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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류 | 술이름 / 도수 / 생산지 |
백주(白酒) | 분주(汾酒) / 65 / 산서(山西) 서봉주(西鳳酒) / 65 / 섬서(陝西) 마오타이주(茅台酒) / 55 / 귀주(貴州) 노교주(老蕎酒) / 60 / 사천(四川) |
황주(黃酒) | 소흥주(紹興酒) / 15-20 / 절강(浙江) |
과실주 | 홍포도주(紅葡萄酒) / 16 / 산동(山東) |
브랜디 | 금장백란지(金奬白蘭地) / 40 / 산동(山東) |
베르뭇 | 미미사(味美思), 17~18, 산동(山東) |
위의 표에서 보면 산동에서 나는 술이 여덟개중 세개나 차지한 것이 눈에 띈다.
역시 자칭 사나이중의 사나이라고 하는 산동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건국 초기에 여덟개로 지정하였던 국가공인 명주는 1979년의 제3회 회의에서는 무려 18개로 늘어 났다. 여기서는 정통 중국술이라 할 수 없는 과실주, 브랜디, 베르뭇을 제외하는 대신 이미 다른나라 사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맥주를 포함하여 소개드린다.
중국의 명주(1979)
종 류 | 술이름 / 도수 / 생산지 |
백주(白酒) | 분주(汾酒) / 65 / 산서(山西) 마오타이주(茅台酒) / 53~55 / 귀주(貴州) 오량액(五粮液) / 55~60 / 사천(四川) 검난춘(劍南春) / 52~60 / 사천(四川) 고정공주(古井貢酒) / 60~62/ 안휘(安徽) 동주(董酒) / 60~62 / 귀주(貴州) 양하대곡주(洋河大曲酒) / 60 / 강소(江蘇) 노교특곡주(老蕎特曲酒) / 55~60 / 사천(四川) 죽엽청(竹葉靑) / 45 / 산서(山西) |
황주(黃酒) | 소흥가반주(紹興加飯酒) / 15~20 / 절강(浙江) 심항주(沈缸酒) / 14~16 / 복건(福建) |
맥주 | 청도맥주(靑島卑酒) / 16 / 산동(山東) |
이 표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과실주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장성(長城, 츠앙츠엉)이라던가 Dynasty는 빠지고 다른 포도주(煙台와 民權)가 들어있는 점과 사천(四川) 지방의 술들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 재미있다. 사천 출신의 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것이 1977년이니 의심의 눈을 주자면 그럴싸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이같은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곳곳에 지방마다의 명주를 고이 간직해온 중국인들의 정성에 비추어 보면 돌아가면서 명주로 치켜 세운다해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라고 믿는다.
실제로 필자는 중국의 어느 지방에를 가도 그 지방의 명주가 있을 뿐더러 조악한 병에 포장은 보잘 것 없어도 제각기 향과 맛을 가지고 있는 것에 매혹되곤 하였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기간중에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곡주의 생산과 가정에서의 양조가 제한 또는 금지되었고 해방후에도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이러한 정책이 계속되면서 각 지방의 특산 명주의 제조법마져 끊긴 것이 하나둘이 아닌 점에서 볼때 참으로 술을 사랑하는 필자로서는 그들의 지방 명주의 맛이 더욱 별다르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네들의 식량사정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전 보도에 의하면 위와같은 정부의 공인을 받는 명주의 권위에 이변이 생겨나고 있다 한다. 중국의 국가통계국이 최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중국인이 선호하는 10대 백주에서 1위의 자리는 오량액(五粮液)이었고 오랜동안 수위를 차지하던 마오타이가 2위로 밀려났는가 하면 싫어하는 순위에서는 첫째가 마오타이였다고 한다.
이 조사에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술의 순위는 사천(四川)의 오량액, 귀주(貴州)의 마오타이(茅台), 사천 여주(濾州)의 노교툭곡(老蕎特曲), 강소 양하대곡(江蘇 洋河大曲), 사천의 첨장(尖庄), 섬서의 서봉주(西鳳酒), 산서(山西)의 죽엽청(竹葉靑), 북경의 이과두주(二鍋頭酒), 사천의 검남춘(劍南春)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싫어하는 술의 순위는 마오타이주, 서봉주, 이과두주, --- 등의 순이었는데, 통계국 측은 이러한 뜻밖의 결과에 대해 마오타이의 경우 가짜가 너무 많은 탓을 원인으로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최근에는 고급 술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호남성에서는 주귀(酒鬼)라는 것이 나와 독특한 토기 모양의 병에 담겨 인기를 끌고 있고, 사천에서는 수정방(水井坊)이라는 술이 새로 개발되어 최고가 술로서의 자리를 굳혀 나가고 있다. 가격만큼 품질이 좋은 지는 보장하기 어려우나 워낙 증류 기술들이 좋은만큼 굳이 비싼 고급 술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량액(五粮液, 우리앙예)
이 술은 세상에 나온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웬만한 국가 귀빈에게도 이것을 내놓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술도 오량액이다.
그러나 이 술은 역사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오량액을 만드는 회사에서는 이런 저런 설을 들어 역사가 오래된 것처럼 꾸미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짧다고해서 오량액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사천(四川)의 의빈(宜賓, 이삔)은 술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아 당나라의 두보(杜甫)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이곳의 술을 칭찬하였지만 웬일인지 전해오는 명주가 없었는데 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이 술을 개발한 것이다.
이 술은 다른 술처럼 한 두가지 원료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수수, 옥수수, 찹쌀, 멥쌀, 밀과 같은 여러가지 곡식을 가지고 만든다 해서 처음에는 잡량주(雜粮酒)라고 부르다가 이름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므로 원료가 되는 다섯가지 곡식이라는 것에서 오량(五粮)을 따고 경장옥액(瓊漿玉液, 경장과 옥액은 둘다 옥과 같이 귀한 물이라는 뜻)이라는 글에서 액(液)을 따 합쳐 만든 우리앙예(五粮液)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알콜도수가 60%정도여서 매우 독한 술이지만 마시기가 그리 힘들지 않고 마신 뒤의 입에 남은 향이 그만이다.
현대 중국의 저명한 학자인 화나경(華羅庚)이 이 술을 맛보고서,
“호탕하게 마시는 이태백도(豪飮李太白)
멋스럽게 마시는 도연명도(雅酌陶淵明)
너무 일찍 태어났음을 한탄하리라(深恨生太早)“ 하고 시를 바쳤으니 독자 여러분도 한번 맛을 볼 필요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서봉주(西鳳酒, 시훵지우)
서봉주는 섬서(陝西) 봉상(鳳翔, 훵시앙)에서 나는 술이다. 그래서 서안(서안, 시안) 지역에 갈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마셔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중국의 멋장이 시인 소동파가 그의 시에서 “유림의 술이 빼어나고 동호의 버들이 아름답다(柳林酒東湖柳)”라고 읊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유림의 술이란 바로 서봉주를 말하는 것이다. 동호는 항주(杭州)의 서호와 마찬가지로 소동파가 백성들의 농사짓기를 돕기 위해 인공으로 파서 만든 호수이거니와 그 둘레에 심은 버드나무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림의 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당나라 고종때 이부시랑(吏部侍郞) 벼슬을 살던 배행검(裵行儉)이라는 이가 당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페르샤 왕자 일행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봉상(鳳翔)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오래 묵은 술내음이 바람결에 진하게 퍼지더니 눈앞에 날던 벌이며 나비가 땅위에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기이하게 생각한 배행검이 원인을 알아보라 일렀더니 시오리밖 유림진(柳林鎭)의 어떤 사람이 집을 수리하려고 땅을 파다가 삼백년이나 묵은 술독을 발견하여 여러 사람들이 나누고 마시는 참이었다는 것이다. 이 술의 향이 바람을 타고 퍼지면서 벌과 나비도 취해 떨어진 것이었다.
이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소동파가 이곳에 부임하자 식도락가로서 한말씀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다른 시에 "꽃이 피어 좋은 술을 마시니 어찌 취하지 않으리(花開美酒曷不醉)”라는 귀절이 있는데 여기서 좋은 술도 마찬가지로 서봉주를 일컫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면 서봉주의 병 도안에 들어있는 용과 봉황은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열선전(列仙傳)이라는 책에 보면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의 딸 농옥(弄玉)과 그녀의 남편 소사(蕭史)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들은 둘다 피리를 잘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까지 흉내를 낼 수 있었다는데 어느날 피리를 불어 용과 봉황을 불러 이를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시훵지우의 도안은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언젠가 필자가 상해에서 운남(雲南, 윈난)으로 야간 열차를 타고 갈 때의 일이다.
출출한 생각이 들어 식당칸을 찾았더니 이미 자리가 모두 차있어 두리번거리다가 젊은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는 탁자의 맞은편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비록 옷은 남루하지만 그들 부부는 밝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오손도손 대화를 하고 있어 아름답게 보였는데 남편되는 사람은 반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중국의 기차에서는 맥주를 제외한 독주는 팔지 않는다.
맥주를 마시며 상대편의 진한 술내음을 맡으니 맥주맛이 제맛이 아니다. 이쪽의 사정을 눈치챘음인가. 그는 나에게 한잔을 권해왔다. 이 술이 바로 서봉주였다.
중국이나 우리나 술인심 좋기는 매한가지. 권커니 잣커니하면서 술병을 비우자 그는 또 한병을 꺼내 놓았다. 그의 이야기로는 중국의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마오타이나 오량액(五粮液)은 너무 비싸므로 서봉주가 가장 인기가 높으며 기차에서는 독주를 팔지 아니하므로 여행시에는 이렇게 몇병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한밤에 기차안에서 잠깐 만난 인연이지만 그날의 추억이 새로워 훗날 예쁜 한국 달력을 구해 운남의 그의 집으로 부쳐 주었지만 아직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이 농옥과 소사의 변신인 탓에 받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백주를 대표하는 분주와 마오타이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분주(汾酒, Fen Jiu)
당나라 두목(杜牧)의 시를 음미해 보자.
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이것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청명을 맞아 부슬비가 내려
길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주막이 어디메뇨 묻노니
목동은 멀리 행화촌을 가리킨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행화촌은 바로 분주의 명산지인 분양(汾陽, FenYang)현의 한 마을이었던 것이다. 이 시는 너무나 유명하여 우리나라 사람들도 알 정도인데 그때문에 분주의 병에는 이 시가 적혀 있어 마치 광고문안처럼 보인다.
분주는 백주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어 마오타이(茅台酒)며 서봉주(西鳳酒), 죽엽청(竹葉靑)이 모두 분주를 어머니로 하고 있음을 알아 두어야 하겠다.
역사가 1500년쯤 되는 분주는 향내가 좋을 뿐만 아니라 뒷맛이 상큼하고 갈증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어 색, 향, 맛이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옛날부터 감천가양(甘泉佳釀, 좋은 샘물로 잘 빚은 좋은 술), 액체보석(液體寶石, 액채로 된 보석)으로 찬사를 받아 왔다.
분주는 행화촌에서 나는 일파조(一把抓, 한손에 쥔다는 뜻)라는 수수를 원료로 하여 누룩을 섞고 이곳의 신천수(神泉水)에서 나는 샘물을 부어 땅에 묻은 다음 3주 동안 발효시켜 증류하고, 다시 이러한 과정을 두번 더 되풀이 하여 얻는다.
이 신천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 하노(賀魯)라는 용감한 장군이 있었다.
어느날 전쟁에 이기고 돌아 오다가 행화촌을 지날 때에 이곳의 술이 훌륭하다는 것을 듣고 주점에 들러 술을 청하였다. 얼마큼 마셨을 때 밖에서 그가 타고온 천리마가 큰 소리로 우는 것을 듣고 하장군은 주인을 불러 말에게 술찌개미를 한 무더기 먹이도록 분부하였다.
장군이 항아리를 비울 무렵 천리마도 술찌개미를 다 먹어 둘다 취해 버렸다. 술집 주인은 수고 가도록 말렸지만 호방한 대장군이 그 말을 듣고 쉴 리가 없다.
쓰러진 말을 일으켜 세워 몽롱한 정신에서 말을 타고 가던 장군이 무심결에 말의 궁둥이에 채찍을 가하자 말은 깜짝 놀래어 쏜살같이 달리다가 마을의 서쪽 어귀에 이르러서 쓰러지고 말았다. 장군도 땅에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병사들이 황급히 쫒아와 장군을 부축해 일으키고 보니 다행히 장군은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말의 앞발이 땅에 깊숙이 박혀 빼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럿이 힘을 합해 겨우 발을 빼내자 그 자리에서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 올라오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다투어 마셔보니 차가우면서도 맛이 좋아 상큼하였다. 장군도 한 모금을 마시자 술이 금방 깨었고 말도 이 물을 마시고서는 기운을 차렸다.
이후로 이곳의 샘은 제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어 신천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분주는 바로 이 신천수의 물로 담그는 것이니 그 맛이 유별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오타이주(茅台酒, Maotai Jiu)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마오타이는 귀주성 모태(茅台, Maotai)에서 생산되는 증류주이다.
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마오타이는 알콜도수가 53%로 높으며 모향(茅香), 또는 장향(醬香, 간장냄새)라고 하는 독특한 향이 진하므로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쉽게 마시기 어렵지만 중국에서 나라의 큰 손님들을 맞이할때면 자신있게 내놓는 술이 바로 이것으로 우리나라에도 꽤나 잘 알려졌다.
그러나 이같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양조 역사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200여년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지역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모택동의 홍군이 장정을 진행중에 귀주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마시고 부터이다.
모택동이 홍군을 이끌고 장정을 시작하여 평야지대를 벗어나 貴州(꿰이저우)에 도착한 것은 1935년 초였다.
이 귀주란 곳이 어떤 곳인가.
중국사람들에게 있어 귀주는 "하늘에는 맑은 하늘이 3일도 맑지 않고 땅에는 평야가 삼리(三里)도 없으며 사람에게는 세푼의 돈도 없다(天無三日晴 地無三里平 人無三分銀)"고 할 정도로 오지인 곳이다.
그나마 귀주를 지나 예정하고 있는 코스는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지대로서 그 앞날에 어떤 고생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 홍군들은 여기서 모처럼 이곳의 향토주인 마오타이를 흠뻑 마시며 혁명 의지를 가다듬었던 것이다.
고생을 할때 겪은 추억과 입맛은 누구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마오타이는 산골의 시골 토속주 신세에서 뛰어 올라 국가 공식 만찬 석상에 오르는 명주로 격상이 되었고 미국과 수교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술꾼 닉슨대통령이 맛을 보고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지더니 레이건이 북경의 만찬회 석상에서 독한 맛에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이 TV 뉴스로 보도되고 부터는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면 이 마오타이가 중국의 변두리에서 그것도 200여년전에 비로소 등장하게된 사연을 알아 보자.
마오타이는 산서(山西)의 분주(汾酒)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세기 초 청나라 강희(康熙) 임금때 분주의 고향 분양(汾陽) 에는 가부(賈富)라는 상인이 살았다. 그는 하루 세끼 식사에 분주를 반주로 빠뜨리는 법이 없었고 먼 길을 떠날 때도 반드시 술통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주가였다.
그가 언젠가 멀리 귀주(貴州)의 회인(懷仁, 화이르언)으로 장삿길을 떠난 때의 일이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술을 충분히 준비한다고는 하였지만 워낙 먼길이고보니 회인에 도착할 즈음에는 그만 술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는수 없이 주막에 들러 식사를 하면서 그는 주인을 불러 좋은 술을 내오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한 모금 입에 머금자 그 맛에 실망하여 경치는 아름다운데 좋은 술은 없구나 하고 탄식을 하며 자신의 술이 떨어진 것을 아쉬워 하였다. 이를 들은 주인이 아끼던 비장의 술통을 몇개 가지고 나와 가부에게 시음을 해보도록 청하였다.
가부는 먼저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대충 살피더니 하나씩 내음을 맡고서는 사발로 퍼서 혀끝에 굴리며 맛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부의 실망은 여전하였다. 비록 오래 묵었으나 뒷맛이 좋지 못하다는 가부의 종합 평가를 들은 주인이 가부에게 좋은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자 가부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는 이듬해에 분주를 빚는 기술자를 데리고 오면서 분주의 원료용 누룩이며 여러가지 도구들을 갖추고 돌아와 방초촌(芳草村, 후에 茅台鎭으로 바뀜)에 양조장을 차렸다.
이곳 마오타이에서 생산된 분주는 처음에는 화모주(華茅酒, 후아마오지우)로 불리었는데 고대 한자에서 화(華)는 화(花)와 통하여 화모주(華茅酒)는 화모주(花茅酒)와 마찬가지이므로 이것은 행화촌방식의 마오타이주(杏花茅酒)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마오타이주가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주장도 있다.
언젠가 마오타이진(茅台鎭) 에 큰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몰아쳐 사람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추위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때 백발의 노파가 어느 젊은 청년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는데 그 젊은이는 조금도 성가시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노파를 안으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얼른 불을 크게 피워 추위에 떠는 노파를 따뜻하게 해드리고 뜨거운 밥과 함께 집에서 담근 술을 데워서 드시도록 권하였다. 그는 식사가 끝나자 자기의 침대를 노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난로가의 땅에 누워 잠이 들었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가 들리면서 아름다운 선녀가 나타나 손에 든 빛나는 술잔을 기울여 술을 부으니까 술향기가 주위를 진동하였다. 선녀는 말하기를 "참으로 좋은 마음씨를 가졌오. 내가 이제 어떤 물웅덩이를 가르쳐 줄 것인즉 이 물로서 술을 빚어 마시면 좋은 술을 마시면서 오래도록 건강하고 장수할 것입니다." 하고서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잠이 깬 젊은이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눈도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졌는데 집앞 어디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린다. 이 젊은이는 물흐르는 소리를 따라 샘을 찾아내어 이 물을 사용하여 술을 빚기 시작하였다.
마오타이주의 병에 그려져 있는 하늘을 나르는 선녀(飛仙)의 도안은 바로 이 선녀를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이같이 유명한 마오타이주는 값이 비싼 것이 흠이다.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월급으로 받는 돈을 모두 털어야 한 병을 살 수 있으니 어찌 대중적인 술이라 할 수 있으랴. 그래서 중국인들도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사게 되는데 뇌물로 받은 술을 그냥 마시기가 아까워 다시 더 높은 이에게 선물하다 보면 결국 마오타이주는 고급 간부들에게 집중되기 마련이라 한다.
양조기술이 복잡하고 생산기간도 긴 마오타이주는 생산을 늘렸다고는 해도 년간 2천톤 정도밖에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본토에서도 가짜가 마구 돌아다녀 심심치 않게 가짜 마오타이주의 적발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비단 마오타이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1985년부터 1992년사이에 가짜술 때문에 병을 얻은 자가 5천명에 40여명이 눈이 멀었고 200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메칠 알콜로 만들어 향료만 적당히 섞은 탓이리라. 조심, 조심을 요한다.
또 한가지 약점은 비록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으나 도수가 높아 웬만한 주당이 아니고서는 가볍게 마실 수가 없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이 술의 도수를 낮추어 대중형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독특한 향과 어울어지는 독한 술의 맛이 줄어들면 마오타이의 성가가 전처럼 유지될까 하는 의아심도 든다
소흥주(紹興酒, 사오싱지우)
소흥(紹興)은 절강(浙江)의 항주(杭州)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춘추시대에 월(越)나라의 서울이 있던 곳으로 남쪽으로는 회계산(會稽山)을 베고 있다.
회계산이라고 하면 중국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매우 눈에 익은 곳이다. 월나라에 패하여 죽은 아버지를 위해 땔나무 위에서 자면서 복수를 다짐한 부차(夫差)가 월을 무찌르자 월의 구천(勾踐)은 회계산으로 도망쳤다. 구천은 여기서 뇌물을 쓰고 간청을 하여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구천은 회계에서 돌아오자 쓸개를 옆에 두고 이것을 핥아 쓴맛을 보면서 "너는 회계의 수치를 잊었는가?"하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쳤고 싸움에 진 부차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상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이거니와 이 이야기는 회계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소흥은 예나 제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고장인가 보다.
근대에 들어서도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이 바로 이곳 출신이며, 중국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주은래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은래는 근대 주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청나라 말기에 태어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결혼한 부인의 몸으로 혁명활동에 참여하던중 체포되어 고향 땅 네거리에서 처형을 당해 오늘도 모든 국민의 사랑을 받는 여성 혁명가 추근(秋瑾)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근의 우능(禹陵, 위링)은 하나라의 임금 우(禹)의 묘라 하는데 그가 젊어서 8년이나 홍수를 막기 위한 치수(治水)에 전념하여 세번이나 집을 지나가도 결코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순(舜) 임금이 이 점을 높이사 임금의 자리를 내주었다고 전한다.
이곳 소흥에서 빚어내는 소흥주(紹興酒)는 중국의 황주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술로서 사실상 중국을 대표하는 술이라 하겠다.
소흥주는 찹쌀을 보리누룩으로 발효시켜 감호(鑒湖)의 물을 이용해 담그는데 알콜도수는 15-20%이며 짙은 갈색을 띠고 있으며 오래 묵은 것일수록 좋다고 한다.
소흥주에는 약간 쓴 맛이 도는 가반주(加飯酒, 지아환지우)와 원홍주(元紅酒, 위앤홍지우), 단 맛이 도는 향설주(香雪酒, 시앙쉬에지우), 선양주(善釀酒, 산니엔지우)가 있다.
이중에서 가반주는 이름(加飯酒)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반주로 먹는 술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반주는 다른 사오싱지우보다 찹쌀을 10%가량 더 사용하므로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짙은 노랑색을 띤 가반주는 원홍주보다도 달며 소흥주중에서 고급품으로 수출량도 많다.
원홍주는 소흥주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다. 1979년의 전국평주회의에서 우량주로 선정되었다. 원홍주(元紅酒)라는 이름은 술가마에 붉은 칠을 하므로 붙여진 것이라 하기도 하며, 과거시험에 장원하듯이 첫번째로 맛있는 술이라는데서 붙여진 것이라도 한다.
향설주(香雪酒)는 물대신에 소흥지방의 조소(糟燒)를 사용하여 빚으므로 도수가 20%정도로 비교적 높으며 달고 향이 진하다. 따뜻한 물을 타서 마시기도 하고 탄산수를 타서 마시기도 한다.
선양주(善釀酒)는 원홍주를 2, 3년 정도 묵혔다가 이것을 물대신에 사용하여 빚은 것으로, 옛날 어떤 선량한 노파가 신선으로부터 이 술을 얻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국가에서 우량주로 선정된 바 있다.
이밖에도 소흥주에는 유명한 화조주(花雕酒, 후아땨오지우)가 있다.
이것은 가반주의 하나인데 화조주는 백년까지 묵히기도 하므로 소흥주중에서도 특히 고급에 속한다.
소흥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딸아이를 갖게 되면 가반주를 빚어 미녀나 꽃을 그려 넣은(花雕)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딸의 혼례를 치르는 날 축하주로 내놓는 습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술은 화조주라고도 하고 여아주(女兒酒, 뉘얼지우)라고도 한다.
이런 까닭에 술을 얼마큼 묵혔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가반주나 화조주나 모두 한가지로 가반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특히 오래 묵힌 술은 이름 앞에 진년(陳年)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진(陳)은 오래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사람들이 '좋은 술은오래 묵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好酒不 陳)'고 할 때도 마찬가지의 뜻이다. 요즘은 18년 혹은 더 오래되었다는 소흥주도 팔고 있으나 필자는 그다지 신뢰하고 싶지 않다. 마치 위스키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상술에 능한 중국인들의 재주로 치부하는 까닭이다.
노신의 소설 「풍파(風波)」와 「공을기(孔乙己)」에는 함형주점(咸亨酒店)이 등장한다. 사오싱의 노신 생가 근처에 이 주점이 새로 문을 열어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콩안주와 함께 마시는 소흥주의 맛이 각별하다.
소흥주는 일반적으로 덥혀서 마셨지만, 최근에는 여름철에 차게 식혀서 먹는 방식도 등장하였다. 따뜻한 소흥주건, 차가운 소흥주건 마셔서 머리 아프지 않고, 마신 뒤 역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 막걸리와 다른 점이다. 가능하다면 우리나라 막걸리 양조업체에서도 이 점을 연구하여 한 단계 발전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향교주(香橋酒, 시앙챠오지우)
광서(廣西) 녹채(鹿寨)현의 어느 깊은 산속에는 절벽사이를 연결하는 돌다리가 있다. 이 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맛있는 물이 나오는 샘이 있는데 향교주(香橋酒)는 바로 이곳의 물로 담근 술이다.
옛날에 이 다리가 없을 때 사람들은 등나무 덩쿨에 매달려 이 절벽을 건너곤 했었지만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절벽밑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으므로 이곳에 다리를 놓는 것은 꿈과도 같은 숙원 사업이었다.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노반(魯班). 목수(木手)의 신으로 노반문전무대부(魯班門前舞大斧)하면 노반의 집앞에서 큰 도끼를 휘두른다는 뜻이니 공자앞에서 문자 쓴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하겠다.
이 현지인들의 고생이 심한 것을 보고 그들을 위해 하룻밤 사이에 돌다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노반이 떠나는 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때마침 잘 익은 복숭아를 따서 가는 길에 목이 마르면 드시라고 선물로 드리면서 다리 이름은 무엇으로 정하면 좋을지 그에게 물었다. 이때 복숭아 두개를 먹은 노반은 씨를 돌다리 양쪽끝의 밑부리에 하나씩 던지면서 “내년 이 복숭아가 자라면 다리 이름을 붙이시요”라고 말하고서는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난 뒤 이 다리를 지날 때 사람들은 노반의 은공에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복숭아 씨가 던져진 곳에 물을 주었다. 이 때문인가. 복숭아는 곧 싹이 트더니 이듬해 봄에는 꽃이 피었고 머지않아 복숭아도 열렸다. 이 복숭아는 향이 무척 진하여 다리 밑을 지나는 물까지도 단맛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리를 향이 나는 다리라 하여 향교(香橋)라 이름 지었고 다리밑의 물은 향하(香河)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다리 근처에는 주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를 놓기 전만해도 술이 잘 팔려 돈을 많이 벌었으나 향교를 놓은 다음부터는 술이 잘 팔리지 않게 되었고 이때부터 욕심많은 주인의 걱정도 많아졌다. 남편의 수심어린 얼굴을 바라보던 처가 “향하의 물이 단맛이니 우리 술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하고서는 “다리 끝에 있는 그 복숭아 나무 둘만 뽑아 버리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외다.”라고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주인은 옳다구나 생각하고 그날밤 장대와 쇠갈고리를 가지고 다리로 가서 먼저 쇠갈고리를 장대에 묶어 복숭아나무를 뽑아 내려고 하였지만 갈고리가 나무에 닿지 않았다. 다음에는 장대 두개를 연결하여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조금 모자라다. 세개, 네개,------ 몇개를 연결하여도 항상 결과는 그 거리가 조금 모자라는 것이었다. ‘
해뜰 시간이 다가오면서 둘은 초조해졌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 비난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돌다리를 설설 기어서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갈고리끝이 복숭아나무의 뿌리 근처에 닿을 수 있었다. 장대를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복숭아나무는 뿌리가 뽑혀 절벽밑으로 떨어졌다.
그가 다른편 복숭아 나무로 다가가자 그의 처는 다시 말하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여보. 이 나무를 뿌리채 뽑아 집으로 가져가서 심으면 술을 안팔고 물만 팔아도 되지 않겠소?”
주인이 듣고보니 그럴싸한 생각이다. 그는 마누라의 의견에 찬동하고 그 나무를 뿌리채 뽑아 가려고 갈고리를 조심하여 휘둘렀지만 나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친 주인이 포기하려고 장대를 거두려하니 이번에는 갈고리가 복숭아 나무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손도 장대에 붙었고 점점 몸이 굳어가더니 마침내는 복숭아 나무도 그의 몸도 돌로 변하였다.
이것을 바라본 주인 여자는 공포로 놀래어 몸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는데 이때 그녀의 독기로 향하의 물은 향기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아침에 동네사람들은 밑으로 떨어진 복숭아나무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이것을 못찾고 단지 근처에서 샘물만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이 물로 향교주(香橋酒)를 담았는데 술에서 복숭아향이 풍긴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다리 난간끝에는 복숭아 모양의 석물 조각이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전설을 언제까지고 전하고 싶어하는 그네들의 바램때문이리라.
삼편주(三鞭酒, 싼삐엔지우)
물개, 사슴, 뱀 따위 세가지 동물의 숫컷 생식기와 함께 인삼, 녹용 등 40여종의 한약재를 고량주에 넣어 담근 약용술로서 옛날부터 불로장생의 술로 알려져 왔다. 수천년전부터 궁중이나 일부 귀족들만이 즐겨온 이 술은 기가 허하거나 양기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산동(山東)의 연태(煙台, 옌타이)에서 제조되는 이 술은 91년도에는 국제의학대회에서 최고 품질상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이 술은 술이라고 하기 보다는 한약에 가깝다 하겠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장생장락 보주(長生長樂 補酒)가 있다.
한때 등소평의 장수 비결이 이 술에 있다고 전해져 우리나라의 모 재벌이 이 술을 우리나라에 독점 공급하려다가 실패하였다고 전해진 일도 있는 술이다. 필자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던 술임에는 틀림없다.
이 술에는 동충하초(冬蟲夏草), 대황정(大黃精), 따위의 신비한 약재가 들어 있다. 특히 동충하초는 이름 그대로 겨울에는 벌레가 되고 여름에는 풀이 된다는 약초인데 물론 실제로 벌레가 되는 것은 아니고 지네의 몸뚱아리같은 모양을 갖게 된다는 표현이지만 이 약이 가지는 약효는 상당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은 재배가 시작되어 여러 가지 모양의 동충하초를 구해 먹을 수 있다.
이제 술 소개는 이 정도로 끝 맺으며 몇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술을 한데 묶어 선 보이고자 한다.
우선 북경 시민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 온 이과두주(二鍋頭酒, 얼꿔터우지우).
이 술은 북경시 정부가 가난한 일반 시민들을 위해 생산을 장려하고 있는 백주(白酒)의 하나다.
값이 싸며(한병에 가장 싼 것은 우리 돈으로 몇 백원 짜리도 있다) 도수는 높아 누구나 부담없이 취하도록 마실 수 있어서 북경에 와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때면 몇 병 씩 사 들고 가는 효자 상품에 속한다. 다만 싼 것은 뒷 맛에 누룩 냄새기 약간 남아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는 것이 흠이지만, 이 정도 값이면 충분히 참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공부가주(孔府家酒, 콩후지아지우).
여기서 공(孔)은 공자, 부(府)는 집안을 뜻하고 가주(家酒)는 집안의 술을 뜻하니 공부가주는 공자 집안의 술이라는 뜻인데, 사실 알고보면 공자 집안과는 별다른 인연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경주 법주가 경주 최씨 문중의 전통 술이라 하였지만, 필자는 이 또한 그다지 믿지 아니한다. 다만 공자 집안의 브랜드 네임을 갖고보니 브랜드 파워가 강해져 수출 양으로는 다른 술들을 거뜬히 앞서고 있다. 마침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 품질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 우리나라의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 등에서도 상당히 좋은 술로 대접을 받고 있다.
양하대곡(羊河大曲, 양허따취).
이 술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강소성(江蘇省)의 명주이다.
필자가 남경(南京)에 볼 일이 있어 갔을 때, 남경시 부시장이 베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 맛을 보고 홀닥 반한 적이 있다. 유달리 혀끝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뒷 맛이 깔끔하며 여운이 남아 무슨 술보다 필자의 입맛에 맞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값도 우량액이나 모태주보다는 턱 없이 싸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수년 전 개발되어 품질과 가격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술로는 주귀(酒鬼, 지우꿰이) 와 수정방(水井坊, 쉐이징후앙) 이 있다. 주귀는 호남성(湖南省)에서, 그리고 수정방은 사천성(四川省)에서 만드는 것인데 그 모양은 대조적이다. 주귀는 흙으로 빚어 구운 병에 담겨 잇어 토속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수정방은 투명하고 깔끔한 유리병에 담겨 있어 세련된 현대적 감각을 자랑한다. 주귀는 약간 강한 맛을 가지고 있으나, 수정방은 병 모양 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맛을 가지고 있다. 값은 둘 다 만만치 않아 현지 가격이 우리 돈으로 각각 6만원과 9만원 전후에 살 수 있으나 우리나라 호텔에서는 자그만치 각각 44만원과 77만원 호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국내 호텔에서 마신 적이 없음). 현지 가격을 잘 아는 필자가 어찌 이런 값에 마실 수가 있으랴! 그러니 이런 술은 중국에 갔을 때나 맛 보고 우리 국내에서는 행여라도 만용을 부릴 일이 아닐 것이다.
[사진왼쪽] 주귀(酒鬼, 지우꿰이)
[사진오른쪽] 수정방(水井坊, 쉐이징후앙)
경주(京酒, 징지우)
지난주에 얘기했던 오량액은 알콜도수가 53%정도여서 매우 독한 술이지만 마시기가 그리 힘들지 않고 마신 뒤의 입에 남는 깨끗한 뒷맛이 그만이다. 다만 다른 중국술도 그렇지만 오량액은 본토에서는 우리돈으로 5만원 남짓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특급 호텔의 경우 30만원이 넘어 웬만한 사람은 맛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흠이다. 게다가 가짜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어 중국에서건 우리나라에서건 비싼 돈을 내고 마시기가 더욱 어렵다.
그래서 나온 술이 경주(京酒, 징지우)다. 이 술은 오량액 주조회사에서 북경의 시민 대중(老百姓)을 위해 개발한 술인데 값도 싸지만(북경에서 우리 돈으로 2,500원선) 도수도 38도라서 마시기에 여간 부드럽지 않다. 더구나 도수가 낮은 탓으로 우리 음식에도 잘 어울려 북경에 근무하는 우리나라 주재원들이 반주로 가장 즐기는 술은 경주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 술이 북경시민을 위해 개발한 것이라서 북경을 벗어나면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북경에 살고있는 조선족들도 명절에 고향에 돌아갈 때면 1박스씩 사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술도 우리나라에서는 고급에 속한다.
대사관 부근의 중국집에 가서 이 술을 주문하면 25,000원 정도를 내야한다. 결국 100배 가량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중국에서 돌아와 가장 아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담없이 즐기던 경주를 가까이 접하기가 어려워진 점이다. 가까운 벗들과 여러 병을 마셔도 다음 날이면 아무 지장 없이 일과에 복귀할 수 있었던 모두 경주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죽엽청(竹葉靑, 주예칭)
대나무는 중국에서는 쓰임새가 매우 다양한 산물이다. 집짓는데도 쓰고 종이의 원료로도 쓰인다. 중국 남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제법 대형건물을 보수하는데 대나무로 겉을 쌓올려 올라가기 쉽게 한다. 소위 비계공(飛階工)들을 위한 받침 구실로 이용하는 것이다. 홍콩에 가면 우리는 곳곳에서 이러한 설치물을 볼 수 있다. 또한 죽순은 많은 요리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한 재료로 사용된다.
그래서인가. 소동파는 "음식에 고기가 없을 망정 거처에 대나무가 없어서 되랴."하고 노래 하였다. 게다가 대나무의 잎은 중국의 이름난 명주, 죽엽청의 향료로 쓰이기도 한다.
국엽청은 분주를 기본으로 하여 대나무잎과 치자나무 따위 10여종의 약재를 우려내어 만들기 때문에 단맛이 나면서 연두빛을 띠므로 죽엽청(竹葉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알콜도수가 46% 정도이고 여러가지 약재때문에 붉은 핏톨을 늘려주며 위를 튼튼히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어찌보면 중국 술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접하게 된 것이 죽엽청이 아닌가 싶다. 과거 대만이나 홍콩을 다녀오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엽청을 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대륙에 드나들기 시작한 뒤로는 인기가 다소 떨어져 찾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도 이술 만큼은 단 맛이 강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 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으로 부터 약 1400년전 쯤인 수나라 무렵에 산서(山西)지방에서는 양조장 업자들이 일년에 한번씩 모여 각자가 만든 술을 가지고 품평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 오래도록 대회에 참가하였으나 항상 꼴찌만 하고 좋은 평을 얻지 못하는 업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도 대회가 다시 열렸지만 입상에 자신이 없는 그로서는 참가를 하자니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참가를 안할 수도 없어 고민을 크게 하였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일단 참가키로 하고 대회장으로 가면서 그는 일꾼들에게 자기는 먼저가니 천천히 따라 오라고 일렀다.
주인이 떠나고서 해가 높이 뜬 한낮에 일꾼 둘이서 술통을 메고 대회장으로 가는 도중에 대밭에 이르자 땀이 비오듯하여 둘은 갈증으로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술통을 내려놓고 물을 찾았으나 근처에 마을도 없고 샘도 찾을 수가 없으므로 하는수 없이 그들은 술이라도 마시자 생각하고 술통을 열었다.
그러나 술통을 열고보니 이번에는 퍼 마실 그릇이 없다. 그러자 그중 한 사람이 옆의 대나무에서 잎을 따 잔 모양으로 만들어 술을 퍼서 마시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마시어 갈증은 풀고 피곤도 가셨지만 술통에는 술이 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당황하여 허둥대던 그들의 발뿌리에 채인 큰 돌을 옮기니 그밑에는 조그만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샘솟는다. 옳다구나 생각하고 그들은 댓닢으로 만든 잔을 이용하여 열심히 물을 퍼담았다.
그들이 갈길을 재촉하여 대회장에 겨우 도착하였으나 이미 대회는 끝나갈 무렵이다.
기대할 것도 없지만 기왕에 가져온 것이니 만큼 주인은 술을 한잔 퍼서 품평위원장에게 맛을 보도록 권하였다.
성의를 보아 한모금 마신 위원장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놀라 다른 품평위원들에게도 마셔 보도록 권하였다. 이제까지 마셔본 술과는 전혀 다른 술이 아닌가.
위원 모두는 이구 동성으로 금년 최고의 술로 꼽았고 주인은 꿈에도 그리던 영예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주인이 일꾼들에게 어찌된 영문인지를 묻자 일꾼들은 사실을 털어 놓았다. 주인은 집에 돌아오자 말자 그 물이 솟아났던 대나무밭 일대를 사들여 그곳에 양조장을 차렸고 더욱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오늘의 죽엽청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의 주법(酒法)
중국사람들의 주법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술에 대한 관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 자기잔을 남에게 권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주의 포석정(鮑石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잔을 주고 받는 문화권에 속한다. 잔에 서로 입을 대고 마심으로서 상하 또는 동료간에 일심 동체감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중국은 자기 잔은 자기 앞에 두고 상대방과는 잔을 마주 부딪치므로써 일체감을 느끼는 문화권에 속한다. 대부분의 민족이 여기에 속하지만 유독 우리는 비위생적이라 할 수 있는 주고 받기 문화권에 속하였다. 누가 나은 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찌개에 이 사람 저 사람의 숟가락을 함께 담가 퍼 먹는다던가 잔을 여기 저기로 돌리면서 입을 맛대는 것은 끈질긴 우리 음식문화의 전통일 뿐이다.
둘째, 조금만 비워도 채운다.
우리는 완전히 비우지 않은 상대방의 잔에 술을 채우지 않는 것이 관례다. 혹시 남은 잔에 채우면 첨잔이라하여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첨잔이나 퇴줏잔은 그다지 좋은 감정으로 받아 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술이 약한 사람들이 간혹 술을 바닥에 남긴 채로 술을 받는 수가 있으나 혹시라도 들키면 한마디쯤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다르다. 잔을 들어 조금이라도 마시면 잽싸게 마신 만큼 채우고 만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관심이 없는 것으로 오해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므로 더 마실 생각이 없으면 잔에 술이 가득 찬 채로 대화만 즐기면 된다.
세째, 새 요리가 나오면 술을 마신다.
우리는 새 요리가 나오는 것과 술마시는 것에 별다른 관계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새 요리가 나오면 반드시 신차이라이(新菜來)!, 즉 새로운 요리가 나왔네요! 하면서 술잔을 부딛히며 마신다. 이것은 음식을 먹기 전에 입맛을 돋우는 효과를 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새 요리에 대한 감사의 뜻도 있는 것 같다.
네째, 과음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음식점에서 과음을 하는 경우가 많다. 2차에도 가기 전에 이미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과정에 벌써 취하곤 한다. 2, 3차에서 술이 취하는 것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동북지방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지나치게 과음을 하지 않는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한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생각이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도 강제로 권하지 않고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껏 마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주정뱅이도 적을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도심지 음식점이나 유흥가 곳곳에서는 술에 취해 고래 고래 소리지르거나 방뇨하고, 주위 사람들과 시비를 거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추태는 그들 중국인들에게는 구경꺼리가 될 뿐만 아니라, 흉이 되고 있다.
다섯째, “깐뻬이(乾杯)!”하면, 정말로 건배한다.
우리는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자주 건배를 외친다. 기분이 내키면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건성으로 건배를 외쳤을 뿐, 그들의 술잔을 살펴보면 그저 조금 비웠을 뿐이다. 우리에게 있어 건배라는 말은 영어로 이야기하면 Cheers!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깐뻬이(乾杯)!하면 반드시 잔을 비운다. 왜냐하면 잔을 비우자(乾杯)고 하였으니 잔을 비우는 것이다. 북부로 가면 잔을 머리위에 거꾸로 세워 턴 다음 잔을 비웠음을 보여 주기까지 한다.
요즈음은 때로 우리처럼 건성으로 깐뻬이를 외치기도 하지만, 원래의 의미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원탁에 둘러 앉아 상호간의 거리가 있을 경우는 탁자에 잔을 톡톡 부딪히면서 깐뻬이하기도 하는데, 이는 앉은 채로 한 자리의 참석 인원 모두가 같이 건배할 수 있어 편리한 점도 있다.
물론 중국인이라고 우리와 전혀 다른 인간은 아니다.
술은 좋은 친구와 만나면 천잔으로도 부족하고 말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반마디도 많다(酒逢知己千杯少 話不投機半句多)고 생각하는 그들이다. 그러므로 기분이 맞으면 술배는 따로 있다(酒有別腸)고 하며 권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술을 마시면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酒後吐眞言)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웬만하면 자신의 주량을 생각하여 스스로 절제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이 일반적인 중국인들의 음주법이기 때문에 그들과의 술자리에서 너무 우리식의 주법을 강요하여 어색한 분위기로 만들 필요는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이상으로 중국인의 술에 관한 얘기를 일단락 하였다.