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동북부 지역 사찰 순례기(巡禮記) 2부 ~~~~~
(보타암, 개운사, 보문사 / 경국사, 화계사)
* 2004년 5월 26일 15시 ~ 21시까지
★
연등으로 가득한 북한산 화계사(華溪寺) 경내
4. 북한산 경국사(慶國寺) - 서울 유일의 조선 후기 목각탱화가
있는 곳.
▲ 경국사 위치도
보문사를 둘러본 후, 정릉동에 있는
경국사를 찾아갔다.
보문역 정류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이용해온 서울시내버스 1번(정릉동↔방배동)을
타고
정릉4동 사무소에서 하차, 정릉천(貞陵川)을 건너면 웅대한 규모의 경국사 일주문(一柱門)이 나온다.
* 여기서 잠깐 북한산 경국사(慶國寺)의 내력을 살펴본다면..
북한산 정릉지구에 자리한 경국사는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하였으며, 1330년에 승려 무기(無奇)가 여기에 머물며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일으켰다.
1331년(고려 충혜왕 원년)에는 권신 채홍철(蔡洪哲)의 지원을 받아 선방 등을 증축하였으며,
1352년에는 인도에서 온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이 곳에 머물렀다.
조선 인종(仁宗) 때와 명종(明宗) 때는 불교를 신봉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며, 절이 중창(重創)된 이후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청암사에서 경국사로 변경하였다.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송시열(宋時烈)의 건의에 따라 태종(太宗)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던
태조의 2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姜氏)의 정릉(貞陵)을 복원하면서 국민대 근처에
있는 봉국사(奉國寺)와 함께 원찰(願刹)로 지정되었으며, 고종 원년(1864년)에는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재를 열었고, 1868년에 호국대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조선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하였다.
20세기 초반 암흑기 때는 단청과 탱화 전문으로 널리 알려진 보경(寶慶=寶鏡) 스님이
경국사의 주지로 60년간 머물면서 절을 발전시켜 나갔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보경 스님를 만나러 여러 차례 찾아왔으며,
1953년에 아메리카 합중국 부통령인 닉슨이 방한(訪韓)했을 때 이승만은 그를 데리고 이 절을 찾아왔다.
아마도 그에게 보경 스님을 소개시켜주기 위해 그런 듯 싶다.
현재 경국사에는 보물 748호로 지정된 목각탱화가 있으며.
극락전, 삼성보전, 선방 등 6~7동의 전각이 있는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 경국사 찾아가기 (2004년 7월 기준)
1. 지하철 4호선 길음역에서 서울시내버스 143,162,1013,1113,1114번 이용,
정릉4동사무소에서 하차, 도보 5분
▲ 웅장한 규모의 경국사 일주문
보문사 입구는 행상(行商)들과 절을 찾아온 사람들로 매우 북적거린데 반해
경국사 입구는 행상들은 커녕 절을 찾은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경국사는 평상시에는 신도가 아닌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지는 않으나
절 입구 안내문에 일반인들은 출입하지 말라는 문구(文句)가 있으며,
경국사 승려들도 일반인들의 절 관람을 별로 반기지 않는 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4월 초파일 대목임에도 절 경내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 용이 새겨진 2개의 돌기둥 위에 일주문의 맞배지붕이 놓여져 있으며,
현판에는 '三角山 慶國寺'라 쓰여 있다.
▲ 경국사 가는 길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면 나무로 우거진 절 진입로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 경국사 약수터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200m 정도 가다보면 길 왼쪽에 약수터가 하나 있다.
약수터 위에는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쓰인 3개의 돌 조각이 있고
그 앞에 3분의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손과 머리에 100원짜리 동전을
들거나 올려놓으며, 나에게 기념촬영을 부탁하고 있다.
석불 앞에는 파란색 바가지들이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 경국사 약수터
약수(藥水)는 저 샘 안에 있으며 바가지를 아래로 약간 내려
물을 떠먹으면 된다.
▲ 경국사 부도(浮屠) <오른쪽은 부도 탑신부(塔身部)에 새겨진
명문(銘文)>
약수터 건너편에 우아하게 생긴 부도 1기가 세워져 있다.
부도(浮屠)란 쉽게 말하면 승려들의 무덤으로, 승려가 입적(入寂)하여 화장(火葬)을 하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사리가 나오는데, 그 사리를 봉안한 것이 이 부도(탑)이다.
이 탑은 경국사를 크게 중흥시키고 한국 전통의 단청(丹靑)과 불화(佛畵)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보경 스님의 사리탑으로 그의 휼륭한 공적에 걸맞게 우아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탑신부에는 '寶鏡堂大宗師之塔'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 경국사 무우정사(無憂精舍)
경국사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여기서 무우(無憂)는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 무우정사(無憂精舍)를 지키는 개
황구(黃狗) 1마리가 나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개는 그 때까지 열심히 자고 있다가 절을 찾아온 사람들의 인기척으로
잠에서 깨어났는데, 왜 잠을 깨웠냐는 듯. 원망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 경국사 삼성보전(三聖寶殿)
칠성신(七星神), 산신(山神), 독성(獨聖,나반존자)을 모시는 전각으로
다른 절에서는 보통 삼성각(三聖閣)이라 부르는데 반해, 이 곳은
특별하게도 '삼성보전'으로 높여 부르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음.
▲ 왼쪽은 경국사 극락전 아랫쪽에 새겨진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오른쪽은 경북 상주 남산공원에 있는 주악천인상
극락전(極樂殿) 벽면에 천의(天衣)를 휘날리며 비파(琵琶)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비파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저번 5월 8일, 상주(尙州) 남산공원에서 만났던 주악천인상의
모습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다른 면이 있다면 오른쪽 천인상은 탑 기단부에 조각된 것이고, 왼쪽 천인상은 벽면에
채색된 것이며, 오른쪽은 왼손 쪽을 보고 있으나 왼쪽은 오른손 쪽을 보고 있고
머리 뒤에 둥그런 두광(頭光)이 달려 있는 것 정도..
비파를 연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그의 연주가 듣고 싶어진다.
과연 무슨 노래를 연주하고 있을까?
▲ 연등으로 가득한 경국사 극락전(極樂殿)
이 전각은 경국사의 법당(法堂)으로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모시고 있다.
전각 앞에는 사월초파일 행사로 괘불(掛佛)을 걸었던 높다란 장대가 있으며,
전각 아래에는 관정(灌頂) 의식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사진에 담지는 않았다.
▲ 경국사 극락전에 있는 목각탱화(木刻幀畵)
이 목각탱화(木刻幀畵)는 나무를 조각하여 도금(鍍金)을 입힌 것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몇 개 안되는 목각탱화 중에 하나이다.
흔히 '목각탱화(목각탱)'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북 내륙지역의 상주 남장사(南長寺),
문경 대승사(大乘寺),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목각탱 정도만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중심지 서울에도 그에 버금가는 보물급 목각탱화 1점이 이 절에 전해오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탱화는 중앙의 아미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으며, 그 주변으로 13구의 불상과
보살이 어지럽게 자리해 있다.
중앙에 자리한 아미타불은 커다란 광배(光背)를 뒷배 삼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위에
앉아있으며, 전체적인 그의 모습에서 볼 때 얼굴이 상당히 큰 것 같다.
아미타불 주변으로는 아미타 8대보살과, 사천왕(四天王), 나한상(羅漢像)등이 있으며,
몇몇 보살상은 아름다운 모습의 연꽃 잎을 들고 서 있다.
나는 극락전 아미타불 뒤에 걸려있는 이 목각탱화를 찍으려고 내부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마침 저녁 예불(禮佛)이 열리고 있어서 들어가질 못했다.
그래서 멀리서나마 열심히 사진을 찍어보았으나, 모두 흐리게 나오고, 이상하게 나오는 등,
괜찮게 나온 것이 없어서, 부득불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사진을 사용하였다.
내가 경국사의 목각탱을 보기 위해 3번 정도 찾아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모두 비공개를 했기 때문에, 그러다가 이번에 그것을 보게 되니, 비록 멀리서 봤지만,
보문사의 괘불(掛佛)을 본 것과 같은 뿌듯함이 느껴진다.
이 목각탱화는 보물 748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지정된 지 21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와 관련된 안내문이 설치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문화재 안내문을 설치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하루빨리
그것을 설치하여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길 바란다.
그 탱화가 경국사의 소중한 보물임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경국사만의 보물이 아닌
우리나라 전 국민들의 소중한 보물임을 자각(自覺)해주길 바라면서..
▲ 경국사 명부전(冥府殿) 10왕상(十王像)
지장보살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5왕씩, 모두 10왕이 앉아 있다.
저들은 이승을 떠난 사람들의 행실(行實)을 평가하여
그들의 극락과 지옥행을 결정한다. 특히 7번 째에 앉아 있는 염라대왕(閻羅大王)은
그 영향력이 상당하여 그가 사자(死者)의 행적을 평가하는 7주차에
유가족(遺家族)들이 49재(칠칠재,중유제)를 지내 망자(亡者)가 편안히 극락에 가도록
염라대왕에게 재를 지낸다.
10왕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진상한 꽃들이 정적이 감도는 전각 내부를 화사한 분위기로 만들어 준다.
나는 지징보살과 10왕에게 삼배(三拜)를 올리고 명부전을 나왔다.
▲ 경국사 명부전(冥府殿) 구석에 앉아있는 불상 하나
명부전 한쪽 구석에 철로 만든 불상 하나가 외로이 앉아 있다.
저 불상의 정체는 무엇인지? 혹시 전각 중앙에 앉아있어야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아닌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누굴까?
▲ 경국사 범종을 치는 아저씨
삼성보전 옆에 있는 종각(鐘閣)으로 가보니 마침 타종(打鐘)할 시간인 저녁 6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승려가 와서 타종하겠지 싶었는데, 승려 대신 경국사 관계자로 보이는
아저씨 1명이 종각으로 들어와서 조심스런 마음으로 종을 친다.
솔직히 저녁 종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새벽 종소리는 몇 번 들어봤는데,
그윽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잠시나마 복잡한 세상근심을 잊어본다.
♠ 5. 북한산 화계사(華溪寺) - 조선 왕조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던 황실 사찰..
약 30분에 걸쳐 경국사를 둘러본 후, 화계사를 찾아갔다.
여기서 화계사까지는 매우 가까운 거리이나 한 번에 갈 수 있는 대중교통이 없으며,
적어도 미아동SK아파트까지는 가야 그 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수가 있다.
그래서 미아동으로 통하는 가파른 솔샘길을 걸어올라 성북구와 강북구의 경계인 솔샘터널을 넘어
미아동 SK단지에 이르러 서울시내버스 441번(화계사↔월곡동)을 타고 화계사 종점에서
하차하여 화계사로 올라갔다.
화계사로 올라가는 길목은 아까전 보문사와 마찬가지로 행상들과 절을 찾아온 사람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는데, 화계사 입구에서 일주문 못미쳐까지
대략 400~500m에 걸쳐 길게 장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미 날은 서서히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장터의 분위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행상과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지나면 시원스런 모습의
화계사 일주문이 나를 맞이한다.
▲ 화계사 일주문(一柱門)
* 여기서 잠깐 화계사의 내력을 살펴본다면...
화계사는 북한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산사(山寺)로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에 소속되어 있다.
이 절은 1522년(중종 16년), 신월(信月) 선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는데,
원래는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년)때 광종과 친분이 두터워던 탄문대사(坦文大師)가 화계사 근처인
부허동(浮虛洞, 어딘지 모르겠음)에 보덕암(普德庵)을 창건하였는데,
이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화계사의 전신(前身)은 바로 보덕암(寶德庵)이며,
화계사의 내력은 10세기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쨌든 1522년에 보덕암의 신월선사가 황실종친인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협의하여
보덕암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사명(寺名)을 화계사(華溪寺)로 바꿨다.
1592년 쪽발이들의 반란 때는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1618년(광해군 10년) 9월에
화재를 만나 절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다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집안의 시주로 크게 중창을 하여 1619년에 낙성을 보았다.
그 이후 1866년(고종 3년)에 용선도해(龍船渡海) 스님과 범운취견(梵雲就堅) 스님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시주를 받아 불전과 승방(僧房)을 중수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이 절에 시주를 한 이유는
이 곳이 여흥민씨 집안의 원찰(願刹)로 그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자주 화계사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 덕분에 대원군은 화계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
1870년(고종 7)에는 용선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1876년에 조선 황실로부터
자수(刺繡)로 만든 관음상(觀音像)을 하사 받았는데, 이 관음상을 모시기 위해 같은 해에
관음전(觀音殿)을 중수하였다.
이 자수관음상은 1876년에 고종의 원자(나중에 순종)가 태어나자 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신정익황후(神貞益皇后) 조씨, 헌종(憲宗)의 비(妃) 명헌왕후(明憲王后) 홍씨
등의 발원으로 궁녀들이 정성스레 수를 놓아 만든 것이라 한다.
1880년(고종 17년)에는 신정익황후 조씨가 명부전 경비에 쓰라고 불량답(佛糧畓)을 하사하였으며,
황실의 원로들과 상궁들의 왕래가 잦아 사람들이 화계사를
궁(宮)절이라고 불렀을 정도..
1883년에는 금산스님이 신정익황후와 명헌황후의 시주로 관음전의 불량계(佛粮契)를 설립했으며,
1897년(고종 24년)에 경북 영주 희방사(喜方寺)에 있던 대종(大鍾)을 이 곳으로 옮겨왔고,
전남 장흥 미황사(美黃寺)에 운판(雲版)을 이 곳으로 옮겨와 봉안하였다.
1937년에는 종식 스님이 낡은 전각들을 정비하고 삼성암으로 오르는 길가 바위에
관음보살을 조성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다행히 병화(兵禍)를 피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境內)에는 서울지방유형문화재 65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희방사에서 가져온
조선 중기
범종이 있으며, 대웅전, 대적광전, 국제선원을 비롯하여 약 10동에 가까운 전각이 있다.
특히 이 절은 국제적인 사찰로 아메리카, 유럽에서 온 수십 명의 외국인 승려들이
불법을 배워 그들의 땅에 포교하기 위해 이 곳에서 열심히 수양을 쌓고 있으며,
화계사 출신 외국인 승려들이 세계 각지에서 화계사의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리며
포교활동에 정진하고 있다.
* 화계사 찾아가기 (2004년 7월 기준)
1. 지하철 4호선 미아3거리역에서 서울시내버스 151,1116,1121번 이용
2.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서울시내버스 151,152번 이용
▲ 연등이 화계사 가는 길을 비쳐주고 있다.
▲ 화계사 삼성각(三聖閣)
1885년에 세워진 전각으로 1975년에 해체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으로 칠성신(치성광여래). 산신, 나반존자(독성)를
모시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칠성도(七星圖)
삼성각 중앙에 칠성도(치성광여래)가 걸려 있다.
칠성은 우리나라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불교와는 별개의 존재였으나
불교가 한국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산신, 독성과 더불어 불교의 일원이 되었다.
▲ 삼성각(三聖閣)
처마 밑에 걸린 풍경과 물고기
절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과 물고기..~~
▲ 범종각(梵鍾閣)
2층에 걸려있는 목어(木魚)
어떻게 짝다보니 목어의 꼬리와 지느러미 부분만 나와 버렸다
붉은 색의 지느러미 왼쪽에는 구름처럼 생긴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목어 옆에는 사물(四物)의 하나인 법고(法鼓)가 있다.
▲ 범종각(梵鍾閣)
범종(梵鍾)
종 꼭대기에는 한국 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음관(용통)이 있고,
용머리가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윗부분인 상대(견대) 아래에 화려한 무늬의 당초문(唐草紋)으로 새겨진
네모난 유곽이 있으며, 그 안에 9개의 유두가 달려 있다.
이 종은 1897년 경북 희방사(喜方寺)에서 넘어온 대종과는 별개의 것으로
희방사 종은 범종각 2층에 높이 매달려 있다.
▲
대종(大鐘)의 아랫 부분
궤좌(跪坐)를 한 비천상(飛天像)이 천의(天衣)를 하늘 높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니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종의 왼편에는 종을 치는 동그란 당좌(撞座)가 있으며, 종 아래에는 당초무늬가
새겨진 하대(구연대)가 있다.
▲ 연등으로
가득한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하늘을 가릴 만큼 엄청난 수의 연등 때문에 천불오백성전의 전체 모습을
찍을 수가 없었다.
▲ 연등으로
가득한 화계사 경내(境內)
▲ 화계사
대웅전(大雄殿)
화계사의 법당(法堂)으로 1870년에 용선스님이 중수하였다.
이 전각은 석가여래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고 있으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총 9칸이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이 전각은 지붕처마를 받치고 있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놓여있는 다포(多包)양식의
전각으로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목조 전각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서울지방유형문화재 65호로
지정되었다.
▲ 화계사
대웅전(大雄殿) 현판
▲ 문이 활짝
열린 대웅전(大雄殿)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아니면 사월초파일이라 그런지 대웅전의 문짝이 모두 위로 올려져 있다.
이런 형태는 절 뿐만 아니라 양반가(兩班家), 궁궐(宮闕)에서도 아주 쉽게 볼 수 있으며,
더운 여름철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때 문짝을 위로 올린다.
활짝 열려 있는 대웅전을 보니 매우 시원해 보인다. 따로 선풍기나 에어콘이 필요 없을 듯..
그리고 마치 큰 새가 양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을 향해 비상(飛上)하는 모습의 팔직지붕도
꽤 시원스레 보인다.
▲ 대웅전에
모셔진 3존불
대웅전 불단(佛壇) 위에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관세음보살, 오른쪽으로
대세지보살이 앉아있다.
가운데에 앉아있는 부처는 자신의 생일을 하례(賀禮)하러 온 중생들에게
고마움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을 넌지시 바라본다.
3존불 뒤에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가 걸려 있다.
▲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는 관정 의식
사월초파일의 주요 행사중 하나인 '관정 의식'..
보문사와 경국사에 이어 화계사에서도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꽃으로 둘러 쌓인 흰 대좌(臺座)위에 금동(金銅)으로 만든 아기 부처가 서 있으며,
중생들은 그의 탄생을 축하하며 두 손으로 정중하게 시원한 물을 떠서 그에게 살며시 껴얹는다.
그런 다음 그에게 절이나 합장을 하면서 자신의 소망을 기원하며
시주함(施主函)에 약간의 시주를 하면서 의식은 끝난다.
꽃들에게 둘러쌓여 사람들의 하례를 받는 부처의 모습이 부러울 뿐이다.
▲ 환상적인
분위기에 대적광전(大寂光殿) 내부 (1)
천장에 매달린 수만 개의 분홍색 연등으로 다른 전각과는 다른 환상적이고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연등 밑에는 수십 명의 중생들이 불단에 모셔진 비로사나불을 비롯한 7분의 불상들에게
예불을 드리고 있다.
▲ 환상적인
분위기에 대적광전(大寂光殿) 내부 (2)
▲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모셔진 불상들
불단 가운데에 지권인(智拳印)을 한 불상이 비로사나불이다.
불상 뒤에는 같은 그림의 탱화 3점이 걸려 있다.
▲ 연등으로 둘러쌓인 대적광전과 국제선원
19시 30분 이후 날이 어두워 지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연등들이
자신을 불태우며 전각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각각 다른 색을 가진 연등들이 내뿜는 빛의 색깔이 너무 곱고 아름답다.
이 전각은 제일 윗층은 대적광전으로 아래의 1,2층은 외국인 승려들을 교육시키는
국제선원으로 쓰이고 있다.
6. 화계사의 연등행사 - 연등행렬을 따라 수유리까지
▲ 연등행사의
서막으로 열린 풍물패들의 공연모습
화려한 분위기의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마침 풍물패들의 공연이 있었다.
이들의 공연은 19:25분부터 시작될 연등행사의 서두(序頭)로 진행되는 것으로
화계사를 찾아온 수만명의 사람들은 그 주변에 빙 둘러앉아 그들의 신명나는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19:25분이 되자 풍물패들의 공연이 끝나면서 외국인 승려를 포함한 승려 수십명과 한복을 곱게 입고 분홍색
연등을 들고 있는 아줌마 신도들, 화계사에 소속된 청년부 회원들과 어린이들이 쭈욱 나와 연등을
들며 거리행진을 준비, 그 외에 범종과 고(鼓)의 모습의 모형과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득도(得道)를 하는
부처의 모습을 한 거대한 모형에 환하게 불이 켜지면서 본격적인 연등행진이 시작된다.
그들이 나간 이후부터는 일반인들의 연등행렬이 뒤따르게 된다.
말로만 듣던 연등행렬을 이렇게 보게 되고 뒤따르게 되니 늦은 시간 화계사를
찾아온 보람이 있네 그려..
화계사 경내에는 사월초파일의 모습을 촬영하러온 외국인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으니
사월초파일 행사는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축제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보리수
나무 아래 연꽃 위에 서 있는 석가여래
이 모형은 화계사 승려들과 청년부 사람들이 직접 끌고 이동하였다.
▲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3개의 모형들
19:40분이 되자 범종, 북, 부처 모형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색체를 내기 시작한다.
▲ 연등행렬에
참여한 외국인 승려들
장삼(長衫)을 입고 있는 유럽, 아메리카, 동남아, 서아시아 계통의 외국인 승려들이
자신들의 국적에 해당되는 국기(國旗)를 들고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 수십명의
신도들이 흰색 저고리의 황색계통의
치마를 입고 오른손으로 분홍색 연등을 들며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출발시간이 계속 지연되자 풍물패와 선비 복장을 한 광대꾼들이 사람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북과 장구를 치며 얼씨구 절씨구 하고 있다.
▲ 3개의
모형들이 화계사 입구로 슬슬 나가고 있다.
저 모형 중에서 북과 범종 모형은 소형 화물차 뒤에 실어서 차로 이동하며
부처 모형은 신도들이 직접 끌고 간다.
▲ 화계사를
나가는 연등행렬
3개의 모형이 화계사를 빠져나가자 그 뒤를 이어 풍물패들이 나가고 그 다음으로 외국인 승려들이
국기를 앞세우며 밖으로 나간다.
▲ 쌍문동길을
행진하는 연등행렬
화계사의 연등행렬은 화계사를 출발하여 '한신대4거리→화계사입구→수유5동사무소→수유4거리→쌍문동길
경유→
광산뷔페4거리→번동입구,강북구청4거리→수유역→수유4거리→한신대4거리→화계사'로
이동하였으며
나는 수유역(강북구청)까지만 뒤따라가며 연등행렬을 계속해서 사진에 담았으나
딱히 잘 나온 사진이 없어 부득불 저 사진 1장만 올렸다..
나는 수유역에서 연등행렬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22시...
-> 이로써 서울 동북부 지역 사찰 순례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화계사
위치도와 연등행렬의 이동경로(파란색 싸인펜으로 표시함)
◆ 마무리
사월초파일 기념으로 갔다온 서울 동북부 지역 사찰 순례에서 많은 경험을 하였고,
많은 것을 보았다.
보문사에서 난생 처음으로 괘불(掛佛)을 만났으며, 보문사와 경국사, 화계사 등지에서
아기 부처의 목욕 의식을 지켜보았다.
보문사, 화계사에서는 초파일 기념 풍물패들의 공연을 관람했으며, 특히 화계사에서는
연등행렬에 참여하여 수유리까지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단 연등은 들지 않았음..
비록 영천 백흥암을 가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좋은 경험과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접하면서 그 곳에 대한 아쉬움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 내년 사월초파일을 기대하면서.. 이만 순례기를 마친다. 총총~~
* 2부 완성일 : 2004년 6월 9일 4시
* 공개 일시 : 2004년 6월 10일 부터
* 2004년 6월 30일, 8월 27일에 일부 내용 수정함..
Copyright (C) 2004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첫댓글 늘 좋은 자료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언제 충주오실 기회있으면 메일 주세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