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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호 (金正浩)
1952년 3월27일 ~ 1985년11월29일
못다 부른 노래
A.
1. 기다리는 마음(김정호)
2. 바람이어라(김정호)
3. 대전부르스(김정호)
4. 정때문인가봐요(윤승태)
5. 빗물(장은숙)
6. 누구라도 빛이되어(김정호)
7. 불효자는 웁니다(김정호)
8. 꿈속의 사랑(김정호)
9. 공든탑(이승희)
B.
1. 난 알았네(이승희)
2. 맴도는 얼굴(강인원)
3. 전화(이승희)
4. 조용히 들어요(강인원)
5. 그대떠난 뒤에는(이승희)
6. 두손을 잡아요(장은숙)
7. 생일을 축하합니다(건전가요)
김정호(金正浩)
본명: 조용호.
1952년 3월27일 전남 광주시 북동 태생.
부친 조재영씨 부친은 서울 종로경찰서. 여수경찰서장을 거쳐
이름을 김광범으로 개명한 후 출판사를 경영
모친 박숙자분 한국동일창극단 단원
창의 명인인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몸이 약해 온갖 병치레를 다 했었다 한다.
김정호의 음악적 재능은 외가쪽의 영향이 지대했다.
모친과 함께 6ㆍ25동란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외조부 박동신은 우리 국악의 명인이었는데
명창 김소희의 고수이자 인간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 박우성 등이 그의 제자이며
보국가, 유관순전, 해방가등 판소리 창작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는 함께
‘아성극단’이란 악극단을 만들어 만주나 상해 등지로
공연을 다니기도 했던 ‘명인’이었는데
어머니는 김정호가 6살 때
집안에 있던 국악 악기를 모두 내다 버렸고
심지어는 가야금 줄까지 끊어버렸다.
그 힘들고 고된 악극단생활을 자식에게 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거라 본다.
또한 어머니는
한국동일창극단의 단원으로서
명창 김소희 선생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외할아버지인 박동신 선생은 국악의 명인으로서
인간 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인 박우성 등을 길러냈고
특히 ‘김유신 보국가’ ‘유관순전’ ‘건국가’ 등을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국립국악원 악장인 박종선씨는 김정호씨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꽹과리 (kkwaenggwari) 미궁속으로
"어릴 때는 뭘 압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국악의 가락과 션율을 들으면
어디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 정도로 소리를 마냥 좋아 했어요"
(당시 음악잡지 김정호씨 인터뷰 기록중에서.....
광주 수창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 교동국민학교로 전학
김정호씨는 70년대 인기 개그맨
고영수씨와 같은 동네 같은 교동국민학교를 다녔는데
김정호씨의 어린 시절 성격은 온순하면서도 활달했다한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 글짓기나 연극을 잘하는 감성이 짙은 학생이었고
특히 웅변에 재능을 보여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으며.
밥상위에 올라가 연설흉내를 내는 등 웅변에 재능을 보여
여러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머리좋고 활달한 소년이었는데
남달리 잦은 잔병치레가 많아
국민학교 1학년 때에 뇌염에 걸려 사지를 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 교동초등교 졸업 대동중학교를 거쳐 대동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출렁이는 물결속에 마음을 달래려고 ........ 이름모를 소녀
꿈을 이루려 무작정 서울로 상경
뮤지션들의 아지트라 일컸는
종로 낙원상가를 배회하다.
우연히 향간에 들리는 소문 정말 기타를 잘 다루시는 분이
근교 어디에 계신다는 얘기를 입수
‘삼청동의 기타박사’라 불리는
이생회씨 찾아 사사를 받게되는데
우이동에 골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온종일 기타를 배운 뒤부터
노래와 기타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실력을 다진 후
미8군 기지촌에서 노래가 아닌.
그룹사운드 기타리스트로 먼저 활동을 시작 하게 되는데
시일이 지나면서 여러 가수와 연주인들을 거듭하던 중
임창제씨와 쉐그린의 멤버였던 이태원씨와 함께
서로 통설 후 격없이 술잔을 맞치며 허물이 가실 무렵즈음에
자신이 그간 교정과 수정을 번복하며 다져온
작시곡 두 곡을
이들 듀엣 어니언스에게 주어 레코드(L.P)를 취입하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사랑의 진실)과 (작은새) 였다.
" 취입을 하고도 별 관심 밖이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더군요.
뭐!, 별로나쁘진 않더군요. 하 하 하"
김정호씨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미망인) 이영희씨
故 김정호 씨 의 동반자 이영희 부인
마지막으로 김정호의 영원한 동반자인 이영희씨의 남편 김정호에 대해 쓴 글
‘하얀 나비’ 되어 봄마다 찾아올 겁니다.
그를 무섭게 옥죄던 고통만큼이나 사나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85년 12월 2일의 금촌 기독교공원묘지.
내 남편, 가수 김정호는
양지바른 그곳 한 곁을 차지하고 땅 속 깊숙이 누웠습니다.
영원히 깰 수 없는 잠이 든 채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눈물로 범벅 된 흙으로 덮이는 그의 관을 보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그가 활짝 웃으며 맞을 것만 같았습 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도무지 나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비극의 한장면 들일 뿐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서른 세 해를 살고 이제 그는 떠났지만 세상에 두 가지의 귀한 것을 남겨놓았습니다.
쌍 쌍둥이 딸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득한 정을 불어 넣던 많은 노래들.
그는 그 속에서 다시 이 세상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11월 28일 그러니까 숨을 거두기 전날 저녁.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사옵니다. 주여 어서 빨리 제 맘속에 드시옵소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운명을 예감한 듯 육신의 고통을 없애달라는 여느 기도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깊은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그를 보자 속 절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었습니다.
“울지마. 당신 우는걸 보면 내 마음이 너 무 아파.”
앙상한 손으로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던 그는 미안하다는 듯이 실쭉 웃으며
‘내가 죽으면 땅 한 평만 사서 묻어 줘’ 란 말을 세번씩이나 거듭했습니다.
내가 침대에 기대 깜박 잠이라도 들라치면 몹시 싫어했지요.
“날 계속 지켜보고 있어 줘.”
고통과 싸우느라 마지막 안간힘을 쏟던 그는
마침내 다음날 12시 15분 한 많은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비통한 울부짖음과 기도 속에.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란 굳은 믿음과 희망이
그대로 사그라지던 그 순간 저는 하느님마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를 왜 그렇게 미워하셨습니까?’ 라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날 밤하늘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집에서 그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와 함께 했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습니다.
나의 남편 김정호의 본명은 조용호입니다.
그이와 나는 1952년생 동갑 나기입니다.
교동 초등학교 동창생이기도 하죠.
우리는 천생연분이라고 좋아하며 같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가 대구 집에 내려가자 그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도 한 달 내내.
하지만 그 편지는 처음 세 통 외에는 모두 어머니 손에 들어갔지요.
내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대로 포기한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1972년 겨울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만두를 빚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 길래 나가 보았습니다.
‘아, 그이구나’하며 돌아서서 나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머리엔 기름을 발라 하이칼라로 넘기고
빨간 넥타이까지 맨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고 안어울리던지,
그래도 그이 딴에는 날 찾아온다고 반코트도 빌려 입고 잔뜩 멋을 냈다는 겁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집에 들어 올 용기가 안나 막걸리까지 한 사발을 다 마셨다는군요.
그날은 만두 국만 한 그릇 대접하고 어머니께 서 타일러 보냈습니다.
또 한동안 소식이 없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니던 늦은 봄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를 처음 취입한다며 재킷사진을 싸서 회사로 찾아온 그 이.
나는 처음으로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기고 그곳에 그냥 갔으려니 하고 갔는데 웬걸,
그는 그때까지 다방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이 주변엔 담배꽁초가 수북했었습니다.
“아직까지 영희씨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죠?”
그윽하게 날 지켜 보던 그이가 대 뜸 하는 말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지요.
영희씨를 꼭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지요.”
그날 명동의 ‘쉘브르’에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촉촉이 젖어드는 그이의 노래 속에서 어느새 내 마음은 그이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좁은 곳을 싫어해서 우리는 주로
경복궁. 삼청공원. 여의도 잔디 밭 등에서 많은 시간 을 보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그이.
나는 꽃구름을 타고 하늘을 떠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에 이어 한나절 동안 만들었다는 「하얀 나비」인기가 신나게 올랐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이 몸 속에 깃든 병마도 활동을 시작했던 겁니다.
그땐 가끔 기침이 잦은 정도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를 통해 그이가 폐결 핵 환자라는 말을 듣곤 펑펑 울다가
이것이 ‘나의 운명’이려니 하고 그이를 활짝 받아 들였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셨고, 장녀라서 그이의 따뜻한 정을 잊지 못했던 거지요.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병마와 싸운 덕에 완치됐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이에 게 닥쳐온 돌이킬 수 없었던 큰 시련은 ‘대마초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잃고 또다시 병이 찾아들었습니다.
1975년 봄,
우리는 집안 어른들을 모신 가운데 약혼식을 올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하나를 만들면서 자신의 생을 한 조각씩 떼어바치던 그이,
촛불만 켜고 밤늦도록 곡을 만들면서도 피곤하기는커녕, 기쁨의 빛을 뿜어내던 그이,
그런 그이와 밤을 꼬박 새우기도 여러 날이었지요.
1977년 3월 27일, 아직 그이가 활동을 못하고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일영가는 길목의 은평교회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작고 가무잡잡한데다가 눈만 휑하니 커서
무척 어둡고 볼품없어 뵈던 그이.
무척 세심하고 엉뚱한 면도 참 많았지만 우린 오손도손 참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아플 때 면 무조건 잘 먹어야 낫는다며 돼지고기를 사와
고추장을 넣고 볶음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정작 당신께선 식성도 까다로워서 고기를 먹으라면 약같이 생각하시더니.
이윽고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겼습니다.
분만의 고통 때문에 내가
‘지금 안 낳고 조금 있다 낳을레요’라며 헛소리를 하더라나요.
당신을 쏙 빼어 닮은 쌍둥이 딸아이를 그이는 참으로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말 그대로 ‘행복의 절정’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대마초 가수들에 대한 규제가 풀렸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춤이라도 한바탕 추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작곡과 레코드취입에 쏟아넣느라
몸조리는 자연 생각 밖이었던가 봐요.
차 오르는 숨과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지새는 밤이 계속되는 그이를 보기란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습니다.
말려야 했습니다. 그이의 삶을 계속 잇기 위해서는.
하지만 그의 생을 지탱해 주고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노래를 그에게서 앗아간다는 건,
더욱 큰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그이를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타이틀로
재기 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님」등을 발표하고 결국,
인천 송도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12월,
그이가 요양을 시작한 지 4개월 째가 되던 날,
아무도 찾아 올 리 없는 저녁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이였습니다.
담당 의사분께 인사도 않고 그이는 마침내 요양원을 뛰쳐나온 겁니다.
그이를 사로잡은 노래에의 집념, 그것은 더 이상 잠재우지 못할 뜨거운 불꽃이었습니다.
그이는 고통을 안으로만 안으로 만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 파
사랑하는 아이들과 더 많이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해 했습니다.
그이와 함께 산 10년, 그 당시로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커다란 아쉬움만 남습니다.
최근 2년 동안 우리에겐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노래에 전념한 값을 그이는 고통으로 치러냈습니다.
작년부터는 병원 입원이 잦아졌습니다.
환절기만 되면 가뜩이나 약한 몸에 저항력이 떨어져 합병증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그이의 병도 깊어만 갔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렸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토록 어려움을 치르고 있을때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님과 신앙 속에 빚어진 그이의 선배님들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한 형제처럼 찾아와 기도하며 찬송하며
그이를 일으키려 애쓰던 분들께 그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해야 할는지요.
지난 일요일엔 그이를 만나러 금촌에 갔었습니다.
인부들이 그의 무덤 집을 만드느라 떼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해. 수고하신다고 내 대신 점심 값도 드리고
그 이 성격에 틀림없이 이런 말을 할 것 같아 웃음이 쿡쿡 나오더군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이가 누워 있는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냉정한 바람은 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 놓았습니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프다고 그이는 노래했지만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싶습니다.
내겐 그이를 닮아 맑은 눈을 가진 두 아이, 정선이와 정훈 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의 생명까지 바친 그의 노래가 영원할 것이니까요...
부인과 딸 정선
중학교 2학년때 우연히 친구가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본것이 계기가 되어
그 날부터 그 신기한 기타를 얻기위해 할머니를 졸라
결국 그의 부탁에 못이긴 할머님은
중학교 2학년의 김정호에게 당시 1천 3백원짜리 기타를 사주었다는 일설도 있다.
--- 당시 기사 인용 ---
18인의 노래모음 사랑의 앨범
Tribute Kim Jung Ho
김범룡 이름모를 소녀
송창식 잊으리라
윤시내 하얀나비
한마음 빗속을 둘이서
윤승태 작은새
전영록 나그네
김학래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홍 민 지난 겨울엔
신형원 보고싶은마음
이정선 세월 그것은 바람
김수희 인 생
강은철 기다림
채은옥 어느날 갑자기
김현식 님
하남석 사랑가 서수남 · 하청일 사랑의 진실
모든 진행 프로그램 형식인 편곡. 연주. 믹싱. 감독은
70년 그룹사운드 ·사랑과 평화· 건반 주자
(고) 김명곤씨가 맡아 진행되었으며
주제는 = 부제 18인의 노래모음 = 사랑의 앨범으로 엮어
고인을 넋을 위로하였다.
그 해 1986년 10월 수많은 연예계 동료들이 제작하여 고인의 무덤 옆에 노래비를 세웠다.
1 . Intro opening 김정호
2 . 인 생 김의철
3 . 세월 그것은 바람 하남석
4 . 지난 겨울엔 한승기
5 . 하얀 나비 이경우
6 . 날이 갈수록 김두수
7 . 외 길 이성원
8 . 저 별과 달을 이원재
9 . 작은새
사랑의 진실
푸른 하늘 아래로
외기러기 김정호
10 . 이름 모를 소녀 김의철
11 . 님 김정호
2003년 11월 28일-29일 양일간 서울 명동 YWCA 마루홀에서는
김정호가 떠난 지 18년만 에 처음으로 추모공연이 열렸고.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기타가 특별 전시되었으며 고인의 사진이 놓인 타는 향터울 앞엔
고인이 좋아했던 국화꽃이 소복히 쌓여 고인의 회심이 고요함속에서 안식을 표효했다.
2004년도 (고) 김정호 추모콘서트
김정호를 기리기 위해 김정호의 트리뷰트(헌정) 음반이 나왔다.
그의 미공개 육성 5분여를 포함한
‘트리뷰트 김정호’는 그의 육성으로 시작되는데.
“저녁 때가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죠…
그냥 매일같이 찾아오는 밤인데도,
그냥 한 토막 시를 못쓸 때가 많아요.
내 곁에 맴돌 때 빨리 잡아다가 백지에 옮기는 작업 … 그게 작곡가니까…
” 첫번째 트랙에 5분여 담긴 그의 음성에는
병마와 싸우는 한 음악가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듯하다
서른 셋에 요절한 가수 김정호가 숨지기 1년 전쯤 녹음했다는 육성이 담긴
고귀한 앨범은 기쁜반면 스산하고 아픈 마음이 깊은 마음속을 헤민다
“내 죽거든 앞이 툭 트인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85년 11월 29일 12시 15분 서울대병원 82병동에서 죽음을 맞았다.
병명은 폐결핵 합병증으로 타계하였는데 부인 이영희씨와 당시 여덟 살 난 쌍둥이 딸이 지켜보고 있었다.
김정호는 1952년 3월 27일 생으로 33년 8개월을 살다가 1985년 11월 29일 세상을 등졌다.
1985년 12월 2일 흰눈이 내리던 날 김정호는 지인들의 손에 의해 금촌 탄현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Tribute of a Tear Tribute of Praise Tribute To One's Memory
동음음악학원 Dong Eum Music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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