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를 다루는 영화를 보는 일은 언제나 나에게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범죄현장을 수사하는 매력적인 탐정이나 경찰을 따라가면서 나는 일탈의 세계와 조우하며, 이상심리의 살인자를 만나기도하고, 위험에 빠진 탐정을 안타까워하고, 우리와 닮은 평범한 모습의 악을 접하면서 서늘한 기분에 젖기도 한다.
심리 미스터리, 스릴러, 갱스터필름, 필름느와르등으로 세분되는 추리물 들은 매력적인 캐릭터와 시각적 스타일, 사운드 활용만으로도, 영화 연출가들이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장르다. 하지만, 영화 역사에서 그 장르에 속하는 걸작들이 워낙 많은 점과 우리의 영화 현실이 필름느와르나 미스터리 스릴러 류를 대중장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항상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프리츠랑, 알프레드 히치콕, 오토프레민저, 빌리와일더 등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좋은 대본의 발굴과 제작 당사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이라면 이 미지의 영역에서도 작품과 흥행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런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은 야심적인 성과물로 신선한 충격이다. 시나리오, 스타일, 캐릭터, 감독의 신중하고 신선한 관점 모든 것이 뛰어나다.
실제 사건인 80년대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김광림 씨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원작으로 삼아 봉감독이 직접 각색을 했다. 한국 최초의 연쇄살인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공권력이 인권을 탄압하던 5공 시절인 1986년부터 6년 동안 1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정권의 하수인인 경찰들이 각종 시위진압에 투입되던 시절에, 한 평화로운 농촌마을에서 일어난 이 엽기적인 살인사건은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경찰병력이 투입되었지만 결국 범인을 못 잡고 잊혀졌다. 고문과 증거조작을 통해서 멀쩡한 마을 주민을 범인으로 기소했다가 법정에서 발각되는 황당한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여러 명의 경찰 고위간부가 잘리고, 이 사건을 담당한 많은 수사진들은 공권력을 조롱하는 이 사건이 장기화되면서 가정파탄을 맞는가하면 정신분열을 일으킨 사람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한국 범죄사에 여러 기네스 기록을 남겼다. 엄청난 분량의 수사기록과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봉감독은 2년에 가까운 꼼꼼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그 결과물로 나온 <살인의 추억>은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독창적인 시도가 많은 귀중한 성과이며, 봉감독의 성실함, 열정, 고뇌, 예술적 재능이 그대로 느껴지는 영화다.
<살인의 추억>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할리웃 연쇄살인 영화의 선정적이고, 과장되고, 환타지적인 컨벤션과는 차별화 된다.
80년대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내면서, 객관적이고, 리얼리티가 있는 영화다. 정치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이 살인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부조리한 자화상을 돌아보며 한번쯤 쓴 웃음을 짓고, 생각할 꺼리를 제공하는 그런 영화다.
영화 속에선 폭력적 시위진압 현장, 전두환 5개국 순방 환영행사에 동원된 학생들 모습, 학교 내 민반공훈련, 문귀동 성고문 사건, 국토건설현장, 살인자를 잡는 일 보다 정권 수호에 동원 되는 일이 더 중요한 경찰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 정교하게 배치된다.
범인 추적 미스터리 영화를 생각할 때,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은 “범인은 누굴까?”, “범인과의 대결에서 위험에 처한 수사관”등일 거다. 범인의 실체를 처음엔 숨기더라도 나중엔 제시하거나, 그 범죄동기를 설명하고, 응징하는 게 컨벤션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선택을 한다. 작위적인 픽션은 거부하고 리얼리티를 택한다.
감독의 관심은 그 시대의 반영이다. 그 내외적인 아수라장 속에서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의 경찰 들은 할리웃 영화에서 보여 지는 세련되고 멋있는 아이콘이 아니라 단순 무식하고, 폭력, 고문을 일삼고, 증거조작을 하고, 과학 보다는 직감 수사에, 심지어는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수사하는 한심한 작태까지 자행한다.
영화 중반부 까지의 중요한 갈등은 육감에 의존하는 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과 나름대로 서류분석과 과학수사를 하는 도시 엘리트형사 서태윤(김상경 분)간의 대립이다. 자원하여 마을로 들어오는 서형사의 처음 등장부터 박두만은 그를 강간범으로 오해하고 일방적인 린치를 가한다.
박두만은 자신을 따르는 마을출신 후배 형사인 조형사(김뢰하)를 데리고 독자적인 수사를 한다. 어리숙한 마을 청년 백광호를 범인으로 지목한 박두만은 결국, 수사를 종결하려고 한다. 범인 검거가 매스컴에 알려지고, 현장검증에서 백광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난리를 피운다.
서형사는 백광호의 신체적 결함으로 범인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고, 사건의 종결은 물 건너간다.
신 반장(송재호 분)이 부임하고.....박두만의 어설픈 브리핑은 실소를 자아낸다. (송재호 씨의 모습은 처음 등장부터 아주 인상적이었다. 대사 없는 인상적인 두 씬이 지나면, 그의 말투로 경상도 사람임을 알게 된다.)
신 반장은 감으로 수사하는 두만 보다는 서형사(김상경 분)쪽에 힘을 실어준다.
마을에서 사라진 처녀가 살해되었을 거라는 서형사의 주장과 제 발로 마을을 떠난 거라고 굳게 믿는 두만의 의견이 대립된다. 시신 수색 작업현장, 두만과 조형사가 실 놀이를 하며 딴전을 피우는 동안 서형사의 예견대로 처녀의 시신이 갈대밭에서 발견된다.
살인자는 꼭 비오는 날, 빨간 옷의 여자를 대상으로 삼아서, 끈으로 묶고 강간하고 희생자의 옷이나 도구를 이용하여 살해하고, 능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속되는 연쇄살인 중에, 라디오를 즐겨 청취하던 수사진의 유일한 여경(권귀옥)은 우연히 “우울한 편지”라는 곡이 나오는 시간에 매번 살인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보고한다. 게다가 그 신청엽서는 이 마을에 사는 청년이 보낸다는 것이다. 병력지원을 요청한 수사진은 시위진압 동원관계로 지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결국, 또 한사람의 희생자가 생긴다. 희생자의 몸속에서 발견된 물건을 보고 경악하는 수사진들. 수사는 진전이 없고, 답답한 두만은 무당을 만나 미신에 의존하는 수사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이 영화의 장점은 내용과 맞물리는 시각적 스타일에서도 돋보인다. 박두만 형사가 처음 사건 현장을 지휘하는 스테디캠 장면 (범인의 발자국을 보존하려는 그의 의도가 경운기의 지나감으로 좌절되는 데까지의 원씬원테이크). 산속의 국토건설 현장까지 이어지는 용의자 검거 시퀀스(히치콕 감독의 오마주를 보는 듯한 경이로운 명장면), 전봇대에 올라간 목격자 백광훈을 심문하다가 제시되는 추수 끝난 논의 그로테스크한 풍경(명백히 감독의 의도인 볏단들이 마치 공동묘지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수사팀에 합류한 서형사를 이화시키는 카메라 기법, 폐소공간에서 탁 트인 농촌 풍경의 롱숏으로 공간 전환하는 편집스타일 등 뛰어난 장면들이 많다. 촬영과 조명, 음악도 수준급이다.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하는 건 캐릭터들의 연기다.
그 중에서도 박두만 역을 맡은 송강호의 능청스런 연기는 정말 압권이다. 영화를 살아 숨쉬게 한다. 그가 시기적절하게 한마디 씩 던지는 대사, 코믹한 말투와 몸짓 도 캐릭터와 딱 붙는다. 악행을 일삼는 나쁜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괴롭힌 용의자에게 신발을 사주는가 하면, 밥은 먹고 다니냐고 걱정해 주기도 한다. 관객은 이상하게도 그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김뢰하가 연기하는 조형사도 무데뽀의 폭력경찰인데, 연민이 생기는 캐릭터다. 그 또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월급쟁이 샐러리맨, 시대의 희생자로 그려진다. 그 또한 <플란다스의 개>에서 만큼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치밀한 경찰의 수사과정을 보여주며 관객이 추리하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선이 악을 응징하는 스토리도 아니다. 감독은 악행을 범한 자를 지목하지만 단죄하지도 않는다. 살인자의 동기나 엽기적인 살인행위를 살인자의 시점에서 디테일하게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관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영화 속에서 서스펜스를 느끼는 살인자의 유일한 시점샷(우리가 아는 두 여자 중 누구를 희생자로 삼을까 결정하는 순간)에선 모두가 조바심을 느낀다. 그리고, 시신과 서형사만 아는 비밀스런 사소한 행동에 똑같이 낙담하고, 그의 폭력에 공감한다.
서형사가 확신하는 용의자는 정말 살인을 한건가? “난 너희들에게 당하지 않아!”라는 외침과 함께 진실은 어두운 심연으로 깊은 동굴 속으로 사라질 뿐 인가?
봉감독은 어떤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농촌 스릴러’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재치있는 표현이다.
대부분의 스릴러라면 도시, 네온, 밤, 로우키한 화면이 떠오르지만 이 영화는 거꾸로다. 아름다운 자연에서의 살인. 낚시하는 사람들을 야유하는 두만의 넋두리처럼 휴식과 평화를 주어야할 장소가 경찰들과 그곳의 사람들에겐 정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을 거다.
그가 보여주는 풍경은 <서편제>나 <취화선>에서의 아름다운 우리의 자연이 아니라 암울한 시기의 인권이 유린되던 관심 밖의 공간이다. 그곳에 살인이 있었고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들이 있었다. 그들도 똑같은 희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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