 자라는 병이다. 암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하고 점점 진전되어 결국 말기에야 느끼게 되고 심한 통증에 시달리다 죽게 된다. 문둥병자는 자신의 아픈 것이나 썩어 가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처럼 죄의 병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다. 죄가 진전되어 결국 사망으로 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
1. 죄의 병은 세상의 어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고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한다.
☞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죄의 병은 감각이 없다. 죄의 병은 자기가 모르게 자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각하다. 개인의 수양이나, 전문지식이나, 높은 권세로도 이 죄의 병을 고칠 수 없다. 오직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주님만이 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은 언제나 우리의 머리를 스치고가지만 죄의 자리에 안주해 있을 수는 없다. 주님 앞에 나아 와 그에게 고백하여야 한다.
2. 죄는 예수님의 손길이 직접 닿을 때 치유 받게 된다.
☞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희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깨끗하여진지라." 손을 댓다는 것은 주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의미한다. 죄의 징치(懲治)의 손길이 우리에 닿아야 죄를 치유(治癒) 받게 된다. 아무리 죄인이 회개한다고 해도 회개케 하는 주의 손길이 직접 와닿기 전에는 인간은 완악해져 할 수 없다. 회개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해야 한다.
3. 죄인이 죄를 치유 받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한다.
☞ 마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죄사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죄 사함의 감격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 많은 죄 사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아 온 집안에 향기를 풍기게 했다. 이것은 죄의 사유함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이다. 우리도 속죄함의 감격을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 생활이 있어야 하겠다. 거기에 복음의 향기는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29 일 1998. 3. 31.
제 목: 새 생명의 발아(發芽)
본 문: 시편 65:6-13
오늘의 묵상
새 봄이 왔다. 봄은 모든 씨앗을 발아시키는 계절이다. 봄은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섭리하는 자연의 질서이다.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이 가고 모든 나뭇가지에는 새 생명의 물줄기가 넘친다. 땅 속에 파묻혔던 씨앗들은 봄비와 함께 축축이 불어나 따스한 봄볕에 그 두꺼운 껍데기를 터치고 발아(發芽)된다. 우리의 속사람의 영이 겉의 육신적인 욕심의 껍데기를 뚫고 새 생명이 흘러 나와야 하겠다. 봄의 계절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
생명의 말씀
1. 하나님께서는 생명(生命)을 발아(發芽)시키는 역사(役事)를 이룬다.
☞ 시 65: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따스한 햇빛으로 얼어붙었던 대지를 녹이고 비를 내리어 말랐던 밭고랑에 물을 대어 씨앗들을 불어나게 하신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새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 마음을 축축하게 하고 말씀의 씨앗을 뿌려 싹이 나게 한다. 우리의 마음 밭을 이러한 계절에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겠다.
2. 하나님께서는 년년히 밭과 들에 풍요로움으로 기름지게 한다.
☞ 시 65:11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땅은 매년 어김없이 씨앗을 발아시켜 수확을 거두게 한다. 들과 산에는 초목이 무성하게 하고 소떼와 양떼들이 풀을 뜯어 기름지게 만든다. 생명을 발아시킬 뿐만 아니라 성장시키고 무성케 만든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을 처음 생기게하여 새 생명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점점 성도의 교제와 봉사 활동을 통하여 성장시켜 풍성하게 만든다.
3.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함으로 기쁨으로 감사하게 한다.
☞ 시 65:13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수확의 기쁨을 주는 하나님이시다. 들에 양떼가 덮이게 하고, 밭에 곡식으로 수확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계절의 교훈을 통하여 깨달아야 하겠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자연의 은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것을 망각하고 불평불만속에서 나날을 보내기 쉽다. 이제 새봄과 함께 우리의 영이 새생명으로 발아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였다.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었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0 일 1998. 4. 1.
제 목: 순종하는 믿음
본 문: 누가복음 4:16-30
오늘의 묵상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가지가지이다. 의심하면서 믿는 경우, 불평하면서 믿는 경우, 걱정 근심하면서 믿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순종하면서 감사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주님께서 친히 지적한 두 사람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될 대표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는 사렙다 과부의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믿음이다. 이 두 사람은 퍽 대조적인 신분이었다. 하나는 힘없는 가난한 과부이었고, 다른 하나는 힘있는 군대의 장관이었다. 저들이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예수님께서 대표적인 인물로 지적하였을까?
생명의 말씀
1.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보는 편견을 고치도록 지적하였다.
☞ 눅 4: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였다. 인간적 신분으로만 대하려고 하였다. 저가 정말 가버나움에서 행하였다는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일까? 하고 그런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면서 속담을 인용하여 '의원아 너를 고치라'고 한다고 지적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인간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 소위 '역사적 예수'만 보면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2. 사렙다 과부에게서 일사각오의 순종하는 믿음을 배워야 하겠다.
☞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사렙다 과부에게로 엘리야를 인도했겠는가? 그의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가루를 하나님께 바치었다. 이것이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일 뿐이었다.
3. 수리아 나아만에게서 신분을 초월한 겸손의 믿음을 배워야 하겠다.
☞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나아만도 처음에는 자존심을 내세워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 나와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 일곱번 목욕하라는 말에 기분이 상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권유를 듣고 신분을 초월하여 순종하였다. 오늘도 자존심과 함께 믿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에 손상을 입으면 불평하고 욕하고 돌아선다.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은 모든 예배 행위보다 낫다고 말씀하였다. 무엇으로 높아졌든지 우리의 높아진 자존심들을 버리고 겸손해져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1 일 1998. 4. 2.
제 목: 메시아를 만난 여인
본 문: 요한복음 4:3-26
오늘의 묵상
가슴에 멍이든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인생의 깊은 질곡(桎梏)에서 사람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소외된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주님은 만나진다. 수가성에 살던 이 여인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피하여 정오(正午)에 우물에서 물을 길러 왔다가 주님을 만났다. 처음에는 지나치는 유대의 한 남자로만 알았지만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가 메시아인 것을 깨닫고 물동이를 놓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으니 와 보라!'고 외쳤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전하여야 하겠다.
생명의 말씀
1. 이 여인은 가슴에 멍이든 체 살아가던 한(恨) 많은 여자였다.
☞ 요4:9 "당신은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처음에는 마음을 닫고 말했다. 사마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면서 살았다. 그 중에서도 이 여인은 또 자기들 동네 사람에게서도 소외당하며 살았다. 그것은 그의 사생활에서 잘 드러났다. 이미 5번의 결혼 경력을 가졌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와는 동거 중에 있었을 뿐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누구도 그와 마주치려 하지 않았기에 그 자신도 이웃과 벽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한편 메시아에 대한 소식은 듣고 그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여인이 우연히 물 길러 왔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2. 주님은 이런 여자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여자는 이 세상의 온갖 갈증을 다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의 모형이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가며 살아 보았으나 그런데서 만족은 없었다. ①돈, ②명예, ③권세, ④성공, ⑤쾌락을 추구해 보았으나 여전히 갈증은 남았다. 이것이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 것은 순간적일 뿐, 영혼 깊은 곳에서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겉으로는 '내가 뭐 어때?' 할는지 모르나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는 고독하다.
3. 여인의 심안(心眼)이 열렸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예배(禮拜)이었다.
☞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누구나 내면 세계의 눈이 열리면 예배가 먼저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인간의 본능적 갈구(渴求)이기 때문이다. 다 죄(罪)가운데서 살고 있기에 하나님께 예배 생활을 멀리하였을 뿐이지 사람에게는 누구나 예배에 대한 본능적 요구가 다 있다. 예배드리며 사는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새삼 느껴야 하겠다. 예배를 묻어 둔 채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오늘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주님은 만나 주신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기쁨으로 뛰어 가는 이 여인을 보라! 이것이 복음의 환희(歡喜)이다. 이것이 진정 인생의 기쁨이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2 일 1998. 4. 3.
제 목: 영적 불구자들의 치유
본 문: 마태복음 15:29-31
오늘의 묵상
주님은 자기에게 나아 오는 모든 「불구자」들을 고쳐 주었다. 절뚝발이, 소경, 벙어리, 기타 불구자들을 다∼고쳐 주었다. 그 결과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하였다. 부활절을 앞두고 우리들의 영적 불구들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 와야 하겠다. 아직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적 귀가 열리지 못하고, 말씀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불구적 신앙을 치유 받도록 주 앞에 간구하여야 하겠다.
생명의 말씀
1. 주님께 절뚝발이들이 나와서 고침을 받고 온전하게 걸었다.
☞ 마15: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절뚝발이의 걸음은 균형을 잃은 불구를 의미한다. 신앙의 발걸음이 일정치 못한 것을 의미한다. 예배 출석이 일정치 못함을 의미한다. 봉사 생활에서 기분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생활에 굴곡이 심함을 의미한다. 한평생 몇 번씩이나 교회를 등지고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옴을 의미한다. 이런 절뚝발이도 주님께서 고쳐주어 정상적인 걸음을 걷게 하였다.
2. 주님께 소경과 벙어리들이 나와서 고침을 받고 보고 말하게 되었다.
☞ 마15: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영적으로 소경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함을 의미하고, 벙어리는 남들 앞에 전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무리들 틈에 소경과 벙어리들이 끼어 나왔던 것처럼 진리를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서 오늘까지 믿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교회에 왔다 갔다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앙의 불구들이 이번 기회에 치유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자. '내 눈을 밝혀 진리를 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다.
3. 그밖에 각색 불구자들이 다 주님께 나와서 고침을 받았다.
☞ 마15:30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기타 각종 불구자들이 다 나와 고침을 받았다는 말이다. 기타 불구자들이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병일 수도 있다. 남들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이 불구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체의 어떤 부분이든지 그 기능이 정상적이 못되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숨겨진 불구자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여러 불구자들도 주님께서 고쳐 주었다. 이번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통하여 이런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기적적으로 나타남을 확신해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3 일 1998. 4. 4.
제 목: 다시 찾은 예수
본 문: 누가복음 2:41-51
오늘의 묵상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모들이 유월절에 참석하였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에 예수를 길에서 잃어버린 내용이다. 가장 가까이 함께 해야 할 부모들이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아들을 잃어 버린 꼴이 되었다. 그래서 사흘 길을 걸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다.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 신앙생활에서 타성(惰性)이 생길 수 있다. 반복되는 예배, 자주 듣는 설교, 이미 알고 있는 성경 지식, 이런 것들로 인하여 타성이 생겨 처음 믿을 때의 감격과 열심이 사라져 갈 수 있다.
생명의 말씀
1. 부모들은 예수가 저희들과 함께 동행(同行)하는 줄만 알았다.
☞ 눅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갔기에 아이가 함께 오는지도 몰랐을까? 오늘도 예수를 잃어버린 크리스천들이 많다. 자기가 가는 길에 주님이 동행하고 있으려니 착각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을지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예배 참석, 교회 절기행사에 참예하면서, 무감각하게 지키면서 정작 함께 해야 할 예수는 잃어버리고 따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2. 부모들은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예수를 찾으려고 했다.
☞ 눅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이것이 문제이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는 것은 믿음의 타성(惰性)을 의미한다. 으레히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줄 알지만 온통 관심은 인간사(人間事)에 관한 것들뿐이다. 하룻길을 간 후에 비로소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물어 찾으려고 했다. 잃어버린 예수를 사람들에게서 찾으려고 했다는 말이다. 오늘도 이런 경우가 많다. 시험 들어 잃어버린 예수를 교인들(사람들)에서 찾으려고 한다. 거기서는 찾을 길이 없다.
3. 부모들은 성전에서 말씀으로 묻고 답하는 예수를 다시 만났다.
☞ 눅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결국 사람들 중에서는 못 찾았고 성전에서 말씀을 주고받고 있는 주님을 다시 만났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다. 세상 사람들의 지식, 학문, 그들의 말에서 아무리 진리(예수)를 찾으려 해도 만날 수 없다. 그런 곳에서는 빈, 텅∼빈 허무감만 느낄 뿐이다.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영원한 말씀 안에서만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4 일 1998. 4. 5.
제 목 : 예루살렘 입성(入城)
본 문 : 마태복음 21:1-11
오늘의 묵상
드디어 우리 주님은 기다리던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하지만 당시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처럼 기다리던 메시아였지만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었건만 정작 저들 눈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만왕의 왕이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입성(入城)하였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개선 장군들에 비하면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으며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임(臨)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슥9:9)
생명의 말씀
1. 벳바게 동네의 나귀 주인은 주님께서 쓰시도록 말없이 허락하였다.
☞ 마21:2-3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이 말에 자기의 나귀를 내어 놓았던 사람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신앙이 있어야 하겠는데.... 얼마나 이기적이 되었는가. 현대의 물질 만능의 사상에 젖어서 우리는 인색해질 대로 인색해 졌는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 서울에 주님이 나타나 교회에 나가는 누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과연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자신의 나귀(차)를 선듯 내어 줄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한번쯤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이 주인은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이유 없이 허락하였다.
2. 「만 왕의 왕」(King of the kings)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였다.
☞ 마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참으로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다. 특히 오늘의 우리들 스스로가 겸손을 말로만 했지 행동화, 생활화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 아닌가. 오늘의 높아지기 좋아하는 크리스천들이 깊이깊이 반성해 보아야 될 일이다. 웅장한 팡파르를 울리며 붉은 카페트 위를 준마(駿馬)를 타고 입성하는 로마의 개선 장군(凱旋將軍)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한편 붉은 카펫 대신 제자들의 땀내 나고 더러워진 겉옷을 깔고 준마 대신 새끼 딸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우리 주님을 상상해 보라! 무엇을 느끼는가?
3. 하지만 그의 입성(入城)은 모든 성중의 사람들을 놀래게 하여 소동케 하였다.
☞ 마21:10-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온 성이 소동하였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했지만 가장 요란한 반응을 일으켰다. 높은 권력자들의 강제로 동원된 무리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중들의 함성이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외쳤다. 참된 권위는 무력의 힘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의 힘이다.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입성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도대체 인간의 성공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어떤 성공을 원하여 그렇게들 애쓰고 노력하고 원망하고 걱정하는가?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5 일 1998. 4. 6.
제 목: 성전을 청켤케 하신 예수(월)
본 문: 마태복음 21:12-17
오늘의 묵상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한일은 성전을 청켤케한 일이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면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으며 저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로 낙인이 찍혔다. 이 일 후부터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음모를 꾸미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옛날이나 현재에도 자신들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서 남을 증오하게도 되고 헐뜯게 된다.
생명의 말씀
1. 여기서 우리는 온유하신 주님의 의분(義憤)을 보게 된다.
☞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어디에서 이런 용감한 행동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말로 타일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종교가 타락하면 범죄의 집단이 되듯이 사람의 믿음이 타락하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심하게 된다. 거룩한 곳에서 장사의 소굴을 만들었다. 기도해야 할 자리에서 팔고 사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냐?
2.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에서 그리스도 오심의 본분(本分)을 볼 수 있다.
☞ 마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성전을 일컬어 '내 집'이라고 하였다. 내 집이란 말에서 성전의 본질적 개념을 깨닫게 된다. 성전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곳이 아니다. 이해관계에서 교회에 나와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교회를 이용하여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바울은 믿는 성도들의 마음을 성전(聖殿)이라고 하였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영(靈)을 모신 성전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의 성전이 세상의 온갖 이권과 이해관계로 오염되었으면 이것을 청결케 해야 하겠다.
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일로 분(憤)히 여겨 충돌하게 되었다.
☞ 마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와 직접 충돌하게 되었다.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치는 것과 아이들이 소리질러 '호산나'하는 소리를 듣고는 분이 가득차 직접 충돌하였다. 말씀은 진리이기에 거짓과 불의는 자연히 충돌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직과 진실은 도리어 어둠의 세력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미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런 것에서 오는 고통은 주님이 이미 십자가로 승리하였기에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6 일 1998. 4. 7.
제 목: 대제사장과 장로들과의 변론
본 문: 마태복음 21:23-46
오늘의 묵상
성전을 청결케 한 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께 힐책하는 변론을 주고받았다. '네가 무슨 권위(權威)로 이런 일을 했느냐?'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고 힐문(詰問)하였다. 이 물음에 예수님도 똑 같이 저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너희에게 대답하리라고 하면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물음에 저들이 대답을 못했다. 왜냐하면 하늘로서라고 하면 왜 저를 믿지 않았느냐고 책잡힐 것이고, 사람에게로서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데 백성을 두려워함이었다. 주님도 저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생명의 말씀
1. 「직분 자들」이 <말씀>에서 멀어지면 세속적 권위만 내세우게 된다.
☞ 마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누구의 허락을 받고 말씀을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격을 누가 주었느냐는 말이다. 교권(敎權)의 출처를 대라는 것이다. 종교가 타락하면 세속적 욕망으로 눈이 어두워진다는 말처럼 직분 맡은자들이 말씀에서 멀어지면 교회의 직분을 인간적인 권위로만 생각하기 쉽다. 섬기며 봉사하는 자세에서보다 가르치며 명령하는 권위주의로 빠지기 쉽다.
2. 하나님 나라는 직분(職分)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는 자들이 들어간다.
☞ 마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끝내 뉘우치지 않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 회개(悔改)하는 자들에게는 과거의 죄를 묻지 아니하신다.
☞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신분적 지위만 내세우며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신앙의 순종이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다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믿는다는 칭함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 깊이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말씀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고 있는가? 죄(罪)가운데 여전히 빠져 그것을 회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는 아닌가? 이번 기회에 주님 앞에 모든 죄들을 자복하고 뉘우치고 회개해야 하겠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7 일 1998. 4. 8.
제 목: 수난을 맞을 마음의 준비 (수)
본 문: 마태복음 23:1-39
오늘의 묵상
오늘은 주님께서 조용히 쉬시면서 수난과 죽음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신 날이다. 수요일은 쉬신고로 아무 기록이 없는 날이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은 주님을 죽일 모의(謀議)를 계속하였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헤롯당파들이 다 예수를 죽이자는 데는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러므로 어떻게서든 예수를 책잡으려고 시험하였다. 옛날부터 수요일은 가롯유다의 배신을 기억하고, 회개와 금식의 날로 지키었다. 수요일은 침묵의 날이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누룩(僞善)에 관하여 경고하였다.
생명의 말씀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
☞ 마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왜냐하면 저들은 말만 할뿐, 자기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입술로 믿는 신앙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저들의 행위는 모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뿐, 외식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섬기는 자세가 없이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가르쳤다.
2. '화 있을찐저'라고 책망을 받은 대상은 누구인가?
☞ 마23:13, 15, 16, 23, 25, 27, 29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모두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외식(外飾)>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했다. 저들은 예수님 당시 모두 선생(先生)들이었고 지도층들이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고 모두 종교 행위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바를 행치 않는 자들이었다. 겉으로 사람 앞에서만 행하는 척 하였다. 이중적 생활자들이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화(禍)를 선언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진실함이다. 죄를 지었으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외식하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다.
3. 땅 위에 흘린 의인의 피 값을 그 세대에서 치러야 한다.
☞ 마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의인의 피 값은 반드시 그 세대에서 치르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죄값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회개하라는 것이다.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는 그만큼 죄의 값을 치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교훈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에 문제라기보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 큰 문제란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8 일 1998. 4. 9.
제 목: 십자가를 앞에 둔 전날 (목)
본 문: 마태복음 26:36-46
오늘의 묵상
오늘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하루 앞둔 전날이다. 제자들과 이 땅위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눈 날이다. 저들의 발을 씻기시며 유월절 만찬과 최후의 교훈을 하였다. <새 계명>을 주었고 <나를 기념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동산으로 들어가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날 자정을 기해 배신자 가롯 유다의 신호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심문을 서둘러 끝내고 빌라도에게 끌고가 십자가에 못 박도록 군중들을 동원하여 압력을 넣었다.
생명의 말씀
1. 주님도 육신을 입었기에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였다.
☞ 마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육신을 입은 인간적 모습을 보게 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였을까!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 선 순간 편할리 없다. 물론 우리 주님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 앞에서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의 대속의 메시야직을 수행함에서 오는 고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어 죄인들에게 심문을 당하고 죽어야 하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바로 그런 고민이었다.
2.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지(眞摯)함과 간절(懇切)함을 볼 수 있다.
☞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한 모습인가!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주님과 같이 진지한 자세로 기도한 적이 얼마나 될까? 아직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 보다 세상의 줄, 세상의 언덕을 더 의지하고 있기에 이러한 간절성과 진지함이 없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렌즈의 초점이 맞아야 불길은 타오른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더욱 더 진지한 기도를 하도록 힘쓰자.
3.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였다.
☞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님의 마지막 권고의 말씀이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다. 기도 없으면 시험에 들기 쉽다는 뜻이다. 기도는 최후의 무기이다. 그 기도를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였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 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길도 누구와 함께 가느냐에 따라 먼길도 가깝게 느껴진다. 사업도, 사는 것도,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는 사람! 복된 사람이다. 십자가(고난)를 앞에 두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자. 거기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39 일 1998. 4. 10.
제 목: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본 문: 마태복은 27:1-66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다. 죄 없는 몸이 죄인들에게 끌려 심문을 받고 죄인으로 낚인 찍혀 가장 잔인스러운 로마의 십자가 형틀에 달렸다. 죄 없는 몸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에 이제 저 십자가는 형틀이 아니라 '용서'와 '희생'과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도 십자가의 용서가 있었기에 죽을 죄인들이 살 수 있게 되었고,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힘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긍휼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십자가의 사랑이 있었기에 숭고하고 거룩한 존경스러운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생명의 말씀
1.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고소한 자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 마27:1-2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 마27:12-1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을 고소했던 자들은 당시에 죄인들이라고 칭하는 세리나 창기들이 아니라 거룩하다고 하며 믿음이 좋다고 하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다. 이것이 오늘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현재도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게 하는 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 사람이 아닌가?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일은 없었는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겠다.
2. 주님을 죄 없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못박게 한 빌라도를 생각하게 한다.
☞ 마27:17-18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 마27: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뻔히 죄 없는 주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하여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오늘도 빌라도의 행동을 우리가 반복하여 한 적은 없지 않는지?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포기한 적은 없지 않는지? 아니 지금도 그런 일에 손을 씻고 있는 일은 없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3. 주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 마27:55-56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 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예수와 함께 죽겠다던 베드로는 어디로 갔는가? 그래도 가장 연약한 여자들이 멀리서나마 예수님의 운명을 지켜보았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 나의 이름은 어디에 나올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이렇게 주님은 오늘 십자가에서 속죄의 사역을 완성하였다.
사순절 특별 새벽 기도회
제 40 일 1998. 4. 11.
제 목: 무덤에 장사 지냄
본 문: 마가복음 15:42-47 (참조: 요19:38-42, 마27:57-61, 눅23:50-56)
오늘의 묵상
오늘은 주님께서 무덤에 계시던 날이다. 고난 주간이 끝난다. 사순절 최후의 날이다. 악의 세력이 승리한 것 같이 느껴지는 날이다. 여기에 비탄의 부르짖음이 있게 된다. 선지자들은 "왜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잠잠히 보고만 계시는가?"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합1:13) 오늘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질문은 계속된다. '정말 하나님은 정의로 세계를 다스리고 계신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은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승리하는 것 같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에서 몇가지 교훈을 찾게 된다.
생명의 말씀
1. 주님은 비천한 죄인처럼 죽었으나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마태복음에는 아리마데 요셉을 부자라고 하였다. 부(富)와 권세(權勢)가 있던 당시 상류층(上流層)이었다. 그래서 직접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요청할 수 있었다. 주님은 비천한 죄인으로 죽었으나, 존귀한 부자의 무덤에 장사지냄을 받았다. 이것은 벌써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된 말씀의 응답이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9) 여기에서 그의 죽음이 경배의 대상이 됨을 볼 수 있다.
2.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님과 함께 돕는 손길들이 따르게 된다.
☞ 요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선생이라고 하였다. 그도 주님의 죽음 앞에서 최고의 경배를 돌렸다. 값비싼 향유를 100근씩이나 가져다가 정성된 마음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길에서는 이렇게 돕는 손길들이 나타남을 깨달아야 하겠다. 반드시 죽을 자리에서도 돕는 손길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겠다.
3. 죄의 세력은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지만 무덤이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다.
☞ 마28:1-4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참으로 감격적인 장면이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천사들로 인하여 굴려졌다. 이것은 도저히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진행되었다. 다시 살려내신 것은 하나님의 영역의 세계이다. 인간의 죄의 세력은 죽음으로 승리한 줄 알았지만 그 죽음을 이기게 한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주님 따르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있을 수 없다. 승리! 승리! 승리! 뿐이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님과 함께 선한 싸움 다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