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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indshoes.new21.org
하이랜더(HIGHLANDER, 1985)
감독 : 러셀 멀케이(Russell Mulcahy), 출연 : 크리스토퍼 램버트(Christopher Lambert), 숀 코네리(Sean Connery), 클랜시 브라운(Clancy Brown), 록산느 하트(Roxanne Hart) 등
Inner Link |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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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코네리 우라사와 나오키 뱀파이어(드라큘라) 영화들 J.R.R.톨킨 최인훈 Queen 나인 하프 위크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
옆의 그림은 제니 홀저의 개념미술(conceptual art) 작품 <Protect Me From What I Want>이다.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받았던 충격은 놀라운 것이었다. 현대인의 삶, 그 핵심에 놓인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욕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달라'는 이 메시지에서 받은 전율은 나중에 우라사와 나오키(Urasawa Naoki)의 작품 『몬스터』에서 "나를 봐, 나를 봐. 내 안의 악마가 이렇게 크게 자랐어.", "도와줘, 내 안의 몬스터가 파열할 것 같아."를 읽었을 때 또다시 반복되었다. 영화 <하이랜더>는 그와 같은 인간의 중요한 욕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실 영화 <하이랜더>의 인기는 기묘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잘 짜인 한 편의 오락 영화로 치부하기에는 이 영화가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물론 이 영화를 진정한 컬트(cult)로 만든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영화 <하이랜더>는 이후에도 몇 편의 후속편이 만들어졌고, 심지어는 TV 시리즈로도 제작되는 등의 인기를 누렸지만 히트한 성공작의 후속편치고 괜찮은 영화 없다는 영화판의 속설처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작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입장에서는 더욱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후속작들은 보지 않았고, 여러분들에게도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렇듯 후속작들이 제작되고, 특히 TV시리즈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영화 <하이랜더>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매우 잘 짜여있고, 풍부한 이야기 거리들을 담을 수 있는 구조라는 뜻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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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 / 제니 홀저 현대에 나타난 중세의 인간, 코너 맥클라우드 - 그의 기억은 400여년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400여년의 역사를 통해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최후의 대결을 통해 얻고자 했던 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화 <하이랜더>와 <시실리안>에서 우울한 모습의 전사를 열연했던 크리스토퍼 램버트. <하이랜더>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이후 그가 출연하는 대개의 작품들에서도 우울한 캐릭터를 넘어서지 못했다. 씨족의 명예를 걸고 전장에 나서는 코너 맥클라우드. 그러나 불사의 몸을 지닌 그의 부활은 씨족공동체로부터는 물론 연인에게도 버림받는 것이었다. 불사신 대 불사신의 대결 - 그들은 인류 종말에 이르러 벌어진다고 하는 아마겟돈의 대결을 벌인다. <하이랜더>는 단순한 오락 액션물임에도 치밀한 스토리 구조와 400여년의 역사 속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잔잔한 재미를 준다. |
<하이랜더>는 이중의 스토리가 교묘하게 직조되어 서로에게 상승 작용을 주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남녀 구분없이 모두에게 어필할 만한 매력이 된다. 물론 가장 강력한 이야기의 구조는 '오직 한 명만이 남아야 한다'는 원칙 아래 벌어지는 불사신들 사이의 대결이다. 그러나 이들 불사신 사이의 대결에 감동을 더해주는 요소는 역시 사랑이었다. 20세기의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프로 레슬링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경기장 지하 주차장에서 난데없는 칼싸움이 벌어진다. '살라망카'라는 이탈리아의 명검을 든 사내의 목을 베자 지하주차장에서는 엄청난 빛과 함께 폭발이 일어난다. 목을 벤 사내는 러셀 네쉬(Russell Nash, 크리스토퍼 램버트)로 골동품상이었다. 경찰은 그를 용의자로 추정하지만 명백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고, 뉴욕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엽기적인 사건에 놀란다. 원래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러셀 멀케이는 아보리아츠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레이저백>이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아 <하이랜더>의 감독으로 발탁된다. 그후에는 비록 이렇다 할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하이랜더>에서 그는 16세기의 스코틀랜드와 20세기의 뉴욕을 오가는 장면 전환에서 매우 감각적인 화면처리 솜씨를 보인다.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자연에 비해 뉴욕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로 그려지고 있다. 코너 맥클라우드(Connor MacLeod, 크리스토퍼 램버트)는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의 켈트(Celt)족인 맥클라우드 씨족의 일원이다. 그는 씨족의 일원으로 성장했고,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질 당연한 운명으로 알고 있었다. 고원부족의 일원이었던 코너 맥클라우드에게 그것은 당연한 운명이었고, 축복이었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그의 명저『죽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경위는 바로 다음과 같다. 먼저,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 ― 스스로 죽음을 느끼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죽음을 알려주어야 하든지 간에 ― 을 알고 있었다.… 중략 … 인간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사고나 전투의 경우에서조차도 급작스런 죽음은 드물었다. 급사(急死)는 인간에게 회한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죽음을 박탈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약간 위중한 병도 거의 치명적이었던 시대에 죽음은 항상 예고되는 것이었다." 중세 농경과 목축이 중심이 되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신의 일가 친척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기의 죽음은 오늘날 우리들이 맞게 될 죽음처럼 두렵고, 무서운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늘 쓰던 침대에서 낯익은 얼굴들에 둘러싸여 성직자의 축복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죽음 중 가장 두려운 것은 가족과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에서 홀로 맞이할지 모를 죽음이었다. 공동체에서 퇴출된 이방인의 영원한 생명 코너 맥클라우드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지만 씨족의 명예를 걸고 전장에 나섰고, 연인 역시 그가 전사로서의 영예를 더하길 바랬다. 상대는 이웃한 지역의 프레이저 씨족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낯선 전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머나먼 이방에서 오직 코너 맥클라우드를 죽이기 위해 나타난 커간(Kurgan, 클랜시 브라운)이었다. 커간은 오로지 코너를 겨냥해 돌진해 온다. 그의 무시무시한 돌진과 괴력에 코너는 가슴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코너의 목을 베려는 커간을 간신히 저지하는 코너의 친구들이 전장에서 코너를 들춰업고 돌아온다. 코너의 상처는 매우 치명적이었고, 당시로서는 코너를 구해낼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코너가 죽을 것이라 생각해 신부를 불러 종부성사까지 마쳤다. 그러나 코너 맥클라우드는 죽지 않았고, 치명상을 입기 전보다 더욱 건강한 몸이 되어 일어났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고원지대 하일랜드의 맥클라우드 일족은 이런 놀라운 일을 신의 축복이라 생각하지 않고, 신의 저주이거나 악마의 장난이라 생각하여 맥클라우드를 마을에서 쫓아낸다. 그는 공동체에서 쫓겨나 이방인이 되고 만다. 중세 시대 공동체로부터의 방출은 '죽음', 즉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이제 공동체로부터 부과된 어떤 의무도, 보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코너 맥클라우드는 자신이 불사신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란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다. 마을에서 쫓겨난 코너는 헤더(Heather, Beatie Edney)를 만나 아이를 낳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어 했다. 헤더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었던 코너, 그러나 그에게 결전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깨우쳐 줄 스승이자 친구인 라미레즈(Juan Sanchez Villa-Lobos Ramirez, 숀 코네리)가 등장한다. 그는 맥클라우드에게 죽지 않는, 아니 죽을 수 없는 코너의 운명을 일깨워주려 한다. 불사신, 슬픈사랑의 운명 라미레즈는 믿으려 들지 않는 코너에게 자신의 운명을 일깨워준다. 불사신들은 인류의 운명을 걸고,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며 그 최후의 일인이 빛의 영역에 속해있는 인물이어야 인류가 어둠의 세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인류 종말에 이르러 벌어진다고 하는 아마겟돈의 대결과 같은 것이다. 라미레즈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헤더와의 사랑이 그에게 던질 슬픔에 대해 미리 충고하지만, 코너는 공동체에서 쫓겨난 자신에게 새로운 사랑을 가져다 준 헤더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코너를 훈련시키는 라미레즈, 코너가 잠시 집을 떠난 동안 불사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사인 커간이 습격해 온다. 코너의 준비가 끝나기 전에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될 코너 맥클라우드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커간의 습격에 대항하여 라미레즈는 커간의 목을 베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나 커간의 역습에 도리어 목을 잃고 만다. 커간이 상처를 입고 떠난 뒤 돌아온 코너는 라미레즈의 죽음에 슬퍼한다. 그러나 코너는 라미레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헤더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여전히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룹 Queen의 타이틀곡인 <Who Wants Live Forever>가 흘러나오면서 코너가 헤더를 소리쳐 부른다. 코너는 젊었을 때 모습 그대로이다. 새끼양을 안고 돌아보는 헤더, 그녀의 아름다움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영화 <하이랜더>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늙고 병든 헤더는 어둠이 깊게 드리워진 자신의 침상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헤더: 나의 아름다운 사람, 내 남편 자신은 늙어 사랑하는 이를 떠나야 하는데 사랑하는 그 대상은 늙지도 않고, 자신이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헤더' 같지만 우리가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와 반대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의 대상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이별의 그 순간으로부터 조금도 늙지 않는다. 추억 속의 그는 한결같은데 변하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사람은 오히려 코너 맥클라우드이다. 그의 주변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모든 추억은 낡은 것들이다. 어렸을 때 오랫동안 즐겨 신던 운동화 한 켤레를 버려야 할 때도 뭔가 아쉬움이 남아 계속 뒤돌아 보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추억이다. 우리가 실연이나 이별에 가슴 아파하는 까닭. 그것은 누군가와 함께 한 기억의 일부를 상실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사신으로 산다는 기쁨(?) 역시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결코 대단한 일일 수 없다는 자명한 진실을 이 영화는 코너와 헤더의 사랑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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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죽음의 역사』/ P. 아리에스 지음/ 이종민 옮김/ 동문선/ 1998년 - 아날학파의 업적 중 한 가지는 그동안 일반적인 역사가들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던 주제들을 역사의 장에 새롭게 올려 놓았다는 것이다. 필리프 아리에스는 그 중에서 '죽음'에 대한 부문의 연구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 책 '죽음의 역사'에서 아리에스는 집단의 정신 속에서 역사의 현장에서 늘 인류와 함께 해온 죽음의 변천사를 밝혀두고 있다.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역사서 중 하나이다. 『사기』/ 사마천 지음/ 정범진 외 옮김/ 까치/ 1999년 - 서양에 헤로도투스가 있다면 동양엔 사마천이 있다. 정범진 교수를 중심으로 우리말 완역에 성공한 까치의 <사기>는 동양(중국) 고대사를 알고자 하는 이에겐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고전이다. 그러나 색인이 없다는 점 등은 고전을 좀더 여러 각도로 활용하고자 하는 이에겐 매우 불편한 점이다. 하이랜더 : 크리스토퍼 램버트 - 영화 <하이랜더>와 크리스토퍼 램버트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나 배우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 <하이랜더>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당장 바람구두와 그 친구들은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좋아하는 이유야 제각각이지만 실연당한 이들에게 특히 약효가 좋다는 점에서 <하이랜더>는 좋은 영화다. 이 사이트는 크리스토퍼 램버트 개인에 대한 사이트이다.(영어) |
헤더의 죽음 이후에도 결코 죽을 수 없었던 코너 맥클라우드는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독립,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 뉴욕에 살아왔다. 그는 매번 서류상으로 죽은 자신을 대신해 자기 자신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방식으로 살아온다. 400년간 코너는 헤더의 생일 때마다 성당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촛불을 밝혀 왔다. 드디어 커간과 러셀 네쉬 아니, 코너 맥클라우드는 마지막 대결을 기다려왔고, 드디어 그 때가 밝아온다. 커간은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코너를 사랑하는 경찰 조사관을 납치해 그를 유인한다. 다 아시겠지만, 코너와 커간의 대결에서 코너는 최후의 승자로 살아남는다. 이때 그에게 마지막으로 내려진 선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선물이 무엇일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은연 중에 그 선물이 보통 인간과 같은 '한정된 수명'이 될 것임을 드러낸다. <하이랜더>는 죽을 수 없다는 점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 선장>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진실한 사랑을 찾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운명, 영우너히 바다를 방황해야 하는 화란(네덜란드)인 선장의 운명. 하긴 그것이 어디 '화란인 선장' 이야기 뿐이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한 수명을 둘러 싼 인간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점에서 그만큼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강조하고 있다. 이 영화 <하이랜더>는 16세기의 스코틀랜드와 20세기의 뉴욕 사이를 오가며 주인공인 코너 맥클라우드가 그의 숙적인 다른 무사와 벌이는 싸움이라는 매우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이야기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아무도 이 영화 <하이랜더>가 그렇게 관객들의 지속적인 호응을 받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이랜더>는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연이은 속편제작과 만화, TV시리즈 등을 낳게 했다. 1993년에 시작된 TV 시리즈는 여섯 시즌 동안 방영되며(국내에서도 경인방송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전세계 90여개 국가에서 매주 천만 명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이랜더>는 최신판을 요청하는 전세계의 광범위한 팬층을 갖고 있으며, 매년 2회의 하이랜더 컨벤션이 열리고 있다. <하이랜더>가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러셀 멀케이의 감각적인 영상 솜씨와 탄탄한 스토리가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매력은 바로 불사의 인간이 꿈꾸는 죽음에의 열망과 불사신들이 펼치는 판타지적인 이야기 구조에 있다. 우리는 J.R.R.톨킨의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를 놓고 벌어지는 사투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새삼스런 반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 영화 <하이랜더>는 광기와 순수가 지배하는 스코틀랜드의 중세로부터 근대적 이성이 지배하는 20세기의 뉴욕을 가로지른다. 우리는 하이랜더 코너 맥클라우드를 통해 '드라큘라' 혹은 '뱀파이어'라는 또다른 불사의 생명체를 느낄 수 있다. 코너 맥클라우드는 기본적으로 중세의 인간이다. 그에게 뉴욕은 어쩐지 편치 않은 공간으로 보인다. 멀케이 감독은 스코틀랜드의 초록빛 자연 속에서의 맥클라우드와 뉴욕의 회색빛 도시 속에서의 네쉬를 빛과 어둠으로 대비되도록 처리하고 있다. 20세기의 도시에 살게 된 네쉬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새로운 인간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불사의 몸이지만 매번 새로운 인간으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Who Wants Live Forever 사마천이 『사기』「관안열전(管晏列傳)」편에서 "가령 안자가 지금 다시 살아있다면 내 비록 그를 위해 마부가 된다해도 기쁨과 흠모로 모시리라" 했던 안자(안영)의 일화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제나라 남쪽에는 '우산(牛山)'이라는 명산이 있는데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치수(淄水)가 휘돌아 흐르고 북쪽을 조망하면 제나라 수도인 임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어느날 경공(景公)이 우산을 유람하다가 북쪽의 국성(國城)을 돌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처럼 광활한 나라를 두고 어찌 죽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곁에 있던 대부(大夫) 애공(艾公)과 양구거(梁丘據)도 이 소리를 듣고 안타까워 울었다. 그런데 안자만이 홀로 곁에서 웃고 있었다. 경공이 눈물을 닦으며 안자를 돌아보고 물었다. "과인은 오늘의 유람에서 슬픔을 느꼈습니다. 애공과 양구거도 모두 과인을 따라 울고 있는데 그대만이 홀로 비웃고 있으니 이 무슨 연유입니까?" 이에 안자가 이렇게 설명했다. "어진 이라 해도 항상 세상을 지켜 끝까지 죽지 않는다면 태공(太公)과 환공(桓公)께서 지금까지 계속하여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또 용감한 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세상을 지키게 할 수 있었다면 영공(靈公)과 장공(蔣公)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것입니다. 이상 몇 분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면 임금께서는 무슨 지위로 여기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차례로 살다가 차례로 떠나고 해서 지금 임금에게까지 이른 것인데 이런 일로 눈물을 흘리시다니 이는 어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어질지 못한 한 임금과 아첨에 뛰어난 두 신하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제가 홀로 웃고 있는 까닭입니다." 옛 성현은 '무릇 예로부터 죽음이 있었던 것은 후대에 어진 자들에게 뒤를 이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요, 불초한 자에게는 복종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라 했다. 불멸은 기억 속에서만 가능하다 최인훈의 장편 『화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기억 때문에 슬프다. 세상은 흘러가도 기억은 남는다. 사람말고는 이 세상 모든 물질이 시간이 흐르면 자기도 변화한다. 지난해 봄을 기억하는 나무는 없을 것이다. (....) 나와 기억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 내가 기억이다." 그야말로 기억의 존재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정신의 육체를 이룬다. '나'는 단지 현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기억에 맺힌 나뭇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삶의 육체인 셈이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고스트(ghost)'이자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처럼 '가상체험'이 경고하는 것은 기억의 혼란, 삶의 육체성 상실로 인한 실존의 혼돈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유사 이래 줄곧 불멸을 추구해왔다. 영화 <나인 하프 위크>의 사랑은 분명 감각적이고 자극적이지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될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좋은 건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 네 삶 속에서 영원한 것들이라곤 대개 가치 없는 것들 뿐이다. 아이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길 바라는 어미는 없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보자. 죽어가는 소녀가 불쌍하다 해서 소녀를 뱀파이어로 만든 뱀파이어는 그녀에게 영원한 미성숙을 주었을 뿐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수명은 유한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슬퍼해야 할 것은 그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삶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중의 '코너 맥클라우드'는 최후의 승자로서 온전한 생명 - '유한한 생명', 자신을 기억하는 대상들과 함께 소멸할 수 있는 죽음, '낯익은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을 상으로 받았지만 우리는 연이어 김 빠진 속편이 제작되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무한 추구 시스템은 결국 욕망의 폭주를 의미하고, 400년을 넘게 살아온 불사신에게 새로운 투쟁을 강요한다. 욕망의 폭주는 결국 '지구'라는 인류 공동체의 터전을 파괴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달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는 제니 홀저의 작품을 보면서 <하이랜더>가 떠오르는 까닭, 우리는 우리의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
첫댓글 이것도 역시 즐겨 봤습니다.. 1편만.. ^^;
하핫 저두요. 저는 특히 퀸의 사운드트랙에 대단히 심취했었다는.....이 영화 감독이 듀란듀란 뮤직비디오 전담 감독이어서 특히 유심히 봤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