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 화단에 심겨진 배롱나무 한 쌍을 유심히 지켜본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다. 꽃잎이 화사하거니와 한여름 비바람이나 뙤약볕에서도 본성을 잃지 않아. 여름 지나 초가을까지 꽃봉오리를 무수히 내며 꽃을 피워 올리는 그 끈기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잎사귀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디붉은 정열을 볼 때마다 질투가 느껴지곤 했다. 여자들을 꽃에 비유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꽃을 피우되 서릿발 같은 절개가 있고 벌이 날아들어도 꽃잎을 쉽게 열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청 화단에 선택된 두 그루의 운명! 한 시 한 날 ‘아름다운 정원’을 꿈꿨다. 그런데 동쪽에 심겨진 것은 슬픔의 켜가 너무나 두꺼운가? 나무껍질이 벗겨져나가고 표면이 매끄럽지 않을뿐더러 잎사귀마저 말려들어간 것까지 있다. 군데군데 진딧물까지 껴안고 살다보니 꽃봉오리가 소담스럽지 않을뿐더러 꽃도 늦게 올라오고 지는 것은 되레 빨랐다. 반대편 것은 풍채가 좋아 마치 어린아이들이 둥그렇게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슬픈 전설의 노래는 16~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원교육청 청사가 낡고 비좁아 1991년도에 현 위치로 신축 이전하면서 청사 양쪽에 화단을 만들었다. 동쪽으로 전산실을 배치하였다. 세상 만물은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에 의해 선택되어질 수밖에 없는가. 동쪽에 심겨진 배롱나무는 그때부터 뒤틀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자신의 힘으론 어쩌지 못하는 처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24시간 가동되는 전산실 냉ㆍ난방 기기의 기계음과 열기에 시달려야 했다. 제 몸 어찌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고스란히 몸을 내주었다. 앞으로도 누군가에 의해 옮겨 심어지지 않는 한 참지 못할 고통의 날은 이어질 것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다루며 일하는 직장인들도 수많은 직업병을 얻는데 나무라고 다를까. 전자파를 오래 쪼이면 시력의 저하를 부르고 목 근육 통증이 온다. 불임(不姙)을 겪는 사람도 있다. 환경생태계가 파괴되면서 오는 부작용이 너무도 많다. 사과 주산지로 유명한 충주에서는 도로가에 상징적으로 사과나무를 심었지만 차량 소음공해로 인해 열매의 크기나 당도가 제 밭에 있을 때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 텃밭에 심어놓은 들깨도 가로등 불빛의 영향으로 밤ㆍ낮을 혼동하다보니 생육의 리듬이 깨져 웃자라며 열매를 맺더라도 실하지 않다고 한다. 환경이 뒤바뀌는데서 오는 부작용이다. 골프장 주변의 논도 벼농사가 되지 않는다 하고 여러 곳에서 연일 농작물 피해를 호소하는 소리를 듣는다.
운명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가는 길이 결정되어지고 정해진 길을 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사(人間事)는 어느 정도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노인네들이 자식들을 키워놓고 이제 편안할 것 같으면 세상을 뜨지 않는가. 그렇게 죽을 고생하였으면 자식 어루만지며 누릴 일만 남았는데 복(福)을 놓고들 간다. 좋은 세상에서 어깨 펼 일만 남았는데 왜 그리들 서두르는지. 생명의 실을 뽑아내고 생애를 마음대로 조종하며 생명의 실을 끊는 3명의 여신(女神)이 있다고 헤시오도스가 이미 말했다. 삶의 깃발을 꽂고 살아가는 궤적에 스스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자 얼마나 될까? 죽음과 절망과 한계 상황에서도 운명은 개척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동쪽 화단에 심겨진 배롱나무마냥 자신의 삶을 어찌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가슴 속에는 늘 응어리진 걱정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섹스피어의 희곡 속에 나오는 햄릿의 너무나 유명한 독백! 햄릿은 숙부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부도덕한 세계에 맞서 복수를 감행하지 못하고 결국 독화살에 찔려 자신의 운명을 파멸로 이끈다. 숙부 예종이 승하하고 조선의 제9대 임금에 오른 성종(成宗). 그도 감히 예종의 외아들 제안대군과 기세등등하던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마저 밀어내고 왕이 될 줄은 몰랐다. 남다른 능력을 지녔음에도 신분상승을 하지 못하고 초로(草露)보다 못한 삶을 살았던 시인묵객들의 외침이 메아리로 들려온다. 허균의 스승인 문장가 손곡 이달도 서얼출신이라 재주를 부리지도 못하고 음풍농월하며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특출한 용모에 시(詩)ㆍ서(書)ㆍ음률(音律)이 뛰어나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었던 황진이는 중종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기에 기고한 삶을 살아야 했다. 2000년도에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KBS 2TV 드라마 ‘가을 동화’는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부터 운명이 뒤바뀐 남매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냈다. 극에서는 주인공 ’송혜교‘가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죽음을 맞이하지만 공교롭게도 현실에서는 그때의 아역 출신들의 운명이 뒤바뀌고 말았다. 문근영이 국민 여배우로 잘 나가는 것과는 달리 ‘한채영’ 의 아역으로 출연했던 이애정은 2007년 10월에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숨을 거두고 만다. 너무나 아이러니컬하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선택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저울질하고 진행되는 일을 중단할까 계속할까 갈등하며 번뇌한다. 처한 환경에서 늘 괴로워하며 빠져나갈 수 없는 무저항의 상황에서 울기도 한다. 생명의 존귀함 때문에 견디는 것이고 처한 처지에서 촛불을 밝힐 불꽃같은 희망이 있기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패를 반복하는 시간에 그냥 얹혀 있는 것이다.
옛날 어느 어촌에 목이 세 개 달린 이무기가 나타나 매년 처녀 한 명씩을 제물로 받아갔다. 그때 한 장사가 제물로 선정된 처녀대신 옷을 갈아입고 제단에 앉아 이무기를 없앨 작정을 한다. 장사가 칼로 이무기의 목 두개를 베자, 처녀는 기뻐하며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죽을 때까지 당신을 모시겠다.” 했지만 장수는 청을 사양하며 이무기의 남은 목을 마저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성공하면 흰 깃발을 달고, 내가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 것이다."라고. 처녀는 지극정성을 다하여 백일기도를 드렸지만 붉은 깃발이 걸린 것을 보고 그만 자결하고 말았다. 사실 이무기가 죽어가면서 뿜은 피가 깃발에 묻어 붉어진 것인데 장사가 죽은 줄로 안 것이다. 배롱나무의 전설은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