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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나에게 무었이 중요한 일이었으며 앞으로도 그 어떤 것이 중요한 걸까?
근자에 들어서 가끔 자문해보고 곰곰히 생각해 보곤한다.
그간에 난 어떤것이 중요하였기에 거기메 매달려서 이제껏 살아 왔을까!
금방 말 할 수 있다
난 나의 소중한 가족이 이요 그리고 그곳에 나의 입지가 있었고 또한 항상 건강이 나와 우리 가족을 뒷받침하여 주었다
난 거기에 가장 많은 것을 ?P아 부었으니 그것이 가장 나의 중요하였으리라.
에고야 그건 누군들 아니라하냐. 아마도 이정도는 7살백이도 가장 인정하는 부분이다 임마.
그러니 야야! 상식적인 인식에서 벗어난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것을 찾아보란 말야 .
역시 같은 말일꺼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맞는 말이긴하지 나역시 그것을 부인하고 싶지않으이..
돈보다도 건강이 우선이라고 건강이 있어야 돈도 벌고 뭣도(?)할 수 있제!
그래서 우리 동북산악회도 생겨나고 친목이다 뭐다 하면서 정신적이요 육체적인 건강을 위하여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건강한다 하며 발바닥이 쉴새없이 맹진하는 것 아니냐!
정말 건강 중요하제. 허지만 어째 마음에 확 와닫지 않으니...
내 지금 50객 중반을 지나치면서 나의 중요한것이 정말 무었일까 과연 건강이 일까 이제 ?죽어빠져 불속에서 살아질 날 얼마 남지 않았건만 무스거 건강이 그리 중요하단 말이냐
건강한 님들도 어느날 갑자기 숨이 껄떡 넘어가는거 무지기 봐왔는디 참말 무었이란 말이냐. 무얼까?
사람들은 흘러간 시간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그속에 배여있는 일상적인 사건과 함께 도매금으로 잊어버린다 아무리 중요한 것이었지만 시대따라 세월따라 그당시 매우 중요시 하였던 그것도 지금은 중요함이 없어졌다는 가치관이 변해서 그냥 잊어버린다 아니 애써 잊으려 하더라 (실연 당한 연인들 처럼...잊으리 ..)
난 어느정도 였을까 나에 대하여 좀 아는 사람은 말하더라 뭔가 인간적인 냄새는 나는데 그따라 냉정한 부분도 많고 꼴통같기도 하지만 때론 이지적이기도 하고 ?y가 돌출적인 눔이라 하더라 만 그건 다 헷갈린 자들의 개딱지 소리구(계속)
(10월2일시작)
어느때 였던가 술좌석 이였는지 그당시 대화중에서 한사람이 한여자에게 농담처럼
그게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 하면서 한강에 배지나가면 뱃자국 남더냐 뭐 다 그런거 야냐1
히야까시같은 추근거리는 남정네 이죽거리는 소리에 그때 아마 그 여자는 그저 웃고만 있었는데 ..
듣고있 던 난 뭔가 반문해야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튀어 나온말이 이랬다
야 아무리 한강에 배 지나간 자국은 남지않지만 사람이라면! 그때 배가 그곳을 지나갔다는 기억을 남을 것 아냐 ! 하고 변죽을 울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들을 잊고 있었다.
나같이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내가 뱉어낸 이말을 기억하게 된 이유는
그들과 대화에서 당시 그 여성에 대하여 착각인줄 모르나 그가 나에게 가까히 닥아온 느낌을 받았기에 그 여인의 상을 기억하고 있었습이다.(이미지상)
그후로 4-5년 지난 후 그때 그 여성을 우연히 잠시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나자 하는 말이 저는요 그전에 이사장님이 한 말씀을 지금껏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며 희미한 내추억을 더듬게 하였다.
사장님이 하였던 말!
사람은 한강물에 배가 지나간 자국은 남지않으나 지나 갔다는 건 기억은 한다고 한 그말이 너무 깊이 마음 속에 담아졌기에 그후 살아오면서 ..
(10/8 글이음)
자신이 하고 난 일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남으로 부터 믿음을 받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산다하였으니 이건 순전히 이사장님 덕이었다며 정말 멋진 명언이었다고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었다!
내가 한말이었지만 나도 몰랐던 말이었으나 그 이후 부터 나도 그말의 의미를 다시 느끼고는 나를 되내이는 시간을 갖게 되다 보니 나에 대하여 나자신이 많은 걸 요구하게 되었고 그걸 지키고 해내려하니까 매우 힘들고 고민을 많이 하게되었다
나로서도 지나간 세월은 내가 나를 잊은체 보낸 것 같았다. 그래도 지난 세월은 내가 청춘같은 시절이었으니 감내 할 수가 있었다
허지만 말년을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는 그간에 사업적이었고 사회생활에서 눈치코치 보고 살아온 세월은 이제는 싫증이 났으니 그런 나를 그만 버리고 이젠 나도 나만이 중요한 것을 찾아보아야 겠다는 편향적 사고가 나를 충동질 한다
과연 이제는 내가 무었을 중요하다 할까 는 반문이 시작된 것이었으니..
혹 이글을 읽고있는 방문객이나 회원님께서는 그저 넋두리라 생각하고 읽어보시고 나 또한 앞으로 내가 무었이 중요한걸까를 생각해 내는대로 써내려 갈것이니 제위께서 읽거나 말거나 난 이글을 이어져 갈껍니다 (계속)
2004년10/10일): 나에게 가장중요 한 것은 시간이다 건강도 시간을 이기지는 못한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난 그간에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여진다
사업한다고- 주색잡기 등. 일상적인 삶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을 꺼다 후회스러움은 없다 단지 그동안 난 지난 것을 잊혀지기만 하였지 기억하고 생각한 은 너무 적었던 것이 마음이 편치를 않다 소중한 것에 소흘히 하지는 않았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이제부터 내가 날 위하여 주어진 시간을 어떻에 사용해야 할까 하는 암담함과 이미 세뇌된 일상적인 삶을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슴을 방망이 친다
철처한 나만의 삶의 시간을 갖고싶다 그럼 이기적이고 비타협적인 삶의 시간이 되면 어쩔까..
이제까지 주변에서 나에 대한 칭송과 질시 비난을 이제껏 그렇게 공유하고 살아 왔지만 앞으로도 과연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거나 모르는척 할 수 있을까 ?
사람은 본심을 버리고는 못살것이다 다만 감추고 살뿐이라고 말하고싶다 세상사 어느정도 알 나이는 50을 뛰어 넘으려는 때라고 하지않을까-
(2005년2/21)실로 몇개월 만에 이글을 펼쳐본다 처음 이글을 써내려 가자는 마음은 나의 남은 행로에 대한 일기같은 마음에 접하였는데 그새 세뇌된 일상생활을 버리지 못한 버릇된 일과를 언뜻 지속하였기에 상당한 시간을 이곳에서 멀어져 있었는것 같고 -
사람은 끌없이 반복된 생활속에서 자신을 추스리고 복돋으며 생의 마감까지 자아를 부정하거나 긍정적인 삶을 일깨우며 산다하였으니 거기에 나도 얼마나 접하였었는지 모르겠다 .
2005년 2월 나는 이시점에 어떻게 서 있는 걸까 음파처럼 나로부터 번져나가는 소문에 귀를 귀우려 본다 언뜻 빈정거림도 들린다 그 예로 나같은 사람은 나가서는 주변사람에 인기도 있고 권위도 있어 보이나 집에들어가면 맹탕이란다 집안에서는 영 딴판이라는거다 이런 말은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소문이라기보다는 거의 실질적이 사실처럼 나에 대한 평판으로 굳어져 있는것 같았으니..
왜 나에게 이런 딱지가 붙어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도 한 남아요 지아비로서는 그리 썩 좋은 점수는 받은바 없다 하겠으나 그렇다고 집에서 기본점수는 받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
그렇다고 나는 변명을 늘어놓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던 이 나이에서 그런 의미는 나의 존재를 그들이 어떻하던 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치부하고 싶으니까 -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입맛대로 살아 갈 수는 없는것이다 내가 알기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동네 소문에 따라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리던 따라가려고 있는 지혜를 다 짜서 살아가는 사람이 꽤 많은것 같으나 나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을 적어보자
성인으로 우러러보는 공자님도 제사는 골에 먼저 비오라는 속담이 있듯이 소문도 그들 좋은대로 퍼트린 것이니 아무리 그렇게 폄해한 말이 번진다 해도 자신이 뚜렷한 소신이 있다면 능히 대처하고 남을 것이나 그것에 말려들어 피하려 든다면 결국 그 소문대로 질질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 설혹 사업상 실패하여 대궐같은 집에서 전세방이나 삭월세 방에 산다하여 창피하여 쉬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은 당당하고 떳떳해야 건전한 사고가 뒤따르고 그러므로 자신을 극복할 길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난 미아리 이곳 미아4동에 13살에 이사왔다 그전에도 미아리였고 그 이전에는 동순도 명륜동 이렇게 살다왔으니 그러니까 43년을 이곳 한자리에서 살은것이다 이곳에서 세아이를 낳아 키웠고 생활근거지가 이곳이다 나많큼이나 이곳에서 오래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치않을 것이니 -
언제부터인가 다수의 주민들이 한자리에 오래 머물고 살지않으나. 그래도 적지않은 주민이 10~20년을 살고있다 함은 난 그들의 눈에 희미하나마 표적이 될수있었다. 그랬기에 남보다 내가 많은 그들의 입담의 주된부분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이곳에서 사업도하고 사업도 거반 4동에서 왔다갔다 하며 하였으니 - 나의 소문도 꽤나 있었을 법한데 난 그것에 대하여 철처히 무시를 하였고 냉담하였다 내소문에 대하여 휩쓸림없이 당당하게 버티어나갔다 즉 그들 앞에서 아랑곳 않고 내색도 않하자 결국 내소문은 잠행하였다 - (없어진 것이 아니었지만 ) .
우리사회는 상대의 칭송보다 비난이 더 거세다 또한 여자입장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칭송하는 것이 더 많듯이 남자들역시 남자보다는 여성이 더 남자에게 비난이 적다 이말은 -
남자가 남자를 보호 또른 배려하려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상대남자를 자기보담 낮게 보이면 어떻허던 깍아내리려 한다 그래야 자기 존재가 더 돋보이기 때문이라 생각들 많이하니까-(남자의 속물근성)
나역시 그런부류들 속에 완전히 배제된 속성이라고는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솔직히 인정할것은 이정해 주는 쪽에 가깝다 하겠으니 -
어떤 부류의 사람은 상대가 자기에게 인심을 베풀었다치면 그걸 겉으로 상대에게 과맙다 표시는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꼬득여 얻어먹었다는 생각 또는 자기가 무엇인가 필요하였기에 나에게 인심?㎢鳴? 생각하며 진식로 고맙다는 속마음이 없는 사람이 많다 -
사람은 거지에게 동냥줄때 거지가 불쌍해서 주는것이 바로 자신이 그러한 마음으로 부터 탈출하고자 적선한다고 한다 즉 인?資? 쓰는 것이 아니라 급속히 발생한 자신의 히스테리를 달래기위해서 준다는것으로 말하자면 동정심은 아니라는 역설적인 말이다
우리사회는 이런 히스테리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 그래서 상대를 불신하고 혐오하고 비난한다 상대를 칭송하면 자신이 작아지고 무언가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난 얼마나 그런 사고에서 벗아나 있쓸까 생각해보면 --
앞서 말하면 그러 부류보다는 스스로 좀 나은 편이라 자위하고 싶다
(계속)
2005년4월9일: 히스테리 근자에들어 난 자주 히스테리에 접한다 별대수롭지 않은일에 화를 잘내기도 한다 계절적인지 주변 환경 탓인지 모르지만 사업상 쪽에 많이 가까운 것 같다
앞서 말햇듯 공자님도 제 사는 골에 비먼저오기를 기다린다는 속담은 인간사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난 조금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꺼면 좀더 아끼고 포장해서 잘 간수하여야 하는 것이 보통 범인들의 상식인데 - 도무지 나에게는 그것이 잘 안된다 이유는 열거하기 전에 -
동네 아주 잘아는 선배 한 분이 술 공짜로 먹는 법을 아르켜 주었다 여럿이 술자리가 끝나면 제일 먼저 계산대에 나가서 돈을 지불하라는 것이란다 허지만 계산대 앞에서 짐짓 주머니마다 뒤져보이며 낭패한 빛을 보이고 있으면 같이 좌석했던 사람이 대신 내 준다는 것이다
선배가 한 말은 명쾌한 해답이었다 기실 나도 몇번 그런 경우를 당했으니까 사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술값은 내겠다고 하였으면 내었겠지만 아마도 얻어먹는 술 좌석 같으면 절대 낼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그건 애교로 봐줄 주 있다.
어떤 뻔뻔한 사람은 자기가 술값 내겠다고 옆사람 카드 빌려가 끊어놓고 나중 내가 언제냐 식이다 얼마전 연합회에 어떤 산악회회장에게 나도 당했지만 -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남자에게는 눈치것 큰소리치며 얻어먹으려 하지만 여자에게는 인심을 잘쓴다 좀 반반하고 이쁘다 싶으면 10년 꼬깃꼬깃 숨겨논 비상금까지 털어내는 습성이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한가지 공통된 사고방식은 그런대상을 만나면 친구나 선후배 의리고 뭐고 없다 어떻허던 환심사고자 온갖 정성을 다 ??아버린다 상대가 직업여성이라면 좀 괜잖다 허지만 상대가 어떤 구룹에 속해 있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별별 짓거리를 다하며 대쉬한다 헌대 그런부류의 사람은 절대적 의리가 없다 어떤 일을 하더래도 댓가가 있어야 한다
나는 곰곰히 생각한다 또한 나는 형제가 없는 독자다 내가 크면서 내주위에는 맨여성
뿐이었다 위로 누님두분(작고)이 있었고 10년차 나는 여동생이 있다 위로 8순의 노모가 계시고 딸둘에 아들하나다 지금은 며느리에 손녀하나 손자 하나다
남자가 귀한 집안이다 그래서 그런가 여성에 대해서는 그리 폭빠지는 성격이 아니다 오랫동안 집안에 여성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살아왔기때문일 것이다
허지만 남자들과는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살아오면서 부족하였지만 작은 희망이라도 때를 쓰면 들어주던 어머니와 누님이 있었기에 그런대로 나를 충족시키며 커 왔기 때문일까 -
술은 35세를 넘어서야 배웠다 담배는 고등학교시절부터 피웠지만 40세쯤에 끊었다 대신 술을자주 마셧다 그래서 주변에 술친구가 아주 많았다
술친구가 많은 것도 자랑은 아니지만 본인이 술자리를 자주 펼??기에 주변에 술친구가 많은건 사실이다 10 에 8할은 내가 먹자 하였으니 -
헌대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 술배우고 나서 처음에는 어울리는 사람하고 계속 어울렸다 그러다가 다른사람이 끼면 먼저 그 사람과 만남 횟수가 적어지고 새사람과 어울린다 이런식이 계속 반복 되다 보니 술 싫컷 사주고 괜 시리 비난과 먼저 사람으로 부터 욕을 처먹는다 -
관연 누가 욕을 하여야하고 누가 욕을 먹어야 할까 이걸 여자들은 시샘이나서 질푸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의리부동하다 고 비난한다 그럴까 ? 허지만 난 자유로울 수가 있으니. .
2005년 5월14일): 살아가면서 낭비하는 사람 아끼는 사람 수전노 처럼 모으기만 하는 사람 대략 부류가 셋이라 논하고 싶다 남자나 여자나 돈은 획득하기위하여 부던히 노력한다 노력에 대한 댓가로 많은 부를 축척하기도 하고 잘못짚어 실패도 뒤따른다
난 어릴적부터 돈에대한 애착심이 별로였던것 같다 아마도 그건 내가 살아온 과정이 많은 영향을 준것같아 내가 살아온 과정을 우선 적어본자 -
우리 어머니는 내가 2살때 6.25 전쟁중 2살위 둘째누님을 병으로 잃으셨지만 나와 5살위 큰누님을 생활고로 내나이 6살때 부산에 있던 나의 고모에게 의탁하였으나 우리 고모는 양육하기 어려웠던지 전쟁고아들이 있던 고아원에 보내졌다 나와 누님은 부산 전쟁고아원에서 1년 남짓 있었는데
당시 어렴풋이 내가 알기도 그 전쟁 고아원은 먹거리와 입는것 장남감등이 국내 꽤 잘산다는 집보다 훨씬 윤택한 삶을 살았다고 볼수있다 내가 고아원을 나와 당시 고아원에 있을때 갖고 놀던 장난감이 몇년후에 부자집 도령들이 갖고 있는걸 보았으니 미국 100%원조를 받던 고아원 생활을 엿볼수있다
(여기 사진은 고아원 생활할때 작은 어머니가 찾아와 고아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내가 알기로는 최초의 내사진이라 하겠다 (사진 좌로 부터 나의 고종사춘누나 본인 5살정도 작은어머니뒤에는 친 큰누나 (73년 작고)
옷입은 모양세가 제법 질 좋은 것이고 그때는 잘먹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미군원조로 먹어서인가 얼굴이 포동포동하다 )
아래 사진은 내가 1964년 창경초등교를 졸업할때 찍은 사진을 비교하여 보면 국내 경제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수있다 졸업시장에서 큰 누나가 찾아와 사진을 찍고나서 누나가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누나는 야간 고등학교 다니면서 낮에는 돈암동 자혜의원 사환으로 있었다)
그시절 나의 할아버지는 함경북도와 만주 국경지대에서 벌목업을 하고 계셨다 한다 아들둘을 서울 동순동에서 유학을 시키고 있었고 큰딸은 할아버지 고향인 풍기에 부자집으로 시집보내셨다 하는데 815 해방되기 몇해전에 나의 고모부가 돌아가셔서 부산에 살던 큰딸(나의 고모)집으로 찾아가 초상을 치르고 고모네 식구들을 부산으로 이사시키고 서울 동순동에서 집얻어 살던 아들 형제집에 눌러앉게 되었다 한다 당시 함경도에서 사업이 꽤 크게 하였지만 일제 말기에 사업이 부진하던 중 나의 고모부가 돌아가셧다는 말에 사업을 정리하고 오셧는데 만일에 북에 남아 있었다면 만주를 통하여 중국으로 도망가지 않았으면 부르조아 (자본주의)사상범으로 몰려 김일성 집단에게 처형되었을 껀대 빈털럴이는 되었지만 천만다행으로 북으로 가지않아 목숨을 건진 것 같다 -
나의 할아버지는 동순동에 정착하였지만 고보를 나와 화공약품 다니던 아들에 의탁하여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 근처 이웃에 살던 나의 외할머니의 눈에 우리 아버지가 사위감으로 보여 그집 윤씨집 2남 5녀 막내딸이었던 나의 어머니와 결혼하였다 나의 외가는 외삼촌이 트럭 여러대로 운수업하여 동순동에서 제법 떨떵거리고 살던 집이라 한다 동순동에서 내 위로 두 누님을 두었고 나를 625 직전에 낳았다
나의 부모는 나를 낳던해에 강원도 삼천 피아골로 이사를 하였다 그건 나의 할아버지가 벌목에 의한 목제업를 다시하고자 하였다 한다 삼척 피아골에 정착한 부모는 탄광촌 부근에서 부친이 화학소수를 내리는 기계를 만들어 많은 부를 축척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6.25가 터저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와 부역으로 끌려가 528 수복 때 살해 당하셨다
전쟁 중 어머니는 두딸과 갓난 나를 업고 할아버지와 보따리 장수로 피난생활을 하고 다니다가 풍기에서 마마를 앓던 나의 둘째 누님을 잃고 상심하자 할아버지는 나의 남매를 데리고 부산서 살고 계시는 딸네(나의고모)집에 의탁하려 하였으나 어머니는 장사하신다고 서울 외할머니(친정)네 집으로 가셨다. 그때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시고 5섯 남매를 혼자 키우던 고모님도 힘들었던지 우리 남매를 부전동에 있던 모 전쟁고아원에 보내 졌다 한다 고아원에서 1년 가까히 생활 하던 중 서울 외할머니가 우리 남매를 잦아내려와 서울 동순동 외삼촌 집으로 데려갔다
어렴풋 생각나지만 그때 외할머니랑 기차를 탓는데 2틀밤을 기차에서 보낸 기억이 나는걸 보니 당시 부산서 서울 오는 기차가 아마도 2특은 족히 걸린리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94세에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는 최씨 문중 무남독녀로 고집과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하였다 한다 내나이 29살에 외할머니가 타계하셧는데 그당시 어디에서 살던 호랑이 할머니라고 소문이 났었고 90 이라는 연세에도 바늘귀를 끼는 눈과 자하문에서 미아리까지 걸어 다니시는 건강하며 키가 156cm로 큰키였었다 )
나의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닮었는지 외지로 보따리 장사하러 다니시기에 외삼촌집에 있던 우리 두남매를 한 달에 한 두번 우리 남매를 보려 오셧다 전쟁직후라 모든게 부족한 시절이라 외삼촌도 트럭이 625때 다 징발되어 망해버렸지만 그중 1대가 남아 트럭을 개조하여 운수업을 어렵사리 하고 있어 나를 정능살고 계시는 셋째 이모네 집으로 다시 보내졌다
허지만 외할머니 성화에 명륜동으로 이사온 외삼촌네 집으로 다시와서 원남동 근처 창경 초등하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외삼촌은 그다음해 미아리 (지금의 숭인시장)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때 부터 미아리 사람이 되었으니 한 50년 가까히 살고 있다 하겠다
내가 3학년 막 올라가던해 재가하여 하월곡동에서 어렵게 사시던 어머니는 나만 데려가셧고 누님은 그해 초등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 할 당시 어려워진 외삼촌이 돈암도 자혜병원에 사환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누님은 야간 중 고등하교를 마쳤지만 -
술고래로 피둥 피둥 놀던 새 아버지를 믿을 수 없어 어머니는 조금 있던 재산을 길음시장에 점포를 얻어 이사하여 숙대국집을 차렸다 이때부터 소년기 시절의 나의 성격이 형성되기 시작 한 것 같다
내 의붓 아버지는 술 안먹으면 양반인데 술만 먹으면 술주정뱅이라 술만먹었다 하면 일주일 이상 술만 내내 먹었다 그러니 집안에 내가 정을 붙이고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난 나데로 초등학교에 만 다녀오면 내 또래 아이들 여럿이서 길음시장 뒷산과 정릉천을 오가며 부모들 간섭없이 멋대로 살았다
용돈도 어머니가 식당을 하기에 달라면 푼돈은 자주 준 편이고 당시 모든 야체가 미아리 고대를 넘어 돈암시장에 가야 값을 많이 받기에 야체장수가 손수레에 잔뜩싫고 미아리고개 앞에서 우리들과 흥정하여 길음다리 위에서 부터 그 손수레를 고개까지 밀어주고 지금 돈으로 2.000원 가량 받았다 수레를 밀고 미아리고게(지금은 많이 낮아졌다)오르면 수고비 받아 냉차 한컵 사 마시고 내려오면 주머니에 호떡 3장 사먹을 돈이 남았다(그때 대영빵이 있었는데 맛이 아주 좋아 자주 사먹었으며 미아리 고개호떡집은 한 50년 정도 미아리 살았던 사람들은 다알고 있다)
첫댓글 그냥ㅡ그냥 지금그대로 얼마나 좋아요 인생 허무하다고 생각 하지 마세요, 외롭고 쓸쓸하다고 생각하면 병나죠,
이백님 가족사진 잘보앗습니다
향기가 장담하건만 이백님의 앞으로의 인생은 영화처럼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요?이백님은 편안함속에 묻어나오는 사람냄새가 매력을 넘어 마력으로 와닿는데요? 점점 좋아져서 큰일났어요 나 어떡해요?
향기님 난 그럼 웬지 괜한 흥분이 감돈니다 어여삐 보아주어서 감사하고 많은 지지 부탁드리네요.
이백님의 센치멘탈 하심이 조금은 이해가 안되지만 우리모두 인생의 내리막에서 느끼고 공유하고픈 부분 공감합니다,늘푸른 영희로 닉~~바꿨어요,멋진 휴일되세요.^^*
영희씨 남자나 여자나 어느 시점에서 자신도 모르는 우울증 증세가 있기는 다 마찮가지나 단지 어느정도 중하냐 또 그걸 극복할 정도냐 이런점에서 가벼운 증세가 센치멘탈이라지요 중년을 훌쩍 넘어설때 자신이 그들 관심밖으로 내몰린 다는 서글픈 마음 여기에 주저앉지않으려는 몸부림 치는 불혹의 중생일꺼요 ..
이태민 사무국장님 지난번에는솔직히 사진만보고 평가했는데 이백님 나이가 만만찬네 할아버지네 미아4동 토주대감님이시고 왠지 마음이찹찹하지요 ^0^ ㅎㅎㅎ이백님은 40대 같아요^*^ 동북 회장님 화이 팅
고바우님 항상 격려의 말씀 넘 고맙고 기분이 솟습니다 고바우님 많은 세월을 떠나 보내온 이시대의 사람이지만 항상 맑은 정신으로 건전한 삶을 영유하고 청순미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들려주어 감사드립니다
^0^^0^ 감기가 너무심해서 한동안 떰했어지 예삐게봐주니 몸둘바을 모르겠시유 고맛구만유 땡큐
그래도 회장님은 멋지게 사시잖아요
이백님 오늘 수락산 친구랑 갈려고 약속을했는데 딸집에 있으서 또못가네요 그래서 다시 쯕 보왓네요 음... 그랬군요 나도길음시장 무지많이다녀는데 63년도부터 서경대 자리옹달샘 돌산 또똥밭 소설같은이야기.....
저보담 더많이 알고 있는것 같습니다 과거 서라벌 고등학교 동네는 9 번지 미도극장자리 동네는 시셋말로 부촌 숭덕초등교 가지전 동네는 양동네 이렇게 불렀다 생각됩니다
아직도 많은글이 남은것 갔은대 다음글 빨리 올여주세요 저도 그호떡 먹어봣어요 자 ~~다음글8282시작하시죠 글 다일고 독후감 쓰겠습니다~~~
나만의 삶 만 가지고는 살수가 없는것같으네요 하지만 모든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모든것이 행복일것 같아요 회장님은 정말 멋진분이세요 항상 건강하시어요 ^ 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