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조치원을 지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한다 . 대전이 가까워진 것이다 . 대전역 하행선 열차는 약 십분간 대전역에 머무른다 . 그 틈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우르르 기차에서 뛰어내려 플랫폼의 가락국수매점으로 달려간다 .단무지를 아예 국수 속에는 두세 개 빠져있고 씨까지 함께 빻은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 . 분할저(分割著) 한 개를 국물에 담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건네주는 홍익회 대전역 가락국수. 그릇을 받자마자 국물부터 후르르 마시고 나서 미처 씹을 틈도 없이 퉁퉁 불어터진 국숫발을 입에 털어 넣고 먹고 난 바닥에 그릇을 내려놓고 다시 기차에 오르던 기억 기차 서서히 움직이면 그제야 참았던 트림을 끄윽하고 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던 흐뭇한 기차여행 나이가 지긋한 40대 이후의 중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대전역의 추억이다 . 이제야 새마을이던 KTX던 정차 시간이 절대 부족하여 이런 여유가 없다 . 그저 아쉬운 듯 차창 밖의 가락국수 집을 바라보며 침을 흘릴 뿐이다 . 삶은 달걀과 신문지에 삼각형으로 싼 소금봉지 대전역의 가락국수 기차 여행하면 떠오르는 추억들이다. 일본식 가락국수와 홍익회 가락국수가 어떻게 다른가 ? 참으로 우매한 비교이지만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일본식 가락국수는 우선 국물을 가다랭이로 뽑아 낸다 이에 비해 우리가 익숙한 예전 홍익회 가락국수는 씩씩한 멸치 국물이었다 . 또 하나 일본식 가락국수에는 칠미(七味)라고해서 고춧가루 깨 산초가루등으로 섞어놓은 양념을 뿌리는 데 반해 우리는 여전히 씩씩한 씨까지 박박 갈은 고춧가루가 듬뿍 뿌려지고 기름에 튀긴 유부는 어김없이 더해져 씹을 것 없는 가락국수에 씹히는 맛하나를 보탠다 . 바로 출출한 속을 흐뭇하게 만들어주던 순 한국식 가락국수의 맛을 어찌 잊겠는가. 길벗 이영균 형과 만나기로 한 것은 대전역 프랫트폼이 였다 . 길을 나서기전 모처럼 만에 대전에 도착했으니 어찌 그곳의 가락국수를 지나쳐 갈 수 있겠는가 일단 젓가락을 들긴 했어도 맛이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 홍익회라는 이름이 바뀐 것이 첫째이고 시간이 밤 열두시가 아니라는 것, 좀더 위생적이고 깔끔한 맛보다는 조금은 부실하고 조금은 엉성하고 무척 불친절한 것이 내게는 더 익숙했기 때문일까 맛있다는 것은 혀끝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 라는 양념이 하나 더 첨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했다 . 대전 토박이 이영균형을 따라 나선곳은 대전에서 삼십분거리에 옥천의 대청호 부근이었다 . 나선의 길을 휘감아 돌다보면 문득 대청호의 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배산임수의 자리에 그는 예목원(藝木園)이란 은밀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아직 공개할 수 없기에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여하튼 무지하게 중요한 사업의 부지로 그가 골라놓은 30만평 남짓의 터를 보여 준다하기에 길을 따라 나선 것이다. 눈 아래로 툭터진 호반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 길을 내려서 오면 옥천 정지용 생가로 이어지며 바로 윗마을에 육영수여사의 생가가 있는 마을 . 휘돌아 나가는 실개천과 얼룩배기 황소의 게으른 울음이 들릴 듯한 마을이다 . 최근 깨끗하게 마련된 지용 문학관을 들러 오며 우리는 목금관악기박물관에 대한 구상을 나누었다 . 코리안심포니의 홍연택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용평리조트 음악캠프에서 내게 건네주던 아이디어였는데 지금 공공기관을 떠나 백면서생인 내가 어찌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은근히 트럼본을 전공했던 사업가 김영균형에게 내가 짊어지고 있던 짐 하나를 배낭 채로 벗어 떠 넘겼다. 호른을 전공하는 딸아이들 둔 나로서는 김영균형 홍핏대가 내게 건네준 무거운 배낭을 대신 짊어져 준다면 딸에게도 면이 설 것 같아 반강제로 넘기고 곧바로 대흥동에 그 유명한 두부 두루치기 집인 진로집을 찾았다 . 진로(眞露)집. 참으로 찾기 어려운 골목에 진로집은 깊게도 숨어 있었다 . 올해 환갑인 딸 남임순 여사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 대째 내림손맛을 이어가는 진로집은 원래 그의 어머니 임금임여사가 문을 연 집이었다 . 지금 살아 계셨으면 84세였을 이 집의 손맛은 여전해서 나이 지긋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두루치기란 사전대로 말하자면 ‘한 가지 물건을 이리저리 둘러쓰는 일, 여러 가지 일에 모두 능통한 사람을 말라는 것이고 음식으로는 영호남에 두루 퍼져 있다 안동지방의 두루치기국은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은 맑고 깨끗한 국을 말한다 여기에 밀가루를 물에 살짝 푼 것을 넣어 약간 걸쭉하게 끓인 것을 '집나물"이라고도 한다. 전골보다는 바특하고 자작한 음식 . 넣는 중심 재료에 따라 오징어 두루치기 돼지고기 두루치기등 무한 변용이 가능한 음식이다 경상남·북도에 따라서 조리법 역시 조금씩 다르다. 경상남도에서는 전골 비슷하게 콩나물·무채·박고지 등의 채소와, 쇠고기·처녑·간 등의 육류, 표고·송이 등의 버섯을 채로 썰어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인다. 경상북도에서는 주로 돼지고기와 김치를 이용한다.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볶다가 김치를 넣고 김칫국물을 부어 끓인다. 그런데 대전 진로집은 두부가 주된 중심재료이고 안동과 달리 칼칼한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것이다 . 원래 진로집은 소위 포장마차에서 시작된 집이다 . 창업주 임금임 여사가 국수를 말아 팔던 사업이 번창하여 가게를 낸 것인데 감칠맛과 푸짐한 양 넉넉한 인심으로 번창해지자 가게를 열게되었는데 가게를 냈으면 간판을 걸어야 하는데 간판을 만드는 사람에 올 때까지 마땅한 가게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차에 마침 앞에 놓인 두꺼비표 진로 병이 눈에 띠자 올타거니하고 결정한 상호가 바로 참진 이슬로 진로였다 . 상호가 상호인지라 지방에서 진로 구하기가 참으로 어렵던 시절에도 웃돈을 주어가며 술을 댔다고 한다 . 그러니 지방소주사의 얄궂은 눈초리를 한 두 번 받은 것이 아니라고 대중매체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 짖꿎게 왜 하필 진로집이냐는 물음의 답이었다 .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볶아내는 두부두루치기는 누가 고안한 음식이냐는 질문에 집주인은 슬며시 웃는다 . 창업주인 어머니가 독창적으로 수십 년에 걸쳐 개발한 것이고 비밀의 양념은 절대 가리켜 줄 수 없다며 은밀한 비법이 있을 것이란 말을 은근히 기대했던 내게 집주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원래 술안주로 두부를 뜨겁게 데쳐 내거나 지져 내다가 보니 심심한 맛에 손님들이 고춧가루를 넣어라 마늘을 좀 더 넣어라 이렇게도 부탁 받고 저렇게도 부탁 받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 하나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지금 상위에 올라 온 두부두루치기고 지금의 양념 맛이라는 것이었다 . 단골손님들이 만들어낸 음식 그것이 대흥동 진로집의 명물 두부두루 치기였던것이다. 지금도 오래된 단골들은 두루치기맛의 저작권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했다 . 노포(老鋪)의 음식이란 이런 것 아닐까. 기실 대전의 두부 맛은 산내에서 비롯된다 . 남북분단으로 이남에 피난온 북쪽사람들이 대전에 정착하며 생활의 방편으로 만들기 시작 한 것이 숨두부다. 원래 두부란 지금처럼 마트에서 사는것이 아니라 땔랑땔랑 종을 울리며 새벽같이 골목을 누비는 두부장수의 손에서 부엌으로 날라 진것이다 . 여간 바지런하지 않으면 안되는 고단한 노역이 바로 두부며 두부장수의 몫이다 .영순옥 추어탕 한밭식당 설렁탕과 함께 대전 음식의 한축을 이루는 평안도식 냉면이며 두부. 그중 숨두부의 전통이 진로집 임금임 여사의 손으로 단골들의 입맛으로 자리잡혀 오늘 명물 두루치기로 되살아 난 것이다 .여기에는 대흥동 부근 관공서의 가난한 공무원과 육군병참학교 관구사령부등의 군인들 충남대의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이 이 집을 드나들며 술판을 벌이면서도 고기 한 점 먹기 어려웠던 시대에 두부를 최고의 안주로 삼아 술을 먹고 남은 양념에 국수 비벼 먹으며 자리를 굳친 음식 . 역대 국회의원이나 충남지사나 대전시장은 어김없이 찾아 들던 허름한 진로집 . 아직도 이천원을 고수하는 장터국수가 당당한 메뉴로 자리잡고 있는 집. 초행길에 집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집 그러나 대전사람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집이 바로 두부 두루치기 전문 진로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