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회 찾아가는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허소미
철쭉꽃이 한창 흐드러지고 가로수 은행나무 잎파리가 애송이의 턱수염처럼 두둑 돋아나던 4월 27일에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기행에는 문학춘추 박형철 발행인과 손광은 교수, 그리고 장정식 수필가, 문학춘추작가회의 회원 등 58명이 참석하였다. 노남진 회장과 임원진들이 정성껏 준비한 자료와 주전부리를 받아들고 광주 문화의 전당 남쪽 버스정류장에서 오전 8시에 천사고속버스를 타고 기행에 나섰다가 오후 6시에 돌아왔다.
이번 문학기행의 취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인물들의 행적과 작품들을 직접 보고 들음으로서 작금의 문학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혹자에 따라서는 꼭 무슨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하느냐는 말도 있겠지만.
아는 만큼 본다고 하지 않던가. 보는 만큼 안다는 말도 있지만,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접하고 기행에 나서는 것이 잘 듣고 보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차창으로 스치는 연한 풀빛의 단풍이 어우러지는 산과 들에 눈을 두다가 한 시간 여쯤에 도착한 곳이 보성군립 <백민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은 1992년 주암댐 건설로 폐교가 된 문덕초등학교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으로 기와지붕에 자색의 벽돌로 지어졌는데, 건물의 외관은 매우 심플했다. 백민은 스승인 오지호 화백이 제자인 조규일 화가에게 지어준 호로 그 뜻은 '백제의 백성'이란 뜻이다. 이 미술관은 국내관, 국제관, 백민관, 자료실 등으로 이루어져 백민 선생 작품 뿐 아니라 유수한 국내외 화가의 작품도 접할 수 있다. 백민관에는 백민 조규일 화가의 회화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남도 구상주의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는 조규일의 작품 앞에서 남도 구상주의를 생각한다. 백민 선생의 스승인 오지호는 평소에 '자연을 그대로 사실하는 것은 예술적 의미가 없다고 했다. 자연을 단순화하고 왜곡. 변형 데포르메(어떤 대상의 형태가 달라지는 일)시켜 자연과 또 다른 세계를 추구했을 때 이룬 순수한 예술의 극치인 가장 좋은 화풍이다'에서 우리는 남도 구상주의가 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윤곽이 뚜렷한 고전주의 그림이나, 사실주의보다는 뭔가 생략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색채들의 풍성함을 본다, 백민 선생의 아들이면서 미술관장인 조 현 선생의 주석을 들으면서, 그림을 구경하다가 조규일 화가가 말기에 이르러 더 화려한 색채들의 그림을 즐겨 그렸다는 말을 들으며 '추광 2'의 작품 앞에 선다. 타는 듯 한 단풍의 색채감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고 순수미마저 느낄 수 있다. 백민의 그림은 구도 보다 색채가 다채롭다는 생각이 든다. 큐비즘의 입체파 작가인 마티스의 붉은 색감을 연상한다. 이 미술관은 기증 받은 작품들을 잘 보관 전시하기 위하여 자연채광을 하며 자연 채광 가운데 색을 바래게 하는 요인인 자외선은 막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백민 화가의 피가 뚝뚝 듣는 듯 한 선홍빛 색채의 싱싱함을 다시 바라본다. 그런 정성이 없고서야 어떻게 화가의 미술작품을 상설 보관 전시할 수 있겠는가.
승차를 하여 이동한 곳은 <서재필 기념공원>이다. 노오란 유채꽃이 피어 반기는 가운데 독립문이 먼저 보인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과 같은 규모의 크기다. 서울 서대문 공원에 있는 독립문은 프랑스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파리의 개선문을 본 떠 세웠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했던 틈바구니에서, 그 당시 조선백성들의 조국 근대화와 자주독립에의 열망은 그 어느때보다 드높았을 것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에서 지금의 독립문 자리에 있던, 영은문에서 고자세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조선신하들을 묘사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에 앞서 청국으로부터 독립을 시키는 등의 치밀한 전략을 취하였다는 건 다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서재필 기념회관>에 들어서니 김종채 이사장이 기다리렸다가 서재필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조선 말기 19세기중에 태어나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분이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윤치효 등 개화파들과 교류를 하고 개화파 일원으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단기교육을 받고 돌아와서 그가 조정에 건의한 세 가지 조목들은 문호의 개방과 능력에 따른 등용, 만인 평등 등이다. 이것은 나중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1884)의 원인이 되고 서재필이 미국으로 망명까지 하는 빌미가 된다. 미국에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고 워싱턴 시티에서 서재필은 그 지역의 유명인사가 된다. 나중에 미군정 시절에 고문으로 와서 우리나라 건국에 끼친 지대한 공로로 1977년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서재필을 다시 본다. 다시 본다는 건 우리의 역사에 대해 새롭게 인식을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도미하였다가 일시 귀국하여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만들어 90프로 이상의 농민들도 읽을 수 있게 만들었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독립문을 세운 그다. 그런 그인데 노나라에서 공자가 대접을 못 받듯 우리나라에서 서재필도 그렇다면서 워싱턴시티에 서재필의 날이 열렸고 동양인 중 유일하게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는 말을 곁들인다.
점심에 앞서 보성문협에서 준비한 오리로스와 김기찬 계심헌 미술관장이 낸 막걸리, 그리고 임원진들이 준비한 삼합과 따끈한 전 등으로 <고향 맛집>이란 식당 한 켠에서 간식의 시간을 가졌다. -간식이 아니라 금방 부친 따끈따끈한 전과 불판에서 구워지는 오리로스등으로 간식을 먹고, 근처 소나무 숲으로 자리를 옮겨 장정식 수필가의 문학강연을 들었다.
'구전가요. 이제 세상에 나와 산책로가 된 부용산 오리길‘이라는 제목의 강연은 시작되었다.
목포에 '목포의 눈물' 이 있다면 보성에는 '부용산'이 있다면서 운을 뗀 후, 그는 어려서 구전가요인줄만 알고 '부용산'울 줄줄 외우고 다녔다고 하면서, 자기는 수필을 쓰지만 시도 좋아해서 수필은 양지에서 쓰고 시는 음지에서 쓴다고 한다. 몇 번이고 책상 속에 넣어놓고 퇴고를 하지만 미진한 감이 있어, 선뜻 시라고 내놓지 못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시의 이론적 배경은 김현승 시인에게 있다고 한다. 김현승 시인의 '자네는 시보다 산문이 더 승하다'는 말을 듣고 지금 수필가로 활동 중이라고 하였다. '부용산'을 쓴 박기동 시인은 여수에서 태어나 줄곧 벌교에서 살았으며, 폐결핵으로 죽은 누이를 그리기위하여 지은 '제망매가'다. 이 시를 박기동 시인이, 목포 항도여중(현 목표여고) 교사시절 같이 근무하던 동료 교사인 안성현이 작곡을 하였다. 안성현은 그때 폐결핵으로 죽은 그 학교의 천재소녀 김정희의 죽음에 박기동의 이 시에 가락을 붙였다. 이 곡을 배금순이라는 상급생이 불렀고 그 노래는 학교 담장을 넘어, 전남 일대로 퍼져나갔다. 이 노래는 나중 빨치산이 부르다 금지곡이 되었다. 분단극가의 아픔이다. 80년대까지 운동권 가요로 불려지게 되었는데,이 시가 구전가요가 아님을 알게된 것은 88올림픽 이후 세계화를 향한 열린 정책을 표방하는 노태우 정부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가 구전가요가 아님을 알게 된 계기는 1997년 한국일보 논설고문이 '부용산 오리길에'라는 칼럼을 통해 호남인들만이 부르던 '부용산'이후 후속 보도 등이 이어지고 박기동 시인의 시임을 알게 되었다. '부용산'노래를 장정일 수필가가 육성으로 들려주어 더욱더 구슬프고 처량한 생각이 드는 시였다. 저승새인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갔다고나 할까.
'크로바 산장'에서 참게 메기탕으로 점심을 먹고 승차를 하여 당도한 곳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이다. 보성과 별교 읍장을 거쳐 서기관으로 명예 퇴직한 위승환 태백산맥 문학관 길동무가 우리를 안내하여 태백산맥 문학관에 건물이 담고 있는 뜻에 대해 해설을 한다. 이 건물은 제석산 산자락에 비스듬하게 세워졌는데 1층은 소설에 나오는 매몰된 역사- 조정래 작가는 분단국가로 근현대사가 반쪽의 역사라 복원하기 위해서 아리랑을 비롯한 태백산맥이란 소설을 썼다고 한 적이 있다-를 상징하고 2층은 쇠줄로 매달려있는데 분단국가로 반쪽뿐인 역사를 소설로 들추어냈다는 점을 상징하고, 건물의 문은 북향을 향하여 통일조국에 대한 바람을 형상화하였다. 2층 옥상은 그 언젠가 될지 모르는 다시 흘러갔다 돌아오는 도래뜸처럼 회원을 위한 그날을 위해 텅 비워놓았다고 한다. 대보름날 동네 고샅을 다니며 지신밟기를 하던 그 날처럼 한민족이 하나가 되는 그 날을 향한 염원이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작가로서 글 감옥에 빠졌을 때를 위해 나름대로의 건강을 위한 도구들을 보고 키를 넘는 태백산맥 원고를 본다. 부친의 장례를 위한 사흘을 빼고, 11년을 한결같이 아침 9시에 시작하여 오후 6시까지 조정래작가는 글을 썼다. 일층은 모두 네 마당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마당에는 4년간의 취재수첩과 16절 모조지에 등장인물만 써내려간 메모가 있고, 둘째 마당에는 작가가 고발되고 11년 만에 무혐의을 받기까지의 있었던 일이 정리되어있고, 세째 마당에는 영화 만화 일본어판 프랑스판의 태백산맥이 있다. 네째 마당에는 아들 며느리, 독자가 옮겨 쓴 원고가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 위승환 길동무의 해설을 듣고 무당의 딸인 소화의 집을 본다. 무도의 제구가 갖춰진 웃방 아래, 큰방에는 어느 집의 씻김굿을 위해 소복한 소화가 민경을 앞에 두고 쪼그리고 앉아, 동백기름을 바르고 있는 것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다. 정하섭과 인연을 맺기도 했고,, 빨치산의 하대치 아들 둘과 그의 아낙 들몰댁이 잠깐 와서 몸을 의탁했던 집이 또한 소화네 이 무당집이다. 현부자는 현부자집에 가끔 찾아와서는 자신의 소유인 중도 들녘을 지그시 내려다보곤 했다는 것을 이 소설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가상의 도시가 아니라 태백산맥은 벌교라는 현실의 소재지가 소설의 무대이고, 소설은 벌교라는 무대의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특색이기도 하다. 벌교 읍내로 들어서기 전에 ‘부용교’가 벌교천에 걸쳐져 있다. 이 다리를 벌교 사람들은 일본 천황 소화 6년에 건립되었다 하여 소화다리라고 불렀다, 물론 동음이의어겠지만 무당의 이름을 굳이 소화라고 작가가 작명한 것은 그 당시 벌교 사람들- 식민지 속국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우리나라 사람들 너나 없이 그랬을 것이다.-의 저변에 깔린 저항의식을 담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어느새 버스는 벌교읍사무소 앞에 이르고 거기서 하차하여 '부용산 오리길'에 오른다. 가파르지만 한번쯤 오르고 싶은 길. 물론 어느 도시의 공원과 다름없이 건강을 위한 체육시설이 있고 벌교를 지킨 충혼탑이 있다. 거기에서 한참을 걸어가서 '부용산 시비' 앞에 선다. 시비에는 '부용산' 시 1. 2연이 쓰여 있다. 2연은 호주로 이민간 박기동 시인이 한국일보 논설고문 김성우의 부탁을 받고,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은 '부용산'의 시 2절을 썼다. 장정식 수필가는 이 노래의 주제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라 한다. 장정식 수필가의 어법대로 구슬프고 애처로은 ‘부용산’ 시를 여기에 옮겨 본다.
부용산
박기동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오릿길에 있는 박기동 시비 못 미쳐 이 고장 출신의 민족음악가인 채동선의 묘소가 있다. 그는 작곡가지만 정지용의 '향수', '고향'등의 시에 가락을 붙여 곡을 만들었는데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처럼 금지곡이 되었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정지용의 둘째 아들인 정구인 씨가 아버지 정지용을 찾아 그가 월북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해금이 되어 채동선 작곡의 노래도 ,불리게 되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지용의 '고향'이란 시를 가만가만 뇌어 본다.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태백산맥문학관 외벽에 쓰여 있던 조정래작가의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문학의 현실반영을 의미하며 문학의 정서순화 기능 외에 현실에 대한 눈을 떠야 한다는 문학인의 자세를 말한 것이다고 본다. 서재필 기념회관에서 김종채 이사장도 각고의 노력 없이는 성공이 없다고 했다. 글 쓰는 일이 얼마나 고된 노동인가를 조정래는 자전적 에세이인 '황홀한 글감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골똘해 있다가 광주 문화의 전당에 당도했다. 기행은 끝이 났다. 각자 돌아서가는 길에 세상을 보는 눈의 폭이 한 뼘씩 자랐을 것이다.
|
첫댓글 문학기행의 여정이 한 눈에 모두 들어오는 글이군요. 시간대 별로 그림이 그려집니다. 한뼘이나 자란 눈으로 쓰신 글 덕분에 저희 세상을 보는 눈도 한뼘씩 자랄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허소미 선생님.^^
고운 글, 잘 음미했습니다. 늘 고운 날 누리시길
저는 선생님의 이런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보람을 느낀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동행에 가사드립니다.
함께 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부분까지 다시금 느낄수 있는 기행문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